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사 지낼 때마다 사라지는 그릇들, 최부자댁 남다른 클래스

경주신문 기자 / 2024년 02월 0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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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부자댁 친척들이 함께 산 교촌 안 골목

↑↑ 박근영 작가
두두리출판기획 대표
“회장님, 회장님께서 어린 시절에는 부자댁 위용이 어느 정도는 살아 있었을 텐데 부자댁 만의 특징으로 무언가 기억되는 것은 없었습니까?”

내 질문에 최염 선생님은 고개를 가로저으셨다.

“아니, 그렇지 않네. 내가 어릴 때는 이미 독립자금 지원하느라 만든 ‘백산상회’를 통해 재산을 거의 다 써버린 이후였어. 조선식산은행에 전재산이 차압 당해 온 집안에 빨간 딱지가 붙어있기도 했었지”

그러나 ‘부자 망해도 3년 간다’는 속담을 떠올리며 끝까지 여쭈어보았다. 더구나 경주 최부자댁은 그냥 평범한 부자가 아니고 조선 최고의 뼈대 있는 부자댁 아니었나 말이다.



100여명이 참여하는 제사, 그때마다 사라지는 그릇들과 소달구지로 실어 오는 새 그릇들!


한참 생각하시던 최염 선생님은 ‘이런 것도 이야기가 될지 모르겠다’시며 천천히 말씀하셨다.

“집안에 제사가 많았다는 말은 이미 했었고..., 그 제사가 끝나면 할아버지께서 가복 한두 명과 함께 소달구지를 끌고 나가곤 하셨다네. 그렇게 나갔다 들어오시면 소달구지에 잔뜩 새 그릇들을 사오곤 하셨어!”

나는 긴장감이 느껴졌다.

“제사에 그만큼 많은 그릇들이 사용되었다는 말입니까?”

최염 선생님은 빙긋 웃음을 띠셨다.

“그럴 만한 것이... 봉송이 장난 아니었어요. 박작가 어릴 때 교촌 기와집들 중 몇 집을 빼고는 대부분 우리 집안 대소가들 아니었나. 내가 어렸을 때는 그 기와집들 전부가 우리 집안 사람들이었지”

분명히 그랬을 것이다. 내가 교촌에 살 때만 해도 아버지 형제분들 살던 몇 집과 그 외 두어 집을 빼고는 그때도 교촌의 대부분 기와집들은 최부자댁 친인척들이 살고 있는 집이었다.

다시 되짚어 보자면 최부자댁이 교촌에는 처음 이곳으로 이사온 최염 선생님의 6대조 최기영 공(1768~1734) 이후, 종가를 중심으로 가솔들이 한 집, 두 집 살림을 나가 마을 전체에 퍼져 살았다. 그러니 제사가 있을 때는 자연스럽게 어른·아이할 것 없이 동네 사람들 전부가 종가에 와서 일도 거들고 밥도 먹고 했을 것이고 봉송(封送-제사를 지낸 다음 제사 지낸 음식을 보내는 일 또는 그 음식)도 손에 손에 받아 갔을 것이다.

선생님이 말씀을 이었다.

“그 봉송을 모두 그릇에 담아서 했어요. 봉송도 고기, 떡, 전, 밥, 국... 전부 다 보냈어. 그러니 그릇이 얼마나 많이 들었겠어요?”

그런 후 최염 선생님이 잠시 뜸을 들이셨다.

“그런데 사실은 봉송 못지않게 그릇들이 없어지는 일이 있었어!!”

최염 선생님이 어린 시절에는 가복들이 제법 많았을 때였다. 집안일 하는 남녀 가복들이 늘 5~6명은 늘 있었다. 게다가 제사 지낼 때는 동네 근처 아낙네들이 대거 일손을 도왔는데 그들 역시 몇 개씩 소매나 치맛자락 속에 그릇들을 숨겨 갔다는 것이다. 그러나 최부자댁 어른들은 그것을 거의 문제 삼지 않았다고 한다.

“아니, 그건 훔쳐 가는 것 아닙니까? 가복이나 동네 사람들에게 인정을 베푸는 것과 법도를 지키는 것은 다르지 않습니까?”

최염 선생님도 고개를 끄덕이셨다.

“할아버지는 그들을 귀하게 대하셨네. 그들은 대부분 우리 집과 오래도록 관계를 맺어온 사람들이었어. 그래서 봉송에 보내는 그릇처럼 그들이 훔쳐 가는 것을 알고도 모른 척 눈감아버리기 일쑤였다네. 제사 지내고 나면 그들도 떡이며 음식을 싸가게 했는데 그 역시 마땅히 그릇들에 넣어 보냈으니 하나둘 가져가는 것보다는 아예 터놓고 내주는 그릇들이 훨씬 많았다고 봐야지!”

나는 그 말씀을 들으면서 이른바 ‘클래스가 다르다’는 말을 떠올렸다. 이를테면 최부자댁은 그런 생활 그릇에 연연해할 정도의 부자가 아니었다는 말이다. 제사 한 번 지내면 뭉턱뭉턱 사라지는 그릇을 보충하기 위해 제사가 끝날 때마다 소달구지로 그릇들을 다시 사올 만큼의 습성이 최염 선생님 당대에도 남아 있었다는 것이다.

새로 사오는 그릇들은 대부분은 사기그릇들이었다고 한다. 제사는 놋그릇으로 지내지만 아무리 최부자댁이라도 봉송까지는 놋그릇으로 할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놋그릇과 사기그릇은 가격으로 따지면 최소한 열 배 차이가 났을 것이다.

그렇다면 최부자댁 제사에는 몇 분이나 참사(參祀)했을까? 최염 선생님의 회고는 이렇다.

“다른 집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우리 집은 제사 지내기 며칠 전부터 어지간한 잔칫집을 방불케 할 만큼 시끌벅적했네. 참사하는 사람만도 100여명이었고 제사를 돕기 위해 동원되는 가복들과 동네 사람들도 수십 인이었지”

그러고 보니 내가 어릴 때 우리 큰댁에서 제사 지내던 모습도 그랬다. 우리 집안도 제사를 지내면 방안은 물론이고 마루와 마당까지 내려가 멍석을 깔고 제사를 지내야 했다. 아버지 5형제분 모두 6~8인까지 자녀들이 있었고 그중 남자들은 거의 참사했는데 이러면 줄잡아 3~40명은 늘 모였다. 우리집도 그 정도인데 하물며 최부자댁은 오죽 더 많이 모였을까? 다시 최염 선생님 말씀!

“어린 시절을 돌이켜 보면 가장 힘들었던 것이 참사하는 일이었어. 최부잣집 주손이란 자리는 생각보다 엄해서 아무리 아이라도 제사에는 반드시 참사해야 했거든. 더군다나 정무공 할아버지 이후 후손이 귀했던 집안에서 제사라는 것이 종중의 제사와 우리 집안의 제사를 따로 구분하지 않고 모두가 함께 지내는 식이 되었기 때문에 좀 심하게 말하면 제사를 지내고 나서 돌아서서 또 제사를 지내는 것처럼 여겨질 때도 있었어”



“사람을 부릴라믄 쪼매씩 눈감아 주는 도량이 있어야 대는 기라. 그래야 사람들이 잘 따라 오는 벱이라”

나는 그때는 과객들이 없었는지, 있었다면 제사 지낼 때 과객들은 불편해하지 않았는지를 집요하게 여쭈었다. 그럴수록 선생님은 더욱 기억력을 돋구셨다.

“내 어릴 때는 늘 머무르는 과객들이 많지 않았네. 대신 파젯날은 어떻게 알았는지 과객들이 유독 많아지기도 했지. 그런 날은 사랑채가 온통 사람들로 넘쳐났어. 할아버지께서 머물러 계시는 큰 사랑채와 작은 사랑채는 방이고 대청이고 마루고 할 것없이 사람들도 꽉꽉 들이찼었네. 마당에도 멍석이 펴져서 사람들이 둘러앉았고! 그들 모두가 넉넉히 먹고 가져가기 위해서는 쌀만해도 몇 말씩은 들어갔고 떡이며 전, 나물, 생선 등 온갖 음식들이 넉넉하게 준비되어야 했지!”

갈수록 더 상상하기 어려운 최부자댁 제사 풍경이었다.

“지금 생각하니 신기한 것은..., 그때 그 과객들은 어린 내가 보기에도 거리낌이 전혀 없었어. 당연하게 와서 당연하게 먹을 권리가 있는 사람들처럼 제사를 돌보는 집안 어른들이나 가복들에게 이것 달라 저것 달라 끊임없이 주문해댔거든. 그러면 집안사람들도 역시 당연한 일을 하는 것처럼 과객들이 원하는 대로 이것저것 날라다 주었고 그들이 돌아갈 때면 어김없이 작은 보퉁이 하나씩을 챙겨서 들려 보냈지. 이런 일을..., 요즘이라면 상상이라도 하겠나?”

그렇게 보면 최부자댁 역대 종부들을 비롯한 집안의 며느리들은 일 년 내내 정신없이 바쁜 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여념의 집에서도 제사 모시는 일이 가장 큰 일이고 최소한 4대를 지내며 그 힘듦에 대해 호소하곤 하는데 100명 넘는 사람들을 일년내내 치러낸 최부자댁 역대 며느리들은 어떤 종갓집 며느리들보다 더 어렵고 힘든 시집살이를 하지 않았을까?

최염 선생님은 마지막으로 할아버지 문파 선생님께서 제사가 끝난 후 가복들이 가져가는 그릇들에 대해 들려주셨다는 말씀을 해주셨다. 정리해서 옮기면 이렇다.

“염아, 과객들이야 지나가믄 그뿐이지만 동리사람들은 마케 다 우리캉 한 집안 같은 사람들이다. 저 사람들이 대대로 우리캉 같이 살면서 우리를 도와 왔는데 그깟 그릇 맻 개 땜에 의가 상하믄 대겐나? 그라고 사람을 부릴라 카믄 머든지 쪼매씩 눈감아 주고 봐주고 하는 도량이 있어야 대는 기라. 그래야 사람들이 잘 따라 오는 벱이라. 알것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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