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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 백제연의] 16. 선화공주의 정체가 잠들어 있는 곳, 익산 쌍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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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6. 17. 2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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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글 제목의 연의라는 표현은 소설의 형식이라기 보단 일종의 페이크 다큐멘터리로 보시면 됩니다

설화를 비롯하여 일부 사견이 포함되어 있으므로 실제 역사적 진실은 이와 다를수 있습니다

연재글을 처음부터 차례대로 보시려면 제 블로그인 http://blog.naver.com/baekjelove1 이곳에 오셔서 '백제사랑 역사이야기카테고리로 가시면 쉽게 보실수 있습니다. 기존에 연재하면 '7세기 백제연의'의 내용을 대폭 수정하고 새롭게 작성하고자 제목을 '신 백제연의'로 변경하였으며 리부트 하여 처음부터 다시금 작성하고자 합니다.

 

[신 백제연의] 16. 선화공주의 정체가 잠들어 있는 곳, 익산 쌍릉

  

600년 백제 무왕의 즉위 무렵의 영토입니다. 개인적인 사론이 많이 포함된 추정 영토로써 고대의 영토는 오늘날 휴전선 개념처럼 명확하게 구분져 있지도 않으며 지명고증은 전문학자들도 서로 의견이 달라확실하게 단정짓지 못한 사안이므로 실제 역사적 사실과는 다를수 있습니다.. 


1. 백제 무왕과 선화공주가 잠들어 있다는 쌍릉

익산시 석왕동에 위치해 있는 사적 87호 쌍릉, 전설에 따르면 이 무덤이 백제 무왕의 무덤으로 전해져 오고 있습니다.


전편에 이어 역사 기록대로 선화공주가 정말 신라 진평왕의 딸이 맞을까요? 그 진실을 파헤치기 위해선 고대사의 단편적인 기록만으로는 입증이 어렵습니다. 적어도 관련 유물이라도 나온다면 선화공주의 정체를 파악하는대 매우 큰 도움이 될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 주목받는것이 바로 무왕의 무덤으로 알려진 쌍릉입니다. 구전에 따르면 무왕의 무덤인 대왕릉과 선화공주의 무덤인 소왕릉 두개의 무덤을 합쳐서 쌍릉이라고 불려지고 있다고 하는대요. 이 무덤은 선화공주의 정체를 파악하기 위해 매우 중요한 증거임이 분명하지만 아쉽게도 해당 무덤은 도굴되어서 진실을 밝히기 매우 어렵게 되어 버렸습니다.


그나마 1917년 일제시대때 쌍릉을 조사하여 해당 무덤은 부여에 다수 존재하고 있는 백제 왕릉과 동일한 구조의 굴식돌방무덤[橫穴式石室墳]이라는 것이 밝혀졌으며,치아4점과 목관 일부와 토기 정도만 발견된게 다인대요. 최근들어 바로 이곳 쌍릉과 관련하여 매우 놀라운 주장이 제기되었습니다. 바로 1917년에 쌍릉에서 출토된 치아 4점과 토기 유물이야 말로 삼국유사의 기록대로 선화공주가 신라 진평왕의 공주라는 결정적인 증거라는 것입니다.


2. 쌍릉에서 발굴된 선화공주의 어금니와 신라제 토기?

쌍릉에서 출토된 20~40대로 추정되는 여성의 어금니 4점, 일부 학계에서는 이 어금니의 주인공이 신라 진평왕의 딸인 선화공주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최근들어 무왕의 무덤이라고 알려진 대왕릉에서 수습된 어금니4점을 분석한 결과 놀랍게도 20~40대의 젊은 여성의 치아로 밝혀졌습니다. 백제는 이시기 순장 풍습이 남아있지 않았기 때문에 흔히 알려진 백제 무왕의 무덤이라는 대왕릉은 어쩌면 선화공주의 무덤일수도 있게 되었습니다.


더불어 더 놀라운 주장이 제기되었습니다. 선화공주일지도 모른다는 그 무덤에서 신라제 토기가 발견되었다는 점입니다.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3&oid=277&aid=0003675081


기사 내용을 요약한다면 백제 무왕의 무덤으로 알려진 대왕릉에서 여성의 치아가 발견되었고 이를 토대로 이 무덤은 여성의 무덤이며, 신라 토기가 이곳에서 발견되었음을 미루어볼때 선화공주의 무덤일 확률이 매우 높다는 것입니다.


익산 쌍릉에서 발견된 적갈색 연질 토기, 이 토기는 당시 백제 지역에서 유행한 바닥이 편평한 회색계통의 그릇과는 차이가 크며 주로 경주 방내리 고분군 등 신라 지역에서 출토되는 7세기 전반 무렵의 토기와 유사하다고 합니다.


3. 정말 대왕릉은 선화공주의 무덤이 맞을까?


여성의 치아와 신라제 토기가 발견되었다고 그 무덤이 정말 선화공주의 무덤이 맞다고 확정지을수 없으며 더군다가 선화공주가 신라 진평왕의 딸이라는 결정적인 증거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해당 무덤이 정말 선화공주임을 100프로 확증할만한 금석문이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국보 163호인 무령왕릉지석, 무령왕릉이 발견되었을때도 이 지석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그 무덤의 주인공이 누구인지는 아직도 정체불명으로 남았을 것입니다.


더군다나 고대시대때는 무덤을 재활용한 사례가 드물긴 하였지만 존재하기 때문에 백제가 멸망한 후 신라사람들이 백제의 무덤을 파헤쳐서 재활용하였을 가능성도 무시할수 없습니다.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3&oid=003&aid=0003011164

백제가 한성백제 시절 무덤을 만들고 신라가 그 지역을 차지하여 재활용한것으로 추정되는 안성시 장원리 고분군

만약 정말로 백제 무왕의 무덤이었던 대왕릉이 백제 멸망이후 신라가 도굴해가면서 그 무덤을 그대로 신라여인을 안장하고 재활용하였다고 한다면 왜 무왕의 무덤으로 알려져있던 대왕릉에 여성의 유골이 안장되어 있는지에 대한 의문점은 쉽게 풀리게 됩니다.


 결국 백제시대때 만들어진것은 맞을지 모르나 신라제 토기가 나왔다고 하여 그 무덤이 신라 선화공주의 무덤이라고 속단하기는 이르다는 것입니다. 쌍릉이 신라 진평왕의 딸인 선화공주의 무덤일지 아니면 백제 무왕의 무덤이었으나 훗날 신라가 이 지역을 차지하면서 무덤을 도굴해가고 신라의 여인을 안장했던 것일지... 결국 판단은 여러분의 몫입니다. 


백제 무왕의 무덤이라고 알려져있는 대왕릉(왼쪽)과 선화왕비의 무덤이라고 알려져있던 소왕릉(오른쪽), 하지만 최근 조사결과 대왕릉에 발굴된 치아 유골4점이 여성의 치아로 밝혀지면서 대왕릉이 선화공주의 무덤일지도 모른다는 주장이 제기되었습니다. 그게 사실이라면 과연 소왕릉은 누구의 무덤이 되는 걸까요? 그 진실을 알고 있는 쌍릉은 오늘도 침묵할 뿐입니다.


쌍릉의 주인공이 누구인지는 아직도 논란이 분분하고 진실은 아직도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저만의 부족한 생각을 덧붙여 봤을때 삼국유사 기록대로 선화공주는 신라 진평왕의 딸이 맞다고 생각됩니다.


정말 신라 진평왕의 딸이라면 불천지 원수국인 신라와 백제 사이에서 과연 어떠한 과정을 거쳐서 서동과의 혼인이 이루어졌고 백제 왕자 서동은 어떠한 과정을 거쳐서 왕위에 오르게 된것일까요? 마를 캐며 살던 아이가 백제 왕위에 오르기까지.. 그 드라마틱한 과정과 일대기는 다음편에서 자세히 다뤄보도록 하겠습니다. 

야관중
야관중 스포츠

한화 이글스 최초의 외국인 감독, 카를로스 수베로 감독의 수동지(秀動志)와 백제 역사 관련 글을 집필하면서 베트남과 한국 여행,영화 감상 후기까지 작성하고 있는 야관중(野貫中)입니다. 해당 블로그에서 작성된 글을 퍼가실때는 꼭 블로그 주소를 출처로 남기세요. 욕설 및 광고성 댓글은 바로 삭제하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