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교촌한옥마을 이름, 경주최부자댁마을로 바꾸어야

식모회 주도, 행정복지센터 지원 후원자 늘며 3호점까지

박근영 기자 / 2023년 08월 1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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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주최부자댁 관련 교촌 주요 건물 배치도 1. 경주최부자종택 2.향교 3.적은댁(교동법주) 4.뒷새댁(독립운동가 최완 선생 댁)

내가 교촌에 살기 시작한 것은 정확히 1969년부터다. 내가 다섯 살 때 교촌으로 이사가 교촌한옥마을 정비공사가 시작되기 한 해 전에 시에 집이 유치되면서 이사 가던 2008년까지 우리집은 거의 40년을 교촌에서 살았다.

한옥마을 조성을 위해 경주시는 2008년부터 모두 45채의 집을 사들여 지금의 22채로 공사를 다시 했다. 나는 그 과정을 보면서 과연 그게 교촌의 역사성과 문화성에 합당한가에 대해 많이 고심했다.

2008년에도 무려 45채나 되는 집을 수용해 철거했지만 내가 처음 교촌에 이사했을 때는 이보다 두 배는 많은 집들이 교촌 곳곳에 빼곡하게 살고 있었다. 그런 집들이 한 해 한 해 시간이 지나면서 헐리고 사라지면서 2008년까지 간 것이다. 그렇다면 내가 처음 교촌에 살기 시작했을 때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80여 호 집들이 사라졌지만 최부자댁과 관련한 집들은 거의 보존됐다. 그것이 경주교촌한옥마을의 뼈대다.

좀 구체적으로 변화를 말하자면 인가가 있던 곳이 지금의 첨성대 앞 반월성 진입로 오른쪽 공터와 계림 사이, 지금의 문화재연구소부터 시작해 남천에 이르는 지점까지 집이 10여채 있었다. 계림 앞에는 포도밭이 있어서 포도가 나는 철이 되면 사람들이 놀기 삼아 많이 드나들었다. 지금의 향교 주차장 앞쪽도 대여섯 채의 민가가 있었다. 이들 집들은 대부분 초가집이었다가 새마을운동이 시작되면서 석면이 주원료인 슬레이트 지붕 집으로 바뀌었다.

교촌 북동쪽으로도 집이 많았다. 교촌에 놋그릇을 만들어 공급하던 ‘놋전’이라 불리는 동네였는데 교촌에서 황남초등학교로 이어지는 농로를 따라 가다 왼쪽으로 놋전 골목이 있었고 그 골목 좌우로 10여채의 집이 있었고 그 안쪽으로 100여미터 들어가면 역시 10여호는 됨직한 마을이 자리잡고 있었다.

교촌 안쪽으로는 큰 변화가 없었다. 다만 사마소(司馬所)가 지금의 월정교 남측에 남천과 붙어서 지어져 있었는데 그게 1984년 지금의 교촌 서편으로 옮겨간 것이 가장 큰 변화일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의 교촌을 중심으로 놋전까지 아우르면 당시에는 무려 100세대는 족히 교촌에 살았다는 결론이다. 더구나 당시에는 대가족의 영향이 살아 있을 때고 6.25전쟁 후 한창 베이비 붐이 일어나던 시기다. 교촌과 놋전에는 집집마다 아이들이 넘쳐났고 온동네가 낮에는 사람 사는 소리 밤에는 개짖는 소리 이른 아침에는 장닭 홰치는 소리로 요란했다. 줄잡아 인구가 5~600여명 되는 동네이다 보니 없는 것도 없었다. 동네에는 이발소도 있었고 구멍가게를 겸한 선술집도 서너 개 있었다. 연탄을 찍어내는 가내수공업 연탄 공장도 하나 있었다.

이렇게 많았던 집들이 하나둘씩 자취를 감춘 것은 교촌 일대는 물론 경주전역에 긴 세월을 두고 단행된 ‘경주유적지정비사업’ 때문이었다. 가장 먼저 철거된 곳이 향교와 계림 사이에 자리 잡고 있던 5~6채의 집들이었다. 이어 반월성 남측 지금의 문화재연구소 쪽에 자리잡고 있던 집들이 없어졌고 그 다음으로 반월성 남쪽 집들이 모두 사라졌다. 비슷한 시기에 놋전 마을들도 급격히 사라졌다. 계림 맞은 편 포도밭과 교촌 남서쪽, 최부자댁 후원 뒤 솔밭과 맞닿아 있던 포도밭도 사라졌다. 이게 약 내가 교촌에 이사간 후 약 15~6년 사이에 일어난 변화였다.

이렇듯 많은 집들이 사라졌지만 아무리 시간이 지나고 세월이 흘러도 그 자리를 꿋꿋이 지키고 있는 집들이 있었다. 그게 모두 골기와집들이었다. 지붕도 보통의 집들보다 훨씬 높았고 그런 골기와 집을 막고 선 담장들도 여느집 담장보다 훨씬 높았다. 담장이나 지붕 위에는 와송들이 자랐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우리 큰댁은 그런 골기와집의 전형적인 모습이었다. 큰댁의 집 구조는 우리집과 또 달랐다. 1미터는 족히 되어 보이는 축대를 쌓고 그 위에 마루와 대청이 있고 대청을 사이에 두고 방이 있는 식이었다. 방문은 들어 올리는 바깥문이 있고 밀어서 여는 미닫이가 되어 있었다. 한눈에 보아도 ‘고대광실’이라는 말이 어울릴 정도의 멋진 집이었다.

신기한 것은 마루 앞쪽으로 몇 개의 구멍이 깊숙이 파져 있었던 것이다. 마루 두께가 족히 10cm는 넘어 보이는 나무들로 만들어졌는데 그것에 구멍이 뻥 뚤린 것이 신기했다. 아버지께 그런 구멍이 왜 났느냐고 여쭤봤더니 양반집이라서 그렇다는 것이었다. 옛날 이 집에 살던 양반들이 세수를 마당이나 우물에서 하지 않고 세숫물을 받아 마루에 놓고 씻다보니 늘 세숫대야 올려놓는 곳이 무르고 삭아 이렇게 구멍이 생겼다는 것이다. 그때는 아무렴 세수 좀 했기로 그 두꺼운 나무가 삭았을까 싶지 않았지만 뒤에 아버지 말씀이 사실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큰댁뿐 아니라 동네의 대부분 골기와집들은 큰댁과 비슷한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우리집 앞은 경주고등학교에 재직하시던 이종룡 선생님 댁이 있었는데 선생님은 ‘큰새댁’이라는 택호로 불린 최부자댁 권속인 최모 선생님의 댁 안채에 새 들어 사셨다. 이 댁 사랑채도 큰댁과 비슷하게 축대 위에 마루와 대청이 있고 대청을 사이에 두고 방이 배치되어 있었고 뒤에 막내 큰아버지께서 사서 이사하신 댁 역시 최부자댁 권속으로 ‘큰세댁 손자집’이라 불린 집인데 이 집 구조도 마찬가지였다. 최부자댁 옆으로도 기와집이 이어졌다. 지금 경주법주 만드는 집은 ‘적은댁’으로 알려진 집인데 이 집 역시 건물구조가 비슷하게 지어져 있다.

이밖에도 기와집이 많았다. 경주법주 옆이 ‘뒷새댁’으로 불리던 독립운동가 최완 선생님댁도 번듯한 기와집이었다. 우리집 앞쪽으로는 ‘파훼댁’으로 불린, 서당이 있던 집인데 이 집은 구조가 좀 다르긴 했지만 역시 부잣집으로 손색없는 집이었다.

마지막으로 큰 기와집이 최부자댁 앞 공터 왼쪽에 있는 밭가운데 댁이라 불린, 지금의 요석궁이 있는 집인데 이곳은 당시의 마을 사람들에게는 완전히 별개의 집이었다. 이 댁 주인이 우리나라에서 제일 유명한 전국구 어느분의 집이었기 때문이었다. 뒤에 요석궁으로 집이 개조되고 그 요석궁이 지금처럼 한정식집이 되고 나서 들어가 볼 수 있었는데 역시 최부자댁 못지 않은 고대광실임을 알 수 있었다.


↑↑ 최부자댁 솟을 대문


교촌의 큰 기와집들은 제각각 택호가 붙어 있었다. 이것이 최부자댁 마을임을 입중하는 좋은 증거들이다.

지금 나열한 이 집들은 모두 최부자댁 권속들이 살거나 살던 집이었다. 이 밖에도 교촌에는 기와집들이 몇 개 있었지만 그집들 대부분은 일제강점기 이후에 지어진 집들이거나 그 뒤에 교촌에 이사해 와서 살던 사람들이 지은 집들이었다. 이 몇 집 이외에는 대부분이 초가집이었다. 이런 집들은 오래전에는 경주최부자댁과 음으로 양으로 인연을 맺어오던 사람들이 살았던 것으로 알려졌지만 내가 이사오던 시기에는 그런 사람들은 대부분 마을을 떠났고 새로 이주해 온 사람들이 어울려 살았다. 그 나름대로 역사성이 있었으나 경주시는 이들에 대해 조금의 관심도 없이 모두 철거해버렸다.

그런 분들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분은 고청 윤경렬 선생님이다. 윤경렬 선생님은 함경북도 주을 출신으로 위에 언급한 이종룡 선생님과 동고향이시다. 당시 지금의 교동법주 집에 세들어 사시면서 토기로 이상하게 생긴 인형들을 만드셨는데 나는 가끔 그 집에서 버린 실패작 인형들을 주워와서 놀곤 했다. 선생님은 늘 두루마기에 고무신 차림이셨고 풀어헤친 긴 머리가 매우 인상적이셨다.

참고로 이 글에서 쓴 기와집들에 ~~댁, ~~~댁 등 택호들을 쓴 것을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이 택호들은 최염 선생님께 들은 택호들을 쓴 것으로 선생님조차 이 택호들을 오랜만에 다시 떠올리시면서 매우 신기하고 놀라워하셨다.

나는 이런 택호들에서 또 다른 가치를 발견했다. 바로 택호들을 통해 교촌의 경주최부자댁은 본댁뿐 아니라 마을 전체가 교촌최부자댁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마지막 경주최부자로 알려진 최준 선생님(1884~1970)의 형제분들과 일가친지들이 한 동네 살았다는 아주 중요한 흔적이다.

이런 이유에서 나는 ‘경주교촌한옥마을’이라는 제목에 아주 큰 저항감과 실망감을 안고 있다. 비록 향교도 중요하고 한옥도 중요하지만 경주최부자라는 대한민국 최고의, 세계사적 정신적 문화적 콘텐츠를 어지간한 도시 어디에나 있는 향교나 한옥과 바꾸어버렸다는 아쉬움 때문이다. 그나마 교촌에 경주최부자아카데미와 경주최부자선양회가 있는 것이 다행일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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