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선의 1등 공신은 거듭 태어나지 못한 李會昌 후보
기자는 11월22일부터 선거 전날인 12월18일까지 한나라당 李會昌 후보 민주당 盧武鉉 후보의 유세버스를 번갈아 타고 전국을 돌았다.
서너 대의 유세버스에 피곤한 몸을 싣고 두 후보를 수행 취재한 기자는 각각 100여 명. 신문과 방송, 신문의 사진기자와 TV 카메라기자, 5년 전 大選 유세버스에서는 볼 수 없었던 인터넷 신문기자들까지 동승했다.
기자들은 두 후보가 유세장에서 하루하루 쏟아내는 발언과 지역 공약을 그 자리에서 본사로 電送(전송)했다. 대규모 청중을 동원하는 옛 풍경은 사라졌지만, 유세장은 여전히 각 후보의 優劣(우열)과 지지자들의 열기를 단번에 느낄 수 있는, 살아 있는 선거현장이었다.
기자는 11월22일부터 선거 전날인 12월18일까지 한나라당 李會昌 후보 민주당 盧武鉉 후보의 유세버스를 번갈아 타고 전국을 돌았다.
서너 대의 유세버스에 피곤한 몸을 싣고 두 후보를 수행 취재한 기자는 각각 100여 명. 신문과 방송, 신문의 사진기자와 TV 카메라기자, 5년 전 大選 유세버스에서는 볼 수 없었던 인터넷 신문기자들까지 동승했다.
기자들은 두 후보가 유세장에서 하루하루 쏟아내는 발언과 지역 공약을 그 자리에서 본사로 電送(전송)했다. 대규모 청중을 동원하는 옛 풍경은 사라졌지만, 유세장은 여전히 각 후보의 優劣(우열)과 지지자들의 열기를 단번에 느낄 수 있는, 살아 있는 선거현장이었다.
끝내 부르지 못한 애창곡
「D-25」. 2002년 11월23일 오후 6시.
大田 중부大 강당. 기자가 한나라당 李會昌 후보의 유세버스를 타고 처음으로 도착한 곳이었다.
『李會昌 후보님의 18번이 해바라기의 「사랑으로」라고 합니다. 李후보님께 노래를 청하겠습니다』
힌 청년단체의 정례 모임이 끝난 후 식후 행사 사회를 맡은 코미디언 심현섭이 李會昌 후보를 단상으로 불러 올렸다. 李후보는 이 단체 회원 1000여 명을 상대로 30분 정도 강연을 하고 나서 壇下(단하)에 앉아 있었다. 노래를 못 하겠다며 李후보는 두 손을 내저었다.
『네, 여러분 李후보님이 열 곡을 부르겠다고 열 손가락을 다 펴셨습니다』
李후보가 단상에 올랐고, 30代 후반인 변호사 출신의 趙允璇(조윤선) 선대위 대변인이 뒤따랐다. 李후보 앞에는 노래방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노래 가사를 띄워 주는 텔레비전 모니터가 놓여 있었다.
『내가 살아가는 동안에』로 시작하는 「사랑으로」의 반주가 흘러나왔다. 음악은 흘러가고 마이크를 잡은 李후보는 이 노래를 단 한 소절도 소화하지 못했다. 어색한 시간이 길어지자 옆에 서 있던 趙允璇 대변인이 李후보의 마이크를 함께 잡고 노래를 대신 불렀다. 李후보는 손을 위로 들어 좌우로 흔드는 몸짓을 단상 위의 젊은이들과 함께 했다.
노래가 끝나자 코미디언 심현섭의 멘트가 이어졌다.
『네, 李후보님이 율동을 완벽하게 하셨습니다』
제대로 부르지도 못하는 노래를 자신의 애창곡이라고 얘기하고, 그래서 무대 위에서 어릿광대 노릇을 자초한 까닭은 뭘까?
딱해서 李후보를 수행하던 측근에게 물었다.
─李후보 애창곡이 정말 「사랑으로」 맞습니까.
『연습을 많이 하셨는데, 음정을 못 맞출 때가 있어요』
─그런 노래를 부른다고 李후보가 20代, 30代에게 점수를 땁니까? 대법관과 국무총리를 지낸 사람이 점퍼 입고 다닌다고 『그래, 당신 우리 같은 서민이다』고 하나요. 품위 있는 복장에 가곡을 부르면 20代, 30代가 싫어한다고 어디 조사된 게 있습니까.
『선거를 20일 남겨두고 그럼 어떻게 합니까. 지금까지 그 방향으로 밀고 온 걸…』
11월27일 대통령 후보 등록 후 언론에는 李후보의 애창곡이 「사랑으로」,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라고 소개됐다. 안치환이 부른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는 20代와 30代들도 소화해 내기 어려운 곡이다.
선거가 중반에 이를 때까지 李후보는 유세장의 청중들과 겉돌았다. 李후보를 젊고 활기차게 보이려고, 서민처럼 꾸미려고 만들어 낸 여러 장치들은 그를 더욱 어릿광대처럼 비치게 만들었다. 그럴수록 「20代, 30代에 다가가야 한다」, 「서민처럼 보여야 한다」는 李후보 참모들의 偏執症(편집증)은 심해지기만 했다.
경멸과 조롱의 대상이 된 李會昌
11월22일 오후 8시.
大田 대덕 연구 단지에 있는 KAIST(한국과학기술원)의 구내 식당에서 李會昌 후보는 대학원 학생들과 함께 저녁식사를 했다. 기자는 李후보와 조금 떨어진 식탁에 앉았다. 기자 옆에는 대학원생 네 명이 식사를 하고 있었다. 李후보가 왔다는 사실을 알게 된 한 대학원생이 불쾌감을 표시했다.
『야, 아들 둘 군대 안 보낸 사람 왔다』
한 대학원생이 『야, 우리 주변에도 군대 안 간 사람 많찮냐』며 친구를 만류했다.
李會昌 후보가 유세장에서 『제가 몸과 마음을 바쳐 이 나라를…』이라고 말할 때마다 청중들 속 어디에선가는 『지 아들 둘 군대도 안 보내 놓고…』라는 비아냥거림이 튀어나왔다.
정치 지도자는 두려움의 대상이 될지언정, 경멸과 조롱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된다. 민주당은 집요하게 李후보를 경멸과 조롱의 대상으로 만들었다. 「노사모」 회장인 명계남씨는 유세장에서 李후보를 향해 늘 이런 야유를 퍼부었다. 명씨는 「오아시스」 등의 영화를 만든 영화 제작자다.
<여러분 제가 이번 大選이 끝나면 12월20일부터 「가문의 몰락」이라는 영화를 만들려고 합니다. 남자 주인공을 아직 못 찾았습니다. 키는 179㎝, 몸무게는 45㎏이어야 합니다. 「살아 있는 미라」라는 별명을 갖고 있으면 더더욱 적격입니다.
군대 같은 데는 절대로 갔다 와서는 안됩니다. 반드시 결혼한 사람이어야 합니다. 애 낳기 석 달 전에 미국으로 마누라 데리고 가서 미국 아이를 만든 경력이 있어야 합니다. 한국에 가끔 들어올 때 세 가족이 104평짜리 빌라에서 묵어야 합니다. 할아버지가 친일파라는 얘기를 들으면 더욱 좋습니다. 여러분 제가 이번에 「가문의 몰락」을 찍어서, 그 동안 노사모한다고 돌아 다니면서 까먹은 돈을 벌충해야 합니다. 제발 남자 주인공 좀 찾아 주십시오>
李會昌의 발목을 잡은 惡性 이미지들
11월23일.
李후보의 지지율은 당시 후보단일화 논의를 진행하고 있던 盧武鉉, 鄭夢準의 지지율이 오르내리는 것과 상관없이 35%에 콱 처박혀 일어설 줄을 모르고 있었다. 「魔의 35% 벽」은 선거기간 실시된 여론조사에서 무너지지 않았다. 이유가 뭘까.
지난 5년 동안 李會昌이라는 정치 商品(상품)에는 惡性(악성) 이미지들이 고착됐다.
「두 아들은 모두 병역을 면제받았다」
「104평짜리 빌라 3채를 李후보 一家(일가)가 세를 얻어 살았다」
「병역을 면제받은 큰아들은 뚜렷한 수입원 없이 하와이에서 머물면서 딸을 낳아 원정출산 시비에 휘말렸다」
「병역을 면제받은 두 아들은 미국에서 살고 있다」
더 큰 문제점은 李후보 측이 이런 악성 이미지에 대한 대책을 마련하지 않은 채 大選戰(대선전)에 뛰어들었다는 사실이었다. 20代, 30代의 정치개혁 열망을 사로잡을 정책 이슈를 개발하지 못했다. 한나라당의 선거전은 李會昌의 정책과 人性을 알리기보다 金大中을 공격하는 폭로전으로 시작됐다.
『큰 폭로 한 방이면 盧武鉉은 끝난다』
兵風(병풍)에 맞서 싸워 온 金榮馹(김영일) 사무총장, 鄭亨根(정형근) 전략기획팀장, 李在五 金文洙 大選 기획위원들은 한나라당 안에서 이런 분위기를 주도했다. 그렇지만 한나라당은 폭로전을 통해 유권자들의 마음과 눈길을 金大中 정부의 失政으로 몰아가는 데 실패했다.
후보의 인물과 개성, 미래에 대한 비전이 부각되는 大選에서 李후보의 악성 이미지는 더욱 선명하게 유권자들에게 부각됐고, 李후보는 표를 끌어들일 흡인력을 상실했다.
한나라당의 두더쥐 잡기
11월23일 저녁.
李후보 일행은 光州에 머물고 있었다.
光州 시내의 한 술집에서 李會昌 캠프 사람들을 만났다.
화제는 盧武鉉·鄭夢準 두 사람이 전날인 11월22일 저녁 가졌던 후보단일화를 위한 토론에서, 누가 더 잘했느냐였다. 鄭후보가 공세적으로 잘했다는 쪽과 盧武鉉 후보가 기존 이미지와 딴판으로 부드럽게 잘 받아넘겼다는 의견이 엇갈렸다.
李후보 사람들은 『후보단일화가 과연 이뤄지겠느냐』며 회의적인 반응들이었다. 한나라당 미디어대책본부장인 金武星(김무성) 의원은 뒤늦게 술자리에 합류했다. 그는 「한국 갤럽」을 포함한 5개 주요 여론조사 기관이 후보단일화의 근거가 될 여론조사를 거부했다는 소식을 전해 주었다.
『설사 여론조사를 실시하더라도, 한쪽이 어떤 빌미로든 여론조사 결과를 받아들이지 않을 거요. 단일화가 되더라도 완전히 색깔이 다른 사람이 한 사람은 후보를 맡고 한 사람은 선거대책위원장을 맡아서 선거운동이 되겠습니까』
「盧武鉉, 鄭夢準 단일화는 이뤄지지 않는다, 되더라도 별 파괴력이 없을 것」이라는 게 이 자리에 모인 한나라당 사람들의 희망 섞인 관측이었다. 숙소로 돌아와 한나라당의 선거전략을 지휘하고 있는 李후보의 한 특보와 전화통화를 했다.
『兩者 구도로 가면 큰 일』이라며 그는 걱정이 많았다.
『우리는 3者구도로 가면 필승이라는 판단 아래 전략을 펴왔잖아요. 盧武鉉(지지율)이 조금 오르면 盧武鉉을 두들기고, 鄭夢準(지지율)이 올라가면 鄭夢準을 두들기고. 세게 패면 (지지율이) 죽어 버릴까봐 세게 패지를 못했어요. 盧후보와 관련된 여러 가지 (비리) 자료들을 수집해 왔는데, 盧후보 지지율이 너무 꺼져 버리면 鄭夢準에게 잡아 먹힐까봐 써먹지를 못했습니다. 선거가 20일밖에 안 남은 상황에서는 폭로전의 약발이 먹히질 않아요. 모든 게 정쟁화해 버리니까. 후보 단일화가 이뤄지면 후보의 개성과 인격, 모든 걸 걸고 眞劍승부를 해야 합니다. 이것 저것 눈치 보느라 鄭夢準, 盧武鉉 모두를 결정적으로 타격하지 못한 게 걱정돼요. 설마설마 하는데, 단일화된다면 우리로서는 정말 큰 일입니다』
후보단일화 협상에 참여하고 있는 金杏(김행) 「국민통합 21」 대변인의 목소리가 경쾌하게 전화선을 타고 들려 왔다.
『단일화되겠느냐구요. 되지, 왜 안 돼요? 안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이상한 것 아니에요. 3파전으로 가면 절대 못 이긴다는 게 뻔한데, 자기 죽을 길로 가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盧후보, 鄭후보는 3金이 아니에요. 두 사람 모두 50代로 젊은 사람이에요. 선선히 합의를 잘 하더라구요. 단일 후보가 결국 누가 되겠느냐고요? 그거야 두말할 것 없이 鄭후보죠』
朴智元 실장, 『이번 大選은 재미가 없다』
일요일인 11월24 낮.
북한산 등산을 마친 朴智元(박지원) 대통령 비서실장과 서울의 한 호텔에서 만났다. 점심식사를 하면서 한창 진행중인 盧武鉉, 鄭夢準 후보단일화, 4000억원 對北지원설 등에 대해 세 시간 이상 이야기를 나눴다.
朴실장은 대부분의 이야기에 「오프 더 레코드(非보도)」를 요청했다.
그는 3金이 무대에서 사라진 『이번 大選은 재미가 없다』고 했다. 『李會昌 후보쪽이나, 盧武鉉 후보 쪽이나 열심히 움직이질 않아요. 연습삼아 나온 것 같은 鄭夢準씨는 더 말할 것도 없고』
─大選 선거일이 코앞인데 두 후보진영에서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겠죠.
『안 그렇더라구요. 제가 며칠 전에 민주당 반장(신문 방송사의 민주당 취재팀장) 열여섯 명하고 저녁을 했어요. 한 명도 빠지지 않고 다 나왔습니다. 제가 깜짝 놀랐어요. 「大選이 벌써 시작했는데, 李會昌, 盧武鉉 후보 쪽에서 밥 먹자고 해서 당신들은 지금 정신이 없을 것 아니냐. 힘 다 빠진 朴智元이가 부르는데 어떻게 전부 나왔느냐」고 물었어요. 기자들이 「후보들 하고 한 번도 이런 자리가 없었다」고 해요』
─1997년 大選 때는 어땠습니까.
『후보는 물론이고 모시는 사람들까지 목숨 걸고 뛰었죠. 金大中 대통령께서 당선되신 날 제가 수첩을 한번 훑어 봤어요. 제가 원래 메모를 꼼꼼하게 하는 편이잖아요. 그날까지 1년 동안 일요일을 딱 두 번 쉬었어요. 金大中 대통령도 일요일을 딱 이틀 쉬었다는 얘기 아닙니까. 칠십 노인이 대통령 되겠다는 일념에 일년내내 새벽 6시부터 밤 12시까지 뛰었어요.
저는 「왜 金大中인가」를 설득하느라고, 새벽 2~3시까지 기자들하고 술을 마셨습니다. 그러고 새벽 5시까지 金大中 후보 댁으로 달려갔어요.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血便(혈변)이 나오더라구요. 李會昌 후보진영에서 金大中 후보의 선거운동을 벤치마킹했는데, 일정의 절반도 소화를 못 해냈다고 해요』
朴실장은 1997년 大選 선거일까지 6개월 동안 조선·동아·중앙일보에서 金大中 후보에 불리한 기사가 나오는 것을 막는 임무를 맡았다. 힘없는 야당 대통령후보의 홍보특보가 할 수 있는 일은 「정성으로 기자들을 감동시키는 일」뿐이었다.
『J일보 편집국장은 마감 때쯤 내가 편집국에 들어가면 눈길 한번 안 줬어요. 편집국에 들어가서 부장들, 副국장, 화백에게 인사하고, 편집국장 자리 바로 옆에 딱 40분간 앉아 있었다. 40분 지나면 「잘 부탁드립니다」 하고 나왔어요. J국장이 헤어질 때 하는 말이 「내일은 제발 오지 말라」예요. C일보 주필은 길 거리를 걷다가 돌멩이라도 걷어차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 아닙니까. 걸리면 뭐든지 조지고 시비를 걸잖아요. 그런 양반이 6개월을 매일 찾아가니까 「왔느냐」고 반갑게 아는 척을 해요』
1992년 12월 울산 태화강변에서 민자당 崔炯佑(최형우) 의원의 大選 찬조연설을 듣던 기자는 귀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여러분, 이 崔炯佑가 어제 오줌을 쌌습니다』
崔의원의 연설은 그렇게 시작했다.
『술 먹고 들어가서 자다가 오줌을 쌌어요. 50代인 제가 술 먹고 실수를 했습니다. 여러분 팔십이 다된 노인(국민당 鄭周永 후보)이 오줌 싸고 돌아다닌다는 얘기가 있습니다. 팔십 노인이 오줌 싸는 건 당연한 거 아닙니까』
보스를 위해 감옥에 가는 것을 마다하지 않던 3金의 家臣(가신)들은 激烈(격렬)했다. 상대후보 마타도어 정도는 크게 부담스러운 일도 아니었다.
『우리 영새미』, 『우리 다이쭈』, 『우리 종필이』가 사라진 유세장에서는 청중들에게서도 激情(격정)을 찾아보기 어려웠다. 30代가 주축인 「노사모」가 유세현장에 몰려나와 盧武鉉 후보를 열성적으로 응원했지만, 金泳三, 金大中, 金鍾泌에 대한 지역 유권자들의 뜨거움에는 못 미쳤다.
정서적 일체감, 정치적 충성심을 느끼지 않는 두 후보를 앞에 놓고 유권자들의 마음은 오락가락했다. 정치 巨人(거인)들이 사라진 첫 번째 大選은 20代와 30代를 「지역」이라는 3金정치의 족쇄에서 풀어 놓았다.
그래서 이번 大選에서 盧武鉉, 李會昌 후보의 지지율 격차는 크게 출렁거렸다. 하루 사이에 3%, 100만 명 가까운 사람이 마음을 바꿨다는 엄청난 여론조사 결과도 나왔다. 후보를 정하지 못한 浮動層(부동층)이 선거 막바지까지 30%에 달했다.
20代와 30代의 콘크리트 같은 盧武鉉 지지는 『선거판이 지역구도로 가든, 보혁구도로 가든 우리가 무조건 승리』라는 李會昌 후보의 계산을 헝클어 버렸다. 20代와 30代의 지지는 盧武鉉을 새로운 대통령으로 당선시키는 가장 중요한 동력이었다.
깨진 3파전의 꿈
11월25일 자정.
鄭夢準, 盧武鉉 두 사람은 후보 단일화에 합의했다. 단일 후보는 민주당의 盧武鉉 후보. 大選 선거판과 구도를 잘 짜서, 만만한 후보 두 명을 끝까지 데리고 가면서 싸움에서 이기겠다던 李會昌 후보의 선거전략은 무산됐다. 후보 단일화 직후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盧후보는 李후보를 6.5% 포인트 차이로 앞섰다.
李후보 진영은 왜 마지막 순간까지 단일화가 되지 않을 것으로, 되더라도 별 효과가 없을 것이라고 誤判(오판)했을까. 후보단일화를 성사시킨 「국민 통합 21」의 대변인 金杏씨의 얘기다.
『젊은 기자들까지 3金 시대의 시각을 버리지 않더라구요. 하나같이 「단일화는 절대 안 될 거다」는 거예요. 단일화하고 나니까 기자들이 「金杏이가 되지도 않는 게임에 鄭夢準을 밀어 넣어 죽여버렸다」고 하대요. 그렇지만 盧武鉉씨나 鄭夢準씨는 金씨가 아니잖아요. 타결 일보 직전에 鄭후보의 결심을 받으려고 전화를 했더니 보좌관이 「기도하러 들어갔다. 전화를 연결할 수 없다」고 해요.
저쪽 대표인 민주당의 신계륜 의원은 기획본부장인 李海瓚 의원과 전화통화를 했어요. 李의원이 「야, 너, 盧후보 팔아 먹으려고 작정했냐. 당장 때려치우고 나와」라고 고함을 치는 게 옆에서 들렸어요. 鄭후보가 단일 후보가 될 가능성은 사실 「50 對 50」이었어요. 권노갑씨나 崔炯佑씨가 협상대표였다면 보스가 단 1%라도 질 가능성이 있는 판으로 보스를 끌고 갈 수 있었겠어요. 하지만 신계륜 의원이나 저는 권노갑, 崔炯佑가 아니잖아요. 「3金 시대」가 끝났다는 걸 언론도, 정치판에 있는 사람도 실감을 못 하더라구요』
11월 26일.
「北風」과 「美風」이 정면 충돌했다. 북한은 개성을 신의주에 이어 경제특구로 추가 지정했고, 경의선과 경의선 철도연결을 위해 지뢰 제거작업을 재개하겠다고 선언했다. 이날 미국의 부시 대통령은 허바드 주한 미국대사를 통해 의정부 여중생 사망사고에 대해 사과의 뜻을 표시했다.
『北核 문제에도 불구하고, 남북의 대화통로를 열어 놓아야 북한을 설득할 수 있다』는 盧후보의 주장은 힘을 얻었다. 부시 대통령은 12월10일 방한한 아미티지 美 국무부 副장관을 통해 다시 사과의 뜻을 밝혔다. 하지만 사회 전반의 감성적인 反美는 수그러들지 않고 위력을 발휘했다.
盧후보는 SOFA 개정을 요구하는 시민단체의 서명요청에 응하지 않았다. 그는 『대통령이 될 사람으로서 시민단체의 모임에 참여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며 시위 동참 요구를 거부했다. 치솟는 反美정서로 표는 표대로 챙기고, 左(좌)에서 벗어나 中道(중도)적 위치로 이동하는 듯한 모습을 보임으로써 중도 보수, 나아가 보수진영을 안심시키는 제스처를 취했다.
『盧武鉉이 당선되면 盧武鉉 정권』
11월29일 오후 2시30분.
포항 죽도 시장. 임종석, 추미애 의원이 찬조연설을 한 후 盧武鉉 후보가 트럭을 개조한 유세버스에 올랐다. 경호원을 포함한 민주당 사람들이 40여 명을 넘겼고, 인파는 많이 잡아야 100여 명 정도였다.
盧후보는 20여 명의 사진기자 텔레비전 카메라 기자를 향해 동전이 담긴 돼지 저금통과 꽃다발을 흔들었다.
盧후보는 이웃 사람들에게 이야기를 건네는 투로 연설을 시작했다. 미국의 大選후보들이 전국을 돌며 벌이는 「마을 집회(town meeting)」를 연상시켰다. 『국민 여러분』으로 시작하는 3金과 전혀 다른 스타일이다. 그 점에서 李會昌 후보의 연설은 「3金型」에 가깝다.
한나라당은 선거 초반 盧武鉉을 철저하게 무시하는 선거전략을 채택했다. 「反金大中」의 거센 파도를 일으켜, 盧武鉉을 침몰시키겠다는 전략이었다. 선거 구호는 『盧武鉉은 金大中의 양자』였다.
盧후보는 포항 죽도시장에서 『盧武鉉이 당선되면 金大中 정권이 아니라 盧武鉉 정권입니다』고 목청을 높였다. 盧후보는 선거전에서 金大中과의 고리를 철저히 차단했다.
신문광고 텔레비전 광고에서 「민주당」이라는 세 글자를 빼냈다. 「국민 후보 盧武鉉」이 그의 공식 직함이 됐다. 盧후보의 선거유세단에는 金大中이나 동교동 냄새를 느낄 수 있는 사람은 모두 배제했다.
단골 찬조연사는 정동영, 추미애, 임종석이었고, 전국구인 許雲那 의원이 처음부터 끝까지 동행했다. 盧후보는 영남지역을 돌며 『나는 金大中의 양자가 아니다』고 선언했다.
<여러분 제가 민주당 대통령 후보입니다. 그런데 부산과 영남에서 안 알아 줍니다. 「사람은 좋은데 당이 나쁘다」고 해요. 李會昌씨도 덩달아서, 후보는 난데 金大中대통령만 계속 공격합니다. 후보는 저잖아요. 제가 대통령이 되면 盧武鉉 정권입니다. 내가 대통령이 되면 그건 호남 정권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영남 대통령이라고도 하지 않겠습니다. 전국을 통합하는 통합 대통령이 되는 겁니다>
『부패를 청산할 사람은 李會昌이 아니라 나다』
11월29일 오후 5시.
울산 롯데 백화점 앞 거리유세에서 盧후보는 『한나라당이 부패정권 심판을 얘기하는데, 李會昌씨가 부패청산을 얘기할 자격이 있느냐. 부패를 청산할 수 있는 사람은 나밖에 없다』고 외쳤다. 盧후보는 이번 大選을 「서민 對 특권·귀족 계층의 싸움」으로 규정하면서, 정치혁명과 낡은 정치 청산을 강조했다.
레이건 대통령의 副비서실장이었던 마이클 데버는 『대통령이 자신의 의사를 국민에게 전달하는 뛰어난 전략 中 하나는 명확하고 간결한 메시지의 반복』이라고 했다.
盧후보는 처음부터 끝까지 「새 정치」, 「낡은 정치 청산」을 반복함으로써 유권자의 마음을 파고드는 데 성공했다. 그는 민주당의 국민참여를 통한 大選후보 선출. 여론조사를 통한 후보단일화가 「새 정치」의 징표라고 끊임없이 주장했다.
「낡은 정치 청산」이라는 盧후보의 구호는 한나라당 李會昌 후보의 「부패 정권 청산」을 압도했다.
<李會昌씨는 아들 둘을 군대에 안 보냈습니다. 지난 大選 때는 국세청을 동원해서 기업들 목을 졸라서 166억원을 거둬서 썼습니다. 지난 총선 때는 안기부 예산, 나랏돈을 수천억원 가져다가 한나라당의 선거를 치렀습니다. 그때 李후보가 선거대책위원장이었습니다. 이런 사람이 어떻게 부패를 청산한단 말입니까>
11월30일.
大選 선거운동 시작 후 두 번째로 자신의 정치적 고향인 부산을 찾은 盧후보는 街頭(가두) 유세에서 『부산이 결심하면 끝장난다』, 『東南風(동남풍)을 일으켜달라』고 호소했다.
盧후보는 자신을 『부산의 아들』, 『절벽에서 떨어졌지만 살아 돌아온 사자 새끼』라고 자부했다.
<충청도는 행정수도 옮긴다고 밀어 준다고 합디다. 호남은 盧武鉉이를 다 지지합니다. 이제 金大中 시대는 끝났습니다. 부산 사람이 호남·충청·서울에서 다 지지받는 것은 좋은 일 아닙니까. 나보고 자꾸 金大中 대통령 양자라고 하는데, 양자 갔다고 本家(본가) 저버리는 사람 봤습니까. 고마 이번에 한 번만 도와 주이소>
盧武鉉 후보의 언론특보인 張東勳(장동훈)씨는 서울에서 계속되고 있는 한나라당의 「국정원 도청 폭로」에 대해 『지금까지 아무런 영향이 없는 것으로 조사됐다』며 자신감을 보였다.
盧武鉉의 「부산 경남 遠征(원정)」에 맞서 한나라당 李會昌 총재도 12월1일 大選 선거운동 시작 후 두 번째로 부산을 찾았다.
崔秉烈 선대위 공동의장과 柳興洙(유흥수) 부산 시지부장등 부산지역 의원들도 하루 종일 가두 유세를 통해 盧武鉉 후보를 공격했다. 『盧武鉉은 金大中의 후계자다』 『부패정권이 내세운 후보를 심판하자』는 공격이 主流였다.
<金大中씨는 민주당 후보가 마치 現 정부를 계승하는 사람이 아닌 듯 가장하고 있습니다. 이게 무슨 속임수입니까. 당의 후보는 대의원과 당원들이 뽑는 겁니다. 민주당은 자기 黨 후보를 대한민국 사람들이 뽑은 걸로 속임수를 썼습니다. 마지막 속임수가 후보단일화입니다. 서민 노동자의 후보가 어떻게 재벌 후보와 단일화를 합니까. 썩어 빠진 정권의 후보가 아닌 듯 속임수를 쓰는 데 절대 속아서는 안됩니다>(洪思德 前 국회 부의장)
<金大中 정부는 현대에 돈을 퍼주고, 現代는 북한에 퍼주고, 빵꾸(펑크)난 돈은 공적자금으로 메웠습니다. 그 현대의 사람과 민주당과 한덩어리가 돼서 정권을 잡으면, 金大中 정권의 부패는 어떻게 밝히겠습니까. 부산 사람들은 이 부도덕한 정권을 심판해야 합니다>(李在五 의원)
12월1일.
이날 한국갤럽과 조선일보의 여론조사에서 李會昌 對 盧武鉉의 지지율은 36.9% 對 43.2%로 나타났다. 지지율 차이는 6.3%다. 후보단일화가 이뤄진 11월25일 조사에서 두 사람 간의 지지율 격차는 6.5% 였다. 1주일 동안 지지율 격차에 의미 있는 변화가 발생하지 않은 것이다.
두 사람이 1차 대회전을 벌인 부산지역에서 李會昌 후보의 지지율은 46.9%, 盧武鉉 후보의 지지율은 39.6%로 조사됐다.
12월2일 오전 9시
김해공항. 李會昌 후보는 김해공항 귀빈실에서 국정원의 도청을 공격하는 긴급 기자회견을 가졌다. 「국정원 도청 폭로」가 탄력을 받지 않자, 李후보가 직접 나서서 기자회견을 자청한 것이다.
다음날 아침 조선·동아·중앙 등 주요 신문이 일면 톱 기사로 다뤘지만 유권자들에게 큰 감흥을 주지 못했다. 이런 사실은 여론조사에서 확인됐다.
정치혁명은 이미 시작됐다
李會昌, 盧武鉉 두 후보의 부산 攻防(공방)을 지켜보면서, 기자는 「한국의 정치혁명이 이미 시작됐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한국 정치는 절망』이라고 모두가 얘기해 왔지만, 기자는 한국 정치의 희망이 싹트고 있는 것을 보았다.
무엇보다 돈 선거, 조직 선거가 선거현장에서 사라지고 있었다. 釜山 晉州 馬山의 큰 길 모퉁이에서 지지 후보 피켓을 들고 지나가는 차량을 향해 고개를 꾸벅 꾸벅 허리를 굽히는 「아주머니 부대」는 舊시대의 유물처럼 느껴졌다.
한나라당 부산지역 국회의원 10여 명이 모두 출동한 거리유세의 청중은 100명을 넘기지 않았다. 의원들이 자신의 지역구에서 동원한 婦女(부녀) 당원들이 청중의 主를 이뤘다. 이들이 하루 10여 곳에서 거리유세를 한다고 하더라도, 한나라당의 부산 국회의원들이 선거운동 기간 동안 만날 수 있는 사람은 2만여 명에 불과하다는 계산이 된다.
세몰이도 끝났다.
한나라당 李會昌 후보는 「盧風」이 가라앉지 않자, 현역 의원들과 지구당 위원장을 전국으로 내려 보냈다. 하지만 12월6일 현역 의원들이 지역에 내려가 돈을 풀고, 그 돈으로 분위기를 장악하는 선거는 한계가 분명히 드러났다. 한 지구당에 2억~3억원씩을 내려 보낼 돈이 없기 때문이다.
한나라당 부산시지부 尹泰慶(윤태경) 사무 부처장은 『보스가 큰 돈을 모으고, 그 돈을 풀어서 조직을 장악하는 3金型 정치는 이미 끝났다』며 『이번 大選은 새로운 정치로 가는 문을 연 선거로 평가될 것』이라고 말했다.
尹부처장은 『3金씨는 유권자들과 함께 해 온 추억이 있는 사람들』이라며 『「내 지역 출신이 아니라도 굳이 상관없다」는 생각이 젊은 층을 중심으로 퍼져가고 있고, 이런 추세가 大選에 엄청난 영향을 줄 것 같다』고 했다. 그는 『정치권에서 늘 얘기돼 온 중앙당과 지구당 폐지가 정치권의 협상과 결정이 아니라 「인터넷 혁명」에 의해 이뤄질 날이 멀지 않았다』고 내다봤다.
『지금까지 지구당 위원장들은 2000~3000명의 조직을 관리해 왔다. 집권당이라고 해도 그 사람들에 줄 반대급부가 제한돼 있다. 이걸 자발적인 지원자 그룹으로 전환시키지 못하는 정치인들은 도태될 것이 분명하다. 돈 주고 돌릴 조직이 아니라면, 국회의원 회관에 여직원 하나두고 이메일 보내서 언제 어디서 모이자고 연락을 하면 된다. 돈 들여서 청년부장, 여성부장, 조직부장을 둬야 할 이유가 없다』
盧후보의 유세장에는 인터넷으로 연락을 취해 달려 온 30代 회사원들이 주축을 이뤘고, 李후보 유세장에는 국회의원과 지구당 위원장들이 동원한 40代, 50代 아주머니들이 많이 눈에 띄었다. 그런 관점에서 본다면 한나라당은 시대변화를 따라가지 못하는 「문화지체」 현상을 보였고, 민주당은 시대의 흐름을 따라가는 조직이었다.
『200만 명을 굶겨 죽인 지도자가 惡이 아니면 善이란 말인가』
12월5일 오후 12:00~14:00.
기자는 주한 미국 대사관의 정치분야 담당관 등 직원들과 대사관 주변의 한 중국 음식점에서 점심을 함께 했다. 기자는 11월26일에도 미국 대사관 사람들을 만나 치솟는 反美 감정과 「大選 이후」의 韓美 공조에 대한 미국 측의 심각한 우려를 들었다.
大選 국면에서 미국 대사관 사람들이 한국 언론과 이렇게 활발하게 접촉한다는 사실은 그만큼 그들의 걱정이 크다는 것을 보여주는 반증이다. 2003년 초로 예상되는 북한 核시설에 대한 IAEA의 사찰, 우라늄 농축을 통한 북한의 핵개발 저지를 위해, 미국은 동맹국인 한국의 적극적인 협력이 필요한 입장이다. 韓美 군사동맹의 강화가 아니라, 韓美 충돌로 가는 大選정국의 정세가 이들은 못내 믿기지 않는 표정이었다.
「盧武鉉 정부」의 등장 가능성에 불안감을 감추지 못했다.
의정부 여중생 사망 사건에 관한 미국측의 상세한 설명이 있었다. 궁금한 게 많은 것은 미국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기자에게 질문을 쏟아 놓았다.
─(美 대사관 관계자) 북한이 플루토늄 核폭탄에 이어 우라늄 농축으로 核개발을 하고 있는데 한국 사람들은 왜 두려워하지 않나.
『한국 사람들은 金正日보다 부시를 걱정한다』
─왜 그런가.
『북한 核을 제거하기 위해 한반도를 전쟁으로 몰아넣지 않겠느냐는 생각이다』
─그러면 한국 사람들은 북한이 核폭탄을 보유해도 좋다는 건가.
『보유하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건 미국의 문제지, 우리의 문제가 아니라고 여기는 분위기다』
─북한의 核폭탄이 한국인들을 겨냥한 것이 아니란 말인가.
『설마 우리를 향해 쏘겠느냐고 막연히 믿고 있다』
─한국전쟁을 한 지 얼마나 지났다고 그런 환상을 갖고 있나. 金正日이 어느 날 갑자기 核폭탄을 내놓고 평화를 선택하겠나.
『많은 한국 사람들이 북한하고 그럭저럭 끌고가다 보면(muddling through) 무슨 수가 나오지 않겠느냐고 본다』
─反美를 외치는 사람들이 원하는 대로 주한미군이 물러난다고 하자. 한국인들은 그 이후 한반도에서 어떤 통일이 이뤄질 것이라고 생각하나. 북한이 원하는 방식으로 통일이 이뤄지기를 원하는 건가.
『反美를 외치는 사람들 가운데 그런 사람들이 일부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런 생각이 없이, 감성적으로 휩쓸리고 있다』
─부시 대통령이 「惡의 축」 발언을 하자, 여당(민주당) 사람들은 부시 대통령을 「惡의 화신(embodiment of evil)」이라고 불렀다. 200만 명의 주민을 굶겨 죽인 지도자가 惡이 아니면, 善이라는 말인가.
『미국을 남북한 관계의 진전과 대화의 장애물로 보는 시각이 漸增(점증)하는 추세다. 金大中 정부의 일방적인 對北 유화정책이 이런 분위기를 강화시켜 왔다』
깨춤을 추는 李會昌의 선거유세
12월7일 오후 4시.
서울 동대문 斗山(두산) 타워 앞 광장. 李會昌 후보의 가두연설을 듣기 위해 기다리는 20여 명의 외신기자들이 눈에 띄었다. 李후보 측은 이 연설회가 끝난 뒤 외신기자 간담회를 갖겠다며 이들을 초청했다.
유세차량 위에서는 머리를 노란색으로 물들인 유명 코미디언이 「왜 李會昌이 대통령이 되어야 하는지」를 큰 목소리로 떠들고 있었다. 한국 말에 능통한 30代 후반의 일본 유력 언론의 특파원은 『저 사람 도대체 무슨 얘기를 하고 있는 겁니까』라며 한심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李會昌 盧武鉉 후보의 연설회장을 여러 곳 둘러봤다는 그는 『李會昌 후보 연설회장과 盧武鉉 후보 연설회장은 뭔가 좀 다른 것 같다』고 했다.
─뭐가 다른 것 같습니까.
『글쎄요. 딱 뭐라 잘라 말하기는 힘들고요. 한국 말로 이걸 어떻게 꼭 찝어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李會昌 후보 연설회장은 어수선하고, 盧武鉉 후보 연설회장은 차분하다는 그런 차이 아닌가요.
『예, 바로 그거예요. 저 코미디언이 뭐라고 떠드는데 머리에 남는 게 하나도 없잖아요. 그냥 아무렇게나 떠들어요. 盧武鉉 후보가 연설하기 전에 찬조 연설하는 명계남씨나 문성근씨 얘기는 가슴에 와 닿는 게 있어요. 盧후보 연설회장에 모인 사람들은 盧武鉉 후보의 얘기에 귀를 기울여요. 그리고 그 사람들 사이에 공감하는 뭔가, 이념적 동질성이 있어요. 李會昌씨 연설회장은 시장 바닥 같아요. 李會昌씨가 무슨 메시지를 던지는지도 잘 모르겠고요』
그는 盧武鉉씨의 지지율이 李會昌 후보를 앞서 있다는 사실에 놀라움을 표시했다. 그가 기자에게 거꾸로 묻기 시작했다.
─(日 특파원) 저는 한국 사람들을 이해하기가 정말 힘들어요.
『뭐가 이해가 안 된다는 말입니까』
─북한 核문제를 쉽게 풀 수 있다고 믿는 거죠. 그건 幻想(환상)입니다. 金大中 대통령이 북한의 核개발은 미국과 불가침 협정을 체결하기 위한 「빅딜用」이라고 얘기하잖아요. 그러면 얼마나 좋겠어요. 만에 하나 「빅딜用」이 아니고 남한을 협박하고, 굴복시키기 위한 거면 어떡할 겁니까?
『한국인들이 왜 그렇게 북한의 核위협에 무감각하다고 생각합니까』
─1993년에 核위기가 발생했을 때 한국 사람들이 「북한의 核폭탄은 남쪽에 쓰려는 게 아니다」고 했잖아요.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 저는 정말 모르겠어요.
『지금 한국 사회에 번지는 反美 분위기는 李會昌, 盧武鉉 두 후보 중에 어느 쪽에 유리할까요』
─물론 盧후보죠. 盧武鉉은 민족 자주를 주장하고, 李會昌은 親美다, 그런 분위기가 한국 사회에 있잖아요.
『그럼 당신은 李會昌 후보가 되는 게 2003년 초부터 시작될 북한 核위기 해결에 도움이 될 거라는 생각입니까』
─그래요. 다음 대통령은 북한을 변화시키고,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이 돼야 하는 것 아닙니까. 金大中 대통령처럼 「북한문제는 무조건 대화로 해결하고, 대화가 안되면 다시 대화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대통령이 다음 정권을 맡으면 북한 核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요.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를 最惡의 가두연설
마침 李후보의 도착을 알리는 노래가 귀청을 때렸다. 노래는 「젊은 그대」였다. 李후보의 유세장에서 단골로 나오는 노래다. 사회를 보는 젊은 코미디언과 李會昌 후보가 사진을 찍을 때면 늘 뒤에 서서 「屛風(병풍)」 역할을 하는 젊은 국회의원들이 음악에 맞춰 몸을 흔들어댔다.
젊은이들에게 다가서겠다는 李후보 진영의 몸부림은 처절했지만, 40代, 50代가 주축인 청중들의 분위기와는 어울리지 않았다.
李후보는 채 5분이 안 되는 짧은 연설을 했다.
<이 李會昌이가 대통령이 되면 세계 속에 우뚝 선 세계 10위의 경제강국을 만들겠습니다. 직장이 없는 젊은이, 가장들이 일자리를 찾을 수 있는 강한 대한민국을 만들겠습니다>
<저는 SOFA 개정을 요구합니다. 이 李會昌이가 대통령이 되면 당당하게 어느 누구 어느 나라와도 맞서서, 이 나라의 안녕과 안전을 위해 할 소리를 하는 강력한 대통령이 되겠습니다>
李후보는 이날 저녁 참가하겠다고 발표했던 의정부 여중생 사망사건 규탄 촛불시위에 참석하지 않기로 왜 결정을 번복했는지 설명하지 않았다. 우리 사회를 휩쓸고 있는 「反美 감정」에 대한 자신의 입장 표명도 없었다.
연설은 건조하고, 알맹이가 없었다.
12월7일 오후 5시.
동대문에 이어 서울 대학로 마로니에 공원에서 李會昌 후보의 가두유세가 열렸다. 또 다른 유명 코미디언이 사회를 맡은 이곳 연설은 이번 大選에서 最惡(최악)의 가두연설로 꼽힐 만한 수준이었다.
『춤을 추세요, 춤을』
李후보가 한 문장을 얘기하고 날 때마다, 이 코미디언은 목청을 높이며 『나라다운 나라를 만들 李會昌 후보를 청와대로 보냅시다』, 『李會昌, 대통령』을 외쳤다. 李후보의 연설은 코미디언의 외침과 뒤섞여 연설이 아니라 구호 제창으로 들렸다.
코미디언의 연설회에 李후보가 찬조 연사로 나온 것인지, 李후보 연설회에 코미디언이 찬조연사로 온 것인지 알 수 없는, 한 편의 笑劇(소극)이었다. 李후보 뒤로 죽 늘어서 있던 김영선, 김영춘 의원 같은 젊은 국회의원들은 李후보의 연설을 토막토막 끊어, 엉망으로 만들어 버리는 코미디언을 제지하지 않았다.
코미디언의 연설 같은 추임새는 한참 동안 계속됐다. 치솟는 反美 감정, SOFA 개정과 관련한 얘기가 나오지 않을까 귀를 기울였으나, 李후보의 연설은 그걸로 끝이었다.
李후보의 연설이 끝나자 「젊은 그대」가 다시 쾅쾅 울려 나오고 젊은 국회의원들은 코미디언들과 함께 정신없이 몸을 흔들어댔다. 李후보는 그들과 손을 맞잡고 율동을 같이 했다.
옆에 있던 한 보좌관은 『연설 끝나면 부지런히 춤을 추세요. 춤 한번 잘추면 100만 표입니다』고 李후보에게 소리쳤다.
한나라당의 전략을 수립하는 사람들은 오래 전부터 두 가지 迷信(미신)에 빠져 있었다. 어떻게 해서든 李會昌 후보를 서민과 젊은이들에게 영합하는 상품으로 포장해야 한다는 것이이 하나고, 다른 하나는 「이념과 이데올로기를 얘기하면 20代, 30代 표가 달아난다」는 것이었다.
이런 편집증적인 노력에도 불구하고, 20代와 30代의 표가 盧武鉉 쪽으로 집결한다는 소식에 한나라당 사람들은 恐慌 상태에 빠져들었다. 그래서 젊은이들에게 인기 있는 코미디언들을 불러오고, 유세장은 더욱 소란스러워졌다.
왜 李會昌씨는 『어이 고만해라. 정신 산란하다. 굿판 걷어라. 이기든 지든 내 꿈과 정책을 국민들에게 얘기나 해야겠다』고 못 하는 걸까? 왜 李會昌씨는 참모들에게 『당신들은 이런 정신없는 유세판이 대법관을 지낸 나한테 어울린다고 생각하느냐. 생긴 대로 가자』고 야단치지 못하는 걸까? 딱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청중의 마음을 장악하는 盧武鉉의 연설
盧武鉉 후보의 11월29일 경북 浦項 죽도시장 가두연설은 초반에 청중들의 호응이 신통치 않았다. 盧후보가 연설을 시작하자 노사모 회원들은 분위기를 살리려고 『盧武鉉, 대통령』을 連呼(연호)했다. 썰렁한 연설장 분위기와 어울리지 않자, 盧후보는 연호를 곧바로 중단시켰다.
『여러분, 제가 우리 노사모 회원들 극성 때문에 죽겠어요. 노사모 회원 여러분, 오늘 이곳에 오신 분들은 조용히 제 얘기를 듣고 싶어하시는 것 같네요. 그렇게 해 주실 수 있겠죠』
죽도시장 再개발 이야기를 주제로 한 盧후보의 연설이 10분쯤 이어지자 냉담했던 청중들은 간간이 박수를 보냈다.
『우리 아들 곧 장가 보내야 하는데 지금 제가 전세집 마련해 줄 돈이 없습니다. 전세값 잡겠습니다. 그리고 우리 아들이 집 살 때까지는 집값도 확실하게 잡겠습니다』
소박한 이야기에 환호와 폭소가 터져 나왔다. 그렇게 盧후보는 청중의 마음과 분위기를 장악했다.
12월7일 오후 4시.
李會昌 후보가 마로니에 공원에서 춤을 추는 동안, 盧후보는 대구 서문시장 거리유세에서 「효순양, 미선양 사망사건」에 대해 자신의 입장을 상세히 설명했다.
<오늘 저녁 6시에 전국에서 많은 시민들이 효순양, 미선양의 죽음을 애도하는 촛불시위를 합니다. 저도 이 시위에 참여하거나 적어도 방문이라도 해서 격려라도 해야 하지 않나 고심을 많이 했습니다>
<제가 단순한 시민이나 시민단체 간부, 정당의 대표라면 부담없이 쉽게 말할 수도 있을 겁니다. 그러나 얼마 있지 않아서 대통령이 될지 모르는 사람의 말과 행동은 대통령만큼 무게가 있어야 합니다. 대통령 후보의 행동은 대통령과 같이 외교관계에 책임 있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시위에 참여하지 못한 데 대해 부끄럽게 생각하고 사과드립니다>
<제가 대통령이 되면 제일 먼저 불평등한 韓美행정협정을 고치겠습니다. 남북문제, 북한 核문제 때문에 빠른 시일 안에 미국 대통령을 만나야 할 겁니다. 만나서 국민의 뜻을 가감없이 전하겠습니다. 소파를 개정해야 한다는 우리 국민들의 마음을 전하겠습니다. 이를 개정해야 韓美관계가 돈독해진다는 것을 역설하고 협정을 개정하겠습니다>
도올 김용옥, 『李會昌의 삶의 역정과 유세현장에 괴리가 있다』
12월7일.
李會昌 후보의 서울 유세장에는 중국 옷을 입은 도올 김용옥이 뒷짐을 지고 한가하게 서성이고 있었다. 문화일보의 평기자로 변신한 그는 12월9일자 문화일보에 李會昌, 盧武鉉 두 후보의 유세장 풍경을 기고했다. 毒說(독설)로 유명한 그답지 않게 표현이 부드럽다.
<盧후보의 부산 롯데 유세장(12월6일)과 李후보의 서울 두타 유세장(12월7일)은 콘트라스트가 극적이다. 부산 유세장의 분위기는 진지하고 열기가 넘쳤다. 서울 유세장은 분위기가 좀 피상적이고 어색했다. 떠들썩한 이벤트성 과시가 위주였다. (李會昌 후보)선거참모들의 전략에 약간 문제가 있다고 생각했다>
도올은 이런 의문을 함께 제기했다.
<그(李會昌)의 삶의 역정과 오늘의 유세현장이 무엇인가 괴리가 있는 것은 분명했다. 李후보는 자기가 치열한 선거의 와중 속에 들어 있다고 하는 의식조차 별로 없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대중 앞에 선 李후보는 매우 어색하고 인위적인 것처럼 보인다. 하여튼 李후보에게는 불리한 신의 魔術(마술)이다>
마로니에 공원 유세장을 떠나면서 기자는 유세버스 옆자리에 앉은 李후보의 한 측근에게 물었다.
『이렇게 선거 캠페인을 벌이고도, 李會昌 후보가 당선된다면 기적이 아닐까요?』
그는 공감했다.
『李후보는 자신의 이념적 정체성을 상실하고 혼돈에 빠졌고, 한나라당 선거 지휘부는 상황을 장악하지 못한 채 「표가 된다」는 쪽으로 우왕좌왕하고 있다. 지금 한나라당은 전략도 없고 전술도 없다. 민주당과 벌인 모든 전투에서 다 패배했다』
─李후보가 오늘(12월7일) 저녁 反美 집회인 촛불시위에 참석하려고 한 이유가 뭔가.
『李후보가 어제 大邱에 유세갔다가, 현장에서 그런 결정을 한 모양이다』
─反美 집회에 참석해야 표가 된다고 李후보에게 건의한 사람들은 누군가.
『대구에서 南景弼 대변인을 포함해 젊은 의원들이 가자고 했고, 李후보가 「검토해 보라」고 지시했다. 이걸 南대변인이 「참석할 예정」이라고 발표했다』
『20代·30代 표를 잡아야 한다는 강박관념』
─온 사회가 反美로 들끓더라도, 李후보는 「反美는 안 된다」는 입장을 확실히 하고 韓美 군사동맹과 주한미군의 중요성을 얘기해야 하는 것 아닌가. 『검토해 보라』고 지시한 李후보의 판단에 문제가 있어 보인다.
『내 말이 그 말이다. 李후보는 보수가 아니다. 그 양반은 여중생 추모시위에 진심으로 가고 싶은 것 같다. 그리고 「保革(보혁)으로 몰아가야 한다」는 얘기만 나오면 당내의 젊은 국회의원들이 「표 떨어진다」고 펄펄 뛴다』
─우리사회의 보수층이 전체 유권자의 60% 이상이라는 게 여론조사 기관 사람들의 얘기다. 그래서 당시 金大中 후보도 선거운동이 끝날 때까지 『나는 중도 보수』라고 주장했다. 李후보가 보수 성향을 명확히 하면 표가 떨어진다는 사실이 확인됐나.
『다 어림짐작으로 하는 얘기지, 조사를 해 본 건 아니다. 한나라당은 어떻게든 20代와 30代 표를 잡아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있다』
─여론조사에서 李후보의 지지율이 盧후보에게 8% 가까이 뒤지는 걸로 조사된다. 뒤집을 방책이 있나.
『선거전에 들어서면서 우리가 민주당에 판판이 다 깨졌다. TV 광고도 뒤떨어지고, 홍보도 시원찮고, 유세도 영 엉망이다. 이런 상황에서 李후보가 승리한다면 이건 기적이다. 하지만 나는 그 기적이 일어날 걸로 믿는다』
─그 기적이 뭔가.
『盧武鉉 후보의 좌파적 이념과 反美 성향에 불안을 느낀 중산층과 보수층, 우리 사회의 말 없는 다수가 결집할 걸로 믿는다』
─盧후보의 이념을 놓고 한나라당이 戰線을 형성해야지, 아무 노력도 없이 보수층이 결집하기를 기다리는 건 감나무 밑에 누워서 감 떨어지기를 기다리는 것 아닌가.
『우리가 잘해서가 아니라, 국민이 현명한 판단을 해 주리라고 생각한다. 한 가닥 희망은 그것뿐이다』
『양키 고 홈』이 없는 反美 시위
12월7일 오후 6시.
서울 광화문 교보빌딩 앞.
1980년대 후반과 1990년대 초반 한국 사회의 社會主義的(사회주의적) 변혁을 추구했던 낯익은 깃발들이 차가운 바람에 휘날렸다. 大選을 앞두고 한국 사회의 좌파 에너지가 대폭발한 것일까?
「한총련」, 「서총련」, 「조국통일범민족연합 남측본부」, 「민주주의민족통일 전국연합」
시위 도중 사망한 명지대생 姜慶大(강경대) 군과 성균관大 여학생 金貴井(김귀정) 양의 시신을 앞세워, 취약했던 盧泰愚(노태우) 정권을 벼랑 끝까지 몰아붙였던 1991년 거리 시위가 떠올랐다. 화염병과 쇠파이프, 룸펜 프롤레타리아로 구성됐던 시위의 선봉대 「밥풀떼기」, 춤추는 「지랄탄」(아스팔트 위에 떨어지면 방향을 예측할 수 없게 튀는 다연발 최루탄)….
시위 주최 측에서 틀어 주는 「엿 먹어라, 미국(Fucking U.S.A.)」 같은 反美 선동가에서는 『주한미군 몰아내자』, 『양키놈들을 쓸어버리고』 같은 가사들이 흘러 나왔지만, 시위 주최 측에서는 「주한미군 철수」를 얘기하지 않았다.
미군 장갑차에 치어 사망한 두 여중생을 기리는 이 反美집회에서는 몇 가지 정해진 구호가 되풀이돼서 사용됐다. 촛불만이 거리를 뒤덮은 시위였다. 『미군 철수하라』는 구호가 나오지 않는, 독특한 反美집회였다. 시위에서 나온 구호는 서너 가지였다.
『미선이를 살려내라』, 『효선이를 살려내라』, 『소파 개정하라』, 『살인 미군 처벌하라』
시위 현장에는 월드컵 때 서울시청과 광화문 일대를 메웠던 20代들이 몰려 나왔다. 어린 고등학생들도 눈에 띄었다. 이념으로부터 자유로운 20代들을, 이념지향이 뚜렷한 30代들이 동원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한나라당 사람들은 『시위가 미군 철수를 요구하면서 과격하게 흐르거나, 물리적 충돌이 발생할 경우 보수진영들의 불안심리를 자극할까봐 시위를 철저하게 조율했다』, 『大選용 反美집회다』고 주장했다.
오후 6시30분쯤, 연단에서 100m쯤 떨어진 교보빌딩 앞의 시위대 쪽에서 갑자기 거친 함성이 터져 나왔다.
『李會昌은 물러가라』, 『물러가라』, 『李會昌은 미국 대사관으로 들어가라』
시위를 지휘하는 사회자가 『李會昌씨가 오늘 집회에 참석하려다가 당내 반대로 참석하지 못했다』는 요지로 설명한 것이 「李會昌씨가 참석했다」로 잘못 전달돼 일어난 해프닝이었다.
그 자리에 서 있던 젊은이들은 한나라당 李會昌 후보에게 강한 적개심을 드러냈다.
『여기가 어디라고 와』, 『돌멩이 안 던진 것만도 다행이지』, 『李會昌이는 부시하고 가서 살라고 해』
민주당은 大選을 앞두고 한껏 고조된 反美 분위기가 盧武鉉 후보의 「민족 자주」적 성향을 부각시켜 득표에 도움이 될 것으로 계산했고, 여론조사 기관은 反美 분위기가 盧후보의 득표에 상당한 도움이 된 것으로 분석했다.
李會昌 후보는 우리 사회의 좌파 세력들이 멍석을 깔아 놓은 「反美 분위기」에 올라타기에 급급했다. SOFA 개정 요구서에 일찌감치 서명했고, 촛불시위에 참석하려 했다. 12월7일에는 허바드 주한 미국대사를 면담해서 SOFA 개정과 부시 대통령의 직접 사과를 요구했다.
12월8일 민주당은 이렇게 李會昌 후보를 공격했다.
<한나라당은 국민감정에 편승한 기회주의적 행위를 하고 있다. 두 여중생의 죽음을 선거에 정략적으로 이용해서는 안 된다>
선거 5일 전인 12월14일 시위대는 다시 광화문에 모였다. 10만 명이 모일 것이라는 당초 예고와 달리 집결한 인원은 5만 명(경찰 추산)쯤이었다.
길거리에는 「李會昌이 당선되면 이 땅의 민주주의는 없습니다」는 유인물이 살포됐다. 「주한미군 철수」를 요구하는 플래카드가 곳곳에서 눈에 띄었다. 하지만 시위 주최자들은 「주한 미군 철수」라는 구호를 사용하지 않았다.
反美의 물결은 盧후보의 지지율을 다지는 효과를 발휘했다.
이념전쟁이 공개적으로 펼쳐진 大選
이번 大選에서는 공개적으로 「이념전쟁」이 펼쳐졌다. 북한 核문제가 다시 대두되면서 미국과 일본의 언론들은 일찌감치 이번 大選이 한국 유권자가 「민족이냐, 동맹이냐」를 선택하는 장이 될 것으로 예상했다.
월스트리트 저널의 발행인 케런 하우스는 지난 11월13일 社說(사설)에서 大選을 앞둔 한국 국민들에게 이렇게 물었다.
<사담 후세인이 정리되면, 부시 행정부는 외교정책의 초점을 북한의 대량살상무기 제거로 돌릴 것이다. 부시 대통령의 선택이 경제봉쇄가 될지 군사행동이 될지는 모른다. 하지만 그의 외교정책을 살펴보면 국제사회의 안전을 위협하는 「깡패 국가」를 제거하겠다는 부시 대통령의 의지는 확고하다.
북한은 깡패 국가 리스트에서 이라크 다음이다. 한국 정부의 협력이 없다면 부시 대통령은 이 문제에서 손을 뗄 수 있다. 주한미군을 철수시키고 북한 核문제를 북한 核위협의 직접적인 당사자인 한국과 북한에 넘기는 선택이다>
<부시 행정부가 어떤 정책을 택하든, 대화를 위한 대화는 아닐 것이다. 한국의 다음 대통령은 미국과 손을 잡고 북한에 맞서든지, 북한과 혼자 맞설 것인지 선택해야 한다>
盧武鉉, 『평화만 유지되면 통일은 언제 와도 좋다』
12월8일 오후.
대전 지역에서 이동중인 盧후보의 유세 버스에 미국 시사주간지 뉴스위크의 도쿄 지국장 조지 웨프리츠가 탑승해 인터뷰를 했다. 기자도 함께 차에 올랐다. 뉴스위크의 관심은 온통 북한 核문제였다. 통역은 許雲那(허운나) 의원이 맡았다.
─당신의 유세장에 「양키 고 홈」이라는 플래카드를 든 사람이 있었다. 주한 미군 주둔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그런 플래카드가 있었나. 우리와 관계가 없다. 주한미군은 계속 주둔해야 하고, 韓美동맹은 지속돼야 한다』
─북한에 대해 국제사회의 우려가 증대하고 있다. 북한 核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건가.
『북한 核개발에 대한 확실한 정보를 갖고 있지 않다. 북한이 核개발을 하는 것은 자위적이거나, 전략적인 것으로 본다. 그렇기 때문에 南과 北, 北美 관계를 통해 잘 풀면 (북한이) 核개발을 포기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북한 核문제가 압박으로 해결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압력으로 풀려면 북한이 거부하고, 개방하지 않고, 고립 붕괴할지 모른다. 북한의 붕괴는 한국에 전쟁 만큼이나 위험하다. 북한 붕괴는 전쟁을 불러올 수도 있고, 붕괴 자체가 전쟁만큼 위험하다. (북한을) 지원하고, 代價를 약속하고 核 포기시키고, (북한을) 개방·개혁해야 한다』
─金大中 대통령이 똑같은 얘기를 5년동안 했지만 북한은 변화하지 않았고 이제는 우라늄 농축을 통한 核개발에 나섰다.
『북한이 약속을, 제네바 합의를 깼다는 증거가 분명치 않다. 미국과 북한은 서로 다른 주장을 하고 있다. 국제 분쟁이 있을 때는 대화로 풀어야 한다』
─한나라당 李會昌 후보진영은 「민주당이 反美 분위기를 선동해서 자신들을 조직적으로 파고들고 있다」고 주장한다.
『사실이 아니다』
(盧후보는 『모략이라고 얘기하고 싶지만, 이 정도로만 하죠』라고 했고, 許雲那 의원은 『사실이 아니다』고 통역했다)
─통일이 언제쯤 이뤄질 걸로 생각하나.
『통일의 시기를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평화다. 평화가 유지되면 통일은 천천히 와도 좋다』
─한나라당은 북한의 核 포기를 끌어내기 위해 압박이 필요하다는 입장인데
『한나라당의 강경대응은 대안이 없다. 갈등과 충돌이 점점 커졌을 때 문제를 어떻게 풀 것인가 대책이 없다. 그 사람들은 비판만 한다』
金正日에 대한 분노, 友敵개념이 없는 盧武鉉
─북한의 金正日을 어떻게 생각하나.
『이런저런 평가를 하기보다 대화의 상대로 인정하는 것이 중요하다』
─조지 부시 미국 대통령은 어떻게 생각하나.
『훌륭한 정치인이라고 생각한다. 對北정책에 있어 한국과 다소 마찰이 있어서 우려된다』
「민족이냐, 동맹이냐 선택하라」는 미국의 물음에 盧후보는 「평화만 유지되면 된다」는 자세를 취했다. 그렇지만 그는 미국이 앞으로 취할 어떤 형태의 對北 압박도 반대한다는 뜻을 분명히 했다. 1994년 제네바 核합의로 미봉한 북한의 플루토늄을 통한 核개발, 우라늄 농축을 통한 새로운 核개발 시도에 대해서 『확실한 정보를 갖고 있지 않다』는 입장을 취했다.
北核 해결을 위한 한미간의 對北공조에 뚜렷한 선을 그음으로써 그는 결과적으로 「동맹보다 민족」이라고 선언했다. 『남북대화만 성공하면 다 깽판쳐도 괜찮다. 나머지는 대강해도 괜찮다』는 盧후보의 기존 발언까지 감안한다면, 부시 행정부와 盧武鉉 행정부는 정면 충돌의 레일 위에 올라선 것으로 보인다.
盧후보는 「북한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통일 얘기는 하지 말자」는 기존의 입장을 이 인터뷰에서도 확인했다. 그의 對北정책 외교정책에는 「正義(정의)」가 설 자리가 없다. 200만 명의 주민을 굶겨 죽인, 분단의 원인을 제공한 巨惡(거악)을 향해 「한반도의 평화만 유지된다면, 당신은 나의 대화 파트너」라며 나약한 평화주의자를 자처하고 있기 때문이다.
盧후보는 유세기간 내내 全斗煥 정권을 굴복시킨 1987년의 6월항쟁을 이어 받겠다고 했다. 그는 낡은 정치를 舊惡으로 선언하고 비타협적인 정치혁명을 약속했다. 하지만 對北정책의 영역에 들어서면 그에게는 友敵(우적)개념도 善惡(선악)의 가치관도 찾아 볼 수 없다.
盧후보는 이날 大田에서 新행정수도 이전 공약을 발표했다. 청와대와 국회, 全 중앙부처를 대전지역으로 옮기겠다는 사실상의 수도 천도계획이다.
『통일이 되면 평양으로 행정수도를 옮겨야 하지 않겠느냐』는 논의가 제기되는 상황에서 盧후보는 서울에서 자동차로 두시간이나 南下(남하)한 곳으로 수도를 옮기겠다고 나섰다. 『평화만 유지되면 통일은 천천히 와도 좋다』는 盧후보의 對北관이 반영된 공약이 아닐까?
일요일인 12월8일.
대전에서 열린 盧후보의 가두 유세 현장에는 30代들이 많이 눈에 띄었다. 盧武鉉을 지지하고 있는 「노사모」의 主동력은 30代다. 大田 은행동 시장거리에서 서울에서 왔다는 30代 회사원들과 대화를 나눴다.
30代의 정치개혁 열망이 盧風의 바탕
─盧후보는 유세장에 나온 사람 중에 20代는 거의 안 보이고 대부분이 30代다.
『1987년의 6월항쟁을 경험한 30代와 40代 초반이 노사모의 주축이다. 「386세대」는 철옹성처럼 보였던 군사정권을 맨손으로 몰아내는 데 성공했다. 작은 힘이라도 모으면 사회를 변혁시킬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었고, 정치개혁에 대한 열망이 강력하다』
─직장도 있고, 아이들도 있을 텐데 어떻게 大田까지 오게 됐나.
『노사모 회원들끼리 인터넷으로 연락을 취한다. 오늘은 전국에 있는 회원들이 전화로 연락을 했다. 휴일이니까 내려와 봤다. 정치개혁하자고 말만 할 게 아니라 이 정도 투자는 해야 하는 것 아닌가』
─李會昌씨도 한때는 「대쪽 판사」라는 얘기를 들었고, 개혁의지가 강한 사람 아닌가.
『한나라당은 구태의연한 3金式 정당이다. 철새 정치인들을 다 받아들이고, 지금 뭐하는 건가. 무엇보다 북한을 과도하게 압박하는 게 마음에 안 든다』
盧후보는 자신이 겨냥해야 할 청중이 누구인지 분명히 알고 있었다. 은행동 시장거리 연설에서 그는 지지자들이 돼지저금통에 담아 보내준 성금에 감사하면서, 「정치혁명」을 거듭 약속했다.
『여러분이 보내준 돈이 50억원을 넘어 섰습니다. 1987년 6월항쟁이 생각 납니다. 군사독재를 물리치기 위해 우리는 손에 손에 돌멩이를 들고 일어났습니다. 돌멩이로 군사정권을 몰아냈습니다. 제2의 6월항쟁이 지금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번에는 손에 돼지저금통을 들고 말입니다』
李會昌 후보는 12월8일 정치개혁을 원하는 20代, 30代들의 뜨거운 열망을 겨냥해 「정치개혁 공약」을 내놓았다. 당선되면 자신의 재산까지 사회에 환원하겠다는 공약은, 궁지에 빠진 후보의 空約(공약)으로 치부돼 버리는 분위기였다.
경북 구미에서 거리유세를 하고 있던 盧武鉉 후보는 즉각 비웃음이 섞인 반응을 내놓았다.
『李후보는 5년 전에 집을 이미 팔았지 않습니까. 그러면 빈털터리여야 정상 아닙니까. 그 후에 보니 한 채에 월세가 900만원짜리, 100평이 넘는 빌라를 세 채씩 갖고 있었습니다. (제가 재산을) 헌납 안 해도 부정축재 안 하면 되겠지요. 대통령 마치고 큰 집 짓지 않고, 지금 살고 있는 똑같은 집으로 가면 되지 않겠습니까』
이날 아침 경북 김천에서 盧武鉉 후보의 유세를 취재하고 있는데, 대통령학을 연구하고 있는 고려대 咸成得(함성득) 교수가 전화를 걸어 왔다.
『며칠 전 李會昌 후보가 자문을 청하길래, 「이렇게 밀리고 있는데 아낄 게 뭐가 있느냐. 내놓을 것 다 내놓으라」고 얘기했다』는 咸교수는 『반응이 어떤 것 같아요』하고 물었다.
『글쎄요. 너무 늦은 것 아닙니까. 선거 열흘 앞두고 공약을 내놓으면 국민들이 진심이라고 믿겠습니까』
─그렇죠. 아무리 늦어도 정당개혁 정치개혁을 하자며 탈당했던 朴槿惠 의원이 복당할 때(11월19일) 정치개혁 공약을 내놓았어야 했어요. 그랬으면 정치개혁 공약이 살아 움직였을 거예요. 李會昌씨가 참 느리고, 타이밍도 못 맞추고, 하여간….
『大選 두세 달 전에는 중요 후보들이 「섀도 캐비닛(예비 내각 명단)」을 발표해야 한다는 게 咸교수 지론 아닙니까. 李후보에게 그 얘기는 안 했습니까』
─옛날부터 했죠. 「장관명단을 미리 발표하면 장관 국무총리 자리 노리는 국회의원들이 뛰지를 않는다」, 「黨에 분란이 일어난다」며 여러 가지 걱정이 많더라구요.
『오늘 내놓은 「집권하면 한나라당 국회의원은 내각에 기용 안한다」는 공약은 왜 했습니까. 국회의원들이 아무도 안 뛸 텐데』
─글쎄 말이에요. 미국식 3권분립으로 보면, 국회의원들이 행정부에 안 들어가는 게 맞는 얘기기는 하죠. 내가 李후보나 주변 사람들한테 「선거 6개월 전에는 大選공약 다 준비하고, 내각까지 짜라」고 수없이 얘기를 했는데, 지난 5년 동안 뭐했나 모르겠어요.
『급진 對 중도』
李會昌 후보는 이날 저녁 MBC에서 방송연설을 했다. 李후보는 이번 大選을 「급진 對 중도의 대결」로 규정했다.
<이번 大選은 급진 對 중도 개혁, 불안하고 미숙한 세력을 택하느냐, 합리적이고 희망적인 세력을 택하느냐의 선택입니다. 합리적 개혁을 택함으로써 안정·희망을 이룰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
한번 대쪽은 영원한 대쪽입니다. 내 자신을 던져 부패를 청산하겠습니다>
그는 자신을 保守라고 부르지 않았다.保革(보혁)구도라는 말을 차마 쓰지 못하고, 「급진 對 중도」라는 準보혁구도 시스템을 짜내겠다는 얘기였다.
李후보의 측근은 달라진 전략을 이렇게 설명했다.
『세대구도로 싸움이 붙은 수도권에서는 40代와 민생문제에 포커스를, 부산·경남에서는 지역구도를, 충청에서는 보혁구도를 이끌어 내려고 한다. 세대 대책을 약간 세분하면, 20代에게는 일자리 등 미래의 희망을 전해 주고, 50代에는 안정을 강조하는 식이다』
런자 레인지에 생선을 한 마리 넣고, 머리는 강하게 익히고, 몸통은 살짝, 꼬리 부분은 중간 정도로 익히겠다는 얘기다. 선거를 열흘 앞두고, 수도권은 세대로, 부산·경남은 지역구도로, 충청에서는 보혁구도로 싸우겠다는 얘기가 과연 현실성이 있는 것일까? 그렇게 유권자를 정밀 폭격하면서 선거판을 끌고 갈 능력을 한나라당이 갖고 있는 것일까?
모든 전투에서 패배한 한나라당
12월9일 아침.
한국갤럽 측에 전화를 걸어 여론조사 결과를 확인했다.
李會昌 후보가 정치개혁 공약을 발표하고, 盧武鉉씨가 충청권 유세를 벌인 12월8일자 갤럽 조사에서, 李會昌 후보의 지지율은 35.3%, 盧武鉉 43.3%였다. 격차는 8.0%. 大選 유세전이 시작한 이후 가장 크게 벌어졌다.
『한나라당은 모든 전투에서 패배했다. 남은 것은 우리 사회 보수층의 자각과 결집 뿐』이라는 한나라당 당직자들의 절망은 여론조사 수치에서 그대로 확인됐다.
한나라당은 패닉 상태에 빠진 모습이었다. 한나라당 홍보위원장인 박원홍 의원은 지역구인 서울 서초구에 머물고 있었다. 선대위 공동의장인 최병렬, 김용환 의원도 자신의 지역구에 있었다. 한나라당 의원들에게 『서울에 머물지 말고 다 자신의 지역구로 내려가라』는 동원령이 12월6일 내려졌다고 한다.
12월10일 밤.
저녁 무렵 열린 TV 경제 토론에서 李會昌 후보는 『한나라당은 부패 원조당』이라는 민주노동당 權永吉 후보의 공격에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모습을 보였다. 李후보는 權永吉 후보의 공격에 이런 답변을 내놓아야 하지 않았을까?
『지난 40년간 우리 국민들은 한국 경제를 100배 키웠습니다. 우리 세대는 세계 경제의 기적을 만들어 냈습니다. 그때 그때의 한국 정치는 절망감을 줬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4·19, 10·26, 6월 시위를 통해 민주화를 이뤄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식민지 해방국가 가운데 한국만큼 민주주의를 한국만큼 이룬 나라는 없습니다. 우리는 지난 40년간 정치·경제 두 부분에서 세계에서 제일 가는 성취를 이뤄 냈습니다. 대한민국은 희망이 있습니다』
위에 인용한 발언은 민주당의 盧武鉉 후보가 12월8일 경북 김천 유세에서 한 발언 그대로다. 盧후보까지 「자랑스러운 한국의 40년」을 역설하고 있는데도, 李후보는 「부패원조」라는 비난 앞에 엄마에게 혼난 아이 같은 모습을 연출했다.
그런 사람에게 매력을 느껴 표를 줄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선거일이 다가오는데도 그의 지지율은 35%에서 미동을 하지 않고 있었다.
美 8軍 관계자의 경고, 『주한미군 안에서 미군철수 얘기가 나온 것은 광복 이후 처음』
미국이 아라비아에서 항해중인 북한 선박을 나포하고, 스커드 미사일 12기를 압수했다는 소식이 12월11일 外信(외신)을 타고 들어왔다. 北核 문제가 선거 막바지의 중요 선거 쟁점으로 등장했다. 『이번 大選에서 한국 사람들은 「동맹이냐, 민족이냐」를 선택해야 할 것』이라는 미국 언론의 경고가 현실로 등장한 것이다.
美 8군 관계자는 『이번 사건은 「북한 核만은 안 된다」는 미국의 단호한 의지를 보여 준 것』이라면서 『차기 한국 정부가 北核 문제 해결에 협조하지 않는다면, 미국은 혼자서라도 움직일 것』이라고 말했다.
익명을 요청한 그는 『한국 사회의 反美 분위기로 인해, 주한미군 내부에서 「이런 곳에서 근무할 필요가 있겠느냐」는 식으로 미군 철수 얘기가 나오고 있다』고 주한미군의 분위기를 전했다.
─미국이 아라비아海에서 미사일 수출에 나선 선박을 나포했다. 차기 한국 정부가 협조하지 않는다면, 북한의 核개발을 저지하기 위해 미국이 북한 해역 해상봉쇄 등의 독자적인 군사행동에 나설 수 있다는 의지 표명으로 보면 되겠나.
『미국은 단호하다. 북한이 核무기를 갖는 것을 두려워하는 게 아니다. 북한이 이렇게 미사일을 수출하듯, 核무기를 수출하는 날이 곧 온다는 게 미국의 우려다. 어떤 방법으로든 막을 것이다. 인도, 파키스탄이 核을 보유하는 것과 북한이 核을 갖는 것은 다르다』
─한국 사회의 反美 분위기에 대한 주한미군들의 반응은 어떤가.
『「어리둥절하다. 황당하다」는 게 솔직한 심정일 것이다』
─미국이 여중생 사망 사건 초기에 대응을 적절하게 하지 못했고, 위압적인 자세가 反美 감정의 악화를 가져왔다는 지적이 많지 않은가.
『여중생 교통사고 사망사건만큼 미군이 철저하게 대처한 사건이 없다. 사망한 지 이틀 뒤에 미군들이 촛불 추모예배를 했다. 나도 그 현장에 있었다. 그날은 미국과 한국이 월드컵에서 맞붙은 날이었다. 군인들이 자발적으로 성금을 2만22000달러를 거뒀다. 나중에 또 3만 달러를 거뒀다. 손해배상 절차도 신속하게 진행해 한 사람당 1억9500만원씩을 지급했다. 8군 사령관, 주한미군 사령관, 주한 미국대사가 사건 직후에 유감과 사과를 발표했다』
─한국민들은 미군 군법회의에서 사고를 낸 장갑차 운전병과 유도병이 배심원 무죄평결을 받은 데 분격했다.
『한국과 미국의 사법체계의 차이를 인정해야 한다. 미국은 과실로 인한 사망사건에 형사적 책임을 묻지 않는다. 책임을 인정하며 주한미군이 책임을 지겠다는 게 우리의 입장이다. 미군들은 두 병사를 「살인 미군」이라고 부르는 데 격분하고 있다. 두 병사 모두 미선이나 효순이 같은 동생이 있는 나이다. 한국에서 교통사고로 사람을 죽였다고 「살인자」라고 부르나』
─한국의 소파 개정 요구에 대해 미국은 어떤 입장인가.
『키르기스스탄에 파견된 한국군도 키르기스스탄과 소파를 체결했다. 한국 군인이 비업무상의 과실로 사고를 내더라도 사법권을 한국이 가지게 돼 있다. 그 먼 이역 땅에 키르기스스탄의 안보를 위해 파견된 한국 병사가 키르기스스탄 감옥에 수감돼 재판받는 것을 한국 국민이 정서적으로 납득하겠나』
『동북 아시아의 세력균형이 흔들리면 한국 경제는 죽는다』
─주한미군 내부에서 주한미군 철수 얘기가 나오고 있다는 게 사실인가.
『대부분의 병사들은 한국의 정치, 大選에 대해 잘 모른다. 그러나 고위 장교들 사이에서 「이런 식으로 한다면 누가 한국에 오려고 하겠느냐」는 우려가 제기된다. 광복 이후 주한미군 철수 얘기가 나올 때마다 주한미군은 이에 반대했다. 주한미군 내부에서 진지하게 미군철수 이야기가 나오는 것은 이번이 처음일 것이다』
─많은 한국인들이 「주한미군은 미국의 이익을 위해 와 있다. 나가란다고 나가겠느냐」는 생각을 갖고 있다.
『물론 한국을 위해서 와 있는 것은 아니다. 한국의 이익과 미국의 이익을 위해서 와 있다. 주한 미군이 철수아여 동북아의 세력균형이 흔들리면 한국 경제는 죽는 것이다』
─왜 이렇게 反美 분위기가 확산된다고 생각하나.
『한국 사회의 다수가 이런 감정을 갖고 있다면 이해하겠다. 하지만 몇몇 언론들이 사실과 다른 선동적인 기사들을 내보내고 있다. 金大中 대통령이 「소파 개정은 안 한다. 反美감정이 바람직하지 않다」고 하는데 언론이 앞장서서 부정적인 기사를 양산하는 모습이다. 국민을 진정시키기보다 선동하고 있다』
─한나라당 李會昌 후보가 한때 反美 촛불시위에 참가하겠다고 나섰는데.
『한마디로 황당했다. 韓美 관계를 잘 알고, 국민을 이끌어야 할 사람이 그런 얘기를 해서 당황했다』
12월11일.
盧武鉉 후보의 「충청 천도론」이 선거의 중요 쟁점으로 등장했다. 공무원層, 수도권 지역의 표가 盧후보로부터 일부 이탈하는 조짐을 보이기 시작했고, 盧후보는 「말 실수」까지 했다.
盧후보는 인천 유세에서 『정치·행정은 충청도로 보내고, 여기는 경제·금융 도시로 육성해야 한다. 돈 안 되고 시끄럽게 싸우는 것은 충청도로 보내자. 여기 계시는 충청이 고향이신 분들은 화나겠다』고 발언했다.
盧후보는 『2년 내에 행정수도 입지을 선정하고 임기內에 착공식을 갖겠다』는 기존의 입장에서 여러 걸음 뒤로 물러섰다. 守勢(수세)로 전환한 모습이 역력했다.
<한나라당이 거짓말 가지고 국민을 현혹시키고, 행정수도를 충청으로 옮기면 수도권 집값이 폭락한다면서 수도권 사람들에게 불안감을 조성하고 있다. 새빨간 거짓말이다. 수도권은 계속 인구가 늘어난다. 인구 절반이 수도권에 있다. 충청에 행정수도를 건설하고 그곳에 50만~60만명의 인구가 들어서려면 10년 걸린다. 100만 명이 되려면 20년 걸린다. 10~20년內에 인구증가율이 줄게 되는데 집값이 폭락할 수 있느냐>
盧후보는 국회 청와대를 포함한 全정부부처를 이전하겠다는 공약이 선거 쟁점화하자 자제해 왔던 한나라당과 李會昌 후보를 비난했다.
<한나라당은 정말 문제가 많다. 5년 내내 발목만 잡고 한 일이 없다. 단일화 후에 지지율이 역전되니까, 盧武鉉이 부동산 투기를 했다느니, 새빨간 거짓말을 하고, 흑색선전도 안 먹히니까, 집값 얘기를 하고 있다. 한국의 미래에 필요한 정책에 대해 발목잡기를 하고 있따. 한치 앞을 내다보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한나라당은 역시 할 수 없는 정당이다. 제가 李會昌 후보 별명을 하나 만들어 드리겠다. 「이발목」이다. 앞으로 「이반대」 후보라고 불러야 하겠다>
李會昌 후보는 「대전 천도」를 물고 늘어지기 시작했다.
李후보는 12월11일 기자회견에서 『盧武鉉 후보가 수도권 이전 공약에 대해 양자토론을 제의했는데 받아들이겠느냐』는 물음에 『해보자』며 자신감을 보였다.
<어제(12월10일) 토론회에서 충분히 말을 못했다. 수도권 이전 문제는 지금 워싱턴과 뉴욕의 예를 드는데 19세기 경제나 행정의 기초가 잡히지 않던 당시의 분리다. 서울에 온갖 경제·행정·사회 등의 기능이 몰려 있는데 국회 등을 다 옮긴다면 행정수도가 아니라 수도의 이전이다. 모든 기관이 옮겨 가면서 기업 관련산업까지 옮겨 가게 된 것이다. 서울에 있는 부동산 땅값이 폭락하고, 서울은 공동화될 것이다>
12월12일.
북한은 1994년 10월 제네바 核합의에 따라 동결시켰던 영변의 核재처리시설, 원자로등을 가동시키겠다고 선언했다. 大選은 미국과 일본이 예견한대로 「동맹이냐, 민족이냐」를 선택하는 場으로 전환됐다.
『정부의 현금 지원은 없다』
12월13일.
민주당 사람들은 북한의 核개발 재개가 얼마나 큰 악재가 될 것인지 촉각을 곤두세웠다. 단일화 이후 외곽을 돌던 「국민통합 21」의 鄭夢準 의원은 이날 大田에서 盧武鉉 후보와 합동유세를 가졌다. 李仁濟 자민련 총재권한 대행은 盧武鉉 후보의 좌파성향을 격하게 공격하면서, 李會昌 후보 지지를 간접 선언했다.
兩 진영 모두 내놓을 수 있는 카드를 다 내놓은 셈이다.
이날 아침 서울 여의도 민주당 당사에서 만난 민주당 李康來(이강래) 의원은 『표심이 이미 다 정해져서, 北核이나 이인제 鄭夢準의 움직임이 모두 큰 영향을 주지 못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10% 포인트 차이의 지지율 격차가 오늘 아침에도 당 자체 조사에서 확인됐다』는 게 민주당쪽의 설명이었다.
李의원은 조선일보에 강한 불쾌감을 표시했다.
『조선일보가 흡사 전쟁이나 난듯이 1면부터 지면을 꾸몄다. 나는 우리가 북한에 선전포고한 줄 알았다. 조선일보가 (李會昌 후보의) 뒤집기를 위해 불을 지르고 있다. 1994년 제네바 核합의에는 북한 核동결과 함께 北美 관계의 조속한 정상화가 포함돼 있다. 8년이 지난 지금까지 北美 관계 정상화에 진전이 있었나. 미국이 그만한 성의를 보였나, 짚어봐야 한다. 북한을 일방적으로 몰아붙이니까 북한이 반발하고 있는 측면도 있다. 李會昌씨는 이제 「과격, 극좌 정치인 盧武鉉하고 5년을 더 살거냐」고 국민을 협박하고 위협하는 수밖에 없다. 하지만 먹히지 않을 것이다』
盧후보는 이날 오후 1시30분쯤 용인에서 가진 경기지역 공약 발표회장에서 북한 核문제에 대해 「北核문제와 경협의 엄격한 분리」를 주장했다. 전날 민주당과 「국민통합 21」은 「核의혹 해소가 안 되면 정부 차원의 현금지원 사업 중단을 고려한다」고 합의했다. 그런데도 盧후보는 『정부가 언제 현금지원을 한 적이 있느냐』고 기자들에게 되물었다.
『북한이 核을 보유하고 있다고 믿을 정보가 없다』고 주장해 온 그는 『앞으로 특별히 위험한 일은 없을 것』이라고 낙관적인 전망을 했다. 다음은 기자들과의 문답이다.
─북한이 核개발을 재개하더라도 對北 현금지원을 계속할 것인가.
『한나라당이 對北 현금지원을 중단하라고 얘기한다. 정부가 해 온 현금 지원은 없다. 「현금지원」이 무엇인지 모르겠다. 우리 현금이 건너가고 있는 것은 금강산 관광지원과 민간교류밖에 없다. 한나라당은 「현금지원 중단」을 요구할 것이 아니라 금강산관광과 경제교류를 전부 끊자고 얘기해야 한다. 그건 경솔한 결정이다』
─북한 核문제와 경협을 엄격하게 분리해야 된다는 것인가.
『북한과의 경제교류를 중단하면 대화창구가 끊어진다. 대화로 풀 수 있다. 북한은 미국과 한국의 지원이 필요하다. 제재와 채찍을 얘기하는데 제재를 해서 실패할 때의 결과가 가공할 만하다. 제재하자는 건 평화를 유지하자는 생각이 아니다』
『한나라당 지지자들이 입을 열기 시작했다』
오후 4시30분 서대전 사거리에서 열린 盧武鉉, 鄭夢準 공동 유세에는 500여 명의 청중이 몰렸다.
『鄭夢準의 막판 가세가 현대그룹의 금강산 관광과 對北 퍼주기 이미지와 맞물려 오히려 역효과를 낼 것이다』, 『DJP 단일화 선언 이후 역풍이 불었듯이 역풍을 맞을 수도 있다』는 관측을 의식한 듯 盧후보는 鄭후보와의 유대를 강조하려고 푸짐한 「립 서비스(Lip Seuvice)」를 했다.
『경선을 치르고 옛날에는 승복하지 않았습니다. 鄭대표는 승복했습니다. 이게 새 정치 아닙니까』
『제가 대통령에 당선되면 그 정권은 盧武鉉 정권이 아닙니다. 단일 후보로 만들어 주고 이 자리까지 성원해 온 鄭夢準 의원과 함께 하는 정권으로 생각하겠습니다』
유세장에서 만난 민주당 金榮煥(김영환) 의원은 盧후보의 수도 이전 공약이 수도권에서 상당한 영향을 주고 있다고 걱정했다. 그는 『盧武鉉 후보의 수도 이전 공약과 北核 문제가 꼭 닫혀 있던 李會昌 후보 지지자의 말문을 열었다』고 했다.
『盧武鉉, 鄭夢準 단일화 이후 「李會昌을 지지한다」고 하면 촌스럽다는 느낌을 주는 분위기가 됐어요. 그래서 李會昌 지지층들이 입을 꽉 닫은 겁니다. 행정수도 이전이 쟁점이 되고, 北核 위기가 조성되면서 기존 한나라당 지지층이 입을 열기 시작했습니다. 한나라당이 바짝 긴장하면서 조직이 활발하게 움직이고, 그 위력도 나타나고 있습니다. 우리가 좀 뒤처져 있으면서 추적하는 양상이었으면 좋았을 뻔했어요』
─「수도 이전이 수도권을 공동화시킬 것」이라는 한나라당의 주장이 수도권에서 먹히고 있는 건가요.
『어느 쪽 주장이 더 합리적이냐는 이성적인 판단의 문제는 아닙니다. 수도권 이전을 믿고 싶지 않은 심리를 한나라당이 부추겼고, 이게 한나라당 지지자들의 묶였던 입을 열게 만든 겁니다』
─20代, 30代가 기존의 지역구도에서 풀려나서 세대혁명이 일어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사이버 선거, 20代, 30代의 정치혁명을 얘기하지만 결국 「지역구도」로 갈 겁니다. 우리는 鄭夢準 의원에게 기대를 겁니다. 보수층의 안정 희구심리가 한나라당으로 몰려 가는 것을 鄭의원이 차단하는 역할을 해 줄 겁니다』
지지율의 막판 요동
12월14일.
이날 조사된 갤럽 여론조사에서 중대한 변화가 일어났다. 40代에서 지지율이 逆轉(역전)됐다. 12월8일 李會昌 38.3% 盧武鉉 39.5%였던 지지도가, 李會昌 41.9% 盧武鉉 39.0%로 뒤집힌 것이다.
「수도 이전」에 대해 서울 유권자는 찬성 30.6%, 반대 48.6%로 반대 의견이 18.0% 포인트 높았다. 충청권에서는 68.6%가 찬성, 11.5%가 반대했다. 전체로는 찬성이 38.0%, 반대가 37.5%로 비슷했다.
부동층은 20代가 40%로 가장 높았고, 30代가 32%, 40代가 32%, 50세 이상이 26%로 나타났다. 盧武鉉 후보의 절대적인 지지층인 20代에서 「망설임」이 강하게 나타나고 있다는 징표다.
12월15일.
李會昌 후보는 「수도 이전」를 盧후보의 즉흥성을 입증하는 소재로, 北核 문제를 盧후보의 불안감을 강조하는 소재로 활용했다. 선거 막바지까지 자신의 「긍정적인 정책 이슈」를 만들어 내지 못한 채 盧후보가 만들어 놓은 정책 이슈를 쟁점으로 전환시킨 것이다.
성남 모란 시장 유세에서 찬조연사로 나온 金元吉(김원길) 前 민주당 정책위의장은 『盧武鉉씨가 대통령이 되면 우리가 애써 쌓아온 지금까지의 삶은 물론이고 우리 민족이 세계 사람들의 뇌리에서 사라지는 일이 올 것』이라며 『東으로 갈지, 西로 갈지 모르는 사람이 대통령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盧후보를 비난했다.
李후보 역시 전에 없이 강한 어조로 『盧武鉉씨가 대통령이 되면 국가적 재앙이 초래될 것』이라고 공격했다.
『이미 30~40년 전에 朴正熙 대통령이 행정수도 대전 이전을 연구했습니다. 그때 계산이 「15년 잡고 5조원이 든다」였습니다. 지금 돈으로 하면 50조원이 넘습니다. 문제는 물입니다. 대청댐의 물이 지금도 부족합니다. 100만~200만 명이 옮겨올 새 수도를 건설하면 물은 어디서 가져옵니까. 터무니 없는 말로 표를 얻기 위해 수도권 사람들을 절망에 빠지게 하는 사람에게 국가 운영을 맡길 수는 없습니다』
『무엇이 한반도를 불안하게 합니까. 북한의 核개발입니다. 「核개발 중단하지 않으면, 현금지원은 없다」고 얘기하는 게 국가 지도자의 자세입니까, 「核개발 하더라도 현금지원을 계속해서 金正日 비위를 맞추자」고 하는 게 국가지도자의 자세입니까. 李會昌이가 대통령이 되면 한반도에 전쟁은 없습니다. 金正日과 정정당당하게 만나 대화로 협상으로 核문제를 풀겠습니다』
李후보, 保革문제 들고 나와
D-3일인 12월16일.
두 후보 사이의 지지율 격차는 그대로 유지되고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李會昌 후보는 그토록 꺼리던 保革의 문제를 들고 나왔다. 그는 『지난 14일 북한 조국평화통일위원회 서기국이 저를 「동족을 해치는 전쟁론자」라며 「李會昌 같은 자가 권력을 차지하게 된다면 우리나라에 미국이 강요하는 核전쟁이 터지고 우리 민족은 그 희생자가 될 것」이라고 비난했다』며 盧후보가 북한의 논리를 그대로 대변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한나라당의 李圭澤(이규택) 원내총무는 盧武鉉 후보 장인이 6·25 때 양민학살을 주도한 사실을 거론하면서, 『盧후보 장인이 11명의 양민을 학살한 일선 책임자였다. 盧武鉉 대통령이 되면 공산당 책임자의 사위가 대통령이, 그 딸은 퍼스트 레이디가 된다』고 공격했다. 뒤늦게 保革을 선거 쟁점으로 끌고 나온 것이다.
이날 밤 사회 문화 분야 TV 토론이 끝난 뒤 李會昌 후보는 『잘 해보려고 했는데 제대로 되지 않았다』고 마무리 인사를 했다.
李후보는 의약분업 고교평준화 등 쟁점마다 수세에 몰렸다. 허탈한 웃음을 가끔 터뜨렸으나. 얼굴은 굳어 있었다.
질 수 없는 싸움에서 李會昌이 진 까닭
선거 막판, 지지율의 역전은 일어나지 않았다. 『투표율이 80% 이하로 떨어지면 李후보가 이길 수 있다』는 마지막 희망도 빗나갔다.
한나라당의 전략통인 崔秉烈(최병렬) 선대위 공동의장, 朴源弘(박원홍) 홍보대책위원장, 沈駿亨(심준형) 공보특보는 「李會昌의 敗着(패착)」에 대해 묻자, 李후보가 단 하나라도 실천했다면 손쉽게 大選을 승리로 몰아갈 수 있었을 대목을 수없이 짚어냈다. 「질 수 없는 싸움」에서 지게된 데 대한, 그들의 複棋(복기)다.
① 2000년 4월 총선에서 국회의원 17명을 당선시켜 원내 교섭단체 구성(기준은 20석)에 실패한 金鍾泌 자민련 총재를 도와 원내교섭단체를 구성하도록 도와 줬어야 한다. 자민련을 한나라당의 友軍(우군)으로 끌어다 놨으면, 大選은 하나마나한 싸움이 됐을 것이다.
② 李會昌 후보는 한나라당의 대통령 후보 경선 때 「당권·대권 분리」 등의 정치개혁을 추진했어야 했다. 그랬다면 20代, 30代에게 「한나라당도 변화를 추구하는 정당」이라는 이미지를 심어 줄 수 있었다.
③ 朴槿惠 의원이 정당개혁, 정치개혁을 요구하며 탈당하려고 할 때 정치개혁안을 내놓았어야 했다.
④ 늦어도 朴槿惠 의원이 복당할 때는 정치개혁안을 국민들에게 발표했어야 했다.
⑤ 대통령 후보등록을 할 때 「세풍」, 「안풍」에 대해 정치적으로 사과하고, 그리고 난 뒤에 「부패 청산」을 자임했어야 했다.
⑥ 大選이 시작되고 나서 어떤 형태로든 韓仁玉 여사나 가족이 나서서 두 아들의 병역 면제에 인간적으로 사과했어야 했다. 두 아들의 병역 면제는 덮어 두고 갈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⑦ 大選을 「포지티브 캠페인」으로 시작했어야 했다. 선거기간 동안 왜 李會昌에게 표를 던져야 할지 단 하나의 이유도 유권자에게 제시하지 못했다.
⑧ 「무조건 이긴다」는 자만으로 아무런 준비를 하지 않고 大選을 맞았다. 大選 전략은 적어도 6개월 전에 수립해야 했다.●
大田 중부大 강당. 기자가 한나라당 李會昌 후보의 유세버스를 타고 처음으로 도착한 곳이었다.
『李會昌 후보님의 18번이 해바라기의 「사랑으로」라고 합니다. 李후보님께 노래를 청하겠습니다』
힌 청년단체의 정례 모임이 끝난 후 식후 행사 사회를 맡은 코미디언 심현섭이 李會昌 후보를 단상으로 불러 올렸다. 李후보는 이 단체 회원 1000여 명을 상대로 30분 정도 강연을 하고 나서 壇下(단하)에 앉아 있었다. 노래를 못 하겠다며 李후보는 두 손을 내저었다.
『네, 여러분 李후보님이 열 곡을 부르겠다고 열 손가락을 다 펴셨습니다』
李후보가 단상에 올랐고, 30代 후반인 변호사 출신의 趙允璇(조윤선) 선대위 대변인이 뒤따랐다. 李후보 앞에는 노래방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노래 가사를 띄워 주는 텔레비전 모니터가 놓여 있었다.
『내가 살아가는 동안에』로 시작하는 「사랑으로」의 반주가 흘러나왔다. 음악은 흘러가고 마이크를 잡은 李후보는 이 노래를 단 한 소절도 소화하지 못했다. 어색한 시간이 길어지자 옆에 서 있던 趙允璇 대변인이 李후보의 마이크를 함께 잡고 노래를 대신 불렀다. 李후보는 손을 위로 들어 좌우로 흔드는 몸짓을 단상 위의 젊은이들과 함께 했다.
노래가 끝나자 코미디언 심현섭의 멘트가 이어졌다.
『네, 李후보님이 율동을 완벽하게 하셨습니다』
제대로 부르지도 못하는 노래를 자신의 애창곡이라고 얘기하고, 그래서 무대 위에서 어릿광대 노릇을 자초한 까닭은 뭘까?
딱해서 李후보를 수행하던 측근에게 물었다.
─李후보 애창곡이 정말 「사랑으로」 맞습니까.
『연습을 많이 하셨는데, 음정을 못 맞출 때가 있어요』
─그런 노래를 부른다고 李후보가 20代, 30代에게 점수를 땁니까? 대법관과 국무총리를 지낸 사람이 점퍼 입고 다닌다고 『그래, 당신 우리 같은 서민이다』고 하나요. 품위 있는 복장에 가곡을 부르면 20代, 30代가 싫어한다고 어디 조사된 게 있습니까.
『선거를 20일 남겨두고 그럼 어떻게 합니까. 지금까지 그 방향으로 밀고 온 걸…』
11월27일 대통령 후보 등록 후 언론에는 李후보의 애창곡이 「사랑으로」,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라고 소개됐다. 안치환이 부른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는 20代와 30代들도 소화해 내기 어려운 곡이다.
선거가 중반에 이를 때까지 李후보는 유세장의 청중들과 겉돌았다. 李후보를 젊고 활기차게 보이려고, 서민처럼 꾸미려고 만들어 낸 여러 장치들은 그를 더욱 어릿광대처럼 비치게 만들었다. 그럴수록 「20代, 30代에 다가가야 한다」, 「서민처럼 보여야 한다」는 李후보 참모들의 偏執症(편집증)은 심해지기만 했다.
경멸과 조롱의 대상이 된 李會昌11월22일 오후 8시.
大田 대덕 연구 단지에 있는 KAIST(한국과학기술원)의 구내 식당에서 李會昌 후보는 대학원 학생들과 함께 저녁식사를 했다. 기자는 李후보와 조금 떨어진 식탁에 앉았다. 기자 옆에는 대학원생 네 명이 식사를 하고 있었다. 李후보가 왔다는 사실을 알게 된 한 대학원생이 불쾌감을 표시했다.
『야, 아들 둘 군대 안 보낸 사람 왔다』
한 대학원생이 『야, 우리 주변에도 군대 안 간 사람 많찮냐』며 친구를 만류했다.
李會昌 후보가 유세장에서 『제가 몸과 마음을 바쳐 이 나라를…』이라고 말할 때마다 청중들 속 어디에선가는 『지 아들 둘 군대도 안 보내 놓고…』라는 비아냥거림이 튀어나왔다.
정치 지도자는 두려움의 대상이 될지언정, 경멸과 조롱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된다. 민주당은 집요하게 李후보를 경멸과 조롱의 대상으로 만들었다. 「노사모」 회장인 명계남씨는 유세장에서 李후보를 향해 늘 이런 야유를 퍼부었다. 명씨는 「오아시스」 등의 영화를 만든 영화 제작자다.
<여러분 제가 이번 大選이 끝나면 12월20일부터 「가문의 몰락」이라는 영화를 만들려고 합니다. 남자 주인공을 아직 못 찾았습니다. 키는 179㎝, 몸무게는 45㎏이어야 합니다. 「살아 있는 미라」라는 별명을 갖고 있으면 더더욱 적격입니다.
군대 같은 데는 절대로 갔다 와서는 안됩니다. 반드시 결혼한 사람이어야 합니다. 애 낳기 석 달 전에 미국으로 마누라 데리고 가서 미국 아이를 만든 경력이 있어야 합니다. 한국에 가끔 들어올 때 세 가족이 104평짜리 빌라에서 묵어야 합니다. 할아버지가 친일파라는 얘기를 들으면 더욱 좋습니다. 여러분 제가 이번에 「가문의 몰락」을 찍어서, 그 동안 노사모한다고 돌아 다니면서 까먹은 돈을 벌충해야 합니다. 제발 남자 주인공 좀 찾아 주십시오>
李會昌의 발목을 잡은 惡性 이미지들11월23일.
李후보의 지지율은 당시 후보단일화 논의를 진행하고 있던 盧武鉉, 鄭夢準의 지지율이 오르내리는 것과 상관없이 35%에 콱 처박혀 일어설 줄을 모르고 있었다. 「魔의 35% 벽」은 선거기간 실시된 여론조사에서 무너지지 않았다. 이유가 뭘까.
지난 5년 동안 李會昌이라는 정치 商品(상품)에는 惡性(악성) 이미지들이 고착됐다.
「두 아들은 모두 병역을 면제받았다」
「104평짜리 빌라 3채를 李후보 一家(일가)가 세를 얻어 살았다」
「병역을 면제받은 큰아들은 뚜렷한 수입원 없이 하와이에서 머물면서 딸을 낳아 원정출산 시비에 휘말렸다」
「병역을 면제받은 두 아들은 미국에서 살고 있다」
더 큰 문제점은 李후보 측이 이런 악성 이미지에 대한 대책을 마련하지 않은 채 大選戰(대선전)에 뛰어들었다는 사실이었다. 20代, 30代의 정치개혁 열망을 사로잡을 정책 이슈를 개발하지 못했다. 한나라당의 선거전은 李會昌의 정책과 人性을 알리기보다 金大中을 공격하는 폭로전으로 시작됐다.
『큰 폭로 한 방이면 盧武鉉은 끝난다』
兵風(병풍)에 맞서 싸워 온 金榮馹(김영일) 사무총장, 鄭亨根(정형근) 전략기획팀장, 李在五 金文洙 大選 기획위원들은 한나라당 안에서 이런 분위기를 주도했다. 그렇지만 한나라당은 폭로전을 통해 유권자들의 마음과 눈길을 金大中 정부의 失政으로 몰아가는 데 실패했다.
후보의 인물과 개성, 미래에 대한 비전이 부각되는 大選에서 李후보의 악성 이미지는 더욱 선명하게 유권자들에게 부각됐고, 李후보는 표를 끌어들일 흡인력을 상실했다.
한나라당의 두더쥐 잡기11월23일 저녁.
李후보 일행은 光州에 머물고 있었다.
光州 시내의 한 술집에서 李會昌 캠프 사람들을 만났다.
화제는 盧武鉉·鄭夢準 두 사람이 전날인 11월22일 저녁 가졌던 후보단일화를 위한 토론에서, 누가 더 잘했느냐였다. 鄭후보가 공세적으로 잘했다는 쪽과 盧武鉉 후보가 기존 이미지와 딴판으로 부드럽게 잘 받아넘겼다는 의견이 엇갈렸다.
李후보 사람들은 『후보단일화가 과연 이뤄지겠느냐』며 회의적인 반응들이었다. 한나라당 미디어대책본부장인 金武星(김무성) 의원은 뒤늦게 술자리에 합류했다. 그는 「한국 갤럽」을 포함한 5개 주요 여론조사 기관이 후보단일화의 근거가 될 여론조사를 거부했다는 소식을 전해 주었다.
『설사 여론조사를 실시하더라도, 한쪽이 어떤 빌미로든 여론조사 결과를 받아들이지 않을 거요. 단일화가 되더라도 완전히 색깔이 다른 사람이 한 사람은 후보를 맡고 한 사람은 선거대책위원장을 맡아서 선거운동이 되겠습니까』
「盧武鉉, 鄭夢準 단일화는 이뤄지지 않는다, 되더라도 별 파괴력이 없을 것」이라는 게 이 자리에 모인 한나라당 사람들의 희망 섞인 관측이었다. 숙소로 돌아와 한나라당의 선거전략을 지휘하고 있는 李후보의 한 특보와 전화통화를 했다.
『兩者 구도로 가면 큰 일』이라며 그는 걱정이 많았다.
『우리는 3者구도로 가면 필승이라는 판단 아래 전략을 펴왔잖아요. 盧武鉉(지지율)이 조금 오르면 盧武鉉을 두들기고, 鄭夢準(지지율)이 올라가면 鄭夢準을 두들기고. 세게 패면 (지지율이) 죽어 버릴까봐 세게 패지를 못했어요. 盧후보와 관련된 여러 가지 (비리) 자료들을 수집해 왔는데, 盧후보 지지율이 너무 꺼져 버리면 鄭夢準에게 잡아 먹힐까봐 써먹지를 못했습니다. 선거가 20일밖에 안 남은 상황에서는 폭로전의 약발이 먹히질 않아요. 모든 게 정쟁화해 버리니까. 후보 단일화가 이뤄지면 후보의 개성과 인격, 모든 걸 걸고 眞劍승부를 해야 합니다. 이것 저것 눈치 보느라 鄭夢準, 盧武鉉 모두를 결정적으로 타격하지 못한 게 걱정돼요. 설마설마 하는데, 단일화된다면 우리로서는 정말 큰 일입니다』
후보단일화 협상에 참여하고 있는 金杏(김행) 「국민통합 21」 대변인의 목소리가 경쾌하게 전화선을 타고 들려 왔다.
『단일화되겠느냐구요. 되지, 왜 안 돼요? 안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이상한 것 아니에요. 3파전으로 가면 절대 못 이긴다는 게 뻔한데, 자기 죽을 길로 가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盧후보, 鄭후보는 3金이 아니에요. 두 사람 모두 50代로 젊은 사람이에요. 선선히 합의를 잘 하더라구요. 단일 후보가 결국 누가 되겠느냐고요? 그거야 두말할 것 없이 鄭후보죠』
朴智元 실장, 『이번 大選은 재미가 없다』일요일인 11월24 낮.
북한산 등산을 마친 朴智元(박지원) 대통령 비서실장과 서울의 한 호텔에서 만났다. 점심식사를 하면서 한창 진행중인 盧武鉉, 鄭夢準 후보단일화, 4000억원 對北지원설 등에 대해 세 시간 이상 이야기를 나눴다. 朴실장은 대부분의 이야기에 「오프 더 레코드(非보도)」를 요청했다.
그는 3金이 무대에서 사라진 『이번 大選은 재미가 없다』고 했다. 『李會昌 후보쪽이나, 盧武鉉 후보 쪽이나 열심히 움직이질 않아요. 연습삼아 나온 것 같은 鄭夢準씨는 더 말할 것도 없고』
─大選 선거일이 코앞인데 두 후보진영에서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겠죠.
『안 그렇더라구요. 제가 며칠 전에 민주당 반장(신문 방송사의 민주당 취재팀장) 열여섯 명하고 저녁을 했어요. 한 명도 빠지지 않고 다 나왔습니다. 제가 깜짝 놀랐어요. 「大選이 벌써 시작했는데, 李會昌, 盧武鉉 후보 쪽에서 밥 먹자고 해서 당신들은 지금 정신이 없을 것 아니냐. 힘 다 빠진 朴智元이가 부르는데 어떻게 전부 나왔느냐」고 물었어요. 기자들이 「후보들 하고 한 번도 이런 자리가 없었다」고 해요』
─1997년 大選 때는 어땠습니까.
『후보는 물론이고 모시는 사람들까지 목숨 걸고 뛰었죠. 金大中 대통령께서 당선되신 날 제가 수첩을 한번 훑어 봤어요. 제가 원래 메모를 꼼꼼하게 하는 편이잖아요. 그날까지 1년 동안 일요일을 딱 두 번 쉬었어요. 金大中 대통령도 일요일을 딱 이틀 쉬었다는 얘기 아닙니까. 칠십 노인이 대통령 되겠다는 일념에 일년내내 새벽 6시부터 밤 12시까지 뛰었어요.
저는 「왜 金大中인가」를 설득하느라고, 새벽 2~3시까지 기자들하고 술을 마셨습니다. 그러고 새벽 5시까지 金大中 후보 댁으로 달려갔어요.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血便(혈변)이 나오더라구요. 李會昌 후보진영에서 金大中 후보의 선거운동을 벤치마킹했는데, 일정의 절반도 소화를 못 해냈다고 해요』
朴실장은 1997년 大選 선거일까지 6개월 동안 조선·동아·중앙일보에서 金大中 후보에 불리한 기사가 나오는 것을 막는 임무를 맡았다. 힘없는 야당 대통령후보의 홍보특보가 할 수 있는 일은 「정성으로 기자들을 감동시키는 일」뿐이었다.
『J일보 편집국장은 마감 때쯤 내가 편집국에 들어가면 눈길 한번 안 줬어요. 편집국에 들어가서 부장들, 副국장, 화백에게 인사하고, 편집국장 자리 바로 옆에 딱 40분간 앉아 있었다. 40분 지나면 「잘 부탁드립니다」 하고 나왔어요. J국장이 헤어질 때 하는 말이 「내일은 제발 오지 말라」예요. C일보 주필은 길 거리를 걷다가 돌멩이라도 걷어차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 아닙니까. 걸리면 뭐든지 조지고 시비를 걸잖아요. 그런 양반이 6개월을 매일 찾아가니까 「왔느냐」고 반갑게 아는 척을 해요』
1992년 12월 울산 태화강변에서 민자당 崔炯佑(최형우) 의원의 大選 찬조연설을 듣던 기자는 귀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여러분, 이 崔炯佑가 어제 오줌을 쌌습니다』
崔의원의 연설은 그렇게 시작했다.
『술 먹고 들어가서 자다가 오줌을 쌌어요. 50代인 제가 술 먹고 실수를 했습니다. 여러분 팔십이 다된 노인(국민당 鄭周永 후보)이 오줌 싸고 돌아다닌다는 얘기가 있습니다. 팔십 노인이 오줌 싸는 건 당연한 거 아닙니까』
보스를 위해 감옥에 가는 것을 마다하지 않던 3金의 家臣(가신)들은 激烈(격렬)했다. 상대후보 마타도어 정도는 크게 부담스러운 일도 아니었다.
『우리 영새미』, 『우리 다이쭈』, 『우리 종필이』가 사라진 유세장에서는 청중들에게서도 激情(격정)을 찾아보기 어려웠다. 30代가 주축인 「노사모」가 유세현장에 몰려나와 盧武鉉 후보를 열성적으로 응원했지만, 金泳三, 金大中, 金鍾泌에 대한 지역 유권자들의 뜨거움에는 못 미쳤다.
정서적 일체감, 정치적 충성심을 느끼지 않는 두 후보를 앞에 놓고 유권자들의 마음은 오락가락했다. 정치 巨人(거인)들이 사라진 첫 번째 大選은 20代와 30代를 「지역」이라는 3金정치의 족쇄에서 풀어 놓았다.
그래서 이번 大選에서 盧武鉉, 李會昌 후보의 지지율 격차는 크게 출렁거렸다. 하루 사이에 3%, 100만 명 가까운 사람이 마음을 바꿨다는 엄청난 여론조사 결과도 나왔다. 후보를 정하지 못한 浮動層(부동층)이 선거 막바지까지 30%에 달했다.
20代와 30代의 콘크리트 같은 盧武鉉 지지는 『선거판이 지역구도로 가든, 보혁구도로 가든 우리가 무조건 승리』라는 李會昌 후보의 계산을 헝클어 버렸다. 20代와 30代의 지지는 盧武鉉을 새로운 대통령으로 당선시키는 가장 중요한 동력이었다.
깨진 3파전의 꿈11월25일 자정.
鄭夢準, 盧武鉉 두 사람은 후보 단일화에 합의했다. 단일 후보는 민주당의 盧武鉉 후보. 大選 선거판과 구도를 잘 짜서, 만만한 후보 두 명을 끝까지 데리고 가면서 싸움에서 이기겠다던 李會昌 후보의 선거전략은 무산됐다. 후보 단일화 직후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盧후보는 李후보를 6.5% 포인트 차이로 앞섰다.
李후보 진영은 왜 마지막 순간까지 단일화가 되지 않을 것으로, 되더라도 별 효과가 없을 것이라고 誤判(오판)했을까. 후보단일화를 성사시킨 「국민 통합 21」의 대변인 金杏씨의 얘기다.
『젊은 기자들까지 3金 시대의 시각을 버리지 않더라구요. 하나같이 「단일화는 절대 안 될 거다」는 거예요. 단일화하고 나니까 기자들이 「金杏이가 되지도 않는 게임에 鄭夢準을 밀어 넣어 죽여버렸다」고 하대요. 그렇지만 盧武鉉씨나 鄭夢準씨는 金씨가 아니잖아요. 타결 일보 직전에 鄭후보의 결심을 받으려고 전화를 했더니 보좌관이 「기도하러 들어갔다. 전화를 연결할 수 없다」고 해요.
저쪽 대표인 민주당의 신계륜 의원은 기획본부장인 李海瓚 의원과 전화통화를 했어요. 李의원이 「야, 너, 盧후보 팔아 먹으려고 작정했냐. 당장 때려치우고 나와」라고 고함을 치는 게 옆에서 들렸어요. 鄭후보가 단일 후보가 될 가능성은 사실 「50 對 50」이었어요. 권노갑씨나 崔炯佑씨가 협상대표였다면 보스가 단 1%라도 질 가능성이 있는 판으로 보스를 끌고 갈 수 있었겠어요. 하지만 신계륜 의원이나 저는 권노갑, 崔炯佑가 아니잖아요. 「3金 시대」가 끝났다는 걸 언론도, 정치판에 있는 사람도 실감을 못 하더라구요』
11월 26일.
「北風」과 「美風」이 정면 충돌했다. 북한은 개성을 신의주에 이어 경제특구로 추가 지정했고, 경의선과 경의선 철도연결을 위해 지뢰 제거작업을 재개하겠다고 선언했다. 이날 미국의 부시 대통령은 허바드 주한 미국대사를 통해 의정부 여중생 사망사고에 대해 사과의 뜻을 표시했다.
『北核 문제에도 불구하고, 남북의 대화통로를 열어 놓아야 북한을 설득할 수 있다』는 盧후보의 주장은 힘을 얻었다. 부시 대통령은 12월10일 방한한 아미티지 美 국무부 副장관을 통해 다시 사과의 뜻을 밝혔다. 하지만 사회 전반의 감성적인 反美는 수그러들지 않고 위력을 발휘했다.
盧후보는 SOFA 개정을 요구하는 시민단체의 서명요청에 응하지 않았다. 그는 『대통령이 될 사람으로서 시민단체의 모임에 참여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며 시위 동참 요구를 거부했다. 치솟는 反美정서로 표는 표대로 챙기고, 左(좌)에서 벗어나 中道(중도)적 위치로 이동하는 듯한 모습을 보임으로써 중도 보수, 나아가 보수진영을 안심시키는 제스처를 취했다.
『盧武鉉이 당선되면 盧武鉉 정권』11월29일 오후 2시30분.
포항 죽도 시장. 임종석, 추미애 의원이 찬조연설을 한 후 盧武鉉 후보가 트럭을 개조한 유세버스에 올랐다. 경호원을 포함한 민주당 사람들이 40여 명을 넘겼고, 인파는 많이 잡아야 100여 명 정도였다.
盧후보는 20여 명의 사진기자 텔레비전 카메라 기자를 향해 동전이 담긴 돼지 저금통과 꽃다발을 흔들었다.
盧후보는 이웃 사람들에게 이야기를 건네는 투로 연설을 시작했다. 미국의 大選후보들이 전국을 돌며 벌이는 「마을 집회(town meeting)」를 연상시켰다. 『국민 여러분』으로 시작하는 3金과 전혀 다른 스타일이다. 그 점에서 李會昌 후보의 연설은 「3金型」에 가깝다.
한나라당은 선거 초반 盧武鉉을 철저하게 무시하는 선거전략을 채택했다. 「反金大中」의 거센 파도를 일으켜, 盧武鉉을 침몰시키겠다는 전략이었다. 선거 구호는 『盧武鉉은 金大中의 양자』였다.
盧후보는 포항 죽도시장에서 『盧武鉉이 당선되면 金大中 정권이 아니라 盧武鉉 정권입니다』고 목청을 높였다. 盧후보는 선거전에서 金大中과의 고리를 철저히 차단했다.
신문광고 텔레비전 광고에서 「민주당」이라는 세 글자를 빼냈다. 「국민 후보 盧武鉉」이 그의 공식 직함이 됐다. 盧후보의 선거유세단에는 金大中이나 동교동 냄새를 느낄 수 있는 사람은 모두 배제했다.
단골 찬조연사는 정동영, 추미애, 임종석이었고, 전국구인 許雲那 의원이 처음부터 끝까지 동행했다. 盧후보는 영남지역을 돌며 『나는 金大中의 양자가 아니다』고 선언했다.
<여러분 제가 민주당 대통령 후보입니다. 그런데 부산과 영남에서 안 알아 줍니다. 「사람은 좋은데 당이 나쁘다」고 해요. 李會昌씨도 덩달아서, 후보는 난데 金大中대통령만 계속 공격합니다. 후보는 저잖아요. 제가 대통령이 되면 盧武鉉 정권입니다. 내가 대통령이 되면 그건 호남 정권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영남 대통령이라고도 하지 않겠습니다. 전국을 통합하는 통합 대통령이 되는 겁니다>
『부패를 청산할 사람은 李會昌이 아니라 나다』11월29일 오후 5시.
울산 롯데 백화점 앞 거리유세에서 盧후보는 『한나라당이 부패정권 심판을 얘기하는데, 李會昌씨가 부패청산을 얘기할 자격이 있느냐. 부패를 청산할 수 있는 사람은 나밖에 없다』고 외쳤다. 盧후보는 이번 大選을 「서민 對 특권·귀족 계층의 싸움」으로 규정하면서, 정치혁명과 낡은 정치 청산을 강조했다.
레이건 대통령의 副비서실장이었던 마이클 데버는 『대통령이 자신의 의사를 국민에게 전달하는 뛰어난 전략 中 하나는 명확하고 간결한 메시지의 반복』이라고 했다.
盧후보는 처음부터 끝까지 「새 정치」, 「낡은 정치 청산」을 반복함으로써 유권자의 마음을 파고드는 데 성공했다. 그는 민주당의 국민참여를 통한 大選후보 선출. 여론조사를 통한 후보단일화가 「새 정치」의 징표라고 끊임없이 주장했다.
「낡은 정치 청산」이라는 盧후보의 구호는 한나라당 李會昌 후보의 「부패 정권 청산」을 압도했다.
<李會昌씨는 아들 둘을 군대에 안 보냈습니다. 지난 大選 때는 국세청을 동원해서 기업들 목을 졸라서 166억원을 거둬서 썼습니다. 지난 총선 때는 안기부 예산, 나랏돈을 수천억원 가져다가 한나라당의 선거를 치렀습니다. 그때 李후보가 선거대책위원장이었습니다. 이런 사람이 어떻게 부패를 청산한단 말입니까>
11월30일.
大選 선거운동 시작 후 두 번째로 자신의 정치적 고향인 부산을 찾은 盧후보는 街頭(가두) 유세에서 『부산이 결심하면 끝장난다』, 『東南風(동남풍)을 일으켜달라』고 호소했다.
盧후보는 자신을 『부산의 아들』, 『절벽에서 떨어졌지만 살아 돌아온 사자 새끼』라고 자부했다.
<충청도는 행정수도 옮긴다고 밀어 준다고 합디다. 호남은 盧武鉉이를 다 지지합니다. 이제 金大中 시대는 끝났습니다. 부산 사람이 호남·충청·서울에서 다 지지받는 것은 좋은 일 아닙니까. 나보고 자꾸 金大中 대통령 양자라고 하는데, 양자 갔다고 本家(본가) 저버리는 사람 봤습니까. 고마 이번에 한 번만 도와 주이소>
盧武鉉 후보의 언론특보인 張東勳(장동훈)씨는 서울에서 계속되고 있는 한나라당의 「국정원 도청 폭로」에 대해 『지금까지 아무런 영향이 없는 것으로 조사됐다』며 자신감을 보였다.
盧武鉉의 「부산 경남 遠征(원정)」에 맞서 한나라당 李會昌 총재도 12월1일 大選 선거운동 시작 후 두 번째로 부산을 찾았다.
崔秉烈 선대위 공동의장과 柳興洙(유흥수) 부산 시지부장등 부산지역 의원들도 하루 종일 가두 유세를 통해 盧武鉉 후보를 공격했다. 『盧武鉉은 金大中의 후계자다』 『부패정권이 내세운 후보를 심판하자』는 공격이 主流였다.
<金大中씨는 민주당 후보가 마치 現 정부를 계승하는 사람이 아닌 듯 가장하고 있습니다. 이게 무슨 속임수입니까. 당의 후보는 대의원과 당원들이 뽑는 겁니다. 민주당은 자기 黨 후보를 대한민국 사람들이 뽑은 걸로 속임수를 썼습니다. 마지막 속임수가 후보단일화입니다. 서민 노동자의 후보가 어떻게 재벌 후보와 단일화를 합니까. 썩어 빠진 정권의 후보가 아닌 듯 속임수를 쓰는 데 절대 속아서는 안됩니다>(洪思德 前 국회 부의장)
<金大中 정부는 현대에 돈을 퍼주고, 現代는 북한에 퍼주고, 빵꾸(펑크)난 돈은 공적자금으로 메웠습니다. 그 현대의 사람과 민주당과 한덩어리가 돼서 정권을 잡으면, 金大中 정권의 부패는 어떻게 밝히겠습니까. 부산 사람들은 이 부도덕한 정권을 심판해야 합니다>(李在五 의원)
12월1일.
이날 한국갤럽과 조선일보의 여론조사에서 李會昌 對 盧武鉉의 지지율은 36.9% 對 43.2%로 나타났다. 지지율 차이는 6.3%다. 후보단일화가 이뤄진 11월25일 조사에서 두 사람 간의 지지율 격차는 6.5% 였다. 1주일 동안 지지율 격차에 의미 있는 변화가 발생하지 않은 것이다.
두 사람이 1차 대회전을 벌인 부산지역에서 李會昌 후보의 지지율은 46.9%, 盧武鉉 후보의 지지율은 39.6%로 조사됐다.
12월2일 오전 9시
김해공항. 李會昌 후보는 김해공항 귀빈실에서 국정원의 도청을 공격하는 긴급 기자회견을 가졌다. 「국정원 도청 폭로」가 탄력을 받지 않자, 李후보가 직접 나서서 기자회견을 자청한 것이다.
다음날 아침 조선·동아·중앙 등 주요 신문이 일면 톱 기사로 다뤘지만 유권자들에게 큰 감흥을 주지 못했다. 이런 사실은 여론조사에서 확인됐다.
정치혁명은 이미 시작됐다李會昌, 盧武鉉 두 후보의 부산 攻防(공방)을 지켜보면서, 기자는 「한국의 정치혁명이 이미 시작됐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한국 정치는 절망』이라고 모두가 얘기해 왔지만, 기자는 한국 정치의 희망이 싹트고 있는 것을 보았다.
무엇보다 돈 선거, 조직 선거가 선거현장에서 사라지고 있었다. 釜山 晉州 馬山의 큰 길 모퉁이에서 지지 후보 피켓을 들고 지나가는 차량을 향해 고개를 꾸벅 꾸벅 허리를 굽히는 「아주머니 부대」는 舊시대의 유물처럼 느껴졌다.
한나라당 부산지역 국회의원 10여 명이 모두 출동한 거리유세의 청중은 100명을 넘기지 않았다. 의원들이 자신의 지역구에서 동원한 婦女(부녀) 당원들이 청중의 主를 이뤘다. 이들이 하루 10여 곳에서 거리유세를 한다고 하더라도, 한나라당의 부산 국회의원들이 선거운동 기간 동안 만날 수 있는 사람은 2만여 명에 불과하다는 계산이 된다.
세몰이도 끝났다.
한나라당 李會昌 후보는 「盧風」이 가라앉지 않자, 현역 의원들과 지구당 위원장을 전국으로 내려 보냈다. 하지만 12월6일 현역 의원들이 지역에 내려가 돈을 풀고, 그 돈으로 분위기를 장악하는 선거는 한계가 분명히 드러났다. 한 지구당에 2억~3억원씩을 내려 보낼 돈이 없기 때문이다.
한나라당 부산시지부 尹泰慶(윤태경) 사무 부처장은 『보스가 큰 돈을 모으고, 그 돈을 풀어서 조직을 장악하는 3金型 정치는 이미 끝났다』며 『이번 大選은 새로운 정치로 가는 문을 연 선거로 평가될 것』이라고 말했다.
尹부처장은 『3金씨는 유권자들과 함께 해 온 추억이 있는 사람들』이라며 『「내 지역 출신이 아니라도 굳이 상관없다」는 생각이 젊은 층을 중심으로 퍼져가고 있고, 이런 추세가 大選에 엄청난 영향을 줄 것 같다』고 했다. 그는 『정치권에서 늘 얘기돼 온 중앙당과 지구당 폐지가 정치권의 협상과 결정이 아니라 「인터넷 혁명」에 의해 이뤄질 날이 멀지 않았다』고 내다봤다.
『지금까지 지구당 위원장들은 2000~3000명의 조직을 관리해 왔다. 집권당이라고 해도 그 사람들에 줄 반대급부가 제한돼 있다. 이걸 자발적인 지원자 그룹으로 전환시키지 못하는 정치인들은 도태될 것이 분명하다. 돈 주고 돌릴 조직이 아니라면, 국회의원 회관에 여직원 하나두고 이메일 보내서 언제 어디서 모이자고 연락을 하면 된다. 돈 들여서 청년부장, 여성부장, 조직부장을 둬야 할 이유가 없다』
盧후보의 유세장에는 인터넷으로 연락을 취해 달려 온 30代 회사원들이 주축을 이뤘고, 李후보 유세장에는 국회의원과 지구당 위원장들이 동원한 40代, 50代 아주머니들이 많이 눈에 띄었다. 그런 관점에서 본다면 한나라당은 시대변화를 따라가지 못하는 「문화지체」 현상을 보였고, 민주당은 시대의 흐름을 따라가는 조직이었다.
『200만 명을 굶겨 죽인 지도자가 惡이 아니면 善이란 말인가』12월5일 오후 12:00~14:00.
기자는 주한 미국 대사관의 정치분야 담당관 등 직원들과 대사관 주변의 한 중국 음식점에서 점심을 함께 했다. 기자는 11월26일에도 미국 대사관 사람들을 만나 치솟는 反美 감정과 「大選 이후」의 韓美 공조에 대한 미국 측의 심각한 우려를 들었다.
大選 국면에서 미국 대사관 사람들이 한국 언론과 이렇게 활발하게 접촉한다는 사실은 그만큼 그들의 걱정이 크다는 것을 보여주는 반증이다. 2003년 초로 예상되는 북한 核시설에 대한 IAEA의 사찰, 우라늄 농축을 통한 북한의 핵개발 저지를 위해, 미국은 동맹국인 한국의 적극적인 협력이 필요한 입장이다. 韓美 군사동맹의 강화가 아니라, 韓美 충돌로 가는 大選정국의 정세가 이들은 못내 믿기지 않는 표정이었다.
「盧武鉉 정부」의 등장 가능성에 불안감을 감추지 못했다.
의정부 여중생 사망 사건에 관한 미국측의 상세한 설명이 있었다. 궁금한 게 많은 것은 미국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기자에게 질문을 쏟아 놓았다.
─(美 대사관 관계자) 북한이 플루토늄 核폭탄에 이어 우라늄 농축으로 核개발을 하고 있는데 한국 사람들은 왜 두려워하지 않나.
『한국 사람들은 金正日보다 부시를 걱정한다』
─왜 그런가.
『북한 核을 제거하기 위해 한반도를 전쟁으로 몰아넣지 않겠느냐는 생각이다』
─그러면 한국 사람들은 북한이 核폭탄을 보유해도 좋다는 건가.
『보유하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건 미국의 문제지, 우리의 문제가 아니라고 여기는 분위기다』
─북한의 核폭탄이 한국인들을 겨냥한 것이 아니란 말인가.
『설마 우리를 향해 쏘겠느냐고 막연히 믿고 있다』
─한국전쟁을 한 지 얼마나 지났다고 그런 환상을 갖고 있나. 金正日이 어느 날 갑자기 核폭탄을 내놓고 평화를 선택하겠나.
『많은 한국 사람들이 북한하고 그럭저럭 끌고가다 보면(muddling through) 무슨 수가 나오지 않겠느냐고 본다』
─反美를 외치는 사람들이 원하는 대로 주한미군이 물러난다고 하자. 한국인들은 그 이후 한반도에서 어떤 통일이 이뤄질 것이라고 생각하나. 북한이 원하는 방식으로 통일이 이뤄지기를 원하는 건가.
『反美를 외치는 사람들 가운데 그런 사람들이 일부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런 생각이 없이, 감성적으로 휩쓸리고 있다』
─부시 대통령이 「惡의 축」 발언을 하자, 여당(민주당) 사람들은 부시 대통령을 「惡의 화신(embodiment of evil)」이라고 불렀다. 200만 명의 주민을 굶겨 죽인 지도자가 惡이 아니면, 善이라는 말인가.
『미국을 남북한 관계의 진전과 대화의 장애물로 보는 시각이 漸增(점증)하는 추세다. 金大中 정부의 일방적인 對北 유화정책이 이런 분위기를 강화시켜 왔다』
깨춤을 추는 李會昌의 선거유세 12월7일 오후 4시.
서울 동대문 斗山(두산) 타워 앞 광장. 李會昌 후보의 가두연설을 듣기 위해 기다리는 20여 명의 외신기자들이 눈에 띄었다. 李후보 측은 이 연설회가 끝난 뒤 외신기자 간담회를 갖겠다며 이들을 초청했다.
유세차량 위에서는 머리를 노란색으로 물들인 유명 코미디언이 「왜 李會昌이 대통령이 되어야 하는지」를 큰 목소리로 떠들고 있었다. 한국 말에 능통한 30代 후반의 일본 유력 언론의 특파원은 『저 사람 도대체 무슨 얘기를 하고 있는 겁니까』라며 한심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李會昌 盧武鉉 후보의 연설회장을 여러 곳 둘러봤다는 그는 『李會昌 후보 연설회장과 盧武鉉 후보 연설회장은 뭔가 좀 다른 것 같다』고 했다.
─뭐가 다른 것 같습니까.
『글쎄요. 딱 뭐라 잘라 말하기는 힘들고요. 한국 말로 이걸 어떻게 꼭 찝어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李會昌 후보 연설회장은 어수선하고, 盧武鉉 후보 연설회장은 차분하다는 그런 차이 아닌가요.
『예, 바로 그거예요. 저 코미디언이 뭐라고 떠드는데 머리에 남는 게 하나도 없잖아요. 그냥 아무렇게나 떠들어요. 盧武鉉 후보가 연설하기 전에 찬조 연설하는 명계남씨나 문성근씨 얘기는 가슴에 와 닿는 게 있어요. 盧후보 연설회장에 모인 사람들은 盧武鉉 후보의 얘기에 귀를 기울여요. 그리고 그 사람들 사이에 공감하는 뭔가, 이념적 동질성이 있어요. 李會昌씨 연설회장은 시장 바닥 같아요. 李會昌씨가 무슨 메시지를 던지는지도 잘 모르겠고요』
그는 盧武鉉씨의 지지율이 李會昌 후보를 앞서 있다는 사실에 놀라움을 표시했다. 그가 기자에게 거꾸로 묻기 시작했다.
─(日 특파원) 저는 한국 사람들을 이해하기가 정말 힘들어요.
『뭐가 이해가 안 된다는 말입니까』
─북한 核문제를 쉽게 풀 수 있다고 믿는 거죠. 그건 幻想(환상)입니다. 金大中 대통령이 북한의 核개발은 미국과 불가침 협정을 체결하기 위한 「빅딜用」이라고 얘기하잖아요. 그러면 얼마나 좋겠어요. 만에 하나 「빅딜用」이 아니고 남한을 협박하고, 굴복시키기 위한 거면 어떡할 겁니까?
『한국인들이 왜 그렇게 북한의 核위협에 무감각하다고 생각합니까』
─1993년에 核위기가 발생했을 때 한국 사람들이 「북한의 核폭탄은 남쪽에 쓰려는 게 아니다」고 했잖아요.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 저는 정말 모르겠어요.
『지금 한국 사회에 번지는 反美 분위기는 李會昌, 盧武鉉 두 후보 중에 어느 쪽에 유리할까요』
─물론 盧후보죠. 盧武鉉은 민족 자주를 주장하고, 李會昌은 親美다, 그런 분위기가 한국 사회에 있잖아요.
『그럼 당신은 李會昌 후보가 되는 게 2003년 초부터 시작될 북한 核위기 해결에 도움이 될 거라는 생각입니까』
─그래요. 다음 대통령은 북한을 변화시키고,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이 돼야 하는 것 아닙니까. 金大中 대통령처럼 「북한문제는 무조건 대화로 해결하고, 대화가 안되면 다시 대화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대통령이 다음 정권을 맡으면 북한 核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요.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를 最惡의 가두연설마침 李후보의 도착을 알리는 노래가 귀청을 때렸다. 노래는 「젊은 그대」였다. 李후보의 유세장에서 단골로 나오는 노래다. 사회를 보는 젊은 코미디언과 李會昌 후보가 사진을 찍을 때면 늘 뒤에 서서 「屛風(병풍)」 역할을 하는 젊은 국회의원들이 음악에 맞춰 몸을 흔들어댔다.
젊은이들에게 다가서겠다는 李후보 진영의 몸부림은 처절했지만, 40代, 50代가 주축인 청중들의 분위기와는 어울리지 않았다.
李후보는 채 5분이 안 되는 짧은 연설을 했다.
<이 李會昌이가 대통령이 되면 세계 속에 우뚝 선 세계 10위의 경제강국을 만들겠습니다. 직장이 없는 젊은이, 가장들이 일자리를 찾을 수 있는 강한 대한민국을 만들겠습니다>
<저는 SOFA 개정을 요구합니다. 이 李會昌이가 대통령이 되면 당당하게 어느 누구 어느 나라와도 맞서서, 이 나라의 안녕과 안전을 위해 할 소리를 하는 강력한 대통령이 되겠습니다>
李후보는 이날 저녁 참가하겠다고 발표했던 의정부 여중생 사망사건 규탄 촛불시위에 참석하지 않기로 왜 결정을 번복했는지 설명하지 않았다. 우리 사회를 휩쓸고 있는 「反美 감정」에 대한 자신의 입장 표명도 없었다.
연설은 건조하고, 알맹이가 없었다.
12월7일 오후 5시.
동대문에 이어 서울 대학로 마로니에 공원에서 李會昌 후보의 가두유세가 열렸다. 또 다른 유명 코미디언이 사회를 맡은 이곳 연설은 이번 大選에서 最惡(최악)의 가두연설로 꼽힐 만한 수준이었다.
『춤을 추세요, 춤을』李후보가 한 문장을 얘기하고 날 때마다, 이 코미디언은 목청을 높이며 『나라다운 나라를 만들 李會昌 후보를 청와대로 보냅시다』, 『李會昌, 대통령』을 외쳤다. 李후보의 연설은 코미디언의 외침과 뒤섞여 연설이 아니라 구호 제창으로 들렸다.
코미디언의 연설회에 李후보가 찬조 연사로 나온 것인지, 李후보 연설회에 코미디언이 찬조연사로 온 것인지 알 수 없는, 한 편의 笑劇(소극)이었다. 李후보 뒤로 죽 늘어서 있던 김영선, 김영춘 의원 같은 젊은 국회의원들은 李후보의 연설을 토막토막 끊어, 엉망으로 만들어 버리는 코미디언을 제지하지 않았다.
코미디언의 연설 같은 추임새는 한참 동안 계속됐다. 치솟는 反美 감정, SOFA 개정과 관련한 얘기가 나오지 않을까 귀를 기울였으나, 李후보의 연설은 그걸로 끝이었다.
李후보의 연설이 끝나자 「젊은 그대」가 다시 쾅쾅 울려 나오고 젊은 국회의원들은 코미디언들과 함께 정신없이 몸을 흔들어댔다. 李후보는 그들과 손을 맞잡고 율동을 같이 했다.
옆에 있던 한 보좌관은 『연설 끝나면 부지런히 춤을 추세요. 춤 한번 잘추면 100만 표입니다』고 李후보에게 소리쳤다.
한나라당의 전략을 수립하는 사람들은 오래 전부터 두 가지 迷信(미신)에 빠져 있었다. 어떻게 해서든 李會昌 후보를 서민과 젊은이들에게 영합하는 상품으로 포장해야 한다는 것이이 하나고, 다른 하나는 「이념과 이데올로기를 얘기하면 20代, 30代 표가 달아난다」는 것이었다.
이런 편집증적인 노력에도 불구하고, 20代와 30代의 표가 盧武鉉 쪽으로 집결한다는 소식에 한나라당 사람들은 恐慌 상태에 빠져들었다. 그래서 젊은이들에게 인기 있는 코미디언들을 불러오고, 유세장은 더욱 소란스러워졌다.
왜 李會昌씨는 『어이 고만해라. 정신 산란하다. 굿판 걷어라. 이기든 지든 내 꿈과 정책을 국민들에게 얘기나 해야겠다』고 못 하는 걸까? 왜 李會昌씨는 참모들에게 『당신들은 이런 정신없는 유세판이 대법관을 지낸 나한테 어울린다고 생각하느냐. 생긴 대로 가자』고 야단치지 못하는 걸까? 딱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청중의 마음을 장악하는 盧武鉉의 연설盧武鉉 후보의 11월29일 경북 浦項 죽도시장 가두연설은 초반에 청중들의 호응이 신통치 않았다. 盧후보가 연설을 시작하자 노사모 회원들은 분위기를 살리려고 『盧武鉉, 대통령』을 連呼(연호)했다. 썰렁한 연설장 분위기와 어울리지 않자, 盧후보는 연호를 곧바로 중단시켰다.
『여러분, 제가 우리 노사모 회원들 극성 때문에 죽겠어요. 노사모 회원 여러분, 오늘 이곳에 오신 분들은 조용히 제 얘기를 듣고 싶어하시는 것 같네요. 그렇게 해 주실 수 있겠죠』
죽도시장 再개발 이야기를 주제로 한 盧후보의 연설이 10분쯤 이어지자 냉담했던 청중들은 간간이 박수를 보냈다.
『우리 아들 곧 장가 보내야 하는데 지금 제가 전세집 마련해 줄 돈이 없습니다. 전세값 잡겠습니다. 그리고 우리 아들이 집 살 때까지는 집값도 확실하게 잡겠습니다』
소박한 이야기에 환호와 폭소가 터져 나왔다. 그렇게 盧후보는 청중의 마음과 분위기를 장악했다.
12월7일 오후 4시.
李會昌 후보가 마로니에 공원에서 춤을 추는 동안, 盧후보는 대구 서문시장 거리유세에서 「효순양, 미선양 사망사건」에 대해 자신의 입장을 상세히 설명했다.
<오늘 저녁 6시에 전국에서 많은 시민들이 효순양, 미선양의 죽음을 애도하는 촛불시위를 합니다. 저도 이 시위에 참여하거나 적어도 방문이라도 해서 격려라도 해야 하지 않나 고심을 많이 했습니다>
<제가 단순한 시민이나 시민단체 간부, 정당의 대표라면 부담없이 쉽게 말할 수도 있을 겁니다. 그러나 얼마 있지 않아서 대통령이 될지 모르는 사람의 말과 행동은 대통령만큼 무게가 있어야 합니다. 대통령 후보의 행동은 대통령과 같이 외교관계에 책임 있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시위에 참여하지 못한 데 대해 부끄럽게 생각하고 사과드립니다>
<제가 대통령이 되면 제일 먼저 불평등한 韓美행정협정을 고치겠습니다. 남북문제, 북한 核문제 때문에 빠른 시일 안에 미국 대통령을 만나야 할 겁니다. 만나서 국민의 뜻을 가감없이 전하겠습니다. 소파를 개정해야 한다는 우리 국민들의 마음을 전하겠습니다. 이를 개정해야 韓美관계가 돈독해진다는 것을 역설하고 협정을 개정하겠습니다>
도올 김용옥, 『李會昌의 삶의 역정과 유세현장에 괴리가 있다』12월7일.
李會昌 후보의 서울 유세장에는 중국 옷을 입은 도올 김용옥이 뒷짐을 지고 한가하게 서성이고 있었다. 문화일보의 평기자로 변신한 그는 12월9일자 문화일보에 李會昌, 盧武鉉 두 후보의 유세장 풍경을 기고했다. 毒說(독설)로 유명한 그답지 않게 표현이 부드럽다.
<盧후보의 부산 롯데 유세장(12월6일)과 李후보의 서울 두타 유세장(12월7일)은 콘트라스트가 극적이다. 부산 유세장의 분위기는 진지하고 열기가 넘쳤다. 서울 유세장은 분위기가 좀 피상적이고 어색했다. 떠들썩한 이벤트성 과시가 위주였다. (李會昌 후보)선거참모들의 전략에 약간 문제가 있다고 생각했다>
도올은 이런 의문을 함께 제기했다.
<그(李會昌)의 삶의 역정과 오늘의 유세현장이 무엇인가 괴리가 있는 것은 분명했다. 李후보는 자기가 치열한 선거의 와중 속에 들어 있다고 하는 의식조차 별로 없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대중 앞에 선 李후보는 매우 어색하고 인위적인 것처럼 보인다. 하여튼 李후보에게는 불리한 신의 魔術(마술)이다>
마로니에 공원 유세장을 떠나면서 기자는 유세버스 옆자리에 앉은 李후보의 한 측근에게 물었다.
『이렇게 선거 캠페인을 벌이고도, 李會昌 후보가 당선된다면 기적이 아닐까요?』
그는 공감했다.
『李후보는 자신의 이념적 정체성을 상실하고 혼돈에 빠졌고, 한나라당 선거 지휘부는 상황을 장악하지 못한 채 「표가 된다」는 쪽으로 우왕좌왕하고 있다. 지금 한나라당은 전략도 없고 전술도 없다. 민주당과 벌인 모든 전투에서 다 패배했다』
─李후보가 오늘(12월7일) 저녁 反美 집회인 촛불시위에 참석하려고 한 이유가 뭔가.
『李후보가 어제 大邱에 유세갔다가, 현장에서 그런 결정을 한 모양이다』
─反美 집회에 참석해야 표가 된다고 李후보에게 건의한 사람들은 누군가.
『대구에서 南景弼 대변인을 포함해 젊은 의원들이 가자고 했고, 李후보가 「검토해 보라」고 지시했다. 이걸 南대변인이 「참석할 예정」이라고 발표했다』
『20代·30代 표를 잡아야 한다는 강박관념』─온 사회가 反美로 들끓더라도, 李후보는 「反美는 안 된다」는 입장을 확실히 하고 韓美 군사동맹과 주한미군의 중요성을 얘기해야 하는 것 아닌가. 『검토해 보라』고 지시한 李후보의 판단에 문제가 있어 보인다.
『내 말이 그 말이다. 李후보는 보수가 아니다. 그 양반은 여중생 추모시위에 진심으로 가고 싶은 것 같다. 그리고 「保革(보혁)으로 몰아가야 한다」는 얘기만 나오면 당내의 젊은 국회의원들이 「표 떨어진다」고 펄펄 뛴다』
─우리사회의 보수층이 전체 유권자의 60% 이상이라는 게 여론조사 기관 사람들의 얘기다. 그래서 당시 金大中 후보도 선거운동이 끝날 때까지 『나는 중도 보수』라고 주장했다. 李후보가 보수 성향을 명확히 하면 표가 떨어진다는 사실이 확인됐나.
『다 어림짐작으로 하는 얘기지, 조사를 해 본 건 아니다. 한나라당은 어떻게든 20代와 30代 표를 잡아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있다』
─여론조사에서 李후보의 지지율이 盧후보에게 8% 가까이 뒤지는 걸로 조사된다. 뒤집을 방책이 있나.
『선거전에 들어서면서 우리가 민주당에 판판이 다 깨졌다. TV 광고도 뒤떨어지고, 홍보도 시원찮고, 유세도 영 엉망이다. 이런 상황에서 李후보가 승리한다면 이건 기적이다. 하지만 나는 그 기적이 일어날 걸로 믿는다』
─그 기적이 뭔가.
『盧武鉉 후보의 좌파적 이념과 反美 성향에 불안을 느낀 중산층과 보수층, 우리 사회의 말 없는 다수가 결집할 걸로 믿는다』
─盧후보의 이념을 놓고 한나라당이 戰線을 형성해야지, 아무 노력도 없이 보수층이 결집하기를 기다리는 건 감나무 밑에 누워서 감 떨어지기를 기다리는 것 아닌가.
『우리가 잘해서가 아니라, 국민이 현명한 판단을 해 주리라고 생각한다. 한 가닥 희망은 그것뿐이다』
『양키 고 홈』이 없는 反美 시위12월7일 오후 6시.
서울 광화문 교보빌딩 앞.
1980년대 후반과 1990년대 초반 한국 사회의 社會主義的(사회주의적) 변혁을 추구했던 낯익은 깃발들이 차가운 바람에 휘날렸다. 大選을 앞두고 한국 사회의 좌파 에너지가 대폭발한 것일까?
「한총련」, 「서총련」, 「조국통일범민족연합 남측본부」, 「민주주의민족통일 전국연합」
시위 도중 사망한 명지대생 姜慶大(강경대) 군과 성균관大 여학생 金貴井(김귀정) 양의 시신을 앞세워, 취약했던 盧泰愚(노태우) 정권을 벼랑 끝까지 몰아붙였던 1991년 거리 시위가 떠올랐다. 화염병과 쇠파이프, 룸펜 프롤레타리아로 구성됐던 시위의 선봉대 「밥풀떼기」, 춤추는 「지랄탄」(아스팔트 위에 떨어지면 방향을 예측할 수 없게 튀는 다연발 최루탄)….
시위 주최 측에서 틀어 주는 「엿 먹어라, 미국(Fucking U.S.A.)」 같은 反美 선동가에서는 『주한미군 몰아내자』, 『양키놈들을 쓸어버리고』 같은 가사들이 흘러 나왔지만, 시위 주최 측에서는 「주한미군 철수」를 얘기하지 않았다.
미군 장갑차에 치어 사망한 두 여중생을 기리는 이 反美집회에서는 몇 가지 정해진 구호가 되풀이돼서 사용됐다. 촛불만이 거리를 뒤덮은 시위였다. 『미군 철수하라』는 구호가 나오지 않는, 독특한 反美집회였다. 시위에서 나온 구호는 서너 가지였다.
『미선이를 살려내라』, 『효선이를 살려내라』, 『소파 개정하라』, 『살인 미군 처벌하라』
시위 현장에는 월드컵 때 서울시청과 광화문 일대를 메웠던 20代들이 몰려 나왔다. 어린 고등학생들도 눈에 띄었다. 이념으로부터 자유로운 20代들을, 이념지향이 뚜렷한 30代들이 동원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한나라당 사람들은 『시위가 미군 철수를 요구하면서 과격하게 흐르거나, 물리적 충돌이 발생할 경우 보수진영들의 불안심리를 자극할까봐 시위를 철저하게 조율했다』, 『大選용 反美집회다』고 주장했다.
오후 6시30분쯤, 연단에서 100m쯤 떨어진 교보빌딩 앞의 시위대 쪽에서 갑자기 거친 함성이 터져 나왔다.
『李會昌은 물러가라』, 『물러가라』, 『李會昌은 미국 대사관으로 들어가라』
시위를 지휘하는 사회자가 『李會昌씨가 오늘 집회에 참석하려다가 당내 반대로 참석하지 못했다』는 요지로 설명한 것이 「李會昌씨가 참석했다」로 잘못 전달돼 일어난 해프닝이었다.
그 자리에 서 있던 젊은이들은 한나라당 李會昌 후보에게 강한 적개심을 드러냈다.
『여기가 어디라고 와』, 『돌멩이 안 던진 것만도 다행이지』, 『李會昌이는 부시하고 가서 살라고 해』
민주당은 大選을 앞두고 한껏 고조된 反美 분위기가 盧武鉉 후보의 「민족 자주」적 성향을 부각시켜 득표에 도움이 될 것으로 계산했고, 여론조사 기관은 反美 분위기가 盧후보의 득표에 상당한 도움이 된 것으로 분석했다.
李會昌 후보는 우리 사회의 좌파 세력들이 멍석을 깔아 놓은 「反美 분위기」에 올라타기에 급급했다. SOFA 개정 요구서에 일찌감치 서명했고, 촛불시위에 참석하려 했다. 12월7일에는 허바드 주한 미국대사를 면담해서 SOFA 개정과 부시 대통령의 직접 사과를 요구했다.
12월8일 민주당은 이렇게 李會昌 후보를 공격했다.
<한나라당은 국민감정에 편승한 기회주의적 행위를 하고 있다. 두 여중생의 죽음을 선거에 정략적으로 이용해서는 안 된다>
선거 5일 전인 12월14일 시위대는 다시 광화문에 모였다. 10만 명이 모일 것이라는 당초 예고와 달리 집결한 인원은 5만 명(경찰 추산)쯤이었다.
길거리에는 「李會昌이 당선되면 이 땅의 민주주의는 없습니다」는 유인물이 살포됐다. 「주한미군 철수」를 요구하는 플래카드가 곳곳에서 눈에 띄었다. 하지만 시위 주최자들은 「주한 미군 철수」라는 구호를 사용하지 않았다.
反美의 물결은 盧후보의 지지율을 다지는 효과를 발휘했다.
이념전쟁이 공개적으로 펼쳐진 大選이번 大選에서는 공개적으로 「이념전쟁」이 펼쳐졌다. 북한 核문제가 다시 대두되면서 미국과 일본의 언론들은 일찌감치 이번 大選이 한국 유권자가 「민족이냐, 동맹이냐」를 선택하는 장이 될 것으로 예상했다.
월스트리트 저널의 발행인 케런 하우스는 지난 11월13일 社說(사설)에서 大選을 앞둔 한국 국민들에게 이렇게 물었다.
<사담 후세인이 정리되면, 부시 행정부는 외교정책의 초점을 북한의 대량살상무기 제거로 돌릴 것이다. 부시 대통령의 선택이 경제봉쇄가 될지 군사행동이 될지는 모른다. 하지만 그의 외교정책을 살펴보면 국제사회의 안전을 위협하는 「깡패 국가」를 제거하겠다는 부시 대통령의 의지는 확고하다.
북한은 깡패 국가 리스트에서 이라크 다음이다. 한국 정부의 협력이 없다면 부시 대통령은 이 문제에서 손을 뗄 수 있다. 주한미군을 철수시키고 북한 核문제를 북한 核위협의 직접적인 당사자인 한국과 북한에 넘기는 선택이다>
<부시 행정부가 어떤 정책을 택하든, 대화를 위한 대화는 아닐 것이다. 한국의 다음 대통령은 미국과 손을 잡고 북한에 맞서든지, 북한과 혼자 맞설 것인지 선택해야 한다>
盧武鉉, 『평화만 유지되면 통일은 언제 와도 좋다』12월8일 오후.
대전 지역에서 이동중인 盧후보의 유세 버스에 미국 시사주간지 뉴스위크의 도쿄 지국장 조지 웨프리츠가 탑승해 인터뷰를 했다. 기자도 함께 차에 올랐다. 뉴스위크의 관심은 온통 북한 核문제였다. 통역은 許雲那(허운나) 의원이 맡았다.
─당신의 유세장에 「양키 고 홈」이라는 플래카드를 든 사람이 있었다. 주한 미군 주둔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그런 플래카드가 있었나. 우리와 관계가 없다. 주한미군은 계속 주둔해야 하고, 韓美동맹은 지속돼야 한다』
─북한에 대해 국제사회의 우려가 증대하고 있다. 북한 核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건가.
『북한 核개발에 대한 확실한 정보를 갖고 있지 않다. 북한이 核개발을 하는 것은 자위적이거나, 전략적인 것으로 본다. 그렇기 때문에 南과 北, 北美 관계를 통해 잘 풀면 (북한이) 核개발을 포기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북한 核문제가 압박으로 해결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압력으로 풀려면 북한이 거부하고, 개방하지 않고, 고립 붕괴할지 모른다. 북한의 붕괴는 한국에 전쟁 만큼이나 위험하다. 북한 붕괴는 전쟁을 불러올 수도 있고, 붕괴 자체가 전쟁만큼 위험하다. (북한을) 지원하고, 代價를 약속하고 核 포기시키고, (북한을) 개방·개혁해야 한다』
─金大中 대통령이 똑같은 얘기를 5년동안 했지만 북한은 변화하지 않았고 이제는 우라늄 농축을 통한 核개발에 나섰다.
『북한이 약속을, 제네바 합의를 깼다는 증거가 분명치 않다. 미국과 북한은 서로 다른 주장을 하고 있다. 국제 분쟁이 있을 때는 대화로 풀어야 한다』
─한나라당 李會昌 후보진영은 「민주당이 反美 분위기를 선동해서 자신들을 조직적으로 파고들고 있다」고 주장한다.
『사실이 아니다』
(盧후보는 『모략이라고 얘기하고 싶지만, 이 정도로만 하죠』라고 했고, 許雲那 의원은 『사실이 아니다』고 통역했다)
─통일이 언제쯤 이뤄질 걸로 생각하나.
『통일의 시기를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평화다. 평화가 유지되면 통일은 천천히 와도 좋다』
─한나라당은 북한의 核 포기를 끌어내기 위해 압박이 필요하다는 입장인데
『한나라당의 강경대응은 대안이 없다. 갈등과 충돌이 점점 커졌을 때 문제를 어떻게 풀 것인가 대책이 없다. 그 사람들은 비판만 한다』
金正日에 대한 분노, 友敵개념이 없는 盧武鉉─북한의 金正日을 어떻게 생각하나.
『이런저런 평가를 하기보다 대화의 상대로 인정하는 것이 중요하다』
─조지 부시 미국 대통령은 어떻게 생각하나.
『훌륭한 정치인이라고 생각한다. 對北정책에 있어 한국과 다소 마찰이 있어서 우려된다』
「민족이냐, 동맹이냐 선택하라」는 미국의 물음에 盧후보는 「평화만 유지되면 된다」는 자세를 취했다. 그렇지만 그는 미국이 앞으로 취할 어떤 형태의 對北 압박도 반대한다는 뜻을 분명히 했다. 1994년 제네바 核합의로 미봉한 북한의 플루토늄을 통한 核개발, 우라늄 농축을 통한 새로운 核개발 시도에 대해서 『확실한 정보를 갖고 있지 않다』는 입장을 취했다.
北核 해결을 위한 한미간의 對北공조에 뚜렷한 선을 그음으로써 그는 결과적으로 「동맹보다 민족」이라고 선언했다. 『남북대화만 성공하면 다 깽판쳐도 괜찮다. 나머지는 대강해도 괜찮다』는 盧후보의 기존 발언까지 감안한다면, 부시 행정부와 盧武鉉 행정부는 정면 충돌의 레일 위에 올라선 것으로 보인다.
盧후보는 「북한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통일 얘기는 하지 말자」는 기존의 입장을 이 인터뷰에서도 확인했다. 그의 對北정책 외교정책에는 「正義(정의)」가 설 자리가 없다. 200만 명의 주민을 굶겨 죽인, 분단의 원인을 제공한 巨惡(거악)을 향해 「한반도의 평화만 유지된다면, 당신은 나의 대화 파트너」라며 나약한 평화주의자를 자처하고 있기 때문이다.
盧후보는 유세기간 내내 全斗煥 정권을 굴복시킨 1987년의 6월항쟁을 이어 받겠다고 했다. 그는 낡은 정치를 舊惡으로 선언하고 비타협적인 정치혁명을 약속했다. 하지만 對北정책의 영역에 들어서면 그에게는 友敵(우적)개념도 善惡(선악)의 가치관도 찾아 볼 수 없다.
盧후보는 이날 大田에서 新행정수도 이전 공약을 발표했다. 청와대와 국회, 全 중앙부처를 대전지역으로 옮기겠다는 사실상의 수도 천도계획이다.
『통일이 되면 평양으로 행정수도를 옮겨야 하지 않겠느냐』는 논의가 제기되는 상황에서 盧후보는 서울에서 자동차로 두시간이나 南下(남하)한 곳으로 수도를 옮기겠다고 나섰다. 『평화만 유지되면 통일은 천천히 와도 좋다』는 盧후보의 對北관이 반영된 공약이 아닐까?
일요일인 12월8일.
대전에서 열린 盧후보의 가두 유세 현장에는 30代들이 많이 눈에 띄었다. 盧武鉉을 지지하고 있는 「노사모」의 主동력은 30代다. 大田 은행동 시장거리에서 서울에서 왔다는 30代 회사원들과 대화를 나눴다.
30代의 정치개혁 열망이 盧風의 바탕─盧후보는 유세장에 나온 사람 중에 20代는 거의 안 보이고 대부분이 30代다.
『1987년의 6월항쟁을 경험한 30代와 40代 초반이 노사모의 주축이다. 「386세대」는 철옹성처럼 보였던 군사정권을 맨손으로 몰아내는 데 성공했다. 작은 힘이라도 모으면 사회를 변혁시킬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었고, 정치개혁에 대한 열망이 강력하다』
─직장도 있고, 아이들도 있을 텐데 어떻게 大田까지 오게 됐나.
『노사모 회원들끼리 인터넷으로 연락을 취한다. 오늘은 전국에 있는 회원들이 전화로 연락을 했다. 휴일이니까 내려와 봤다. 정치개혁하자고 말만 할 게 아니라 이 정도 투자는 해야 하는 것 아닌가』
─李會昌씨도 한때는 「대쪽 판사」라는 얘기를 들었고, 개혁의지가 강한 사람 아닌가.
『한나라당은 구태의연한 3金式 정당이다. 철새 정치인들을 다 받아들이고, 지금 뭐하는 건가. 무엇보다 북한을 과도하게 압박하는 게 마음에 안 든다』
盧후보는 자신이 겨냥해야 할 청중이 누구인지 분명히 알고 있었다. 은행동 시장거리 연설에서 그는 지지자들이 돼지저금통에 담아 보내준 성금에 감사하면서, 「정치혁명」을 거듭 약속했다.
『여러분이 보내준 돈이 50억원을 넘어 섰습니다. 1987년 6월항쟁이 생각 납니다. 군사독재를 물리치기 위해 우리는 손에 손에 돌멩이를 들고 일어났습니다. 돌멩이로 군사정권을 몰아냈습니다. 제2의 6월항쟁이 지금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번에는 손에 돼지저금통을 들고 말입니다』
李會昌 후보는 12월8일 정치개혁을 원하는 20代, 30代들의 뜨거운 열망을 겨냥해 「정치개혁 공약」을 내놓았다. 당선되면 자신의 재산까지 사회에 환원하겠다는 공약은, 궁지에 빠진 후보의 空約(공약)으로 치부돼 버리는 분위기였다.
경북 구미에서 거리유세를 하고 있던 盧武鉉 후보는 즉각 비웃음이 섞인 반응을 내놓았다.
『李후보는 5년 전에 집을 이미 팔았지 않습니까. 그러면 빈털터리여야 정상 아닙니까. 그 후에 보니 한 채에 월세가 900만원짜리, 100평이 넘는 빌라를 세 채씩 갖고 있었습니다. (제가 재산을) 헌납 안 해도 부정축재 안 하면 되겠지요. 대통령 마치고 큰 집 짓지 않고, 지금 살고 있는 똑같은 집으로 가면 되지 않겠습니까』
이날 아침 경북 김천에서 盧武鉉 후보의 유세를 취재하고 있는데, 대통령학을 연구하고 있는 고려대 咸成得(함성득) 교수가 전화를 걸어 왔다.
『며칠 전 李會昌 후보가 자문을 청하길래, 「이렇게 밀리고 있는데 아낄 게 뭐가 있느냐. 내놓을 것 다 내놓으라」고 얘기했다』는 咸교수는 『반응이 어떤 것 같아요』하고 물었다.
『글쎄요. 너무 늦은 것 아닙니까. 선거 열흘 앞두고 공약을 내놓으면 국민들이 진심이라고 믿겠습니까』
─그렇죠. 아무리 늦어도 정당개혁 정치개혁을 하자며 탈당했던 朴槿惠 의원이 복당할 때(11월19일) 정치개혁 공약을 내놓았어야 했어요. 그랬으면 정치개혁 공약이 살아 움직였을 거예요. 李會昌씨가 참 느리고, 타이밍도 못 맞추고, 하여간….
『大選 두세 달 전에는 중요 후보들이 「섀도 캐비닛(예비 내각 명단)」을 발표해야 한다는 게 咸교수 지론 아닙니까. 李후보에게 그 얘기는 안 했습니까』
─옛날부터 했죠. 「장관명단을 미리 발표하면 장관 국무총리 자리 노리는 국회의원들이 뛰지를 않는다」, 「黨에 분란이 일어난다」며 여러 가지 걱정이 많더라구요.
『오늘 내놓은 「집권하면 한나라당 국회의원은 내각에 기용 안한다」는 공약은 왜 했습니까. 국회의원들이 아무도 안 뛸 텐데』
─글쎄 말이에요. 미국식 3권분립으로 보면, 국회의원들이 행정부에 안 들어가는 게 맞는 얘기기는 하죠. 내가 李후보나 주변 사람들한테 「선거 6개월 전에는 大選공약 다 준비하고, 내각까지 짜라」고 수없이 얘기를 했는데, 지난 5년 동안 뭐했나 모르겠어요.
『급진 對 중도』李會昌 후보는 이날 저녁 MBC에서 방송연설을 했다. 李후보는 이번 大選을 「급진 對 중도의 대결」로 규정했다.
<이번 大選은 급진 對 중도 개혁, 불안하고 미숙한 세력을 택하느냐, 합리적이고 희망적인 세력을 택하느냐의 선택입니다. 합리적 개혁을 택함으로써 안정·희망을 이룰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
한번 대쪽은 영원한 대쪽입니다. 내 자신을 던져 부패를 청산하겠습니다>
그는 자신을 保守라고 부르지 않았다.保革(보혁)구도라는 말을 차마 쓰지 못하고, 「급진 對 중도」라는 準보혁구도 시스템을 짜내겠다는 얘기였다.
李후보의 측근은 달라진 전략을 이렇게 설명했다.
『세대구도로 싸움이 붙은 수도권에서는 40代와 민생문제에 포커스를, 부산·경남에서는 지역구도를, 충청에서는 보혁구도를 이끌어 내려고 한다. 세대 대책을 약간 세분하면, 20代에게는 일자리 등 미래의 희망을 전해 주고, 50代에는 안정을 강조하는 식이다』
런자 레인지에 생선을 한 마리 넣고, 머리는 강하게 익히고, 몸통은 살짝, 꼬리 부분은 중간 정도로 익히겠다는 얘기다. 선거를 열흘 앞두고, 수도권은 세대로, 부산·경남은 지역구도로, 충청에서는 보혁구도로 싸우겠다는 얘기가 과연 현실성이 있는 것일까? 그렇게 유권자를 정밀 폭격하면서 선거판을 끌고 갈 능력을 한나라당이 갖고 있는 것일까?
모든 전투에서 패배한 한나라당12월9일 아침.
한국갤럽 측에 전화를 걸어 여론조사 결과를 확인했다.
李會昌 후보가 정치개혁 공약을 발표하고, 盧武鉉씨가 충청권 유세를 벌인 12월8일자 갤럽 조사에서, 李會昌 후보의 지지율은 35.3%, 盧武鉉 43.3%였다. 격차는 8.0%. 大選 유세전이 시작한 이후 가장 크게 벌어졌다.
『한나라당은 모든 전투에서 패배했다. 남은 것은 우리 사회 보수층의 자각과 결집 뿐』이라는 한나라당 당직자들의 절망은 여론조사 수치에서 그대로 확인됐다.
한나라당은 패닉 상태에 빠진 모습이었다. 한나라당 홍보위원장인 박원홍 의원은 지역구인 서울 서초구에 머물고 있었다. 선대위 공동의장인 최병렬, 김용환 의원도 자신의 지역구에 있었다. 한나라당 의원들에게 『서울에 머물지 말고 다 자신의 지역구로 내려가라』는 동원령이 12월6일 내려졌다고 한다.
12월10일 밤.
저녁 무렵 열린 TV 경제 토론에서 李會昌 후보는 『한나라당은 부패 원조당』이라는 민주노동당 權永吉 후보의 공격에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모습을 보였다. 李후보는 權永吉 후보의 공격에 이런 답변을 내놓아야 하지 않았을까?
『지난 40년간 우리 국민들은 한국 경제를 100배 키웠습니다. 우리 세대는 세계 경제의 기적을 만들어 냈습니다. 그때 그때의 한국 정치는 절망감을 줬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4·19, 10·26, 6월 시위를 통해 민주화를 이뤄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식민지 해방국가 가운데 한국만큼 민주주의를 한국만큼 이룬 나라는 없습니다. 우리는 지난 40년간 정치·경제 두 부분에서 세계에서 제일 가는 성취를 이뤄 냈습니다. 대한민국은 희망이 있습니다』
위에 인용한 발언은 민주당의 盧武鉉 후보가 12월8일 경북 김천 유세에서 한 발언 그대로다. 盧후보까지 「자랑스러운 한국의 40년」을 역설하고 있는데도, 李후보는 「부패원조」라는 비난 앞에 엄마에게 혼난 아이 같은 모습을 연출했다.
그런 사람에게 매력을 느껴 표를 줄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선거일이 다가오는데도 그의 지지율은 35%에서 미동을 하지 않고 있었다.
美 8軍 관계자의 경고, 『주한미군 안에서 미군철수 얘기가 나온 것은 광복 이후 처음』미국이 아라비아에서 항해중인 북한 선박을 나포하고, 스커드 미사일 12기를 압수했다는 소식이 12월11일 外信(외신)을 타고 들어왔다. 北核 문제가 선거 막바지의 중요 선거 쟁점으로 등장했다. 『이번 大選에서 한국 사람들은 「동맹이냐, 민족이냐」를 선택해야 할 것』이라는 미국 언론의 경고가 현실로 등장한 것이다.
美 8군 관계자는 『이번 사건은 「북한 核만은 안 된다」는 미국의 단호한 의지를 보여 준 것』이라면서 『차기 한국 정부가 北核 문제 해결에 협조하지 않는다면, 미국은 혼자서라도 움직일 것』이라고 말했다.
익명을 요청한 그는 『한국 사회의 反美 분위기로 인해, 주한미군 내부에서 「이런 곳에서 근무할 필요가 있겠느냐」는 식으로 미군 철수 얘기가 나오고 있다』고 주한미군의 분위기를 전했다.
─미국이 아라비아海에서 미사일 수출에 나선 선박을 나포했다. 차기 한국 정부가 협조하지 않는다면, 북한의 核개발을 저지하기 위해 미국이 북한 해역 해상봉쇄 등의 독자적인 군사행동에 나설 수 있다는 의지 표명으로 보면 되겠나.
『미국은 단호하다. 북한이 核무기를 갖는 것을 두려워하는 게 아니다. 북한이 이렇게 미사일을 수출하듯, 核무기를 수출하는 날이 곧 온다는 게 미국의 우려다. 어떤 방법으로든 막을 것이다. 인도, 파키스탄이 核을 보유하는 것과 북한이 核을 갖는 것은 다르다』
─한국 사회의 反美 분위기에 대한 주한미군들의 반응은 어떤가.
『「어리둥절하다. 황당하다」는 게 솔직한 심정일 것이다』
─미국이 여중생 사망 사건 초기에 대응을 적절하게 하지 못했고, 위압적인 자세가 反美 감정의 악화를 가져왔다는 지적이 많지 않은가.
『여중생 교통사고 사망사건만큼 미군이 철저하게 대처한 사건이 없다. 사망한 지 이틀 뒤에 미군들이 촛불 추모예배를 했다. 나도 그 현장에 있었다. 그날은 미국과 한국이 월드컵에서 맞붙은 날이었다. 군인들이 자발적으로 성금을 2만22000달러를 거뒀다. 나중에 또 3만 달러를 거뒀다. 손해배상 절차도 신속하게 진행해 한 사람당 1억9500만원씩을 지급했다. 8군 사령관, 주한미군 사령관, 주한 미국대사가 사건 직후에 유감과 사과를 발표했다』
─한국민들은 미군 군법회의에서 사고를 낸 장갑차 운전병과 유도병이 배심원 무죄평결을 받은 데 분격했다.
『한국과 미국의 사법체계의 차이를 인정해야 한다. 미국은 과실로 인한 사망사건에 형사적 책임을 묻지 않는다. 책임을 인정하며 주한미군이 책임을 지겠다는 게 우리의 입장이다. 미군들은 두 병사를 「살인 미군」이라고 부르는 데 격분하고 있다. 두 병사 모두 미선이나 효순이 같은 동생이 있는 나이다. 한국에서 교통사고로 사람을 죽였다고 「살인자」라고 부르나』
─한국의 소파 개정 요구에 대해 미국은 어떤 입장인가.
『키르기스스탄에 파견된 한국군도 키르기스스탄과 소파를 체결했다. 한국 군인이 비업무상의 과실로 사고를 내더라도 사법권을 한국이 가지게 돼 있다. 그 먼 이역 땅에 키르기스스탄의 안보를 위해 파견된 한국 병사가 키르기스스탄 감옥에 수감돼 재판받는 것을 한국 국민이 정서적으로 납득하겠나』
『동북 아시아의 세력균형이 흔들리면 한국 경제는 죽는다』─주한미군 내부에서 주한미군 철수 얘기가 나오고 있다는 게 사실인가.
『대부분의 병사들은 한국의 정치, 大選에 대해 잘 모른다. 그러나 고위 장교들 사이에서 「이런 식으로 한다면 누가 한국에 오려고 하겠느냐」는 우려가 제기된다. 광복 이후 주한미군 철수 얘기가 나올 때마다 주한미군은 이에 반대했다. 주한미군 내부에서 진지하게 미군철수 이야기가 나오는 것은 이번이 처음일 것이다』
─많은 한국인들이 「주한미군은 미국의 이익을 위해 와 있다. 나가란다고 나가겠느냐」는 생각을 갖고 있다.
『물론 한국을 위해서 와 있는 것은 아니다. 한국의 이익과 미국의 이익을 위해서 와 있다. 주한 미군이 철수아여 동북아의 세력균형이 흔들리면 한국 경제는 죽는 것이다』
─왜 이렇게 反美 분위기가 확산된다고 생각하나.
『한국 사회의 다수가 이런 감정을 갖고 있다면 이해하겠다. 하지만 몇몇 언론들이 사실과 다른 선동적인 기사들을 내보내고 있다. 金大中 대통령이 「소파 개정은 안 한다. 反美감정이 바람직하지 않다」고 하는데 언론이 앞장서서 부정적인 기사를 양산하는 모습이다. 국민을 진정시키기보다 선동하고 있다』
─한나라당 李會昌 후보가 한때 反美 촛불시위에 참가하겠다고 나섰는데.
『한마디로 황당했다. 韓美 관계를 잘 알고, 국민을 이끌어야 할 사람이 그런 얘기를 해서 당황했다』
12월11일.
盧武鉉 후보의 「충청 천도론」이 선거의 중요 쟁점으로 등장했다. 공무원層, 수도권 지역의 표가 盧후보로부터 일부 이탈하는 조짐을 보이기 시작했고, 盧후보는 「말 실수」까지 했다.
盧후보는 인천 유세에서 『정치·행정은 충청도로 보내고, 여기는 경제·금융 도시로 육성해야 한다. 돈 안 되고 시끄럽게 싸우는 것은 충청도로 보내자. 여기 계시는 충청이 고향이신 분들은 화나겠다』고 발언했다.
盧후보는 『2년 내에 행정수도 입지을 선정하고 임기內에 착공식을 갖겠다』는 기존의 입장에서 여러 걸음 뒤로 물러섰다. 守勢(수세)로 전환한 모습이 역력했다.
<한나라당이 거짓말 가지고 국민을 현혹시키고, 행정수도를 충청으로 옮기면 수도권 집값이 폭락한다면서 수도권 사람들에게 불안감을 조성하고 있다. 새빨간 거짓말이다. 수도권은 계속 인구가 늘어난다. 인구 절반이 수도권에 있다. 충청에 행정수도를 건설하고 그곳에 50만~60만명의 인구가 들어서려면 10년 걸린다. 100만 명이 되려면 20년 걸린다. 10~20년內에 인구증가율이 줄게 되는데 집값이 폭락할 수 있느냐>
盧후보는 국회 청와대를 포함한 全정부부처를 이전하겠다는 공약이 선거 쟁점화하자 자제해 왔던 한나라당과 李會昌 후보를 비난했다.
<한나라당은 정말 문제가 많다. 5년 내내 발목만 잡고 한 일이 없다. 단일화 후에 지지율이 역전되니까, 盧武鉉이 부동산 투기를 했다느니, 새빨간 거짓말을 하고, 흑색선전도 안 먹히니까, 집값 얘기를 하고 있다. 한국의 미래에 필요한 정책에 대해 발목잡기를 하고 있따. 한치 앞을 내다보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한나라당은 역시 할 수 없는 정당이다. 제가 李會昌 후보 별명을 하나 만들어 드리겠다. 「이발목」이다. 앞으로 「이반대」 후보라고 불러야 하겠다>
李會昌 후보는 「대전 천도」를 물고 늘어지기 시작했다.
李후보는 12월11일 기자회견에서 『盧武鉉 후보가 수도권 이전 공약에 대해 양자토론을 제의했는데 받아들이겠느냐』는 물음에 『해보자』며 자신감을 보였다.
<어제(12월10일) 토론회에서 충분히 말을 못했다. 수도권 이전 문제는 지금 워싱턴과 뉴욕의 예를 드는데 19세기 경제나 행정의 기초가 잡히지 않던 당시의 분리다. 서울에 온갖 경제·행정·사회 등의 기능이 몰려 있는데 국회 등을 다 옮긴다면 행정수도가 아니라 수도의 이전이다. 모든 기관이 옮겨 가면서 기업 관련산업까지 옮겨 가게 된 것이다. 서울에 있는 부동산 땅값이 폭락하고, 서울은 공동화될 것이다>
12월12일.
북한은 1994년 10월 제네바 核합의에 따라 동결시켰던 영변의 核재처리시설, 원자로등을 가동시키겠다고 선언했다. 大選은 미국과 일본이 예견한대로 「동맹이냐, 민족이냐」를 선택하는 場으로 전환됐다.
『정부의 현금 지원은 없다』12월13일.
민주당 사람들은 북한의 核개발 재개가 얼마나 큰 악재가 될 것인지 촉각을 곤두세웠다. 단일화 이후 외곽을 돌던 「국민통합 21」의 鄭夢準 의원은 이날 大田에서 盧武鉉 후보와 합동유세를 가졌다. 李仁濟 자민련 총재권한 대행은 盧武鉉 후보의 좌파성향을 격하게 공격하면서, 李會昌 후보 지지를 간접 선언했다.
兩 진영 모두 내놓을 수 있는 카드를 다 내놓은 셈이다.
이날 아침 서울 여의도 민주당 당사에서 만난 민주당 李康來(이강래) 의원은 『표심이 이미 다 정해져서, 北核이나 이인제 鄭夢準의 움직임이 모두 큰 영향을 주지 못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10% 포인트 차이의 지지율 격차가 오늘 아침에도 당 자체 조사에서 확인됐다』는 게 민주당쪽의 설명이었다.
李의원은 조선일보에 강한 불쾌감을 표시했다.
『조선일보가 흡사 전쟁이나 난듯이 1면부터 지면을 꾸몄다. 나는 우리가 북한에 선전포고한 줄 알았다. 조선일보가 (李會昌 후보의) 뒤집기를 위해 불을 지르고 있다. 1994년 제네바 核합의에는 북한 核동결과 함께 北美 관계의 조속한 정상화가 포함돼 있다. 8년이 지난 지금까지 北美 관계 정상화에 진전이 있었나. 미국이 그만한 성의를 보였나, 짚어봐야 한다. 북한을 일방적으로 몰아붙이니까 북한이 반발하고 있는 측면도 있다. 李會昌씨는 이제 「과격, 극좌 정치인 盧武鉉하고 5년을 더 살거냐」고 국민을 협박하고 위협하는 수밖에 없다. 하지만 먹히지 않을 것이다』
盧후보는 이날 오후 1시30분쯤 용인에서 가진 경기지역 공약 발표회장에서 북한 核문제에 대해 「北核문제와 경협의 엄격한 분리」를 주장했다. 전날 민주당과 「국민통합 21」은 「核의혹 해소가 안 되면 정부 차원의 현금지원 사업 중단을 고려한다」고 합의했다. 그런데도 盧후보는 『정부가 언제 현금지원을 한 적이 있느냐』고 기자들에게 되물었다.
『북한이 核을 보유하고 있다고 믿을 정보가 없다』고 주장해 온 그는 『앞으로 특별히 위험한 일은 없을 것』이라고 낙관적인 전망을 했다. 다음은 기자들과의 문답이다.
─북한이 核개발을 재개하더라도 對北 현금지원을 계속할 것인가.
『한나라당이 對北 현금지원을 중단하라고 얘기한다. 정부가 해 온 현금 지원은 없다. 「현금지원」이 무엇인지 모르겠다. 우리 현금이 건너가고 있는 것은 금강산 관광지원과 민간교류밖에 없다. 한나라당은 「현금지원 중단」을 요구할 것이 아니라 금강산관광과 경제교류를 전부 끊자고 얘기해야 한다. 그건 경솔한 결정이다』
─북한 核문제와 경협을 엄격하게 분리해야 된다는 것인가.
『북한과의 경제교류를 중단하면 대화창구가 끊어진다. 대화로 풀 수 있다. 북한은 미국과 한국의 지원이 필요하다. 제재와 채찍을 얘기하는데 제재를 해서 실패할 때의 결과가 가공할 만하다. 제재하자는 건 평화를 유지하자는 생각이 아니다』
『한나라당 지지자들이 입을 열기 시작했다』오후 4시30분 서대전 사거리에서 열린 盧武鉉, 鄭夢準 공동 유세에는 500여 명의 청중이 몰렸다.
『鄭夢準의 막판 가세가 현대그룹의 금강산 관광과 對北 퍼주기 이미지와 맞물려 오히려 역효과를 낼 것이다』, 『DJP 단일화 선언 이후 역풍이 불었듯이 역풍을 맞을 수도 있다』는 관측을 의식한 듯 盧후보는 鄭후보와의 유대를 강조하려고 푸짐한 「립 서비스(Lip Seuvice)」를 했다.
『경선을 치르고 옛날에는 승복하지 않았습니다. 鄭대표는 승복했습니다. 이게 새 정치 아닙니까』
『제가 대통령에 당선되면 그 정권은 盧武鉉 정권이 아닙니다. 단일 후보로 만들어 주고 이 자리까지 성원해 온 鄭夢準 의원과 함께 하는 정권으로 생각하겠습니다』
유세장에서 만난 민주당 金榮煥(김영환) 의원은 盧후보의 수도 이전 공약이 수도권에서 상당한 영향을 주고 있다고 걱정했다. 그는 『盧武鉉 후보의 수도 이전 공약과 北核 문제가 꼭 닫혀 있던 李會昌 후보 지지자의 말문을 열었다』고 했다.
『盧武鉉, 鄭夢準 단일화 이후 「李會昌을 지지한다」고 하면 촌스럽다는 느낌을 주는 분위기가 됐어요. 그래서 李會昌 지지층들이 입을 꽉 닫은 겁니다. 행정수도 이전이 쟁점이 되고, 北核 위기가 조성되면서 기존 한나라당 지지층이 입을 열기 시작했습니다. 한나라당이 바짝 긴장하면서 조직이 활발하게 움직이고, 그 위력도 나타나고 있습니다. 우리가 좀 뒤처져 있으면서 추적하는 양상이었으면 좋았을 뻔했어요』
─「수도 이전이 수도권을 공동화시킬 것」이라는 한나라당의 주장이 수도권에서 먹히고 있는 건가요.
『어느 쪽 주장이 더 합리적이냐는 이성적인 판단의 문제는 아닙니다. 수도권 이전을 믿고 싶지 않은 심리를 한나라당이 부추겼고, 이게 한나라당 지지자들의 묶였던 입을 열게 만든 겁니다』
─20代, 30代가 기존의 지역구도에서 풀려나서 세대혁명이 일어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사이버 선거, 20代, 30代의 정치혁명을 얘기하지만 결국 「지역구도」로 갈 겁니다. 우리는 鄭夢準 의원에게 기대를 겁니다. 보수층의 안정 희구심리가 한나라당으로 몰려 가는 것을 鄭의원이 차단하는 역할을 해 줄 겁니다』
지지율의 막판 요동12월14일.
이날 조사된 갤럽 여론조사에서 중대한 변화가 일어났다. 40代에서 지지율이 逆轉(역전)됐다. 12월8일 李會昌 38.3% 盧武鉉 39.5%였던 지지도가, 李會昌 41.9% 盧武鉉 39.0%로 뒤집힌 것이다.
「수도 이전」에 대해 서울 유권자는 찬성 30.6%, 반대 48.6%로 반대 의견이 18.0% 포인트 높았다. 충청권에서는 68.6%가 찬성, 11.5%가 반대했다. 전체로는 찬성이 38.0%, 반대가 37.5%로 비슷했다.
부동층은 20代가 40%로 가장 높았고, 30代가 32%, 40代가 32%, 50세 이상이 26%로 나타났다. 盧武鉉 후보의 절대적인 지지층인 20代에서 「망설임」이 강하게 나타나고 있다는 징표다.
12월15일.
李會昌 후보는 「수도 이전」를 盧후보의 즉흥성을 입증하는 소재로, 北核 문제를 盧후보의 불안감을 강조하는 소재로 활용했다. 선거 막바지까지 자신의 「긍정적인 정책 이슈」를 만들어 내지 못한 채 盧후보가 만들어 놓은 정책 이슈를 쟁점으로 전환시킨 것이다.
성남 모란 시장 유세에서 찬조연사로 나온 金元吉(김원길) 前 민주당 정책위의장은 『盧武鉉씨가 대통령이 되면 우리가 애써 쌓아온 지금까지의 삶은 물론이고 우리 민족이 세계 사람들의 뇌리에서 사라지는 일이 올 것』이라며 『東으로 갈지, 西로 갈지 모르는 사람이 대통령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盧후보를 비난했다.
李후보 역시 전에 없이 강한 어조로 『盧武鉉씨가 대통령이 되면 국가적 재앙이 초래될 것』이라고 공격했다.
『이미 30~40년 전에 朴正熙 대통령이 행정수도 대전 이전을 연구했습니다. 그때 계산이 「15년 잡고 5조원이 든다」였습니다. 지금 돈으로 하면 50조원이 넘습니다. 문제는 물입니다. 대청댐의 물이 지금도 부족합니다. 100만~200만 명이 옮겨올 새 수도를 건설하면 물은 어디서 가져옵니까. 터무니 없는 말로 표를 얻기 위해 수도권 사람들을 절망에 빠지게 하는 사람에게 국가 운영을 맡길 수는 없습니다』
『무엇이 한반도를 불안하게 합니까. 북한의 核개발입니다. 「核개발 중단하지 않으면, 현금지원은 없다」고 얘기하는 게 국가 지도자의 자세입니까, 「核개발 하더라도 현금지원을 계속해서 金正日 비위를 맞추자」고 하는 게 국가지도자의 자세입니까. 李會昌이가 대통령이 되면 한반도에 전쟁은 없습니다. 金正日과 정정당당하게 만나 대화로 협상으로 核문제를 풀겠습니다』
李후보, 保革문제 들고 나와D-3일인 12월16일.
두 후보 사이의 지지율 격차는 그대로 유지되고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李會昌 후보는 그토록 꺼리던 保革의 문제를 들고 나왔다. 그는 『지난 14일 북한 조국평화통일위원회 서기국이 저를 「동족을 해치는 전쟁론자」라며 「李會昌 같은 자가 권력을 차지하게 된다면 우리나라에 미국이 강요하는 核전쟁이 터지고 우리 민족은 그 희생자가 될 것」이라고 비난했다』며 盧후보가 북한의 논리를 그대로 대변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한나라당의 李圭澤(이규택) 원내총무는 盧武鉉 후보 장인이 6·25 때 양민학살을 주도한 사실을 거론하면서, 『盧후보 장인이 11명의 양민을 학살한 일선 책임자였다. 盧武鉉 대통령이 되면 공산당 책임자의 사위가 대통령이, 그 딸은 퍼스트 레이디가 된다』고 공격했다. 뒤늦게 保革을 선거 쟁점으로 끌고 나온 것이다.
이날 밤 사회 문화 분야 TV 토론이 끝난 뒤 李會昌 후보는 『잘 해보려고 했는데 제대로 되지 않았다』고 마무리 인사를 했다.
李후보는 의약분업 고교평준화 등 쟁점마다 수세에 몰렸다. 허탈한 웃음을 가끔 터뜨렸으나. 얼굴은 굳어 있었다.
질 수 없는 싸움에서 李會昌이 진 까닭선거 막판, 지지율의 역전은 일어나지 않았다. 『투표율이 80% 이하로 떨어지면 李후보가 이길 수 있다』는 마지막 희망도 빗나갔다.
한나라당의 전략통인 崔秉烈(최병렬) 선대위 공동의장, 朴源弘(박원홍) 홍보대책위원장, 沈駿亨(심준형) 공보특보는 「李會昌의 敗着(패착)」에 대해 묻자, 李후보가 단 하나라도 실천했다면 손쉽게 大選을 승리로 몰아갈 수 있었을 대목을 수없이 짚어냈다. 「질 수 없는 싸움」에서 지게된 데 대한, 그들의 複棋(복기)다.
① 2000년 4월 총선에서 국회의원 17명을 당선시켜 원내 교섭단체 구성(기준은 20석)에 실패한 金鍾泌 자민련 총재를 도와 원내교섭단체를 구성하도록 도와 줬어야 한다. 자민련을 한나라당의 友軍(우군)으로 끌어다 놨으면, 大選은 하나마나한 싸움이 됐을 것이다.
② 李會昌 후보는 한나라당의 대통령 후보 경선 때 「당권·대권 분리」 등의 정치개혁을 추진했어야 했다. 그랬다면 20代, 30代에게 「한나라당도 변화를 추구하는 정당」이라는 이미지를 심어 줄 수 있었다.
③ 朴槿惠 의원이 정당개혁, 정치개혁을 요구하며 탈당하려고 할 때 정치개혁안을 내놓았어야 했다.
④ 늦어도 朴槿惠 의원이 복당할 때는 정치개혁안을 국민들에게 발표했어야 했다.
⑤ 대통령 후보등록을 할 때 「세풍」, 「안풍」에 대해 정치적으로 사과하고, 그리고 난 뒤에 「부패 청산」을 자임했어야 했다.
⑥ 大選이 시작되고 나서 어떤 형태로든 韓仁玉 여사나 가족이 나서서 두 아들의 병역 면제에 인간적으로 사과했어야 했다. 두 아들의 병역 면제는 덮어 두고 갈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⑦ 大選을 「포지티브 캠페인」으로 시작했어야 했다. 선거기간 동안 왜 李會昌에게 표를 던져야 할지 단 하나의 이유도 유권자에게 제시하지 못했다.
⑧ 「무조건 이긴다」는 자만으로 아무런 준비를 하지 않고 大選을 맞았다. 大選 전략은 적어도 6개월 전에 수립해야 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