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부자댁에서는 무얼 먹었을까?-경주최부자댁 전통 법주

대를 이어온 최부자 댁 전통주, 당도는 강해도 달지 않았던 술

경주신문 기자 / 2024년 04월 1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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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년 10월에 거행된 서애 선생 15대 종손취임식. 이때 최부자댁 전통 가양주를 맛볼 수 있었다.

↑↑ 박근영 작가
내가 경주최부자를 쓰겠다고 다짐했을 때 특히 관심을 가졌던 부분이 생활전반에 대한 이야기다. 최부자댁에서는 무엇을 먹었고 어떤 옷을 입었고 어떤 특별한 생활을 했을까? 이것은 나로서는 각별히 들여다보고 싶은 분야였다. 사람이 사는 것이 다 비슷한데 이 전통의 명가, 12대의 부잣집이라면 얼마나 다양한 음식과 옷, 특별한 이야기가 있지 않을까. 사실 최염 선생님께 이런 것을 여쭈었을 때 최염 선생님도 적잖이 호기심을 내비치시면서 ‘그런 게 이야기가 될까?’ 하시면서 미심쩍어하셨다. 그러나 나에게는 그런 게 더 중요한 이야기였다.

앞 호에서 남천변으로 들어오던 나락 행렬에 대해 잠깐 이야기했다. 그 길이 최부자댁 앞 공터를 기점으로 지금의 월정교 앞으로 해서 계림을 지나 반월성과 첨성대, 박물관과 시내로도 통하는데 그 길 역시 곡식 섬을 실어 오던 소달구지들의 길이었을 것이다. 또 지금 주차장 자리로 쓰이는 최부자댁 앞 넓은 공터 역시 처음 이사를 오던 최기영(1768~1843) 공 때부터 있던 것이다. 최부자댁에는 800석짜리 곳간이 지금도 있고 경작지들의 분포에 따라 이조리, 울산 등에 이런 곳간이 7개 더 있었다. 나락을 분산해서 보관했던 것이다.

참고로 ‘만석의 곡식’이라는 말이 실제로 어느 정도인지 실감이 잘 나지 않을 것이다. 쉽게 말하면 쌀이 주식이던 시절 1만명이 일 년 동안 먹을 정도의 양식이라고 보면 된다. 요즘처럼 쌀을 덜 먹는 경우에는 2만명이 먹을 수 있을 것이다. 최국선 공 이후 최부자댁이 대대로 빈민구제와 과객 대접을 할 수 있었던 것도 이처럼 충분한 양의 양식이 뒷받침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거두는 쌀의 3분의 1은 가용, 3분의 1은 빈민구제, 1000석은 접빈객, 나머지는 치수와 공공사업으로

최염 선생님 말씀에 따르면 최부자댁의 1만석 중 3분의 1은 집안 대소가가 함께 쓰는 가용(家用)으로 사용했고 3분의 1은 빈민구제로 활용했다. 과객을 후히 대접했는데 오히려 그 부분은 비용이 적게 들어가 연간 1000석 정도 사용된 듯하다. 그 나머지는 보막이나 농로개설 등 치수사업이나 요즘의 공공사업에 사용했다.

그러나 위의 설명은 단순히 쌀에 대한 논의일 뿐, 최부자댁에는 다른 곡식은 말할 것도 없고 각 산지별로 온갖 진귀한 음식들이 끊임없이 들어왔을 것이다. 앞에서도 잠깐 언급했듯 최부자댁 소작농들은 대를 이어서 최부자댁 논밭을 관리해 왔고 그 규모도 어지간한 부농 못지않게 큰 곳들이었다. 그런 소작농들이 줄잡아 수백 집이었다. 그들은 경주와 울산, 영천 등 사방에 퍼져 살면서 철마다 자신들의 집 근처에서 나는 작물이나 해산물, 혹은 잘 말린 엽초(담배잎)나 특별한 먹거리들을 최부자댁으로 가져왔다. 이것은 마치 지방 관아에서 중앙조정에 공물을 보내는 것과 비슷했을 것이다. 다른 것은 국가공물과 달리 이게 강제로 규정되어 있지 않고 자발적으로 가지고 온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소작하는 입장에서 누군들 최부자댁에 인심을 얻고 싶지 않았을까?

최염 선생님 말씀에 따르면 소작 관계가 완전히 청산된지 7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예전에 소작하던 분들이 철마다 미역이며 생선, 산나물, 과일 등을 택배로 보내오고 있다고 한다. 하물며 실제로 지주와 소작농의 관계이던 그 시절에는 어떠했을까!

그래서 최부자댁 찬방에는 철마다 산해진미 온갖 음식 재료들이 떨어질 새가 없었다. 말린 전복이나 건어물은 말할 것도 없고 산나물이면 산나물, 해산물이면 해산물 부족할 게 없었다.

이런 진귀한 재료들은 대부분 제수용으로 썼고 동네에 퍼져 사는 친척들과 각 대를 이은 사돈댁, 또는 인사를 차리기 위한 여러 집안에 보내졌다. 귀한 손님들을 맞을 때 특별히 내놓은 음식으로도 사용되었을 것이다.

더구나 최부자댁 후원에는 가산으로 쌓아 올린 언덕 뒤로 ‘뒤솔밭’과 보비림이 있고 그 주변에는 수천 평의 밭이 펼쳐져 있어서 배추나 무, 혹은 음식에 필요한 각종 야채는 대부분 자급자족이 되었다. 그러니 최부자댁은 사시사철 산해진미를 먹지 않았을까? 다시 최염 선생님의 회고!

“우리 식구들이 평소 먹는 음식은 외부 사람들의 상상과 달리 굉장히 검소했어요. 그것은 대를 이어오며 호화와 사치를 경계한 가르침 때문이었지 싶어요. 식구들이 평소에 먹은 반찬은 일주일에 고깃국 한 번 올라오는 정도 이외에는 흔히 먹는 제철 생선에 채소류가 전부였어요”

그렇다면 최부자댁에 대대로 내려오는 전통적인 음식들은 어떤 것이 있었을까? 최부자댁 전통음식의 원형은 아무래도 사옹원 참봉을 지내셨던 최국선 공(1631~1681)의 영향이 컸다. 그 대표적인 것이 최부자댁 고유의 술, 법주다. 이 술은 최국선 공이 사옹원 참봉으로 봉직하던 시절에 마음먹고 그 비법을 배우고 익힌 후 낙향하자마자 담그기 시작한 술로 알려져 있다.

최부자댁 법주는 달고 농도가 진한 것이 특징, 서애 류성룡 선생 가문의 가양주로도 옮겨가

“할아버지는 다른 곳에는 도량이 넓으셨는데 유독 술에는 엄하셨어요!”

최부자댁 법주(法酒)는 최부자댁 며느리들이 가장 많이 신경을 썼던 품목이었다. 온갖 데 인자하고 말수가 적으셨던 문파 선생님이셨지만 유독 술에 대해서만큼은 깐깐하기 이를 데 없어 조금이라도 술맛이 이상하면 불호령을 치셨다고 한다. 그래서 술이 익을 무렵이면 최염 선생님의 할머니나 어머니는 술 항아리들 근처에서 떠나실 줄 몰랐고 조금이라도 시간을 놓칠새라 노심초사하셨다. 반면에 문파 선생님이 술맛을 보신 후 흡족해하시면 온갖 세상의 근심을 내려놓으신 듯 안도의 숨을 쉬기도 하셨단다.

“이 술은 당도가 진해 술 한 방울을 상에 흘려 놓으면 금방 굳어져서 손가락을 가져다 대면 찐득찐득하게 들러붙을 정도예요. 그렇다고 술이 특별히 달지도 않아... 우리집 안채 한쪽에는 날씨가 무더울 때가 아니면 언제나 술이 익고 있었지. 독이 하나만 있었던 것이 아니고 언제건 제때에 마실 수 있도록 독이 순서대로 가지런히 놓여 있었지. 술 거르는 날도 거의 일정한 간격을 두고 정해져 있었고. 우리 집 술은 당도가 강해서 다른 집 술은 거른 후 보름을 못 넘기고 시큼하게 변하는데 우리 집 술은 두어 달을 둬도 맛이 변하지 않지요!”

이 술은 지금도 최염 선생님 댁에서 빚고 있지만 대외적으로 알려지지는 않았다. 이에 비해 안동의 서애(西厓) 류성룡(1542~1607) 선생의 종가댁에서 가양주로 알려진 술은 요즘은 꽤 유명해진 편이다. 그런데 알고 보면 이 술 역시 최부자댁 가양주가 옮겨간 전통 최부잣집 술이다. 그 이유는 바로 최염 선생님의 누님 때문이다. 서애 종가 14대 종부로 시집간 누님이 최부자댁 술을 그대로 이어서 빚은 술이 지금은 서애 종가의 가양주로 알려진 것이다.

나는 이 술을 운 좋게도 직접 마셔 볼 수 있었다. 2015년 10월에 서애 선생 종가에서 제 15대 종손인 류창해 선생의 종손 취임식이 열렸다. 최염 선생님을 모시고 행사에 참석한 나는 뜻밖에 엄격하게 제한된 취임식 장면을 종손의 외삼촌이신 최염 선생님의 추천으로 촬영할 수 있는 특권도 얻었고 최염 선생님의 누님이신 14대 종부님과 겸상으로 밥도 먹는 영광을 누렸다. 여기에서 바로 그 유명한 최부자댁 법주를 맛볼 수 있었다. 은근히 달면서도 특별히 고아한 향기가 나는 것이 ‘신선주’가 따로 없었다. 여기서 최부자댁 전래의 육포도 함께 맛보고 몇 쪽 얻어오는 특권도 누렸는데 이 육포 이야기는 뒤에서 다시 하겠다.

최부자댁 전통 법주와 달리 경주 교촌에 가면 최부자댁 본가 옆에 ‘교동법주’라는 간판이 달려 있고 실제로 꽤 맛이 좋은 술이 있다. 그러나 이 술은 최부자댁 비법을 담은 술은 아니다. 이 술은 최부자댁 친척 며느리이신 ‘배영신’이란 분이 빚은 술로 그 댁의 고유한 비법을 담아 만든 술로 알려져 있다. 지금 배영신 할머니는 안 계시고 그 아드님과 며느리 되시는 분이 빚고 계시는데 이 술 역시 탁월한 향기와 맛이 일품이다. 교촌에 가면 가끔 사서 부모님과 나누어 마시는데 약간 비싸 보이는 술값이 전혀 아깝지 않을 만큼 맛있다.

마침 지난번 교촌에 갔을 때 요석궁 담에 ‘경주최부자댁 방식으로 저온숙성한 가양주 ‘대몽제’‘라는 광고를 보았다. 가주이신 최인환 회장님 역시 당당한 최부자댁 후손이니 비법을 알고 계실 법하다. 한 병 사서 맛보려고 했는데 그때 마침 문을 닫은 시간이라 구입하지 못해 아쉬웠다.

참고로 최부자댁 법주의 제조법은 최염 선생님의 사모님과 자부님께도 전승되어 특허청에 상표등록도 해놓았다. 최부자댁 법주에 대해 말씀을 들을 당시 최염 선생님께 왜 최부자댁 법주를 상품화하시지 않느냐고 여쭈어보았다.

“우리 집 술은 찹쌀로 만드는데 재료에서부터 달라서 교동법주 정도의 용량으로 술을 담근다면 한 병에 십만 원 훨씬 넘는 고가가 될 겁니다”

또 하나, 최부자댁과 관련된 것으로 소문난 유명한 술이 시중에서 살 수 있는 ‘경주법주’다. 이 술은 최부자댁과 전혀 관련 없고 ㈜금복주에서 경주에 공장을 두고 생산하는 대표적인 브랜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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