팬덤, 너의 이름은 '소비'
오픈 런 이야기를 해볼까요. 장소가 좀 다릅니다. 샤넬, 루이비통 같은 명품 매장들이 즐비한 백화점 앞이 아니라 현대인의 오아시스, 편의점 앞이거든요. 주인공은 SPC삼립이 16년 만에 다시 출시한 ‘포켓몬 빵’입니다.
통상 편의점의 새 상품 입고 시간이 늦은 밤이다 보니 밤마다 포켓몬 빵을 사냥하려는 이들이 이른바 ‘원정’에 나서고 있다는 소식입니다. 바야흐로 16년 전, 2006년 ‘라떼’는 하나에 500원이었던 빵 하나 가격이 이제 1천200원입니다.
빵 값이 두 배 넘게 오를 만큼 세월이 흘렀습니다. 변하지 않은 것은 빵과 함께 들어있는 추억의 포켓몬 ‘띠부씰’입니다. 일부 ‘당첨’ 확률이 낮은 포켓몬 띠부씰은 중고 시장에서 개당 5만 원에도 판매가 되고 있다고 하니, 최근 우당탕탕 포켓몬 빵 오픈 런 사태(?)의 진정한 주인공은 바로 이 띠부씰이라 하겠습니다.
BTS의 RM도 포켓몬 띠부씰을 찾아 헤맬 정도로, 16년 전 잠든 줄 만 알았던 유행을 다시 부활시키고 출시 2주 만에 빵 350만 개를 완판한 힘은 과연 어디에 있을까요? 이번 <어쩌다>에선 죽은 유행도 되살려내는 ‘팬덤’ 경제에 대해 다뤄봤습니다.
포켓몬 빵 이야기를 조금 더 하겠습니다. 화제의 중심에 있는 ‘띠부씰’은 ‘띠부띠부씰’을 줄여 부르는 이름입니다. ‘떼었다 붙였다’할 수 있는 씰(Seal)이라는 뜻입니다. SPC 측에 따르면 수 년 전 다른 제품을 출시할 때 자사가 최초로 ‘개발’한 이름입니다.
최근 유례없이 치솟은 포켓몬 빵의 인기에 코로나19로 존폐 위기에 내몰렸던 경북 경산 ‘띠부씰’ 제조 중소기업도 활황기를 맞았습니다. PVC 방수 소재로 만들어진 스티커라 접착력이 강하면서도 떼어내고도 흔적이 남지 않은 점이 강점입니다.
포켓몬 빵 재출시를 기획한 마케터는 연이은 품귀 현상에 생산 일정을 새로 짜느라 조만간 병가를 내야 할 정도로 눈 코 뜰 새가 없는 것으로 전해졌습니다. 사실 재출시 기획이 마케터의 머릿속에서만 나온 것은 아닙니다.
수 년 간 포켓몬 빵을 잊지 못한 고객들의 출시 요청이 빗발쳤습니다. 고객의 소리에 잔뜩 쌓인 ‘민원’들과 실무 마케터 본인의 ‘팬심’, 그리고 때맞춰 적절하게 성사된 <포켓몬>과의 상표권 계약이 ‘대박’을 견인했습니다. SPC 측은 상반기 중에 빵과 띠부씰 포켓몬 종류를 늘리겠다는 방침입니다.
포켓몬 빵 재고가 떨어졌다는 안내문
구매력이 충전된 소비자들의 어릴 적 향수를 자극해 죽은 게임도 살려내는 ‘팬덤’의 사례는 더 있습니다. 2002년 넷마블에서 서비스를 시작해 많은 이용자들을 끌어 모았던 게임 <노바 1492>는 2011년 서비스가 종료됐습니다. 4년 뒤인 2015년, 이 게임을 그리워하던 팬들로 꾸려진 개발진이 직접 회사를 차려 게임을 되살려냈습니다. 재출시 소식을 기다리던 다른 팬들의 성원에 힘입어 텀블벅 펀딩을 통해 하루 만에 천만 원을 달성했고 그때부터 현재까지도 게임 서비스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유명 과학기술 문화 잡지 <와이어드>를 공동 창간한 경영전문가 케빈 캘리는 2008년 디지털 시장에서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수백 만 명의 고객이나 수백만 달러가 아니라 ‘천 명의 확실한 팬’이라는 내용의 에세이를 썼습니다. 이 ‘확실한 팬’은 그야말로 당신이 생산한 모든 것을 소비하는 사람들입니다.
처음부터 백만 명의 팬을 모으려는 것보다 크리에이터의 모든 창작물에 1년에 최소한 10만 원 가량을 쓸 용의가 있는 진정한 팬 천 명을 모으는 것이 훨씬 더 현실적이라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크리에이터는 팬 각각이 어떤 사람인지, 그들의 이름과 특성을 기억하고 챙기기 더 수월해집니다. 대형 유통사를 거쳐야만 창작물을 판매하는 경로를 확보할 수 있었던 종전과는 달리 클릭 한 번으로도 창작자가 팬들과 직접 소통, 거래할 수 있는 기반 덕에 더 개별적이고, 더 희귀한 팬들의 요구사항에 직접 응답할 가능성도 높아졌습니다.
100만 명 중 한 명만 관심을 가지는 작품이나 아이디어라 해도 지구상으로 따지면 이런 사람들이 7천 명 정도일 수 있고, 이 7천 명이야말로 나를 배신하지 않고 ‘끊임없이 소비’해줄 팬이라는 겁니다. 다시 말해 유명세와 제품 다양성의 상관관계를 그린 그래프에서 오른쪽으로 끝없이 뻗어나가는 ‘긴 꼬리’의 기적을 명심하라는 교훈입니다.
애초에 다수에게 통할 아이디어라는 ‘정답’은 찾기만 하면 큰 부와 명예를 가져다주는 대박 상품이 되지만 이걸 찾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죠. 행운도 따라주어야 하고요. 반면 극소수에게만 향유되는 뚝심 있는 제품이라도 오른쪽으로 길게 뻗어가는 저 ‘꾸준함’에 기적이 있다는 겁니다. 꾸준한 소비의 가능성, 16년이 지나도 잊지 않고 재출시를 갈망하게 되는 그 팬심에 주목하라는 거죠.
이제는 어느덧 10년이 훌쩍 넘은 에세이는 그 뒤로 각종 크라우드 펀딩의 활성화, 가치 소비 유행, 맞춤형 광고 시장의 부흥과 같은 여러 방식으로 증명되며 ‘디지털 마케팅’의 교본이 되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하도 많이 언급해서 조금 진부하게 여겨지실 수도 있겠지만 아무래도 BTS의 성공이 가장 확실한 예화로 거론될 수 있겠습니다. 무차별 대중을 타깃으로 ‘히트 상품’을 내놓는 것이 전통적인 관습처럼 굳어졌던 아이돌 산업에서 과감히 팬서비스에 ‘배팅’한 전략이 대박을 터뜨렸습니다.
BTS의 대성공을 사다리 삼아, 어느덧 전 세계적인 유력 엔터테인먼트 기업으로 성장한 하이브는 종전의 성공 전략을 더 영민하게 갈고 닦는 데 매진하고 있습니다. 하이브 소속 남자 아이돌 그룹 <엔하이픈> 결성 과정을 Mnet과 함께 진행한 서바이벌 프로그램은 지난 2020년 비록 매우 저조한 시청률을 기록하며 종영했지만, 첫 앨범을 내기 전부터 이미 구축된 전 세계 팬덤을 바탕으로 디지털 클립 누적 조회수는 무려 1억 8천만 뷰 이상을 기록했습니다.
하이브에 따르면 자회사가 운영하는 커뮤니티 플랫폼 ‘위버스’에 있는 <엔하이픈> 커뮤니티 가입자는 280만 명이 넘는다고 합니다. 비록 국민적 인지도가 높지 않고 눈에 띄는 히트곡도 마땅히 떠올리기 쉽지 않지만 파편화된, 그러나 결코 얕잡아 볼 수 없는 굳건한 글로벌 팬덤이 어디선가 그들의 스타를 떠받치고 있습니다.
어원으로 보면 팬덤은 fanatic에서 fan을, ‘영지(領地)’라는 뜻을 지닌 dom의 합성어입니다. fanatic은 라틴어 ‘파나티쿠스(fanaticus)’에서 온 말로, 교회에서 금전적 요구 없이 헌신적으로 봉사하는 사람을 지칭하는 말입니다. 또 특정한 분야나 인물을 열정적으로 좋아하기 때문에 완전히 몰입한 사람을 지칭하는 말로도 쓰입니다.
열성 팬들이 스스로 2-3차 저작물을 생산해내고, 저작물들은 세계관으로 발전합니다. 창작과 소비의 경계가 흐려지는 지점, 마케터들이 열광하는 순간입니다. 시장에서는 이미 팬덤을 마케팅의 도구가 아닌 전부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마케팅 전문가 데이비드 미어먼 스콧은 2020년 출간한 저서 <패노크라시(Fanocracy)>에서 제품과 서비스보다 더 중요한 것이 바로 팬덤을 만드는 것이고, 팬덤이야말로 모든 조직의 ‘로켓 연료’가 될 수 있다고 표현했습니다.
책에서는 ‘상호작용’의 중요성에 대한 ‘거리감’이 여러 차례에 걸쳐 강조됩니다. 고객을 심리적, 물리적으로 친밀한 소통이 가능한 개인적 거리, 1m 이내로 끌어들이는 일이 정서적 유대를 형성하기에 가장 좋다는 겁니다. 언제든 쉽게 아이돌들의 생활상에 ‘접속’할 수 있게 하는 인프라를 형성한다든지, 특별한 팬심을 드러낼 기회를 많이 부여하는 등의 전략 말입니다.
‘대륙의 실수’라는 샤오미는 아예 회사 슬로건을 ‘오직 팬들을 위해서(Only for Fans!)’로 삼았습니다. 제품의 기획, 개발과 프로그램에 팬들이 직접 참여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 적극적으로 커뮤니티에서 유저들 간의 소통을 장려합니다. 애정을 쏟은 팬들은 자부심을 갖고 제품 소비는 물론, 홍보와 브랜드 마케팅까지 떠맡습니다. 숫자로 기업과 브랜드를 한계짓는 숱한 지표들을 한방에 무력화시키는 강력한 '팬덤' 경제는 이제 '누구나 아는 비책'이 되었습니다.
■ 참고문헌
이헌율‧지혜민, <팬덤 내의 계층 구별에 대한 연구 – 트위터와 팬 생산자를 중심으로>, 2015.
김수아, <소셜 웹 시대 팬덤 문화의 변화>, 2014.
김종윤‧김은비, <팬덤활동의 유형에 따른 효과크기 비교 연구: 메타분석 기반>, 2020.
데이비드 미어먼 스콧, <패노크라시>, 2020.
http://news.naver.com/main/read.naver?mode=LSD&mid=sec&sid1=101&oid=055&aid=00009611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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