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응오 | 2007/11/06 11:07

전통과 현대 아우른 기법… 탁월한 디자인 경쟁력
외국인 스님 좌선 기구 제작… 청계산 봉은사 불사도

나무들이 색동옷으로 갈아입은 늦가을 나무향기가 물신 나는 곳을 찾았다. 목향(木香)이 그윽한 장소는 다름 아닌 1990년 대한민국 목공예 명장으로 지정됐으며 이어 무형문화재 소목장(경기 14호)으로 지정된 권우범 명장의 작업장인 대권공예(경기도 남양주시 소재)다.

나무를 오랫동안 만진 까닭일까? 권 명장은 외모가 그의 공방 넓은 뜰에 서있는 아름드리 침엽수처럼 훤칠했으며 나이테의 물결무늬처럼 곡진한 성정을 지니고 있었다. 어떻게 목공예의 길을 접어들었냐는 질문에 권 명장은 “다 업(業)이었다”는 간명하면서도 의미심장한 대답을 했다. 그도 그럴 것이 권 명장은 선친인 고 권혁원 건축공예가에게서 손재주와 근기를 고스란히 대물림 받았다.

권 명장은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어릴 적부터 나무가 좋았다. 다른 또래의 아이들이 장난감을 갖고 놀 때 그는 아버지의 연장 보관함을 뒤졌다. 보관함 속 연장은 선친의 모든 노하우가 담긴 귀한 것들이어서 아버지가 없을 때만 몰래 만져야 했다.

배위에 정자를 짓다.(정자각선)

어릴 적 갖고 놀던 장난감도 모두 그가 만들었고, 이미 열 살 때는 대부분의 연장을 자유자재로 놀렸다고 하니 그의 재주가 얼마나 뛰어났는지 능히 짐작이 간다. 그런 손재주와 근기 때문에 그는 6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지만 결국 가업을 이어받는다. 물려받은 것은 다만 손재주뿐만이 아니다. 선친인 권혁원 씨는 고향인 경기도 안성 지역에서는 내로라하는 대목(大木)이었다.

선친은 그림이나 글씨에도 능해서 충북 음성 충용사 사당 현판 글씨를 쓸 정도였다고 한다. 아버지에 대한 존경심 때문인지 그의 작업실에는 지금도 선친의 연장들이 전시돼 있다. 작업장 이름인 ‘대권공예’도 권 명장 마음에 담긴 사부곡(思父曲)의 다름 아니다. 대권공예라는 이름에는 선친의 업을 이어나가고자 하는 권 명장의 신념이 깃든 것이다.

그는 아버지에게서 전통 목공예에 대한 기본교육을 다진 후 당시 국전작품 90%이상을 제작하던 오양환선생에게서 현대 목공예에 대한 전반을 배웠다. 전통과 현대를 아우를 수 있었던 것은 주경야독(晝耕夜讀)의 노력의 결실이다. 전통과 현대 목공예를 수련하는 과정은 그다지 녹록치 않았다. 무엇보다도 나무를 만지려면 목리(木理)를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목리에 대해 그는 아래와 같이 설명한다.

“나무는 베어져도 죽은 존재가 아닙니다. 살아서 숨을 쉬니까요. 사계절의 순환에 맞춰 나무는 수축과 이완을 거듭하니까요. 목재에 눈 뜨려면 많은 나무를 다뤄봐야 합니다.”

실제로 그는 수없이 많은 종류의 나무를 만졌다. 그런 노력의 결과로 나무의 면만 보고도 나무의 성질을 파악할 정도다. 그야말로 통달했다는 말이 어울리는 셈이다.

“좋은 나무를 보면 갖고 싶다는 욕심이 생깁니다. 마치 사랑에 빠진 사람처럼 온통 나무생각만 드는 것이지요. 나무마다 목리와 재질, 색이 다릅니다. 그 다름의 미학에 용도가 달라지는 것이지요.”

그만의 노하우로 30여 종의 목재는 최고의 작품으로 거듭난다. 그의 작품에는 주로 화류·흑단·괴목 등을 적용하고 있다. 누구보다 나무를 사랑하는 그여서 수입산 목재가 밀려오는 것이 아쉽기만 하다고 한다.
나무를 만지면서 평생을 살다보니 세상사 만물의 모든 상호보완 관계에 있다는 화엄사상의 요체를 터득했다는 권 명장. 그는 전통과 현대 목공예를 아우른 주인공답게 고전적이면서도 모던한 작품을 만들어왔다.

그의 작업장에는 천년의 숨결이 깃든 전통 목공예 기법의 작품부터 초현실적인 기법이 돋보이는 현대 목공예 작품까지 즐비하다. 전통과 현대의 조화로움. 그것이 바로 권 명장이 추구하는 예술관이기 때문이다.

전통과 현대가 잘 어우러진 장식장 세트

“가구는 그 환경에 맞춰 숨을 쉽니다. 즉, 가구는 주택환경에 맞춰야 한다는 말입니다. 생활전반이 바뀐 만큼 목공예의 기법도 바뀔 수밖에 없습니다. 예전에는 흙과 나무, 한지로 된 집에서 살아서 나무가구에 문제가 없었지만 요즘은 시멘트 집에서 살기 때문에 가구들이 뒤틀리거나 갈라지는 경우가 잦아지고 있습니다. 시대와 환경에 따라 목공예 기법이 달라져야 하는 까닭도 이러한 이유 때문입니다. 전통의 우수함은 계승하면서도 그 정신을 현대생활에 맞게 변화시키는 게 바로 우리 목공예장이 해야 할 몫인 것입니다.”

전통과 현대의 조화라는 그의 예술관은 작품의 디자인에도 잘 드러난다. 그의 작품에는 새와 나무가 즐겨 사용된다. 새와 나무의 조화로운 모습은 인간은 자연을 떠날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암시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그의 작품은 기법 면에서는 호장태상감·당귀상감·태극상감등 전통기법과 분말 상감·금속상감(은·백동등 금속을 파고 박는것) 등 현대기법을 병행하면서 디자인의 전통과 현대를 넘나든다.

대권공예에는 그의 예술세계를 알 수 있는 작품이 많다. 가령, 전통 장롱은 길이가 짧아 넥타이나 긴 옷을 걸 수 없는데, 그는 이를 개선한 작품을 만들었다. 나비문양의 화장대는 일일이 목재를 상감해 제작했으며, 거울에 비쳐진 부분까지 계산해 만든 게 큰 특징이다.

온고지신(溫故知新)의 자세를 강조한 그의 예술관은 그의 작업영역을 확장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의 작업은 서울대학교 규장각 현판과 국보서장· 국사편찬위원회 영인본장·정자각선의 정자 건축물 등 역사적 가치가 높은 유물을 재현하는 일도 있지만, 파나마 대사의 외무공관 가구를 만드는 일도 있다.

그의 작업실 한 쪽에는 그가 그린 도면들이 수없이 걸려 있어, 그가 얼마나 성실한지를 잘 대변해주고 있다. 대권공예의 건축설계와 전시장 인테리어, 정문의 문양까지도 자신의 손길이 닿은 것이라고 한다.

그는 보다 좋은 작품을 만들기 위해 틈나는 대로 사찰을 찾는 독실한 불자다. 안성 출생인 그는 칠장사가 고향집처럼 아늑한 공간이었다고 회고한다. 그래서 그런지 그는 불교관련 공예도 많이 제작해왔다. 송광사 국제선원에 외국인 출신 스님의 참선을 도와주는 기구를 기증했는가 하면, 충주 청계산 봉은사 대웅전의 수미단과 닫집·추모전 안치단이 그의 손길에 의해 완성된 것이다.

권우범 명장과의 인터뷰를 마치고 나오는 길, 기자의 눈에는 대권공예에서 봤던 작품 하나가 눈에 선하게 그려진다. 그 작품은 추사 김정희의 <불이선란>을 서각한 책장이다.

不作蘭花二十年 ( 부작난화이십년, 난을 치지 않은지 이십년)/ 偶然寫出性中天 (우연사출성중천, 우연히 본성의 참 모습을 그려냈구나)/ 閉門覓覓尋尋處 (폐문멱멱심심처, 문 닫고 찾고 또 찾은 곳)/ 此是維摩不二禪 (차시유마불이선, 이 경지가 바로 유마 불이선 일세)/ 始爲達俊放筆 (시위달준방필, 처음엔 달준에게 주려고 그린 것이다)/ 只可有一 不可有二 仙客老人 (지가유일불가유이선객노인, 다만 하나만 그릴 수 있지 둘은 있을 수 없다, 선객노인) 樂文天下士 金正喜印( 낙문천하사 김정희인)

작가 한승원은 장편소설 《추사》에서 불이선란을 궁극의 글씨, 즉, 신필(神筆)이라고 극찬한 바 있다. 어디 글 쓰는 이뿐일까? 세상 일이라는 게 궁극의 자리에 가면 모두가 신필이 된다는 것을 권우범 명장의 옹이 박힌 나무 같은 손바닥이 잘 말해주고 있다.
글= 유응오 기자
사진=이한국 국장



권 우 범 명장은?
1951년 경기 안성 출생
1990년 대한민국 목공예 명장 지정
2006년 무형문화재 소목장 지정(경기 14호)
건국대학교 교육대학원 미교과 수료
1990년 노동부 장관 표창
2002년 석탑산업훈장 수상
기능경기대회 심사위원 및 심사장 역임(8회)
한국문양공예대전 심사위원
제32회 대한민국전승공예대전 부운영위원장
서울대학교 규장각 현판 및 국보서장 제작
국사편찬위원회 영인본장 제작
파나마 외무장관 공관가구 수출
김대건 신부 성체함 제작(바티칸 소장)
저서 《가구디자인-실무의 이해》
현 대권공예 대표
대권공예 (031)571-4567, 011-711-3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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