한국문화사 1 토기의 등장과 확산04. 선사시대 토기 제작기술의 정착과 확산

민무늬토기

신석기시대 말엽에는 석영계의 모래가 섞인 점토질 바탕흙으로 만든 무늬 없는 토기 또는 퇴화된 무늬의 토기가 증가하며, 이는 청동기시대 민무늬토기[無文土器]의 제작으로 이어지는 특징이다. 과거 신석기시대 말기에 민무늬토기라는 새로운 제작 전통을 가진 집단이 이주해 와서 청동기문화를 형성하였다고 설명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현재는 빗살무늬토기에서 민무늬토기로의 전환과정을 내부적인 발전의 결과로 해석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민무늬토기는 빗살무늬토기에 비해 훨씬 더 단단하고 흡수율이 낮으며, 지역적으로나 시간적으로 훨씬 정형화된 토기양식들과 다양한 종류의 그릇이 존재한다. 또한, 유적에서 출토되는 양이 증가하여 한층 더 발전된 양상을 보인다.

빗살무늬토기에는 정교한 무늬를 새기는 것이 특징이지만 신석기시대 후기에는 아가리에만 무늬를 새겼으며, 청동기시대에는 민무늬토기에 무늬를 새기지 않았다. 형태상으로만 보면 빗살무늬토기보다 조잡하게 보이는데, 이러한 변화는 토기의 사용이 확산된 결과로 해석할 수 있다. 즉, 신석기시대에는 토기의 제작과 사용이 보편적이지 않았던 반면 청동기시대에는 토기의 보급이 확산되었기 때문에 장식이 사라지고 기능적인 요소가 강조된 결과로 해석할 수 있다. 따라서 빗살무늬토기를 사용하던 신석기시대에 토기 제작기술이 정착 단계를 거친 후, 민무늬토기가 사용되는 청동기시대에는 선사시대 토기 제작기술이 확산되는 단계에 접어든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청동기시대 구덩식 가마>   
청동기시대에는 야외의 개방식 가마가 사용되지만 얕은 구덩이를 파고 만든 구덩식 가마가 사용되었다. 사진은 남강댐 수몰지구에서 발굴된 진주 대평리 옥방9지구유적에서 발굴된 청동기시대 가마터이다. 구덩이 주변은 여러 번 불을 맞아 단당하게 굳어 있었으며, 내부에서는 토기 조각이 여러 겹 깔려 있는 점으로 보아 오랫동안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민무늬토기의 바탕흙은 점토에 비교적 입자가 굵은 석영계 모래알갱이를 보강제로 사용하여 표면은 다소 거친 느낌을 준다. 민무늬토기 역시 서리기나 테쌓기 방법으로 성형하였으나 표면에는 무늬를 새기지 않은 경우가 대부분이다. 민무늬토기는 밀폐된 가마가 아닌 개방된 야외가마에서 소성하였으며, 소성 온도는 섭씨 900도 정도로 추정되는데, 실험에 의하면 최고 870도를 넘지 않는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14)

신석기시대와는 달리 최근 민무늬토기를 소성하던 소성 시설이 남한 전역에 걸쳐 발굴되고 있는데, 천정이 없는 개방형 구조의 가마이다. 확인된 가마의 구조는 모두 구덩식으로 길이 4m, 폭 3m 이내의 원형 또는 타원형이며, 예외적으로 길이가 5m를 넘는 경우도 있다. 청동기시대 전기에는 구덩식 가마에 토기와 연료를 쌓고 바로 소성하는 개방형이 주를 이루지만, 중기 이후에는 토기와 연료를 쌓고 짚을 덮은 후 그 위에 3∼4㎝ 두께의 점토를 바르고 소성하는 덮개형 가마가 주를 이룬다.15) 이러한 소성 기법은 소성시 내부의 온도를 높이기 위한 것으로 신석기시대에 비해서 토기 제작기술이 한 단계 발전하였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덧띠새김무늬토기>   
바닥이 납작한 깊은 바리 모양의 토기로 아가리에 한 줄의 덧띠를 돌려 붙이고, 손으로 눌러 요철을 만든 후 날카로운 도구로 눈을 새겼다. 이러한 토기는 1991년 하남시 미사리유적에서 처음 확인되어 미사리식토기라고도 불리는데, 청동기 가장 이른 시기의 토기이다. 진주 상촌리유적 2호 집터에서 출토되었으며, 높이는 36.6㎝이다.[국립김해박물관]

민무늬토기 역시 일상생활에서 음식물을 조리하거나 운반 또는 저장하는 용도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붉은간토기[赤色磨硏土器]를 비롯한 일부는 무덤에 부장되기도 하며, 중기에 이르러 새롭게 등장하는 송국리식토기는 생활용기인 동시에 독널[甕棺]로 사용되기도 하여 빗살무늬토기에 비해 토기의 기능이 다양하게 분화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일반적으로 한반도 청동기시대의 문화는 민무늬토기의 등장, 본격적인 마제석기의 사용, 농경의 시작과 사회복합도의 증가로 정의되며, 청동기시대 후반에 들어서야 청동기의 사용이 본격화된다. 과거 한반도에서 청동기시대가 시작되는 시점은 청동기의 기원을 오르도스 지방으로 보아 기원전 7세기, 또는 중국 랴오닝성[遼寧省] 남산건[南山根]유적의 청동단검을 근거로 기원전 10세기로 편년하였다. 그러나 최근 한반도 남부에서 민무늬토기와 관련된 방사성탄소연대 측정값이 증가함에 따라 청동기시대의 상한이 기원전 15세기까지 소급될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으며, 늦어도 기원전 13세기경에는 청동기시대가 시작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16) 따라서 한반도의 청동기시대를 민무늬토기시대라고 부르자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현재 한반도 남부 지역에서 가장 오래된 민무늬토기는 덧띠새김무늬토기[刻目突帶文土器]로 아가리나 바로 아래에 한 줄의 점토 띠를 돌리고 그 위를 일정한 간격으로 눌러 눈을 새긴 것으로, 바닥이 둥글거나 납작한 바리 모양의 토기이다. 덧띠새김무늬토기는 제작기법이나 형태적 특징 등이 신석기시대 말기의 토기와 일정 부분 같고, 지역에 따라서는 신석기시대 말기의 유물 및 청동기시대 전기의 토기와 함께 출토되기도 한다. 덧띠새김무늬토기는 한반도 중남부 지역에서 주로 출토되지만 서북 지방과 동북 지방에서도 출토되며, 유사한 형태의 토기가 중국의 랴오둥[遼東] 지방에서도 출토되고 있어 그 관련성이 지적되고 있다.17) 유구의 중복관계와 방사성탄소연대 측정값에 의하면 덧띠새김무늬토기는 기원전 15세기경에는 등장하였으며,18) 이러한 자료를 바탕으로 본격적인 민무늬토기가 등장하기 이전 덧띠새김무늬토기가 주로 사용된 시기를 청동기시대 조기(早期)라고 부르기도 한다.

대략 기원전 13세기부터 본격적으로 민무늬토기가 제작된다. 민무늬토기는 무늬가 없는 바리나 항아리 또는 굽접시 등의 청동기시대 토기를 통칭하는 용어로서 크게 보아 빗살무늬토기와는 다른 제작 전통을 공유하지만 지역적·시간적으로 다양한 양식의 토기들 이 존재한다. 요동 지방과 청천강 이북의 서북 지방 일대는 미송리형토기, 압록강 중류 유역에는 공귀리식토기, 동북 지방의 두만강 유역에는 구멍띠토기[孔列土器], 청천강 이남의 황해도 일원에는 팽이형토기 등이 유행한다. 한반도 남부 지역에는 동북 지방의 구멍띠토기의 영향을 받은 역삼동식토기와 청천강 이남의 팽이형토기의 영향을 받은 가락동식토기가 유행하다가 이 두 유형의 토기양식이 결합된 구멍띠토기가 남부 지역 전역에 걸쳐 확산된다.

기원전 900년경 충청도 서해안 지역을 중심으로 송국리식토기가 등장하는데,19) 대소의 차이가 있지만 항아리 모양의 토기가 주를 이룬다는 점에서 기존의 민무늬토기들과는 뚜렷이 구분된다. 또한, 송국리식토기는 기존의 긴 장방형 주거지와는 달리 원형 또는 방형 주거지에서 출토되며, 논농사가 본격적으로 행해지는 등 이전 시기와는 다른 문화내용을 보이고 있어서 이를 기점으로 청동기시대 후기 또는 송국리유형문화로 구분한다.

청동기시대에는 민무늬토기의 거친 바탕흙과는 달리 매우 정선된 바탕흙으로 만든 기벽이 얇은 붉은간토기가 제작된다. 붉은간토기는 홍도(紅陶) 또는 적색마연토기(赤色磨硏土器)라고도 부르는데, 소성 전이나 후에 산화철을 바르고 문질러서 광택을 낸 것으로 주로 한반도 남부 지방에서 유행하였다. 붉은간토기는 목이 짧은 소형의 항아리와 굽접시가 주를 이루는데, 주거지에서도 출토되지만 무덤에 부장된 경우가 많다.

한반도의 민무늬토기는 일본의 야요이토기[彌生土器]의 성립에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쳤다. 일본 야요이시대 조기의 대표적인 토기인 유우스식토기[夜臼式土器]는 한반도 청동기시대 조기의 덧띠새김무늬토기의 영향으로 등장하였으며, 이어 역삼동식토기와 송국리식토기에 이르기까지 각각 일본 야요이토기에 영향을 준 것으로 밝혀지고 있다.20)

<민무늬토기 분포도>   
청동기시대 민무늬토기는 전체적으로 보아 깊은 바리와 단지가 주종을 이루지만 지역적으로 다양한 형태의 토기가 사용된다. 토기의 지역적 차이는 신석기시대에 비해 훨씬 강하며, 이는 사회가 한 단계 발전한 결과로 생각된다. 각 지역의 토기들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특징적인 요소들이 서로 섞이기도 하는데, 이는 지역간 교류의 결과로 생각된다.
<구멍띠토기>   
청동기시대 전기 남한 지방 전역에 걸쳐 사용된 대표적인 민무늬토기이다. 아가리에는 한 줄의 구멍 띠 장식을 새긴 것이 특징이다. 구멍은 안에서 바깥 방향으로 절반만 뚫어 밖에서 보면 콩알처럼 튀어나온 장식처럼 보이도록 한 것이 대부분이지만 사용 과정이나 퇴적 과정에서 파손되어 구멍처럼 보인다. 하남시 미사리유적에서 출토된 것으로 높이는 35㎝이다.
<가락동식토기>   
서울시 송파구 가락동에서 출토되어 가락동식토기라고 불리는 토기로, 청천강 이남 지방의 팽이형토기와 동북 지방의 구멍띠토기의 영향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생각된다. 아가리는 서북 지방에서 보이는 겹아가리 형태이고, 겹아가리 아래쪽에는 빗금을 그어 장식하였다. 높이 36.8㎝
<송국리식토기>   
청동기시대 전기에 유행한 구멍띠토기는 대부분 바리 모양인데 비해 청동기시대 후기에는 단지 모양의 토기가 많이 사용된다. 이 단지 모양의 토기는 충남 부여 송국리유적에서 처음 출토되어 송국리식토기라고 명명되었다. 청동기시대 전기의 구멍띠토기 사용자들은 장방형의 집터에서 살았던 반면에 후기의 송국리식토기 사용자들은 방형이나 원형 집터에서 생활하였으며, 이 시기에는 논농사가 본격화되었다.[높이(왼쪽) 26.7㎝, 국립중앙박물관]
<동북 지방의 민무늬토기>   
청동기시대 동북 지방에는 구멍띠토기와 붉은간토기가 유행하는 것이 특징이지만, 장식이 없는 민무늬토기 바리도 많이 사용된다. 토기의 전면을 문질러 광택을 낸 것들이 많으며, 아가리 밑에 나무그루터기 모양의 손잡이를 한 쌍씩 부착한 것도 이 지역의 특징이다.[높이(왼쪽) 18.8㎝, 국립중앙박물관]

중국 전국시대의 혼란을 계기로 기원전 300년경 연(燕)나라의 주조철기(鑄造鐵器)가 한반도 서북 지방으로 유입되기 시작하며, 한반도 고고학에서는 이때부터를 초기 철기시대로 구분한다. 그러나 철기의 유입을 제외하면 청동기가 많이 사용되는 등 물질 문화 면에서 청동기시대와 유사한 특징을 지니고 있다. 이 시기의 토기 역시 청동기시대의 민무늬토기와 동일한 제작전통을 보이는데, 바리모양 토기의 아가리에 점토 띠를 부착한 덧띠토기[粘土帶土器]가 대표적이다. 덧띠토기는 민무늬토기와 마찬가지로 점토에 석영계 모래를 섞은 바탕흙을 사용해 제작하였으며, 테쌓기나 서리기 방법으로 성형하였다. 덮개식의 구덩가마에서 소성하였으나 이전 시기에 비해 규모가 크고, 길이가 10m에 달하는 것도 있다.21)

청동기시대에는 다양한 양식의 토기가 유행한 것과는 달리 덧띠토기는 한반도 남부 지역 전역에 걸쳐 유행한다. 구연부에 부착된 점토 띠의 단면 형태에 따라 원형덧띠토기와 삼각형덧띠토기로 구분되며, 전자에서 후자로 변화된다. 덧띠토기의 등장은 기원전 300년경 연나라의 고조선 침입으로 인한 고조선계 유이민의 집단이주와 관계된 것으로 생각되며, 호서 지역과 호남 지역에서는 기원전 2세기 초에 소멸되고, 영남 지역의 경우에는 기원전 1세기 대에 이르러 회색의 와질토기(瓦質土器)로 대체된다.22)

<덧띠토기>   
기원전 300년경 중국으로부터 철기문화가 전해지는데, 한반도 남부에서는 덧띠토기가 유행한다. 덧띠토기는 아가리에 점토 띠를 덧붙인 것이 특징이다. 점토 띠의 단면이 원형인 것이 먼저 등장하고 삼각형인 것이 나중에 사용된다. 단면 원형의 덧띠토기는 검은간토기 긴목항아리와 함께 무덤에 부장되기도 하는데, 한국식동검이라 불리는 좁은놋단검[細形銅劍] 등과 같이 부장되는 예가 많다. 왼쪽의 토기는 대전 괴정동무덤에서 출토된 것이고, 오른쪽은 청주 비하동무덤에서 출토된 것이다.[높이(왼쪽) 17㎝, 국립중앙박물관]
<굽접시>   
광주 신창동유적의 저습지에서 출토된 것으로, 나지막한 접시에 높은 굽이 달린 모양이다. 굽접시는 청동기시대 전기에 붉은간토기로 제작되기도 하지만 초기철기시대 이후에 유행하는 새로운 그릇이다. 신창동유적에서는 철기로 제작된 목제 굽접시도 함께 출토되었는데, 형태상 제사용 그릇으로 생각된다.[높이 30㎝, 국립중앙박물관]

숫자상으로는 적지만 바리 모양의 전형적인 덧띠토기와 함께 항아리와 굽접시, 손잡이가 달린 토기 등도 함께 제작된다. 덧띠토기는 주거지에서 주로 출토되지만 한국식동검이나 청동거울, 옥 등과 함께 무덤에 부장되기도 하였다. 또한, 이 시기 시루가 처음으로 등장하는데, 새로운 조리방법의 등장과 함께 토기의 기능이 보다 분화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 밖에 청동기시대 붉은간토기에 대비되는 흑도(黑陶) 또는 흑색마연토기(黑色磨硏土器)라고도 불리는 검은간토기가 유행한다. 고운 바탕흙으로 만든 검은간토기는 기벽이 얇으며, 표면에는 흑연을 발라 마연하여 광택을 낸 토기로 목이 긴 항아리가 대표적인데 주로 원형덧띠토기, 한국식동검과 함께 무덤에 부장되었다.

[필자] 최종택
14) 최몽룡·신숙정, 앞의 글, 1998, p.26.
15) 庄田愼矢, 「靑銅器時代 土器燒成技法의 實證的 硏究」, 『湖南考古學報』 23, 2006, p.134.
16) 김장석, 「남한지역 후기 신석기-전기청동기 전환: 자료의 재검토를 통한 가설의 제시」, 『韓國考古學報』 48, 2003, pp.93∼133.
17) 김재윤, 「韓半島 刻目突帶文土器의 編年과 系譜」, 『韓國上古史學報』 46, 2005, pp.31∼70.
18) 덧띠새김무늬 토기와 관련된 방사성탄소연대는 진주 옥방5지구 D-2호주거지 3,230±50 B.P.(1,620∼1,400 B.C.), 3,180±60 B.P.(1,590∼1,310 B.C.), 진주 상촌리 2호주거지 3,030±50 B.P.(1,410∼1,120 B.C.), 상촌리 10호주거지 3,010±50 B.P.(1,400∼1,100 B.C.) 등이 있다(千羨幸, 「한반도 돌대문토기의 형성과 전개」, 『韓國考古學報』 57, 2005, p.79).
19) 이홍종, 「무문토기와 야요이 토기의 실연대」, 『韓國考古學報』 60, 2006, p.251.
20) 이홍종, 앞의 글, pp.236∼258.
21) 庄田愼矢, 앞의 글, p.133.
22) 朴辰一, 「嶺南地方 粘土帶土器文化 試論」, 『韓國上古史學報』 35, 2001, pp.33∼57.
창닫기
창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