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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와 현재를 만날 수 있는 한훤고택에서 서흥김씨 20대 종손 김백용 선생을 만나다!!

기사승인 23-11-17 16: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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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와 현재를 만날 수 있는 한훤고택에서
서흥김씨 20대 종손 김백용 선생을 만나다!!
 
  우리나라 대표적인 성씨 가운데 하나가 김해 김씨다. 조선 전기의 유학자로 김종직의 제자이자 조광조의 스승인 한훤당 김굉필 선생도 김씨다. 선생은 김해 김씨가 아니라 서흥 김씨다.  
 
 
한훤고택
 
 
서흥 김씨는 북한의 황해북도 서흥군을 본관으로 하고 있다. 시조인 김보(金寶)는 신라 경순왕의 후손이며 그의 손자인 김천록(金天祿)은 삼별초를 진압하고 여몽연합군의 본 원정에서 김방경과 함께 참전하여 전공을 세웠다. 이러한 공적으로 그는 서흥군(瑞興君)에 봉해지면서 서흥 김씨의 가문이 이어지게 된다. 이들은 달성 현풍에 많이 산다.
 현풍읍 지리(池里)인 못골에 서흥 김씨의 종택인 한훤고택이 있다. 서흥 김씨 9세손인 김굉필 선생의 20대 종손인 김백용 선생이 살고 있는 집이다.
 고택에서 종손을 만났다.
 
  종손으로 가문의 책임을 맡은 지 얼마나 되었으며 그냥 맏이와 종갓집의 맏이인 종손은 아무래도 다를 것 같은데 어떤지 듣고 싶습니다.
 ▶종손은 때가 되면 자연스럽게 되는 것이 아니다. 종손이었던 아버지의 삼년상(三年喪) 예를 다하고 문중 어른들의 논의에 의하여 날을 정하여 가묘(家廟)에 고유의 예를 거쳐야 종손으로서의 자격을 갖추게 된다. 이러한 절차를 거쳐 20대 종손이 된 지 6년이 되었다.
 종손의 삶이 매우 영광스럽고 남들이 흠모하는 자리라고 생각들을 하지만 한 가문의 전통과 체통을 오롯이 짊어지고 살아야 하는 무겁고 부담스러운 자리로 어려움이 많다. 그러나 피할 수 없으면 즐기라는 말과 같이 긍정적인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선조의 훌륭한 삶을 그대로 따를 수는 없지만 욕되지 않게 하려고 매사에 조심하며 주어진 일에 충실하게 살고 있다.
 
 
한훤당 선생 불천위 신위
 
 
불천위제사를 지내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말씀해 주십시오.
▶불천위는 불천지위(不遷之位)의 준말이며 부조위(不祧位)라고도 한다. 덕망이 높고
국가에 큰 공로가 있는 인물을 영원히 사당에 모시고 제사를 지내도록 국가에서 허가한 신위다. 오늘날에 와서 불천위에 대하여 논하는 것은 잘못하면 큰 원망을 받을 것 같아 말을 줄이겠다. 한훤고택의 불천위는 국령(國令)에 의하여 이루어진 것으로 건축물을 비롯한 내부의 감실 등 모두가 나라에서 하사한 것이다.
불천위 제사는 돌아가신 날인 음력 10월 1일에 지내며 수일 전부터 가양주(家釀酒)인 스무주를 담고 제사준비를 한다. 새벽 1시 정각에 지내오던 전통을 그대로 이어가고 있다. 이날이면 각지에 흩어져 사는 후손들이 참석하는데 갈수록 참석하는 제관들이 줄어들어 평균 참석하는 제관은 30여명이다.
의례는 종손이 사당에 가서 신주를 모셔오는 것으로 시작하며 제수는 제청에 진설하는데 일반 제사와 크게 다르지는 않지만 제수를 평제사보다는 조금 많이 하고 높이 고이는 것이 다르다. 제례가 끝나면 종손이 위패를 다시 사당에 모셔놓는 것으로 모든 행사는 끝이 난다.

종가, 종손이라고 하면 유교문화를 상징하는 것으로 압니다. 옛말이 되었겠지만 종손이라면 결혼을 꺼릴 정도로 제사가 많고 손님이 끊이지 않는다고 하는데 어떠했는지 말씀해 주십시오.
▶집사람은 이름만 대면 알만한 유교집안에서 태어나 어렸을 때부터 보고 배운 것이 유교적 가풍이었다. 그래서인지 종부의 역할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지금까지 큰 탈 없이 종가를 잘 이끌어왔다. 시대가 변하고 문화도 변한다. 제례문화라고 다르지 않다. 요즘에는 4대 봉제사가 아니라 조부모는 물론이고 부모님 제사까지 하루에 모아 지내는 가정이 있고, 음식 또한 간소하게 차리거나 성묘로 대신하고 명절에 차례를 지내는 것도 생략하는 경우가 늘어나고 있다.  
 
한훤고택에 쓴 소학세가
 
 
훗날 종손이 될 아들도 시대의 흐름이라며 전통을 도외시할까봐 염려했는데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수년 전부터 집안 행사에 참석해야 할 자리라면 참석하여 집안 어르신들에게 인사하고, 가풍(家風)과 문풍(門風)을 익히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들이 오케이 한다고 해서 되는 것은 아니다.
종부의 역할이 종손만큼 크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종부가 될 며느리가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야 하는데 다행스럽게도 며느리가 당연한 듯 받아들이고 있어 저로서는 고마울 뿐이다.

종손으로서 고택을 어떻게 관리 유지하고 있는지 말씀해 주십시오.
▶수년 전, kbs방송국에서 ‘고택, 어떻게 유지할 것인가’라는 주제로 방송한 일이 있는데 그때 나 지금이나 생각이 다르지 않다.
전국적으로 소중한 고택들이 많다. 안타깝게도 대부분의 고택들이 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아 허물어지고 있는 것을 보았다. 집은 예나 지금이나 사람의 훈기가 있어야 건재할 수 있다. 이는 사람이 살아야 관리가 된다는 말이다. 현직에 있을 때는 아이들의 교육을 위해서 도시로 나가 살았다. 나가 살면서도 수시로 이곳에 오곤 했지만 완전히 이곳에 들어와 살게 되니 불편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그럼에도 마음대로 수리할 수 없었으니 저보다 집사람이 더 불편함을 느꼈을 것이다. 그런데도 크게 불평 한 번 하지 않고 역할을 잘 해주어 고맙게 생각한다.  
고택은 보여주는 고택이 아니라 사람들과 소통하는 공간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카페를 열어 고택이 담고 있는 작은 의미를 함께 이야기하는, 과거와 현재를 잇는 공간으로 만들었다. 종가나 고택이라고 해서 쉽게 접근할 수 없는 벽이 높은 공간이 아니라 누구나 와서 둘러보고 한훤당 선생에 대해 하나라도 알고 갈 수 있도록 열린 공간으로 관리하고 있다.
 
 
종손 김백용
 
 
종갓집의 맏이로 태어났으면 종손이 된다는 것은 기정사실이라고 생각한다. 종손이 되기 전까지 차종손으로 학교 선생님을 하셨을 텐데 종손과 선생님이라는 이미지가 무관하지 않다고 생각하는데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그 당시에는 특별하게 차종손이라는 것을 의식하지 않았다. 종갓집이라는 분위기가 행동을 자제하게끔 할 때가 없진 않았지만 차종손으로서의 역할이 크게 없었기 때문에 별로 의식하지 않았다. 제사를 지내면 그저 다른 집도 우리 집처럼 지내는 것이라고 생각했지 일이 많아 더 힘들겠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국어를 전공해서인지 모르겠지만 우리말의 품격이라고 할 수 있는 높임말의 쓰임이 바르지 못한 경우와 지나치게 외국어를 쓰게 되는 경우를 접할 때면 선생으로서의 본색, 종손으로서의 본색이 드러난다. 지적받는 걸 좋아할 리 만무하겠지만 우리말의 아름다움을 알려주고 지나친 외국어 사용은 나를 돋보이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상대방에게 불쾌감을 준다는 것을 알려주고 때로는 호되게 꾸짖곤 했었다. 나만이 아니라 기성세대들이라면 누구나 이렇게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바람이 있다면 한 말씀해 주십시오.
▶문화는 하루아침에 형성되는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4여 년의 코로나 기간 동안 많은 것이 변했다. 특히 명절문화, 제례문화가 바뀌었다. 우리민족의 정체성을 알 수 있는 것 중에 하나가 전통문화라고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전통은 지켜져야 한다. 많은 사람들이 유교문화를 접할 수 있는 곳이 서원이나 고택, 제례의식에서라고 한다. 맞는 말이다. 국가의 재정적인 지원을 통해 불천위제사 같은 전통이 이어지고, 종가를 개방하여 일반인들의 사회교육장으로서의 역할을 할 수 있었으면 하는 생각이다.

우남희 기자(Woo7959@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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