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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조정랑(吏曹正郞)

기사승인 2012.02.17  11:1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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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농협직원 이우영

   
 
 이조정랑 : 조선시대 중앙관청인 6조의 하나인 이조(吏曹)의 정5품의 당하참상관(堂下參上官)의 관직으로 현재의 직급으로는 행정안전부의 과장급에 불과한 자리이나 조선시대 피비린내 나는 300년간의 사색당쟁은 “이조정랑”의 자리싸움에서 시작되었다.
 선비들이 화를 입었다는 사화(士禍)는 성격이 같은 두 세력의 다툼이 아니고 지방의 개혁정치 세력인 사림파(士林派)와 중앙의 보수정치 세력인 훈구파(勳舊派)가 싸우는 과정에서 발생한 사건으로 이는 보수정치 세력이 개혁정치 세력을 탄압한 사건으로 현대식으로 말하면 야당(野黨)에 대한 여당(與黨)의 정치탄압으로 네 차례에 걸친 정치탄압인 사화(四禍)에도 불구하고 성리학이라는 확고한 정치이념과 공통의 스승을 모신 학통(學統)으로 연결된 사림파는 훈구파를 물리치고 집권당이 되었고 집권당이 된 후는 분열되기 시작하였다. 분열된 동기(動機)는 이조정랑의 자리싸움이 원인으로 현재의 행정안전부의 과장급 자리를 놓고 분당(分黨)까지 하게 된 것은 인사문제를 운용하는 조선시대의 특이한 제도와 방식 때문이었다. 조선의 관리 임용권은 삼정승(三政丞)이 있는 의정부(議政府)에 있지 않고 이조(吏曹)에 인사권이 있었으므로 이조의 수장(首長)인 이조판서는 삼정승보다 더 큰 권한을 행사할 수 있었다. 그러나 조선에서는 이조판서의 전횡(專橫)을 방지하기 위하여 삼사(三司)의 관리에 대한 추천권은 재상이나 판서가 아닌 이조정랑에게 주었고 그 이유는 삼사(사헌부. 사간원. 홍문관)가 지닌 업무의 특성 때문으로 이들을 청요직(淸要職)이라고 불렀다. 이름 그대로 청렴하고 중요한 직책이란 뜻이다. 삼사가 중요한 것은 이들 관청이 관료들의 비위를 감찰하고 탄핵하는 권한을 갖고 있었기 때문으로 오늘날의 언론기관. 감사원. 검찰청과 같은 막강한 부서로서 사정(司正)부서인 것이다. 이러한 부서의 인사권이 재상이나 이조판서에게 있으면 자기사람을 심어서 권력을 전횡할 수 있기 때문에 삼사의 인사권을 중간관료인 이조정랑에게 준 것이다.
쉽게 말해서 삼사의 관리들이 대신(大臣)들의 눈치를 보지 않고 마음대로 탄핵. 감찰활동을 하게함으로서 관리들의 부패를 방지하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정5품에 불과한 중간관료가 주위의 눈치를 보지 않고 막강한 권한을 행사하기 위해서는 지위의 보장이 있어야 했다. 즉, 권한을 소신껏 행사했다는 이유로 인사상의 불이익을 받지 않아야 이조정랑에게 권한을 준 본래의 취지를 살릴 수 있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삼사에 대한 인사권뿐 아니라 이조정랑에 대한 인사권도 대신들로부터 독립시켜야 했다.

 따라서 조선에서는 이임(移任)하는 이조정랑에게 후임(後任) 이조정랑의 추천권을 주어 대신들의 영향력에서 벗어나게 했다. 즉, 전임자에게 후임자의 추천권을 줌으로서 이조정랑에 대한 대신들의 영향력을 배제하려고 한 것이다. 이를 전랑자천제(銓郞自薦制)라고 한다. 전랑(銓郞)은 이조와 병조(兵曹)의 정5품 정랑(正郞)과 정6품 좌랑(佐郞)을 통틀어 일컫는 명칭으로 한번 정랑이 되면 특별한 사고가 없는 한 판서와 재상까지 승진할 수 있는 출세(出世)가 보장된 자리였다. 이조정랑이란 이처럼 명예(名譽)와 특전(特典)이 함께 주어지는 특이(特異)한 자리였으므로 젊은 선비치고 이 자리를 탐내지 않는 인물이 없었다. 정5품직에 불과한 이조정랑직이 사림이 분당되는 계기가 된 것은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이 자리를 놓고 싸움이 벌어진 것은 선조7년(1574년) 이조정랑으로 있던 “오건”이 다른 자리로 가면서 “김효원”을 후임으로 추천한 것이 발단이 되었다. 김효원은 퇴계 “이황”의 문인으로 병조좌랑과 지평을 역임한 명망이 높은 사대부로 많은 벼슬아치들이 그가 이조정랑이 되는 것을 당연히 여겼으나 반대하는 인물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심의겸” 이었다. 심의겸은 “사람들은 김효원을 고결한 선비로 알지만 고결한 선비이기는 커녕 척신(戚臣) 윤형원의 식객으로 있던 지조 없는 인물에 지나지 않는다”라고 하며 비난하였다.
 즉, 김효원은 외척 윤형원의 식객(食客)으로 청렴(淸廉)이나 지조(志操)와는 거리가 먼 사대부이므로 이조정랑의 자격이 없다는 것이다
 윤형원(명종의 외삼촌)은 명종의 어머니인 문정왕후의 동생으로 명종이 13세의 나이로 임금에 즉위하자 문정왕후 윤씨가 수렴청정(垂簾聽政)을 하게 되자 누이의 신임을 배경으로 정권을 농단했던 외척으로 사림(士林)을 학살(虐殺)했던 문정왕후는 조선왕조 전 기간에 걸쳐 사대부의 증오(憎惡)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이조정랑이 된 김효원은 그 자리에 있으면서 당대의 많은 명사들과 사귀어 자연히 하나의 세력을 형성하게 되었으며 심의겸이 자신을 반대한 감정을 가슴에 담아두고 있었는데 자신의 뒤를 이어 이조정랑의 물망에 오른 사람이 공교롭게도 심의겸의 아우 “심충겸”이었다. 김효원은 이때가 심의겸에게 복수(復讐)할 수 있는 기회라고 여기며 목소리를 높였다.
 “이조의 벼슬이 어찌 외척 집 물건이냐”
 이는 심충겸(명종의 처남)이 명종비인 인순왕후의 동생으로서 외척임을 빗댄 말이었다.

 이렇게 이조정랑 문제로 김효원과 심의겸이 싸우게 되자 당대의 많은 사대부들은 그 옳고 그름을 놓고 논쟁하게 되었다.
 대체로 신진(新進)사대부들은 김효원을 지지하였고 노장(老壯)사대부들은 심의겸을 지지하였다.
 김효원의 집이 서울 동쪽의 건천동에 있었기 때문에 김효원을 지지하던 사람들을 동인(東人)이라 불렀다. 또한 심의겸을 지지하던 사람들을 서인(西人)이라 불렀는데 심의겸의 집이 서울 서쪽의 정릉에 있었기 때문이다.
 이후 서인 “정철”이 세자 책봉문제로 실각하여 동인이 정권을 잡자 정철을 처벌하는 문제를 가지고 정철을 사형하자는 과격파가 북인(北人)으로 정철을 유배하자는 온건파가 남인(南人)으로 분열하고 이후 “송시열”을 지지하는 사람은 노론(老論)으로 “윤증”을 지지하는 세력은 소론(小論)으로 갈라지는 등 조선말에 외척세력에 의한 세도정치(勢道政治)가 탄생하기까지 수많은 당파와 세력으로 사분오열되어 약 300년 동안 중앙정치사에 중대한 영향을 끼쳤다.
 -사색당파(南人. 北人. 老論. 小論)의 분열도-
 동인-남인: 청남(淸南)과 탁남(濁南)으로 분열
 동인-북인: 대북(大北)과 소북(小北)으로 분열, 대북은 골북(骨北)과 육북(肉北)으로 분열
 서인-노론: 시파(時派)와 벽파(?派)로 분열
 서인-소론: 권력투쟁에 실패하여 소멸
 인사(人事)는 만사(萬事)임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역사(歷史)는 끝없이 계속되고 반복됩니다. 그것은 우리의 이성(理性)보다는 욕망(慾望)이 앞서가기 때문입니다.

고성미래신문 gofnews@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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