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 이승엽

[이승엽] 02. 야구 인생의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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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12. 26. 1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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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 야구 인생의 시작

이승엽은 1976년 10월 11일(음력 8월 18일) 이춘광, 김미자 씨의 2남 1녀 중 막내로 태어난다. 전남 강진이 고향인 아버지 이춘광 씨는 대구 2군 사령부 통신근무대 타자병으로 복무했고, 제대한 뒤 고향으로 돌아가 공무원 공부를 하다 친구의 권유로 1967년 대구 서구 내당동 반고개 근처에 있는 삼성 섬유에 취직을 한다. 이승엽의 본적지는 부모가 전남 강진과 해남 출신인 까닭에 전남이지만, 태어난 집은 대구 봉덕동 삼덕 2가 140-13번지이다. 어머니가 뱀이 똬리를 튼 채 천 원짜리를 물고 있는 태몽을 꿨다 하고, 새벽 3시 대구 중구 서성로의 모 산부인과에서 이승엽을 낳았다. 작명은 범어동의 한 철학관에서 했다고 한다.

1982년 프로야구가 태동하고 그 다음 해인 1983년 이승엽은 대구 중구 삼덕동에 위치한 동덕 초등학교에 입학을 하고, 생일 때 먹을 것 정도를 사줄 생각이었던 아버지에게 야구 방망이와 글러브를 사달라고 해 선물로 받는다. 야구와 처음 인연을 맺게 된 건 동덕 초등학교 4학년 때 동부 교육청이 주최한 멀리 던지기 대회 이후다. 학급 대표로 출전했던 이승엽이 고학년 선배들을 제치고 3위에 입상했는데 당시 중앙 초등 신용성 야구부장이 운동장에 나와 이승엽을 유심히 살폈고, 왼손잡이면서 손이 다른 아이들보다 더 두툼한 것을 보고 무척 탐을 냈다고 한다. 신 부장이 승엽에게 야구 선수 의향을 묻자 단번에 '그렇게 하겠다'고 할 정도로 적극적이었는데, 보통 다른 학생들이 대통령이나 의사, 박사, 선생님이라는 장래희망을 생각할 때 혼자 '야구 선수'라 써낼 만큼 야구를 좋아하고 있었다.

당시 아버지 이춘광 씨는 아들 승엽이 운동선수가 되는 걸 강력하게 반대했다. 아들이 평범하게 살았으면 했고, 운동하다 실패하면 나쁜 길로 가게 된다는 생각이 강해서였다. 어린 승엽은 한 달 정도 단식 투쟁(?)을 하면서 학교 수업이 끝나면 집에 곧바로 간 것이 아니라, 다른 학교에 가 야구를 하고 집으로 들어오는 등 그런 생활을 한 달 정도 반복하면서 야구를 하고 싶다며 고집을 피웠고, 신용성 야구부장도 아버지를 설득시키기 위해 한 달 동안 네 차례나 집을 드나들었다. 뜻이 확고했던 신 부장은 "저도 아들에게 야구를 시키는 '학부모'입니다. 제 욕심만으로 승엽이의 길을 망치지 않겠습니다. 초등학교 졸업할 때까지만이라도 야구를 시켜보시지요"라며 설득을 했고, 그 이야기에 아버지 이춘광 씨의 마음이 흔들렸다고 한다. 사흘 동안 고민을 하다 아들 승엽을 불러다 놓고 후회하지 않을 자신 있냐며 물었고, 후회하지 않게 열심히 하겠다는 아들의 약속을 받고 나서야 허락을 하게 됐다.  

결국 이승엽은 초등학교 4학년 때 대구 중앙 초등학교로 전학을 간다. 아버지 이춘광 씨는 아들 승엽이 정말 야구 선수로서의 자질이 있는지 면밀하게 분석하기 위해 매일 멀찍이 떨어져서 운동하는 모습을 관찰했다고 한다. 다른 학부모들은 아이에게 다가가 음료수를 사주기도 했지만, 승엽의 아버지는 '오냐, 오냐. 힘들지 내 새끼', 이런 식으로 맹목적으로 칭찬만 해선 아들이 절대 성공할 수 없을 것이라 보며 굉장히 엄격하게 아들을 키웠다.


야구부원이 된 그해 포항제철 회장배 전국 야구 대회가 포항에서 열렸는데 거기서 첫 안타를 쳤다. 2년 뒤인 6학년 때 제10회 전국 어린이 야구 대회가 서울 장충단 공원에서 열렸고, 중앙 초등은 옥산, 칠성, 남도, 수창 초등을 차례로 꺾고 서울로 간다. 대전 유천 초등학교와의 경기에서 이승엽이 4회초에 투런홈런을 쳤고 그 덕분에 전국 8강에도 진출한다. 대회 이후 대구로 오니 지역 중학교 야구부 감독으로부터 다양한 스카우트 제의가 들어왔고, 당시 야구부가 있는 중학교는 대구, 경상, 경원, 경복중이었는데 이승엽은 경상중학교로 진학을 결정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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