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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흥사, 영상가, 독립운동가, 시인 시무언 이용도 목사 75주기 추모강연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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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mapocmc 작성일15-09-12 20:41 조회3,470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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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무언 이용도 목사 연보

 

 

 

1901.  4. 6.

 

 

1910.  1.15.

 

1914.

 

1915.

 

1919.    3.

 

6. 4.

 

1920.    2.

 

9.

 

10.20.

 

12.18.

 

1921.    3.

 

11.11.

 

1922.    8.

 

1923.

 

1924.    2.

 

 

 1925.

 

11.

 

 

 

1927.  3.17.

 

4.

 

5 - 6.

 

9.13.

 

12.

 

1928.  1.28.

 

         1.29.

 

         9.

 

11.

 

12.

 

12.24.

 

12.29.

 

1929.  1. 4.

 

 

 

1929.  12.30.

황해도 금천군 서천면 시변리 178번지에서 아버지 이덕흥씨 어머니 양마리아씨 사이에서 사남 일녀 중 셋째로 출생.

 

세례 받음.

 

시변리 공립보통학교 졸업.

 

송도 한영서원 고등부 입학.

 

만세운동에 가담하였다가 잡혀 2개월간 유치장 생활.

 

송봉애(宋鳳愛)와 결혼.

 

기원절 사건으로 체포.

 

시변리 신영학교 교원.

 

아들 영철 출생.

 

조선독립주비단 사건으로 신계경찰서에 검거됨.

 

송도고등보통학교(=한영서원) 삼학년에 재입학.

 

태평양회의 사건으로 체포되어 서대문 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름.

 

석방.

 

송도고등보통학교에 세 번째로 입학.

 

감리교 협성신학교 영문과 입학.

이호빈, 이환신을 만나다.

 

(봄) 현저동에 자취방을 얻어 삼이형제가 동거하다.

 

폐병 삼기로 진단.

이환신의 고향 평안남도 강동에 휴양차 갔다가 그곳 교회에서 울음으로 집회를 인도한 이른바 강동 체험을 하다.

 

딸 영숙 사망.

 

가극 “춘풍”발표(“아이생활”,  1927년 4월호).

 

가극 “공주와 꽃팔이” 발표(‘아이생활’,  1927년 5-6월호).

 

강원도 통천 파송.

 

협성신학교에서 연극 “십자가를 지는 이들” 각본을 쓰고 주연함.

 

협성신학교 14회 졸업.

 

파송지인 강원도 통천 교회에 부임.

 

연회 허입.

 

성극 “애굽의 이스라엘” 발표(“아이생활”,  1928년 11월호).

 

성극 “믿음으로 사는 화공” 발표(“아이생활”,  1928년 12월호).

 

승마 체험.

 

온정리 교회 집회에서 성령의 역사를 체험.

 

성화로 죄인을 소살하는 성몽을 꿈. 이 꿈을 계기로 자신을 온전히 주께 바쳐 말씀을 전하다가 죽기로 새롭게 각오하다.

연초 2개월동안 통천 부근 20여개 교회 부흥집회 인도.

 

(새해 1월 5일까지) 덕적도에서 부흥집회 인도. 이 집회에서 김광우와 만남.

 

1930.    1. 1.

 

           2. 26.

 

 

 

           4. 3.

 

           9. 28.

 

          10. 16.

 

          11. 25.

 

1931.    1.  9.

 

           2.  3.

 

           2.  15.

 

           2.  16.

 

           3.  5.

 

           5.

 

           7.  20.

 

           7.  26.

 

           7.

 

           9.

 

          10. 2.

 

1932.

 

            3. 16.

 

            4.

 

            11.

 

            11. 28.

 

1933.      1.  3.

 

             3.

 

             6.  3

 

             6.  6.

 

             7.

 

             10. 2.

 

1995.      8.  15.

 

1998.      10.

 

 

1999.      3.

(),  (),  ()를 생활훈으로 삼다.


(3월 9일까지) 평양 중앙감리교회 부흥집회 인도.

이 집회에 참석했던 장로교 청년 7인이 서문밖 교회 지하실에 모여 기도하기 시작함(후일 “평양 기도단”으로 지칭)

 

평양 중앙감리교회 청빙(연봉 1, 200원) 거절.

 

감리교 중부연회에서 목사 안수 받음.

 

전국주일학교연합회 간사로 발령 받음.

 

남북감리교 감독, 명년 도미유학 주선을 약속.

 

(16일까지) 경북 영동 집회. 걸아 최억성을 만남.

 

(6일까지) 청년회 기독교 강좌 인도.

 

(18일까지) 기도단 요청으로 평양 방문.

 

(28일경까지) 재령 집회 인도.

 

(13일까지) 거창 잡회 인도.

 

감리교 경성지방 순회목사로 파송.

 

김교신에게 연락, 처음으로 만남.

 

용도 목사 초청으로 김교신 광화문교회에서 강도하다.

 

(하순) 이용도 이호빈 원산 방문. 한준명 등 만남.

 

삼방약수터에서 요양 중 원산 수도자들과 집회를 가짐

 

아현성결교회 집회 인도 중 쫓겨남.

 

장년 만국통일주일공과 출판.


경성지방회에서 타교단 초빙시 허락을 받도록 조치.

 

 

평양노회, 이용도 금족령 가결.

 

 (초순) 평양 입류 사건 (소위 “한준명사건”).

 

평양노회 임시노회 소집,  한준명 백남주 치리 결의.

 

원산 예수교회 개천예배 참석.

 

감리교 목사 사임 청원.

 

예수교회 창립선언 발기인 대표.

 

예수교회 창립공의회에서 선도감으로 피선.

 

감리교 목사 사임 수리.

 

원산 광석동에서 운명.

 

정부, 독립유공자로 대통령 표창 추서.

 

감리교 제23회 총회에서 김종순 목사 외 13명이 이용도 목사 복권에 대한 청원을 총회에 제출하여 만장일치로 복권하기로 합의하다.

 

상기 이용도 목사에 대한 복권 청원에 대한 결의가 서울 연회에서 통과되다.

 

 

 

 

오순절 성령운동과 이용도 목사

 

 

 

이상윤 목사(한국기독교사회봉사회 총무)

 

 

지난 학기 4월 7일 협성대학교 신학대학에서 이용도 목사 기념사업회와 협성대학교 신학대학이 공동 주최한 이용도 목사 연구논문 발표회가 있었다. 이 모임은 이용도 목사 사상연구회와 양립되어 있는 이용도 목사 기념사업회가 주관한 논문 발표회였다. 이용도 목사 기념사업회(회장 유승훈 목사)는 교회와 신학대학 그리고 학문 세계에서의 이용도 목사를 기념하고 그의 영성과 목회사상을 발굴하여 학술적으로 연구하고 널리 전파하자는 취지로 시작한 조직이다. 이번에도 목원대학교 당국과 기념사업회 측이 서로 합의하여 공동으로 주최하자고 하였다. 이 자리를 빌어 학교 당국에 감사드린다. 이번 연구의 주제는 ‘오순절 성령운동과 이용도 목사’ 이며 불초 교제가 발제하게 되었다. 오늘 감리교회는 어떤 영성적 위치에 서 있으며 21세기 나눔과 섬김의 시대를 교회가 어떻게 수용하고 실천할 것인지를 묻고자 한다.

 

    이용도 목사 연구는 과거에도 랬지만 장래에도 한국교회 내에서 개신교 영성의 형성과 지도력 개발에 관심이 있다. 특히 감리교 입장에서 고유한 자기 정체성을 설정하고 신학교육은 어떻게 되어야 할 것인가 하는 문제에 직면해있다. 때문에 우리는 이러한 시대적 과제를 어떻게 해결하고 대안을 제시할 수 있을지 찾아야 한다. 뿐만 아니라 감리교회는 깨어난 영성에 기초하는 교회부흥과 개혁 그리고 세계 선교를 위한 도전을 받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지나간 1930년대에 살았던 감리교 이용도 목사를 파헤치고 연구하여 오늘의 감리교 신학을 새롭게 조명해야 한다. 돌이켜보면 감리교는 이용도 목사를 통해서 많은 은혜를 받았다. 수많은 영적 제자들이 배출되어 목회를 하고 지금도 교회를 새롭게 부흥시켰다. 20년대 당시 협성신학교 동료들로는 우원 이호빈 목사, 이환신 감독 등이 있었고 제자들로는 김광우 목사, 박재봉 목사, 조신일 목사, 조경우 목사 등이 계셨다. 특히 일제로부터 해방된 직후 무너진 감리교를 다시 세우는 부흥사로 박재봉 목사가 유명하였다. 그는 이용도 목사와 같이 금강산에 들어가서 기도하던 제자로서 전국적으로 큰 부흥의 불길을 부치기도 하였다. 특히 전화의 잿더미 속에 있던 감리교회를 재건하고 기도하여 능력을 받은 사명자들이 활동하던 시기였다. 그중에는 이용도 목사 예수교회에서 성장한 청년 소설가 박계주 선생도 있었다. 그는 당시 순애보라는 시대소설을 발표하여 큰 인기를 끌었다. 순애보는 기독교적 사랑의 진수가 어디에 있는지를 보여주기도 하였다. 시무언 이용도 목사 측근으로는 단연 우원 이호빈 목사를 꼽는다. 그는 예수교회 초대 선도감을 지냈고 그로 인해서 감리교회를 떠났다. 그는 60년대에는 농촌운동을 하였고 이어서 중앙신학을 이끌었다. 그는 당시의 기성교회의 무능하고 알량한 목사들에게 실망하여 평신도 신학을 추구하면서 한국교회의 사회복지 운동을 이끌어 가는 수많은 사회복지 전문가들을 배출하였다. 이환신 감독은 연세대 신과대학을 창설하였고 이대에서 교목으로 계시다가 총리원에 와서 일하면서 마지막으로 4.19 혁명 직후 감리교 감독이 되었다.

 

    이용도 목사 전집을 쓰고 출판했던 변종호 목사도 특이한 인물이었다. 본인의 말대로 하자면 쭈그렁 밤 송이 삼년 매달린다고 참 오랫동안 이용도 목사 주변에서 살았다. 그는 일찍이 연희 전문을 나와 일본 성공회신학교와 릿쿄 대학을 나오고 귀국 후에는 병약한 상태였지만 그 몸을 이끌고 이용도 목사연구와 사상전파에 헌신하였다. 60년대 와서는 서대문에서 복십자 교회를 개척하여 이용도 목사의 큰 아들 이영철 장로와 함께 목회하기도 하였다. 이런 저런 배경과 이유 때문에 초기 이용도 목사 연구자료 구축에는 변종호 목사의 공적이 확실하게 나타나 있다. 이는 한국교회 어떤 인물보다도 자료가 풍성하였다. 특히 이용도 목사의 육필 서간문편집과 일기문집 그리고 변종호 목사 자신의 독보적인 이용도 연구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할 만큼 잘 정리되어 있다. 이런 측면에서 보자면 장로교회의 김인서 장로도 이용도 목사연구에는 한 켠을 차지하고 있다. 그는 당시 월간 신앙생활지를 편집하면서 장로교적인 입장에서 한국교회 신앙정서와 신학적 경향성을 대변하는 자리에 있었고 박학다식하고 장로교인다운 능수 능란한 교리신학 사상을 구사하는 몇 안 되는 유능한 인사였다. 한국일보의 김창렬 고문이 그분의 자제 분이다. 김인서 장로는 초창기 이용도 목사의 정열적 활동에 반해서 은밀하게 연대하기를 제안하기도 했으나 결국은 장로교 측에 제시하는 이단논쟁에 불을 댕기고 필봉을 휘둘러 이용도 목사의 마지막 가는 길을 공격하였다. 그는 특히 한준명과 원산기도원 일파들을 매도하면서 이용도 목사의 최후 8개월을 고발하였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당시 평양 장로교회의 영적 부친이었던 길선주 목사는 시종일관 이용도 목사의 행적에 시비하지 않고 침묵으로 일관하였다. 특이한 경우이다. 물론 여기에는 장로교 감리교라는 교파 장벽도 개입되어 있었고 평양 장로교회에 대한 이용도 목사의 공개적인 비판에 대한 반작용도 묵과 할 수 없는 요인이었지만 더 중요하게 작용한 것은 한국교회 전체에 대한 영적 헤게모니 쟁탈전으로 비화하면서 적대적 감정이 깊이 개입하게 되는 측면도 무시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 중에서도 평양의 기도단은 평양의 장로교 바닥에서 이용도 목사를 중심으로 활동하는 장로교 출신인사들의 활동상에 반발하여 더욱 더 강하게 비판하고 나선 측면도 무시할 수 없다. 이런 저런 연유로 인해서 30년대를 통과하면서 한국교회의 두 축인 장로교와 감리교회는 이 문제에 관하여 말없는 긴장 관계를 형성해 가지고 내려 왔으며 한국동란 후 가속화된 사회불안과 혁명적 상황에 처한 한국교회가 이단 사이비 문제로 분쟁에 휘말리게 되고 그런 상황에서 이용도 목사를 둘러싼 신학적 정체성에는 서로 서로가 손쉽게 접근할 수 없는 무거운 침묵이 가라앉아 있었다. 그리하여 상당히 많은 시간이 흐른 후에 서로간의 무거운 분위기는 하나 둘 벗게 된다. 실제로 감리교도 이용도 목사를 재론하는데 상당기간이 필요로 하였고 실제로 조심스러웠다. 이용도 목사가 장로교로부터 이단정죄를 받은 상태였기 때문에 더욱 조심스러웠다. 그러나 변종호 목사의 이용도 전집은 감리교회뿐 아니라 뜻있는 장로교인들도 많이 읽었다. 그리하여 1970년 정확하게 그 해를 맞던 해에 연세대 신과대의 민경배 교수는 대학 학술지에다가 이용도 목사를 신학적으로 평가해보는 획기적인 연구논문을 내놓았다. 민경배 목사는 이 논문에서 이용도 목사의 측근들로서는 다분히 감정이 날만한 자료로 받아들이는 신앙생활 지의 주요 논문을 가지고 김인서 장로의 후예답게 이용도 목사의 이단성을 논구하였다. 참으로 지금 읽어보아도 이용도 목사의 이단성은 분명하게 지적되어 있다. 그러나 1966년에 이미 유동식 교수는 자신이 편집하고 있던 ‘기독교사상’에 뜬금없이 이용도 회상기를 발표한 적이 있었다. 연속성이 있는 행동은 아니었으되 분명한 사실은 감리교 신학의 특성상 자유주의적 입장에서 1930년대의 이용도 목사 위상에 대한 회상을 시도하면서 한국교회의 일방적인 매도는 지나친 행위가 아니겠느냐 하는 뜻을 포괄적으로 드러낸 것이었다.

 

그러면서 이 시점은 70년대로 옮아갔다. 시대가 변한 것이다. 70, 80년대 한국사회는 도시화와 산업화의 영향으로 사회 전반적인 분위기는 혁명적 격변을 경험하고 있었다. 특히 도시 산업화 상황에 처한 가난하고 소규모의 한국 개신교는 도시의 인구집중 덕분에 부흥의 불길을 당기기 시작하였다. 산업화는 이 농민들을 도시변두리로 내몰았고 이들은 자연스럽게 도시빈민으로 전락하였으며 노동 대중은 급격하게 증가하면서 민주화와 인권 그리고 산업평등을 요구하는 민주적 참여자로 성장하고 있었다. 여기에 도시화에 따른 목회 서비스의 요구가 폭발하면서 도시목회에 성공한 대형교회가 등장하였고 양극화된 현대 사회에서 기독교 영성의 혁명적 봉사는 민중을 만나고 접촉하는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게 되었다. 적극적 사고방식도 나오고 전통적인 기복신앙도 있었지만 도시화의 그늘 속에 포로가 된 잃어버린 영혼들은 교회 공동체 안으로 흡수 통합되면서 교회성장의 원동력이 되었다. 공동체를 향하는 한국인의 정서를 사로잡고 민주화와 인권투쟁은 노동자 농민 빈민 학생 청년들을 한자리에 모으게 하였고 정치의식을 함양시켰다. 기독교는 사회정의뿐 아니라 조직화되고 참여 성과를 나눌 수 있는 강력한 운동성을 띠게 되었다. 개신교 일부 세력들은 반정부 투쟁과 민주화와 인권과 통일로 가는 에큐메니칼 운동으로 합류하였고 대형교회는 현실 안주에 덧붙여 기복 신앙적 퇴행성을 조직화하는 성과를 내세우게 되었다. 극단적 대립 각을 세우기도 하고 친정부적 행태를 띠기도 하면서 한국교회는 최종적으로 한국사회가 직면한 시대적 좌표를 제시하였다. 의식화되고 전투적인 기독교인과 복음주의적 확신과 헌신에 익숙한 개신교회는 내면적 질서를 향한 희구에서 하나가 되어 기독교 영성과 윤리의식을 고양하고 교회 지도력의 도덕성이 무엇인지를 찾아보게 하였다. 여가에 목회 일선에서 당장 필요로 하는 기도하고 설교하고 교인 훈련시키고 헌신케 하는 목회적 실천력을 제고하는 길은 한국교회의 영성적 유산을 재 발굴하고 정체성을 확립해야 한다는 문제의식으로 나갔다. 여기에서 과거 한국교회를 빛냈던 교회영성들을 하나 둘 발굴하기 시작하면서부터 장로교회에는 길선주 목사, 김익두 목사, 주기철 목사들이 재 발굴되어 나왔으며 감리교회에서는 이용도 목사가 나왔다. 그렇게 되어서 시무언 이용도 목사는 다시 태어났다.

 

이용도 목사 연구에는 먼저 교회적인 측면에서 그의 부흥운동이 주로 연구의 대상이었다. 동시에 목회적으로는 설교연구에 흥미를 더했다. 모두가 이용도 목사의 유산이 무엇인지 주목하였다. 일종의 연구 붐이 일어났다. 연구자들의 관심은 어떻게 하면 한국교회 영성의 핵심인물인 이용도 목사를 깊이 이해하고 평가하여 오늘에 되살릴 것인가 하였다. 여기에는 장로교 길선주 목사, 김익두 목사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런 와중에서 한국 감리교회는 ‘5천 교회 100만신도 선교운동’을 전개하면서 양적 상장에 버금가는 질적 성장의 새로운 차원이 있다는 도전을 받으면서 이것의 내면을 채우기 위하여 좀 더 깊이 있고 내용 있는 영성을 찾아 나섰다. 이 시기에 감리교는 호헌파와 갱신파가 교회를 둘로 갈라 대립하였었고 1978년 3년 만에 합동에 합의하게 되었다. 바로 그 해에 감신대는 신학과 세계 여름호 특집으로 이용도 목사 연구를 냈다. 1930년대 졸업생이었으나 까맣게 잊어버렸던 협성신학교 출신의 이용도 목사를 다시 살리려는 노력의 하나였다. 장로교의 일방적인 이단시비에 휘말려 순식간에 변명한마디 해주지 못한 채 죽어 간 젊은 목회자 이용도 목사를 다시 평가하자는 작은 뜻이 있었다. 감신 교수들은 ‘신학과 세계’ 여름호에서 이용도 목사를 집중 분석하고 전공에 따라서 교회사 조직신학 기독교 윤리 등 순으로 시무언 이용도 목사의 신학을 다루었다. 특히 눈에 띠는 것은 ‘십자가 신비주의’나 독일 라인 강변의 영성 ‘마이스터 엑크하르트’ 에 빗대어 쓴 논문들이 나온 것이었다. 십자가 신비주의 측면에서 바라본 이용도 목사는 분명 이단이 문제가 아니었다. 사실 한국교회에서는 이미 이용도 목사 평가를 이단시 하지 않았다. 신학교에서는 매해 학사 논문으로 이용도 목사 연구 논문을 냈고 그 당시에는 이미 대학원 과정에서 석사학위 논문으로 자주 등장하고 있었다. 이어서 목회학 박사 학위 소재로 각광받고 있었다. 이용도 목사는 위치상 1930년대의 침체기에 들어 간 한국교회에서 어떻게 부흥운동의 주역으로서 활발하게 응했고 영성의 깊이 또한 만만치 않은 독보적인 존재였다. 그러나 이 당시의 연구 경향은 역시 변종호 목사의 전집을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어찌되었든 간에 한국교회가 이용도 목사 문제를 공식적으로 다루어도 손색이 없다는 시그널로 받아들인 후학들은 앞 다투어 연구에 연구를 거듭하였고 본질적으로 이용도 목사는 무엇이 문제인가에 집중하였다. 그는 다루기 힘들었던 것이 아니라 영적으로 깊이를 더하지 못하여 공부의 진도가 나갈 수 없는 것이 더 문제였다. 피상적으로 어떤 면에서는 상당한 지경까지 알고는 있으나 실제 생활과 현장에서 적용하고 응용하는 문제는 결코 만만치 않다는 점이다. 그래서 접근하는 방법이 목회와 선교에서의 실천 신학적 측면으로 연구하는 것이었다. 설교학도 좋고 상담학도 좋았다. 그래서 이 분야의 연구경향은 상담심리학 분야 특히 심층 분석에 많은 자료 들이 쏟아져 나왔고 구스타프 융이나 페아뱅크의 심리분석도 하나의 경향이었다. 다들 중요한 연구의 진전이다.

 

한국교회는 고속성장이 문제다. 특히 대형교회의 경우 성장의 신화에 집착하다 보니까 비대해 질대로 비대해지면서 세습과 목회독재가 만연하여 이단 사이비 교주 행태를 띠는 상식을 벗어난 교회들이 너무 많다. 도덕성에 먹칠하고 불법 비리를 저지르고도 태연하다. 법의식이 마비되고 자기가 정작 뭐하는 인간인지를 망각하고 있다. 그러나 정작 중요한 중소형 교회들도 하나같이 목회적 방향에서 시장경제에 예속되어 장감성 등의 나름대로 간직하고 있는 복음적 정체성을 상실하고 실용주의 편중하여 지나치게 세속화되고 팔았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글로벌 시대의 특성인 융합(Convergence)이 자유자제로 일어나는 대신 비판적 대안인 세계화와 기독교 신앙의 내적 성장과 사회경제적 분석 그리고 상담 심리적 심층 분석 등이 결여되었다는 점이다. 미래학문의 과제인 융합적 세계관은 통학문 (Interdisciplinary) 내지는 학문간 경계 허물기에서 이미 경험하고 있다. 문제는 디지털 혁명시기를 맞은 교회가 자체적으로 검증되는 신학적 방향과 교회의 공동적 고백에 기초한 신학적 일치와 연계를 활용하여 목회적 리더쉽을 개발하고 기독교 영성의 심화된 세계를 찾아내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미 세계교회에서는 제3세계 교회들의 서구세계에 도전하고 있음을 너도나도 인정하고 있으나 정작 우리들은 세계 언어를 자유자재로 사용하고 활용하여야 하고 네트워크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특히 정보 교류의 핵심기술인 모바일 체제에 맞는 정보통제와 공급을 무한대로 사용할 수 있는 기술과 관리 능력 재원 염출을 할 수 있어야 한다. 이미 글로벌한 네트워크에 맞는 일반학문의 진보를 목격하고도 교회는 아직도 진부한 신학이론에 매달려 새로운 시대의 모바일 혁명을 외면하는 신학자들과 교수인력들이 있다. 그러니까 자연 신속한 정보 공급 체제마저도 손대지 못하고 뒤쳐지게 된다. 이미 우리는 세계화의 고속도로에 진입하고 있다. 이러한 시대상과는 배치되어 역주행하려는 경향을 띠고 있기도 한다. 이제는 대형교회를 중심으로 나름대로 형성한 교회 성장론을 가지고 합리화할 정도로 세분되었다. 그러나 좀 더 진지하게 성찰하고자 한다면 우리는 이제 인간구원과 공동체 구현에 전념하여 인간의 얼굴을 한 공동체 현성과 모바일 혁명기를 맞이하는 인간성 구현을 위한 소통의 과제를 안고 있다. 여기에 우리는 가장 중요한 기독교적 가치와 내용을 가득 채운 콘텐츠를 개발하고 공급해야 한다. 이제 우리가 맞이하고 있는 미래적 과제인 모바일 혁명시의 중심 내용은 성령충만의 체험과 은사개발의 중심에는 영성훈련의 심오한 과제가 놓여 있으며 이 운동의 중심에는 21세기 기독교 부흥운동의 새로운 메시지가 무엇이어야 하는지를 절실하게 묻고 있다. 시무언 이용도 목사는 여기에서 마주치는 강한 영적내면을 가지고 있다. 날로 치열해져 가는 세계화의 흐름에 편승하여 나가는 한국교회 목회현장에서는 탄탄한 목회경쟁력 제고의 과제가 숨어있으며 치열한 목회경쟁 선상에서 직면하게 되는 실천력의 부족이 문제되고 있다. 더군다나 자유주의 시장 경제 체제 하의 교회성장이라는 측면에서 도시목회의 현장은 보다 강력하고 탄력성 있는 기독교 신앙 메시지와 조직 방법 및 교인상담 및 관리 능력을 요청하고 있다. 복음주의적이면서도 찬양과 상담과 조직관리와 통섭적인 영적통찰력을 필요로 하는 융합의 새 기술이 나와야 할 시점이다. 나는 이것을 융합의 진실이라고 말하고 싶다. 성경 메시지와 인간 삶의 심층에 깊이 침투하는 영적 깨우침이 절실하게 요망된다. 여기에 덧붙여 나눔과 섬김 사회봉사와 서비스 공급의 주체가 되어야 할 시대적 소 명이 있다. 여기에 시무언 이용도 목사 같은 새로운 인간을 소개하고 나누고 공급하고 전파하고 받으면서 예수의 삶과 유산을 새롭게 전파한다. 예수 공동체 안에서 좌와 우를 극복하고 융합된 사상 체계와 관리시스템을 확보하여 인간구원과 해방의 이중적 과제를 동시에 추구하고 기독교 신앙 본질을 함께 규명해 나간다. 여기에 이용도 목사의 영성적 실천은 많은 시사점과 목회적 전환의 중요한 전거의 틀을 제공할 수 있다고 믿는다. 오순절 성령 은사도 사회 정의와 생태 생명 환경 보전이라는 지구적 큰 틀에서 서로 융합하고 교류하고 협력하는 동시성으로 역사한다. 이러한 제한을 뚫고 공동체적 대안으로 나타난다. 성령의 은사를 대망하고 간구하는 구도자들과 그것을 사모하고 단련받기를 사모하는 전문 사역자들을 영적으로 훈련시키는 현장이 있어야 한다. 이러한 시대의 영적 요구와 기대는 시무언 이용도 목사로 하여금 카리스마 넘치는 산 기도의 사역자로서 그의 진솔한 가치를 빛나게 한다. 고난 당하는 하나님의 백성들 가운데 교회는 약자 집단에 대한 강한 구속력을 행사하면서 교회는 인간구원의 길잡이가 된다. 민중의 아버지가 된다. 현장중심에서 쏟아지는 영성의 폭포수를 정수리에 맞으면서 부흥운동의 내면을 채운다. 그리스도 예수의 영적 다이나믹스를 공동기반으로 하여 가난하고 힘없는 대중들과 인간해방과 구원의 장래를 함께 나눈다. 여기에 이용도 목사의 희생적 삶과 예언자적 메시지 가난의 영상 민중 신앙적 카리스마가 존재한다. 이것이 바로 시무언 이용도 목사이다. 이러한 흐름에서 이용도 목사 연구 분야는 목회학 박사학위를 넘어 본격적인 박사학위를 가능케 할 것이다. 그 중에 한 가지 예를 들자. 인디아의 선다 싱과의 비교연구 분야나 설교학 상담심리 분야는 한국교회 영성신학 형성과 아시아 신학과의 관계에서 아주 흥미롭고 중요한 과제가 된다. 또한 설교학 분야나 상담심리 분야도 각광받을 가능성이 크다. 여기에서 아주 강조하고 싶은 것은 하나다. 그분의 영성적 삶의 내용 곧 실체로서의 이용도 목사는 사실 산 기도로 단련 받은 사람이었다는 것이다. 아주 어린 시절부터 시작된 그의 목회생활 내내 쉬지 않고 이루어진 것은 기도생활이었다. 금강산 기도를 시발로 하여 통천 양양과 마포 서강과 전국을 상대로 휘젓고 다녔던 이 사람 이용도 목사는 한 마디로 하여 산에서 기도하는 담대한 기도대장이었다. 그는 지칠 줄 모르는 담대함을 무기 삼아 산에 오르고 바위에 엎드려 기도로 다져진 강고한 복음의 사역자였다. 그래서 연약한 이들은 그를 흉내 낼 수 없고 그를 능가할 수 없다. 이점에서 시무언이라는 별호를 가지고 있는 성락교회 김기동 목사의 경우는 전형적이다. 지나친 신학적 감수성은 기도생활의 적이다. 따라서 신학동산에서 말로만 연단 받은 연약한 지체들인 신학도들과 일부 목회자들은 단순하고 무식하고 열정적인 다이나믹스를 갖추고 있지 못하다. 따라서 이런 부류들은 복음적 정열에서 떨어지고 기도의 신비주의에서는 함량미달이다. 흉내는 낼지 모른다. 그러나 정작 중요한 전능하신 하나님의 힘을 행사하자는 못한다. 여기에는 신비적 경향성 때문에 깊이 들어 갈수록 이단시비가 따른다. 아주 위험한 수준이다. 여기에서 말하고 싶은 것은 이용도 목사는 너무 짧게 살다가 갔다. 좀 아쉽다. 조금만 견디고 일어났으면 자기를 둘러싼 한국교회의 이단 시비를 잠재우고 새로운 예수교회의 목회적 기반을 든든히 다지고 새로운 형태의 사역모델을 제시할 수 있었다. 그런데 그는 갑작스레 33세라는 연소한 나이에 돌아가셨다. 진짜 성령역사를 마음껏 펼치지도 못하고 장로교의 이단시비에 휘말려서 꿈도 피워보지 못하고 갔다. 실로 안타깝기 그지없는 노릇이었다. 특히 최후의 8개월 그시기에 이용도 목사 주변에서는 무슨 일들이 벌어졌는가. 입신으로 명명되는 주님 임재와 개인을 예언기도 그리고 한준명 목사의 주도로 어린양 혼인잔치를 했고 이것이 원인을 제공하여 피가름이라는 독특하고 잔망스러운 이단세력을 조직화하는데 필수적인 무기가 등장하였다. 이는 기성교회 특히 장로교회를 자극하였고 김인서 장로를 자극하여 신앙생활지에 보도하고 평양교회들이 들고 일어났다. 결국 감리교 경성교역자회의에서도 축출당하고 새 교회 예수교회로 나갔다.

 

    이용도 목사는 이호빈 형님이 없었더라면 예수교회 마저도 세울 수가 없었다. 병약하고 마지막 가는 입장에서 훗날을 책임져준 이가 바로 이호빈 목사였다. 그래서 그랬는지는 몰라도 이호빈 목사는 아가서를 가지고 이용도를 추모하고 아가서를 가지고 신비신앙의 진수를 전하였다. 이것이 이용도 목사 연구에서 빼 놓을 수 없는 부분이다. 더군다나 평화주의자 이호빈 목사는 서울 연합교회마저도 감리교에 뺏기고 말았다. 비폭력 무저항으로 살았던 이호빈 목사는 다시 찾으려 하지 않고 말았다. 탐욕적인 저질 들이 판치는 현실에서 비현실적인 대응으로 일관하였던 분이 우원 이호빈 목사였다. 오순절 성령운동의 강력한 카리스마와는 사뭇 다른 이런 측면들은 예수교회 목회에서도 그대로 드러났다. 작은 교회를 지향하는 대안적 공동체가 바로 자금의 예수교회다. 성직자들의 지나친 대우를 거절하고 평신도 중심의 자립자전의 원칙을 지키고 있다. 기성교회에 대항하는 대안적 공동체교회로서의 자기정체성이 분명한 예수교회는 봉사와 헌신을 주무기로 삼는다.

 

    피터스 선교사의 글 한국의 신비주의 크리스찬 시무언 이용도는 피선교지 한국에서 만난 한 무명의 전도자 이용도 목사가 어떻게 성장하였으며 신학교육을 받았는지 그리고 목회현장에 들어가 어떤 경로를 통해서 성령 받고 설교하고 부흥운동을 주도하다 갔는지를 일목요연하게 보여준다. 특히 이용도 목사의 가난과 아픔과 좌절을 그들의 성령운동 과정에 숨겨진 진실을 내면 가득 증언한다. 1919년 3.1 운동 초기부터 학생의 신분으로 4년간의 투옥생활을 겪었고 항일민족의식을 가지고 투쟁적 삶을 시작한 그는 체질적으로 가난하고 억눌린 민중적 삶의 후예였고 그 속에 뿌리 내린 민중설교자로서 자기 위치가 확고한 그리스도의 제자였다,  그러나 그는 민족해방과 인간구원의 이중적 혁명과정에서 자기정체성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찾았고 인간구원과 해방을 교회 안에서 전파하는 한계 안에서 살았다. 강동 회심 사건 이후 그는 전적으로 회심의 설교자로서 교회부흥의 불길을 부쳤고 성령 안에서 맛보는 기쁨을 가지고 가난한 설교자로서 한반도와 부속도서를 전전하고 북만주로 진출하였다. 열아홉에 장가가서 가정을 이루고 가난하고 고달픈 살림살이에서 찌들지 않는 젊음을 가지고 복음 전도자의 삶을 살았으나 언제나 그는 송봉애 사모와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숨막힐 듯 싶은 가난의 고비 고비를 넘어야 했다. 전하는 말에 의하여 이용도 목사와 사는 동안 송봉애 사모는 열두 번도 더 가출했다고 한다. 그러한 비참한 생활고 속에서도 기개 높은 이용도 목사는 미국선교사의 손아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자기 주변의 인물들을 바라보면서 적개심을 불태웠고 속 좁은 기성교회와 맞섰다. 그런 와중에 치명적인 시대의 질병인 폐결핵(TB)으로 죽었다. 이것이 일제강점기 하에서 미국의 식민지나 다름없는 목회와 교회 현실 속에서 희생되었다. 피터스 선교사의 증언은 이용도 목사와 나누었던 깊은 신뢰가 기반을 이루는 것이었지만 기실 이들 둘 사이에서는 서로가 서로를 넘어 설수 없는 어떤 질적 차이 곧 일제강점기를 사는 미국 출신 선교사와 한반도 식민지 출신으로서 이중적 식민지배하에 살아남고자 몸부림치던 식민지 출신의 가난 했던 설교자였다는 현실적 차이가 뚜렷하게 나타나 있다.

 

    그렇다면 오늘의 오순절성령 은사운동은 어떤 관계인가. 일찍이 순복음신학교 강단에도 섰던 변종호 목사는 이용도 목사의 은혜줄기에 순복음의 대명사 조용기 목사도 넣었다. 그것은 오순절성령운동과 이용도목사의 성령운동 사이에는 일맥상통하는 무엇이 있다는 것이었는데 실제로 이용도 목사는 오순절 성령운동이 오기 이전에 먼저 성령운동을 했고 그것이 너무 짧은 시기에 이루어지는 바람에 영적추수를 이루지 못했다는 아쉬움을 남긴다. 목회와 성령운동은 철저히 조직적이어야 한다. 구역장 제도를 두고 교인관리를 철저히 하는 현대적 목회기법에서 보자면 간헐적이고 즉흥적이기까지 한 부흥설교로서는 경쟁 심한 오늘날 현대목회에서는 기본조차도 지키지 못하는 것이다. 조직 없는 카리스마는 상상할 수 없으며 기독실업인회(CBMC)가 재정지원을 하지 않는 성령운동은 존립조차도 불가능하다. 그런 면에서 성령운동교회는 재정적 기반을 든든히 하면서 교권을 강화시킨다. 시무언 이용도 목사만 가난하고 스스럼 없는 자유혼을 가지고 살았다. 이것이 현대적 성령운동하는 오순절 성령은사운동 교회들과는 현실을 달리하는 측면이다. 실제로 오순절 교회 중에 성공적인 목회를 구축한 이들은 철저히 기도하고 조직화된 평신도 사역자들을 동원하여 조직의 기반을 다진다. 그러니까 예수교회와는 처음부터 다른 조직이다. 카리스마로 다져진 철저한 조직과 통제를 모토로 삼는다. 이처럼 경향성이 다른 다르고 전도를 강조하며 조직관리의 기법이 다르다. 그러니까 원시적 성령운동가 집단들은 사람을 모으고 돈을 모으는 대신 은사를 나누고 사랑을 실천했지만 현대의 카리스마 설교자들의 조직을 세우고 통제를 가하고 재정기반을 다지는 쪽으로 목회를 했다. 이점에서는 통일교 문선명도 같은 방식으로 목회를 했다. 설교를 강력하게 하되 사업기반을 다져서 돈도 마음대로 쓴다. 이런 전략적 특성 때문에 지금은 초기의 메시지의 진실성은 상실했어도 조직들은 가동되고 세습을 하게 되었고 엄청난 재화와 이권을 쥐고 있다. 이용도 목사같이 평생가난을 등에 지고 살면서 부흥회 인도하러 전국을 다녔지만 언제나 가난하고 무력하게 동가숙 서가숙 하면서 살았다. 더군다나 당시와 시대상황은 일제의 식민지였고 기독교 인구도 적었다. 교세도 작을 뿐 아니라 종교적 편견도 무시 못할 정도로 극심한 차이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니까 이용도 목사는 그러한 제한적 삶의 제한적 조건 속에 처하여 현실을 도피하는 산기도를 해서 힘을 얻고 가난을 벗삼아 굶기를 밥 먹듯 하면서 고생하였다. 부흥회를 해도 사례비를 안 받았고 교인들의 대접도 신통치 않았다. 부흥회 인도는 자원봉사 수준이었고 부흥회 운동의 게릴라였는지도 모른다. 실제로 이용도 목사 부흥회는 바로 그런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러니까 부흥운동의 정규군이기를 거부하고 결국은 어렵고 힘든 일선 교회를 상대로 무상으로 집회를 안도하였다. 게다가 폐결핵을 앓고 있었으니 언제까지 견딜 수 있었겠는가. 지금은 유명 설교자가 되면 벤틀리도 타고 골프도 치고 비서도 두고 건강 관리하랴 웰빙하랴 비행기타고 세계를 매주 밟고 다니는 세상이 되었으니 무엇으로 이런 세태를 비교할 수 있으랴. 이것이 당시 일제강점기 식민지 청년으로 가난하기만 하였던 복음전도자 이용도 목사는 결국은 치명적인 질병에 시달리면서 짧고 굵은 생애를 갔다. 그러니까 실제로는 오순절 성령운동의 은사운동이라고 하지만 현대적 의미의 조직체계를 갖추고 관리를 철저히 하는 부흥운동은 아니었다. 실제로는 그런 의미로 해석하려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것보다는 그의 삶의 스타일이 좋았고 기도하였고 주님 임재를 체험하고 은사를 행했고 십자가 신비주의를 체험한 영적 최고봉에 도전하였다.

 

    그렇게 본다면 이러한 여러 문제점들을 극복하면서 새로운 연구 주제를 제시하여 이용도 목사 논구의 한 단초를 풀어가는 길목을 어떻게 설정해야 할까. 한 단계 업그레이드 할 수 있는 길은 없을까 이다. 우선 지난 1998년 10월 제 23회 정기총회에서 이용도 목사 명예회복을 총회에서 결의한 바 있다. 그러나 총회 결의만 있었지 후속 조치는 전혀 없었다. 말만 나왔지 후속조치가 전무하였다. 그래서 화양교회 김종순 목사는 당시 총회의 대표적인 서명자의 한 사람으로서 여러 동료 후배들과 예수교회 지도부를 함께 받아서 이용도 목사 기념사업회를 조직하였다. 앞으로 이용도 목사기념사업회는 연구모임뿐 아니라 앞으로 대중 집회도 하고 장학생도 배출하고 세계적인 신학 교육기관과 연구 및 교수 학생 목회자 교환사업도 벌리고 교단의 대표자도 배출되어서 감리교회 전체가 참가하는 영성개발과 신학교육 프로그램이 합류하는 개발사업을 펼칠 수 있을 것이고 두뇌집단을 초청하여 한국교회의 영성신학을 세계적인 수준의 프로그램으로 개발하게 될 것이다. 물론 이용도 목사의 영성은 한국교회의 목회 일선에서 당장 사용할 수 있으며 신학대학 교과과정에 반영하여 학부 과정과 신학생과 대학원생들을 상대로 하는 목회전문개발 코스를 만들어 운영할 수도 있을 것이다. 특히 교단산하 3개 대학의 학부와 대학원에 한국교회 영성개발을 위한 연속 강좌를 해보고 일선 목회자들에게 실질적으로 도움이 되는 목회자의 인성 개발 과정을 설치하고 해외연수 등 영성개발에 필요한 각종 프로그램을 제공할 수 있을 때가 곧 올 것이다. 덧붙여 기도생활이 자꾸 침체되고 있는 교회현실을 전환시키기 위하여 기도생활을 공동적으로 경 험할 수 있게 대학원 학위과정 학생들에게 합숙도 시키고 직접 산기도도 가고 기도원을 찾아 가는 순례 프로그램도 만들어서 전국을 답사하고 전국적으로 영적으로 건강하고 활기찬 목회자 중간집단을 육성하여 감리교회를 앞세워 나간다.

 

    또 하나 중요한 과제는 WCC-Pentecostal Dialogue 프로그램을 통해서 오순절성령 운동을 정교회 다음으로 세계교회운동에 참가시킨다. 그것이 2007년 11월에 동부 아프리카 케냐 레무르에서 모인 제4차 글로벌 크리스천 포럼이 있다. 여기에는 비 가맹 교단 특히 오순절 계통의 영적 지도자들을 한 300명 정도 초청하여 앞으로의 지구촌 전체를 상대로 하는 교회일치와 연합의 가능성을 타진하고 기독교 - 이슬람 간의 문명충돌을 해결하고 역내의 평화를 진작시키는 운동을 전개하려는 구상이 실현되고 있다. 지금 지구촌에는 4억 8천을 헤아리는 오순절계 교회 교인이 있다. 이들의 영성적 영향력과 일치된 힘을 통하여 글로벌 크리스천 포럼을 확산시켜 나간다. 오순절 성령운동의 추진력을 만나면서 세계교회운동계까지 강력한 파급 효과를 가지고 있느냐는 것이다. 이것은 악한 방법으로 행사하는 강한 조직력을 발휘하도록 하는 방법이다. 즉 인간관계의 최종적 접촉방식의 하나인 성적 행위를 매개로 하는 악랄한 방법으로 인간 공동체 안에서 얼마든지 예상할 수 있는 남녀 관계를 매개로 삼아서 조직을 확대하고 내밀한 관계성을 구축하려는 신흥 종교들의 조직 확산 방법에 다름 아니다. 이것은 최종적으로 교주의 카리스마에 굴복 당하게 만드는 마력을 지니고 있다. 이것은 1950년 한국동란을 겪으면서 안게 된 사회적 혼란과 불안 심리에 편승하여 새로운 조직형태를 시도하여 기성교회를 허물어내고 신흥종교의 교주로 하여금 돈과 조직과 카리스마를 행사하도록 출구를 튼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혼음 파티를 열고 성적 수치심을 배면에 숨긴 채 조직을 확산하고 재화를 약취하여 여성들을 노리게 감으로 삼아 기업도 일으키고 비밀조직도 확산시켜나간 극악무도한 방식이었다. 그 중에 문선명의 통일교는 초창기에 6명의 여성들을 접촉하여 육 마리아라고 하면서 재화를 강탈하고 은밀한 관계를 맺으면서 자파조직을 확대해 나갔고 이것이 기회가 되어 종교조직이 기업으로 진출하여 재화를 얻게 되었다. 당시 통일교는 예화 산탄 공기총 공장을 창업하면서 일화석재도 만들었다. 이것이 후에는 대형기업으로 성장하여 종교 활동을 하면서 동시에 기업 활동도 하였다. 일화를 창업하고 이제는 세계적인 건축기업인 엄건축연구소와 평화자동차가 있고 영가목회 곧 심령술의 예전의식을 장악하여 7대조의 영적 포로를 청한하고 헌금하라는 쪽으로 가평의 청심 빌리지를 이끌어가고 있다. 물론 조직의 비리도 있고 암투도 있으며 이권을 둘러싼 숙청도 있다. 그러나 조직 체계를 발전시키는 과정에서 상상도 못할 조직원 간의 통제방식과 카리스마 리더쉽의 행사가 훨씬 정교해졌고 치밀해졌다. 이용가치가 없다고 판단될 때에는 거침없이 숙청해버리는 사악함도 체계화되었다. 초창기 유효원 선생을 숙청하고 방기한 것은 약과에 지나지 않는다. 이런 집단들은 국외자들 입장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내면적 갈등이 폭발직전까지 간다 한들 아무 소용이 없다. 분명한 것은 이들의 내면에는 밀교 형태를 띠고 있으며 재화와 통치기술의 교묘한 측면에서는 기업적인 생리도 띠고 있다. 조직의 현실화 일반적인 교회공동체 관리 기법과는 전혀 다른 전략적 측면에서 다루는 목회 생리가 이들 집단의 로지스틱스라면 과언일까. 결국은 조직 초기 넘치는 조직과 통제의 힘을 발휘했던 원리강론의 핵심 교리인 이성 합일과 탕감복귀 교리는 결국은 하나의 종교의식으로 자리 잡았으며 조직의 밑바닥에서 정형화의 길을 열었다.

 

    여기에서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시무언 이용도 신비주의의 진수가 무엇인지를 찾아야 하겠고 동시에 기성교회가 기피하는 신비신앙의 목회적 적용에는 어떤 문제점이 없겠는가 하는 것이다. 종교의 신비적 요소는 어떤 신앙 집단이든 갖게 마련이지만 문제는 이러한 은밀한 형태를 띠는 조직의 경우는 비인간적이고 인권유린의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본질적으로 공동체의 덕을 파괴하고 조직을 카리스마 일인에게 의존하게 된다는 문제점을 낳는다. 이것이 신흥종교의 조직내부의 비인간적인 모순이다. 지상 천국의 환상을 주면서 조직 내의 잔인한 인권유린은 제거하지 않는다. 이러한 측면에서 보자면 신흥 종교의 본질적 특성인 광신적 공동체의 속성상 일인 지배하의 카리스마 공동체로 변질되고 따라서 다수 대중들의 눈을 속여가면서 서로 서로를 속이고 조직 장악을 위해 연약한 지체를 희생시킨다. 이러한 조직들은 조직 내의 모든 사항을 협의하지 않고 이너서클에서 처리하고 폐쇄적인 재정 운용과 독재적인 관리방식을 고수한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가 역동적인 성령은사를 가지고 시작하였어도 무조건 일하고 봉사하는 분위기를 이용하여 착취하고 통제하는 한편 성령운동의 은사를 외면한다. 반면에 이용도 목사의 예수교회는 성령운동의 진정성을 담보로 삼아 초대교회의 조직처럼 자발적인 봉사 체제를 통하여 은사를 개발하고 전도하는 사도행전적인 원시 공동체를 지향하였다. 그래서 탄생한 것이 평신도 신학이었다. 그렇다면 우리가 주목하는 핵심적 과제는 무엇일까 그것은 성령 역사의 현재성 바꾸어 말하면 성령 임재를 체험한 이들이 기성교회의 무기력함을 떨쳐 버리고 의문의 율법에서 벗어나 영에 속한 혁명을 체험하는 것이었다. 피터스 선교사의 전언에 따르면 이용도 집단은 여기에 덧붙여 당시 기성교회가 믿는 성탄절의 기원을 12월 마자막 주간으로 보지 않고 러시아 정교회가 주장하는 1월 중순과 성탄절로 셈하였고 18세기 영국 복음주의 성령운동의 일파였던 어빙파의 주장과 흡사한 성령은사를 채용하였다는 것이다. 이것은 기성교회의 관행을 깨부수고 새로운 이니시어티브를 행사하겠다는 암시이다. 이런 일들은 영국 감리교회에서도 일어났다.성공회가 무기력하여 일어났던 비국교도 운동의 감리교회는 캠프미팅 운동을 통하여 서민대중의 요구에 응답하는 Free

Methodist 운동을 일으켰다. 이들은 웨스트 미들랜드 지역에서 머시사이드 전역에 걸쳐서 일어난 민중 성령운동가들로서 주로 맨체스터와 리버풀이 들어가는 머시 사이드 유역까지 확대된다. 이들 Free Methodist 운동 세력들은 민중중심의 성령은사 운동을 강력하게 펼치면서 마음껏 기도하고 찬양하고 싶어 천막을 치고 산중에 들어갔다. 이들은 성령받고 은혜받고 기도하고 설교하면서 후기 퀘이커교가 그랬듯이 회중 출신들이 주도하는 집회를 하면서 설교권 마저도 대중들에게 공개하는 집회운동을 전개하였다. 여기에 참여한 이들은 주로 웨스트 미들랜드 지역에 몰려든 노동자와 농민과 교사와 학생들이 주축을 이루었다. 이들은 찬송과 기도 설교와 개인 예언 기도가 한데 어울리는 역동적인 신앙공동체를 구축하였으며 민중 신앙적 특성을 간직하고 있다.

 

    여기에 1738년 5월 회심사건을 경험한 요한 웨슬리 목사도 이와 유사한 집회를 경험한다. 그것은 웨스트 미들랜드 지역 위쪽인 더비 주의 뉴캐슬 업 폰 타임에서 체험 한 것이다. 그것은 은사 체험의 일종으로 충격적이었다. 70명 가까운 이들이 한데 모여 기도회를 하다가 입신하고 방언하고 밤을 세웠다. 연속적인 집회를 통하여 기적의 은사를 체험한 것이다. 1907년의 웨일스 성령운동과 인디아 카시 힐의 기적 그리고 한국 대부흥운동도 그 때 일어났다. 이것도 성령역사였다. 1907년 미국 L.A. 아주사 거리에서 감리교 전도사인 펀햄(Furnham)이 주도한 24시간 연속집회도 방언 받고 찬양하고 예언하고 은사 행하고 설교하고 하는 역사도 같은 맥락이다.

 

    여기에서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이것이다. 1930년대를 거쳐서 사회적 혼란기에 직면한 한국교회는 수 많은 이단사이비 세력들이 등장하여 기독교 신앙 정통과 본진을 위협하고 혹세무민하는 혼란상을 연출하였다. 이러한 상황에 직면하여 교회는 정통신앙을 파지하고 이단 사이비 척결에 대비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박태선 전도관을 위시하여 문선명 통일교와 나운몽 장로의 용문산 기드온 신학교 등은 기성교회를 뒤흔들고도 남는 위력을 발휘하였다. 이는 비참한 전쟁의 참화를 극복하자는 뜻에서 기성교회의 권력은 여지없이 무너뜨리고 정규 신학교 출신 설교자들을 대신하는 이단적 카리스마들이 대거 등장하여 교권을 농단한 것이다. 이러한 신흥종교의 발흥에 직접적인 영향을 대라면 그것은 1930년대의 이용도 목사가 있다. 여기에서 발원하여 배재학교를 나온 만주 용정출신 황국주가 있고 훗날 통일교를 일으킨 문용명 곧 문선명이 있다. 이들은 다같이 이용도 목사에게서 은혜를 받았다. 우리는 이것을 한국 메시아 운동사의 맥을 같이하는 김백문과 유효원과 변찬린과 한에녹의 것을 담지하고 있다. 물론 한태동 교수의 부친이신 한에녹 장로를 여기에 포함시키는 문제는 논외로 하자. 그러나 이들의 흐름은 일정하게 해방 후 극심한 사회적 혼란기에 처하였던 한국교회의 영적 전통의 형성과정에서 빗나간 한국교회 신비주의 신앙운동의 일맥으로 파악할 수 있으며 이른바 민중 메시야운동의 한 줄기로 평가하고 있다. 그러므로 민중 메시야 운동은 이러한 한국기독교의 신비주의 신앙에서 출발하였고 전통적인 종교심성의 하나로 꼽히는 샤마니즘을 비롯하여 선도와 민간 불교의 전승에서 수혈 받은 신비주의가 혼합주의적 형태로 나타났다고 해석한다. 특히 문선명의 통일교는 정득은 여인의 피가름에서 힌트를 얻었고 한준명의 어린 양 혼인잔치에서 형상화하였다. 한국동란 후 피가름의 은밀한 전수행위는 기독교를 모태로 하는 신흥종교운동의 비밀스런 의식으로 발전하는 양상을 띠었다. 덧붙여 이단 신앙 사상들이 우후죽순처럼 솟아났다. 김백문의 이스라엘 수도원과 유효원의 통일교 원리강론과 한에녹의 영원한 복음과 변찬린의 성경의 원리 상 중 하도 다 한결같이 한국교회의 민중 메시아 운동의 산문이라 할 만하다. 지금도 민중메시야 운동의 경전으로 작용하 있다. 이들의 입장은 전통적인 한국인의 종교성에 뿌리 박은 신비주의 신앙 운동으로서 민중메시야 운동이다. 그때마다 이들을 이용도 목사의 직간접적인 영향을 받았다고 보았다. 물론 종교적 비의를 전수할 목적으로 집필된 이단 문서들에는 불행했던 한국 현대사와 굴곡진 역사의 뒤안길에서 버림받은 민중의 종교심성을 선동하고 조직화하려는 목적이 숨어 있다.

 

    따라서 이러한 종교적 혼란기를 직면한 한국교회의 장자교회라고 부를 수 있는 장로교회도 100여개 가까운 분파로 분열되어 나갔다. 그렇게 되니까 언제나 문제되는 것이 정통과 이단이었다. 오랜 세월 동안 누적된 분열상을 겪으면서 장로교는 이단과 정통나누기가 생존 법칙이 되었고 이러한 교회풍토가 자연히 이단감별사의 위치에 서게 하였다. 거기에다 텃세까지 가세하나 점입가경이 되었다. 이러한 바탕에서 보자면 황해도에서 평양에서 특히 이 지역에서 인기를 끌고 부흥회를 인도하던 이용도 목사는 자연스럽게 이들 집단들과 부딪치고 대립하면서 이용도 목사의 약점인 신비 신앙 사상의 단초들이 장로교 정서에 상충되었고 이단정죄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특히 이용도 목사 최후의 8개월 동안에 진행된 원산 광덕산 기도원에서의 신앙행태나 그 내용들이 대상이 되었다. 이러한 전후 정황들을 살펴보면 결과적으로 스웨덴보리 신비신앙으로 빠져나가는 것도 자연스럽다. 18세기 세계적인 신비신앙의 극치를 이루었던 그에게 경도되어 버린 예수교회를 이해 못 할 것도 없다. 극단에서 극단으로 이어진 위험한 게임을 이용도 후계 세대들은 경험하였다. 이는 아마도 이용도 목사 까지도 예상치 못했던 결과였으리라. 일정한 형태 종교 카리스마를 소유하고 있는 교주들이 종교 독점행위를 이루는 것은 상상할 수 있는 일이었지만 지나친 독선과 이권에 눈먼 것들이 카리스마를 뒷배경 삼아 선량한 하나님의 백성들을 마음대로 조작하고 인권을 유린하는 행위를 서슴지 않았던 것이 오늘날도 한국교회의 도덕성을 땅에 떨어뜨린 작태였다.

 

    이제 결론을 내자. 오늘 여러분들 앞에서 이용도 목사 부동운동을 오순절 성령운동의 틀 안에서 해석해보자는 제안은 그것이 어떤 의도이든 이단 사이비로 지목되는 부담을 벗어나 기독교 신비주의 신앙의 기본을 저버리지 않고 새롭게 대두되고 있는 모바일 혁명시의 기독교 신학과 목회의 과제를 한데 모아 가는 융합의 시대적 과업을 이루어보자고 하는 뜻을 담고 있다. 이용도 목사의 부흥운동 메시지가 강조하였다시피 신비주의적 신앙 세계는 신비주의적 경향으로 대중신앙과 쉽게 영합할 수 있지만 이제는 오순절 성령은사운동의 다음 단계인 주님임재의 신비신앙으로 한층 높여나가는 한편 이에 부합되는 교회의 신학적 준비와 신앙적 각성이 절실히 요망된다. 그리하여 기성 교권의 이단 시비에 걸리지 않으면서도 복음의 종말론적 의미를 되새기면서 한국의 주류 기독교의 윤리의식을 벗어나서 권위주의 작태를 청산하기를 바란다. 이것은 앞서 지적하였듯이 민중 메시아니즘의 저변에 깔려 있는 나눔과 섬김의 새로운 문화 의식을 포괄하고 배타적 우월주의에서 벗어나 포용적 다원주의의 민중메시아 운동으로 나갈 것이다. 이렇게 하여 우리가 초보적 수준의 교리 신학적 시빗거리에 들지 말고 앞으로는 한국교회의 영적 개혁과 생명생태 평화 운동의 비전을 찾아가야 하는 절박한 심정에서 오순절 성령은사운동과 융합하려는 생명운동으로 파악하여 기왕의 한국교회 부흥운동을 만들어 나가자. 그것은 1958년 이후 한국교회에서 성령은사 곧 방언운동으로 영적 운동의 새로운 차원을 마음껏 행사하여 오늘에 닿은 한국오순절 성령운동의 흐름을 보면서 교회 목회구조를 조직화하고 전문화하는 가운데 은사운동의 조직교회로 성장시킨 원동력을 찾아보자는 것이다. 물론 감리교회는 초기 미국 선교사의 교육 의료 사회복지 서비스를 바탕으로 삼아 총리원이 중앙 통제를 해 나가는 교회였다. 더군다나 일제에 협력하는 미국선교사들의 이중적 정치행태에 익숙해진 감리교회의 원초적 사회적응의 문제점에 덧붙여 해방 후에 밀려닥쳐 온 미군정은 감리교 선교사들과 가까웠던 감리교 엘리트들이 정치활동에 개입하였고 이러한 감리교의 독특한 흐름은 1950년대의 이승만 자유당 정권에서 만개하여 현실정치에 뛰어들어 부패 타락하였다. 다행히 7.80년대의 군사독재 치하에서 감리교는 자유당 잔당이라는 숙명적 스티그마를 벗어나서 중도 통합적이지만 그나마도 미래지향적인 리더쉽을 가지고서 산업전도와 도시빈민 운동을 조금씩 펼쳤다. 그렇게 하여 감리교는 청년 학생 대중들과 함께 하는 민주화 세력의 한 지류로서 민주화와 인권회복운동에 참여하게 된다. 그 시기에 감리교는 특히 미국 선교사들의 도움으로 산업전도를 시작하였고 민중선교운동을 개시하였다는 것이다. 이것은 도시빈민과 노동대중들을 포용하는 감리교 나름대로의 운동태도를 발휘하였고 민중과 역사의 요구에 부응하여 감리교 정치의식의 한 저류를 형성하였으며 민족 민주전선의 선한 연대로 남아 에큐메니칼 정신으로 실천하였다. 그러나 산업화의 여파로 형성된 교회의 고속성장과 보수적 신앙의식의 한 뿌리를 이루는 감리교 복음주의는 대체적으로 한국 감리교의 경향성을 자유주의 시장 경제체제 안에 가두었으며 여기에 대형교회들이 탄생하였다. 감리교 부흥사들이 주역을 이룬 속에 형성된 감리교 리더쉽은 중산층지향적인 중도보수였고 여기에 대항하는 감리교 에큐메니칼 신학자와 활동가들은 이러한 주류 감리교에 밀려나 변두리를 형성하였다. 그러나 감리교가 한국사회 내에서 차지하고 있는 책무는 민주화와 인권과 민족통일이라고 파악하고 여기에 헌신하는 감리교 현실참여 리더쉽은 비록 교회 내에서는 소수파였지만 전체 한국사회 내에서는 일정한 참여 민주주의파로서 일정한 역할과 기반을 가지고 있다. 이들 에큐메니칼한 선한 운동세력들은 교파주의를 극복하고 한국사회 내에서의 진보적 선한 연대세력과 호흡하면서 감리교 내부에서 정치적 개혁세력으로 비전을 공유하고 있다. 보편적으로 볼 때 이러한 흐름은 감리교회로 하여금 사회적 약자를 돕고 지원하는 디아코니아 실천과제와 빈곤퇴치 프로그램을 실천할 수 있는 추동력을 제공하고 있으며 도농 협력공동체를 구축하는 농촌 목회와 민중운동 청년 사회운동으로 감리교회의 에큐메니칼 정신을 표출해 왔다. 그러나 이러한 감리교적인 대국민 대중적 목회행태는 여전히 미약하여 감리교회의 대사회적 공신력 제고와 에큐메니칼 행동 프로그램으로 표출되기에는 미흡하기만 하다. 이것이 감리교로 하여금 중도 통합적인 우익 정치성향에 대응하여 복음의 역사적 사회적 의미를 찾아가는 참여 정신의 한 혈통을 이루고 있다. 감리교회는 본질적으로 민중 신앙적 흐름에 서되 복음주의적 서민 대중을 상대로 하는 중도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고 세계선교와 교회개척이라는 틀 안에서 현실 안주적 행태를 취한다. 이는 감리교의 사회정의를 위한 투쟁에 나서는데 장애를 주고 있다. 그러나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은 지난 120년 현대사를 관통하는 감리교 역사는 감리교로 하여금 한국사회에서의 주류 교회 중의 하나로 자리매김하게 하였다. 문제는 교회가 본질적으로 사회적 소명을 선교 정책 프로그램에 잡아넣어서 사회참여의 궤적을 강도 높게 끌고 가야 하는 데 여기까지 미치지 못하고 있는 것이 감리교이다. 오늘날 우리 사회는 지나친 부익부 빈익빈의 경제 양극화가 일어났고 빈곤추방과 사회정의 실천의 요청 앞에 서 있다. 더군다나 이주노동자들을 받아들이는 다문화 이주가정이 폭발적으로 늘어나고 1만 5천명의 탈북자들이 쏟아져 들어오고 있다. 날로 더욱 더 악화되고 있는 경제 세계화의 여파는 미국 중심의 시장경제 체제가 약탈 자본주의임을 확실하게 체험하게 되었다. 이러한 위기의 때를 맞아서 금융자본시장의 폐해로 말미암아 심각하게 희생당하는 대중 생활을 냉정하게 파악하고 나가기 위하여 천민자본주의에 대항하는 대안적 세계화의 신학적 세계를 제시하여야 한다. 동시에 감리교는 한국사회에서의 사회적 비중이 더욱 커지고 있는 가운데 이러한 영적 사명을 감당하고 대안을 제시할 수 있는 시무언 이용도 목사의 성령운동을 통하여 성령은사를 수용하는 성결의 복음으로 무장하고 민중 서비스가 강화된 목회 지도력을 개발한다. 더불어 교회는 이들과 더불어 함께 나누고 섬기는 신약 성경적 디아코니아 사역의 비전을 통하여 성령사역의 토대 위에 세워지는 디아코니아 사역으로 치고 나가서 교회로 하여금 본질적으로 나눔과 섬김의 목회 프로그램이 실천되기를 노력해야 할 것이다. 이것은 결과적으로 교회가 현실에 안주하지 못하게 할 것이고 시장경제 의식에 경도된 중산 지향적인 구조적 한계를 극복하고 대안으로서의 세계화 곧 경제정의와 생태 평화로 나가는 통합된 미래를 찾아가야 할 것이다. 이것이 감리교로 하여금 생명 선교의 미래를 열어가고 성령이 지배하는 참된 평화의 사회를 일구어내는 투쟁으로 승화되어 나갈 것이다.

 

 

 

이용도 목사와 교회갱신과 선교에 관한 연구

 


김주덕 박사(목원대학교 신학대학 강사)



    Ⅰ. 서 론


    1930년대 들어 한국교회는 1920년대부터 일본의 문화정책의 일환으로 외국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일부 신진 학자들에 의해 초기 선교사들의 근본주의적인 보수성을 탈피하고, 성서와 신학 사상을 주체적인 입장에서 새롭게 이해하려는 시도와 이로 인한 논쟁들이 일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1934년에 장로교에 있었던 “모세 저작권 부인설”과 “여권해석의 문제” 그리고 1935년의 “아빙돈 성경 주석 사건”을 통하여 알 수 있듯이 보수 근본주의적인 신앙을 소유한 선교사 또는 그의 영향을 받은 초기의 한국인 교계의 지도자와 목회자들에 의해 이러한 시도는 정죄되고 말았다.1)

    또한 하디 선교사에 의해 시작된 1907년 “평양 대 부흥운동”의 주역이었던 길선주 목사의 사경회를 통한 부흥운동이 1910년대까지 이어졌고, 그의 뒤를 이어 신유적 치유를 통한 부흥운동이 김익두 목사에 의해 1920년대에 일어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한국교회에 신학으로, 기존 부흥회의 형태로가 아닌, 당시의 한국교회의 갱신을 통해 한국교회의 부흥을 새롭게 이루고자 한 사람이 있으니 그가 바로 이용도 목사이다.

    시무언 이용도 목사는 1928년부터 1933년까지 약 5년간의 목회활동을 하다가 33살의 젊은 나이에 짧지만, 결코 짧지만은 않았던 그의 삶을 마치었다. 그의 짧은 목회 활동기간에도 불구하고 그가 한국교회에 끼친 영향은 참으로 크고 충격적이었다. 뿐만 아니라 그에 대한 견해도 각각 달라 어떤 이들은 그를 열광주의자로2),  신비주의자로3)규정하고 있고 또한 이단적 요소를 가진 부흥설교자로4) 평가하기도 하고 있다. 그러나 송길섭은 “병든 몸으로 죽는 순간까지 그리스도의 완전함을 위하여 꾸준히 진지하게 줄달음 쳤던 구도자요, 개혁자였다”5) 라고 하였다.

    이 글에서는 오늘날 한국교회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교회의 선교를 위한 개혁과 갱신이 절실히 요청되고 있는 시대임을 깨닫고, 이용도 목사의 한국 교회의 갱신과 선교를 향한 외침과 몸짓들을 더듬어 보고자 한다. 이를 통하여 한국교회가 건강하게 이 땅에서 선교를 담당하며 나아가야 할 길을 찾아보기 위해서다. 이는 오늘 한국교회가 부흥 성장하며 건강하게 내일을 향해 나아가기 위한 중요한 안내서가 될 것이다.

이 글에서는 서론에 이어 2장에서는 이용도 목사의 생애와 교회갱신을 당시의 한국의 정치적 문화적인 시대적 상황 등과 함께 살펴볼 것이다. 이어서 3장에서는 이용도 목사의 한국교회와 부흥을 위한 선교신학6)을 예배의 가장 중요한 두 가지 본질적 요소인 말씀과 성례전을 중심으로, 이용도 목사의 일기와 저서 그리고 관련된 문헌 등을 통하여 알아보고자 한다. 그리하여 이용도 목사의 선교신학의 원리와 그 모습을 찾아볼 것이다.


1) 주재용, 『한국그리스도교신학사』대한기독교서회, 1998,  pp. 152-165.

2) 유동식은 이용도를 예수신비주의자와 사랑의 열광주의자로 보고 있다. 유동식,  『한국신학의 광맥』다산글방, 2000,  p. 165.

3) 성백걸은 이용도를 “한국적인 영성을 품고서 영생의 삶 곧 영원의 현존을 사는 신비주의자이다”라고 하였다.  성백걸,  “영원 의 향유:

    용도의 생애와 사상”,  『이용도 김재준 함석헌』 한국문화신학회 5,  한들출판사,  2001,  p. 41. 이외에 민경배,  박봉배 그리고 변선환

    등이 있다. 변종호편저,  『이용도 목사전집』 제 9권 이용도목사관계 문헌집, 장안문화사, 1993. 참조바람

4) 정성구,  “이용도목사의 설교연구” 『월간목회』 9월호, 1988,  pp. 206-208.

5) 변종호편저, 『이용도 목사전집』 제9권 이용도목사 관계문헌집, 장안문화사, 1993: p. 227.

6) 선교학은 선교 사역을 성서신학적, 이론신학적, 역사신학적 그리고 '문화인류학적으로 규명하는 작업이라 할 수 있고 이와 밀접한 관계

    를 맺고 있는 “선교신학은 기독교 신앙에 입각하여 세계 선교의 동기, 방법, 정책 그리고 목표를 결정짓는 기본  원리와 전제 조건에 대

    한 연구”라 할 수 있다. 홍기영, “선교학의 개념과 역사”, 『선교학개론』, 기독교서회, 2001, p. 28

 

 

    Ⅱ . 이용도 목사의 생애와 교회갱신

 

시무언 이용도 목사의 출생과 성장 배경에는, 당시 일제치하의 정치 경제 사회적으로 혼란하고 어려운 시대를 살아야 했던 여느 사람들과 비교하여, 그리 특이할 만한 점은 없는 듯하다. 이용도 목사는 1901년 4월 6일 황해도 금천군 서천면 시변리에서 이덕흥씨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체질이 약하여 병 잘 앓고 울기도 잘하였으나 예술적인 그리고 탁월한 웅변가로서의 자질을 갖고 태어났다. 1915년 개성 한영서원 (송도고보의 전신)에 입학하였으나 가난과 독립운동으로 4차례나 투옥되어 3년 이상을 형을 치러야 했기에7)9년 만에 졸업하고 협성 신학교에 입학하게 되었다.

그러나 협성신학교를 통하여 그의 모습은 점차 바뀌어 갔다. 신학교 2학년 둘째 학기를 마치는 1925년 겨울, 폐병 3기라는 진단과 함께 의사로부터 ‘공부를 그만두고 쉬라’는 권고를 받자, 절친한 친구 이호빈과 이한신의 고향인 강동으로 요양을 목적으로 가 있게 되었다. 그러나 요양 중에 인근 교회로부터 부흥회 인도를 요청받고 인도하게 되었다. 그런데 처음 부흥회를 인도함에도 불구하고 온 교인이 감동되어 울음바다를 이루는 큰 은혜를 체험하게 되었고, 이용도 자신도 건강이 회복되어8) 부동의 신념과 확신을 얻은 중생의 사람이 되었다.

마침내 이용도 목사는 1928년 1월 28일 신학교를 졸업하고 그 이튿날인 29일에 통천교회로 부임 받아 가게 됨으로써 그의 짧은 목회활동은 시작되었다. 이 목사는 그의 사역을 10일간의 금식기도로 시작하는 등 기도생활에 열중하였다. 그러던 중 1928년 12월 24일에 환상 중에 마귀를 교회와 통천시가로부터 쫓아내는 신비적 체험을 경험하게 되어 더욱 굳센 힘과 생명을 얻게 되어 부흥회를 인도하기 시작하게 되었다. 이로써 이용도 목사가 인도하는 부흥회를 통한 그의 교회갱신 운동의 불길이 타오르기 시작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용도 목사가 부흥회를 통한 교회갱신운동을 시작한 때는 한국 사회 전체가 일제의 전시체제와 민족말살정책 아래서 극심한 박해와 탄압을 받던 시기였다. 송길섭은 이용도 목사가 활동하던 1930년대의 전후의 한국교회는 “3.1 운동의 정치적 좌절감, 경제공황, 사회주의사상의 침투, 일제의 만주침략에 따른 한국 민족 전반에 대한 억압과 한층 강화된 통제 등으로 위기의식을 느끼고 있었다”9)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위급한 상황 속에서도 교회는 이에 적절히 대응하지 못하였고, 오히려 선교사들의 교회의 비정치화 작업에 따라 교회는 더욱 더 내세적이며, 종말론적인 신앙의 형태가 강하게 나타나게 되고 있었다. 이러한 혼란 속에 한국교회는 교파간의 갈등과 분파가 일어나게 되었고, 또한 황국주10),  최태용11) 등이 나타나 교회를 더욱 어지럽히고 있었다.

이런 당시의 한국교회를 바라보면서 이용도 목사는 한국교회를 위해 오순절에 있었던 부흥이 한국 교회에 있기를 간절히 소망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교회에 부흥이 있을 때 회개함과 구원의 체험이, 믿음의 행함과 인내함이, 열심과 사랑이, 신앙생활의 기쁨과 만족, 그리고 기적이 있으리라고 보았던 것이다. 그러므로 부흥이 있을 때 한국교회의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으로 여긴 이용도 목사의 주된 관심은 당시 교회의 부흥에 있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12)


7) 피터슨, 변종호 편저,  『이용도목사 전집』 제4권 전기, 서울: 장안문화, 2004,  p. 130.

8) 피터슨, 변종호 편저,  『이용도목사 전집』전기, p. 139.

9) 송길섭, 『한국신학사상사』대한기독교출판사, 1987,  p. 300.

10) 황해도 출신의 황국주는 특별한 계시를 받아 “자신의 목은 잘리고, 예수의 목이 그 위에 붙었다”고 주장하였다. 민경배,  『한국기독교회

      사』 연세대학교출판사, 1998,  p. 445.

11) 우찌무라에게서 영향을 받은 최태용은 ‘반선교사’운동을 펼쳐 ‘조선인 자신의 교회’를 주장하며 1935년 12월 ‘기독교 조선 복

     음교회’를 창설하였다.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한국기독교의 역사 II』 기독교문사,  1990,  pp. 206-208

12) 한국교회의 ‘부흥 성장의 선교신학’은 초기 선교사들의 중심 선교신학이었고 이는 길선주, 김익두, 이용도 목사에 이어 오늘날

     까지 한국교회의 중심선교신학이 되었다.

 

 

조선교회에는 지금 부흥이 있어야겠다.... 이때에 조선 교회에 부흥이 있지 않으면 교회의 전도는 대단히 위태롭게 되어 있습니다. 오순절에 있던 그런 부흥이 오늘의 조선에 일어나야겠습니다....

부흥이 있을때: ①...죄인도 회개합니다. ②...구원체험을 맛볼 수 있습니다. ③...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행하게 됩니다. ④…박해를 당하는 것을 영광으로 알게 됩니다. ⑤ 부흥이 있는 곳에 열심이 있고 사랑이 있고 봉사가 있고 자기희생이 있고 기쁨이 있고 만족이 있고 쾌락이 있습니다.  ⑥ 부흥이 있는 곳에는 기적이 있습니다.13)

 

     

또한 이용도 목사는 신학교 시절부터 “항상 입버릇처럼 조선교회가 아래서는 안 되겠다”고 근심하며 한국교회의 부흥을 이루기 위한 교회의 갱신을 준비하고 있었다. 이용도 목사는 1927년 2월 9일, 그의 일기에서 한국교회가 개혁되어야 할 것들과 필요성을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다.

 

조선교회는 부흥이 되어야겠다.

한국교회에 없는 것 : 기도, 개인전도, 열심, 사랑, 용기, 감사, 찬송, 협동, 성경공부, 구도심,  봉사, 가정 기도

있는 것 : 잔말, 말질, 평론, 돈만 모으려는 생각, 게으름, 시비, 투쟁, 비겁, 공포, 불령, 근심, 걱정, 분열, 연문학, 구금심(求金心), 탐욕, 이기, 가정 불안.14)

 

    이용도 목사는 이처럼 한국교회에 부흥이 있기를 간절히 소망하였고 부흥을 위해서는 당시의 교회의 모습으로는 안 되고 새롭게 갱신되어야만 했던 것이었다. 또한 이를 위해서 이용도 목사는 갱신해야 할 것들을 구체적으로 지적하며 인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이용도 목사의 신학은 교회의 부흥을 이루기 위한 “갱신의 선교신학”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이용도 목사의 교회의 부흥을 이루기 위한 교회갱신의 선교신학의 특징은 무엇인가? 이용도 목사의 교회 갱신운동은 부흥회를 통하여 일어나게 되었는데, 먼저 그는 외적인 기구나 제도, 직제나 의식의 개혁에 두지 않았다는 것이다. 또한 교회의 외관이나 외면생활의 기구정비에도 두지 않았고, 전면적인 신앙생활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변화와 갱신을 통해 이루고자 하였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이용도 목사는 교회 안에서 선포되는 복음이 복음 되고, 진리가 진리 되는, 또한 진리 되는 말씀 안에서 모두가 하나 되는 지극히 성서적이고, 복음적인, 신앙인의 내면적인 면에서부터 교회의 갱신을 이루고자 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용도 목사는 가는 부흥회마다 무엇보다도 먼저 회개를 외쳤다. “갱생을 초래하는 회개, 신생적 회개 운동이 없이 다른 모든 운동은 의미가 없다”15) 는 것이다. 다음으로 그는 회개에 이어 기도의 생활을 강조하였다. 기도가 없는 조선교회를 보며 안타까워하며 그는 기도하였고, 기도를 스스로 생활화 하였다. 마지막으로 그는 피를 토하면서도 사랑을 외쳤다. 그는 신앙의 단계를 교회시대, 수도시대, 신앙시대, 그리고 사랑시대 등 4시대로 나누고 사랑이 인간의 최고의 목표요, 믿음의 절정으로 영생이 시작된다고 가르쳤다.16)

 

13) 변종호편저, 『이용도 목사전집』 제2권, 일기, 장안문화, 2004,  pp. 36-37.

14) 변종호편저, 『이용도 목사전집』 일기, p.19.

15) 변종호편저, 『이용도 목사전집』 일기, p.78

16) 제1단계는 교회시대로 교회의 의식 제도 교리에 복종하는 때로 베드로가 대표이고, 제2기는 수도시대로 죄를 버리고 육을 멸

     하여 금욕으로 도를 이루려는 때로 야곱이 대표자요, 제3기는 다만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고 확신하는 때로 바울이

     대표자가 되고, 제4기는 사랑시대로 신앙만으로는 불만족을 느끼게 되어 사랑의 화신이 되어, 사랑의 신에 삼킨바 되기를 원

     하는 시기로 요한이 대표자이다. 변종호,  『이용도 목사전집』일기,  p. 161.

 


    무엇보다도 이용도 목사는 자신이 광야의 소리가 되어 무력해지고, 점점 세속화되어 냉랭해져 버린 교회에 새 용기와 활기를 불어 넣어 깨우는 자가 되기를 소원하였다. 이는 그의 간절한 기도를 통해서 확연히 드러나고 있다.

 

“주여 나로 하여금 예수 선지자나, 기독교 주문(注文) 도리(取集者)만 되지 않게 하시읍소서. 미친 듯이 부르짖는 ‘광야의 소리’ 곧 ‘회개의 소리’가 되게 하시고 새 술에 취한 듯이 덤비는 사랑의 사도가 되게 하옵소서. 아멘.” 17)

 

이처럼 광야의 소리가 되어 잠자고 있는 조선교회를 깨우고자 했던 이용도 목사는 한준명 사건18)과 연루되어 감리교회로부터 면직처분을 받고 1933년 10월 2일 원산에서 33세의 젊은 나이로 폐병과 싸우다가 쓸쓸히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다. 그러나 약 5년간의 짧은 기간 동안에 100여회의 부흥회 인도는 새 생명의 바람을 전국교회에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하였다. 그 결과 1923년부터 계속 내리막길에 있었던 전국 교회의 교세가 1929년부터 1933년까지 계속 다시 올라가기 시작하였고 회복되었다.19)  또한 많은 젊은이들이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하게 되었고 이들은 해방 전후의 한국교회를 실질적으로 재건하고 부흥 성장시키는 일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기도 하였다.20) 이처럼 이용도 목사는 당시의 한국교회의 부흥을 이루기 위해 부흥회를 통해 교회갱신운동을 펼치었고 이는 오늘날까지 한국교회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하겠다.

 


    Ⅲ. 이용도 목사의 "교회갱신의 선교신학"

 

 

    성전과 회당의 문맥(context)속에서 태어난 그리스도의 교회는 이미 물려받은 그리스도교 예배의 두 개의 구성요소를 가지고 있는데 그 하나는 성례전이며, 다른 하나는 말씀이다. 종교개혁의 시발점에서도 이상적인 그리스도교 예배는 말씀과 성례전의 균형을 의미했고 이 중의 하나가 결여되면 불균형적이라 생각하였는데 이것이 루터와 칼빈의 교리였고 종교개혁의 모티브이기도 하였다.21)

    역사적으로 예배의 갱신운동의 흐름은 새로워지려는 운동이요 개혁운동이었다. 그러나 예배의 갱신의 목표는 예배의식을 갱신하거나 예배의 기구를 개혁하는 데 있지 않고 예배자 자신, 즉 인간을 갱신 하는데 있다.22) 그러므로 예배시의 말씀은 초대 그리스도교에서와 같이 성례전을 위한 말씀이어야 하고 성만찬은 예배가 지향하는 클라이막스가 되고 설교 속에서 모든 메시지가 부활하신 주님에 대한 신앙을 그의 죽으심과 부활에 근거하여 강조하는 것으로서 말씀과 성례전, 이 둘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균형을 이루고 서 있어야 하는 것이다.

     이 글에서는 교회의 전반적인 구조적면에서의 갱신과, 예배의 중요한 두 구성요소인 말씀과 성례전을 중심으로 하여 이용도 목사가 소망하던 교회의 부흥을 이루기 위한 그의 교회갱신의 선교신학을 분석하여 보고자 한다.

 


    1. 교회의 구조적 갱신

 

 

    무엇보다도 먼저 이용도 목사는 당시 교회의 제도와 조직에 만족하지 못하였고 안주하려 하지 않았다.23) 그는 개혁자들의 신앙을 따라 “지금은 인류의 영계()의 혁명기”이기에 20세기인, 오늘에 또다시 신약시대의 영적 부흥운동이 '일어나기를 갈망하고 있었다.24) 그러므로 그에게 있어서 교회의 사명은 신령한 은혜가 충만하여 사회의 선구자가 되어 모든 일에 선봉 노릇을 하는, 예수의 이름으로 우리의 생활을 개척함에 두고 있었다.25)


17) 변종호편저, 『이용도 목사전집』일기, p. 95.

18) 피터슨, 변종호저, 『이용도 목사전집』제4권 전기, 장안문화, 2004, pp. 183-186. 참조바람

19) 송길섭, 『한국신학사상사』 p. 311

20) 조경우, 조신일, 이호운, 명관조, 김광우, 변종호, 김용련 등이 대표적이다. 송길섭, 『한국신학사상사』p. 310

21) 정용섭, 『교회갱신의 신학』대한기독교출판사, 1980,  p. 34.

22) 정용섭, 『교회갱신의 신학』,  p. 45.

23) 변종호편저,  『이용도목사전집』일기, p. 182.

24) 변종호편저, 『이용도 목사 전집』제6권 용도신학, 장안문화사, 1993, p. 107

25) 변종호편저, 『이용도목사전집』일기, p. 68.


    교회는 세계만방에 희망의 선교를 해야 할 공동체로서 조직된 것이다. 교회는 예수께서 선포하시고 또 친히 당신의 인격과 직무에서 구현하신 하나님 나라에서 기원한 것이고 또 예수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그 세상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따라서 교회는 예수님의 기쁜 소식을 함께 나누도록 보내심을 받고, 택함을 받은 사람들의 공동체로 선교사역은 바로 교회의 존재이유인 것이다.

그러나 이용도 목사의 눈에 비친 한국교회는 선교사역을 담당해야 할 교회의 본질과는 너무나 거리가 멀었다. 그는 현대교회는 예수를 죽이고 형식과 의식만이 남아 있어 이를 개탄하고 있었다.

 

현대의 교인은 ‘괴이(怪異)한 예수’를 요구하매 현대 목사는 괴이한 예수를 전한다. 참 예수가 오시면 꼭 피살 될 수밖에 없다. 참 예수는 저희들이 죽여 버리고 말았구나. 그리고 죄의 요구대로 마귀를 예수와 같이 가장하여 가지고 선전하는구나. 화 있을 진저 현대 교회여! 저희가 요구하는 예수는 육의 예수, 영광의 예수, 부유한 예수, 고상한 예수였고 예수의 예수는 영()의 예수, 천한 예수, 가난한 예수, 겸비한 예수였나이다.

예수를 요구하느냐.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찾으라. 사람의 예수, 너희가 만들어 세운 예수 말고, 예수를 갖다가 너희 마음에 맞게 할 것이 아니라, 너를 갖다가 예수에게 맞게 하라.26)

 

예수는 죽이고 그 옷만 나누는 현대 교회여, 예수의 피도 버리고 살도 버리고 그 형식만, 의식만 취하고 양양자득(揚揚)하는 현대 교회의 무리여, 예수를 믿는 본의가 어디 있느뇨.27)

 

    이에 이용도 목사는 교회의 부흥을 이루기 위한 교회의 갱신을 결심하고, 교회의 참 부흥을 갈망하며, 부흥회를 통하여 이를 이루고자 하였던 것이다. 그는 교회에 부흥이 있을 때 교회가 교회 노릇을 할 수가 있고 그렇지 못하면 교회는 악마의 참모부가 되고 말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28)

    그러면 왜 현대의 교회가 부흥하지 못하는가? 이용도는 먼저 교회가 부흥하지 못하는 원인으로 죄를 자복하고 회개하는 일이 사라졌음을 지적하고 있다.

 

요단강에서 세례 요한이 전도할 때 수많은 무리들이 나와서 죄를 자복하고 세례를 받았습니다. 지금 우리 교회에 자기의 죄를 자복하고 회개하는 일이 없어진지 오래 되었습니다. 이것이 교회가 진흥치 못하는 한 큰 원인인 것입니다.29)

 

    그러므로 이용도 목사의 교회의 부흥을 위한 갱신운동은 회개로부터 시작된 것이다. 그 회개의 대상은 형식의 틀에 굳어버린 교회와 거만한 직업적인 부흥사와 목사들 그리고 선교사들이었다.

또한 이용도 목사는 당시 교회가 물량주의에 빠져있음을 발견하고 죽기까지 청빈을 외치기 시작하였다. 이용도 목사는 당시의 교회가 버림 받은 사람들, 병약하고 가난한 소외 당한 사람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사치스럽고 호화로운 교회로 남아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30)


26) 변종호편저, 『이용도목사전집』 일기, p. 114.

27) 변종호편저, 『이용도목사전집』 일기, p. 119.

28) 변종호편저, 『이용도목사전집』 일기,  p. 36.

29) 변종호편저, 『이용도목사전집』 일기, p. 37.

30) 예수교회, 『시무언』 다산글방, 1993,  p. 186.

 


그러므로 이용도 목사는 1930년 새해를 맞아 “고()는 나의 선생, ()은 나의 애처, ()는 나의 궁전, 자연은 나의 애인의 집으로 하고 금년에 나는 거기서 주님으로 더불어 살리로다. 31) 하며 청빈의 삶을 다짐하였고 또한 그는 그런 삶을 살다가 갔다.32)

이용도 목사의 교회부흥을 위한 갱신 운동은 평신도들의 신앙부흥 운동으로 이루어지게 되었다. 그리하여 이용도 목사의 부흥회는 이전에 행하던 것과는 전혀 다른 토착적이고33) 신비적인 집회형태를 띠게 되었다. 그는 형식적이고 굳어져버린 예배를 탈피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이용도 목사는 예배 형식에 구애 없이 영감이 떠오르면 5-6시간씩 설교를 했고 특별한 경우에는 7시간을 지칠 줄 모르고 정열적으로 설교했다.34) 그러나 영감이 떠오르지 않으면 설교는 생략하고 찬송하고 기도만을 몇 시간씩 하다가 부흥회를 마치기도 하였다.35)

이처럼 그의 부흥회는 어떤 인간적인 가교나 방법은 전혀 배제하였고 오직 성령에 강하게 사로잡혀 자기 전체를 청중들에게 주었다. 또한 집회 기간 동안을 거의 먹지도 않고 엎드려서 기도하면서 스스로 은혜를 사모하여 능력을 받고자 하였다. 이러한 자세는 청중들에게 귀한 모범이 되었다. 그리하여 이용도 목사의 부흥회는 영적 갈급함과 현세적인 가난과 억압 그리고 절망 속에서 고통 받던 당시 평신도들에게 영적 힘을 주었고, 삶에 새로운 기쁨을 갖게 하는 신앙체험을 하게 된 것이다.36)

또한 전국 곳곳에 불어 닥친 이용도 목사의 교회 부흥을 위한 갱신운동은 기도운동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이용도 목사는 기도가 없기 때문에 조선교회가 빈사상태에 있다고 진단하고 기도의 생활을 강조하였다.

 

장로교에도 이렇게 기도가 없었던가!

아, 조선의 교회는 장감을 막론하고 그 정지가 가련하였구나, 저희가 기도를 몰랐으니 어디 가서 신비한 은혜에 접할 기회가 있었으랴!

오 주여,  저희들에게 기도를 가르쳐 주옵소서.37)

 

 

 

 

 

    특히, 이용도 목사는 자신이 먼저 기도하는 가운데 신비적인 체험을 경험하였기 때문에 기도의 능력을 확신하고 있었고 자신 또한 “기도에 미쳐 살았던 인물”, 또는 “목석도 눈물을 흘리게 하는 기도”를 한다는 평판을 받기도 하였다. 이용도 목사는 기도할 때 결사적으로 하였기에 그 기도를 듣는 사람 들은 뼈에 사무치고 은혜가 되어 아멘을 연발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리하여 한 번 그를 통하여 기도의 매력을 맛본 사람이라면 기도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고,  그 영향으로 1930년 3월 평양 중앙교회에 부흥회가 있고 난 후 평양 서문밖교회를 중심으로 평양기도단이 결성되기도 하였다.38) 이 기도단의 수는 많지 않았으나 이들은 기도의 생활을 강조함으로써 전국교회에 기도의 붐을 일으키게 되어 이용도 목사의 교회의 갱신운동에 중요한 활력소가 되었다.

이와 같이 이용도 목사는 한국교회의 부흥을 갈망하며 부흥회를 통해 한국교회의 전반적인 갱신운동을 펼치기 시작하였다. 가는 부흥회마다 회개할 것과 간절한 기도 그리고 청빈의 삶을 외쳤고 성도와 교회가 하나 되어 선교의 사명을 감당하는, 교회의 본질을 회복하기를 부르짖었던 것이다. 이처럼 이용도 목사가 이루고자 하였던 교회갱신은 당시의 한국 교회 그리고 성도 내면의 전반적인 면에서 찾아볼 수 있다.

 

31) 변종호편저, 『이용도목사전집』일기,  p. 94.

32) 예수교회, 『시무언』 pp. 183-185.

33) 최대광은 이용도 목사는 전통적 의미에서의 한국인과 서구적 기독교인의 모습이 섞여 있어 자신의 정체성의 문제를 찾아 답할 때 “한

      국적 기독교”라는 틀을 형성할 수 있었다고 한다. 최대광, “이용도 목사의 영성적 삶”, 『우원사상논총』 제11집,  강남대학교 우원 사상

      연구소, 2002,  pp. 245-251.

34) 예수교회, 『시무언』 p. 213.

35) 예수교회, 『시무언』 p. 185.

36) 예수교회, 『시무언』 p. 214.

37) 변종호편저,  『이용도목사전집』일기, p. 144.

38) 피터슨, 변종호편저,  『이용도 목사전집』전기,  p. 172



     2. 설교의 갱신


이용도 목사의 교회부흥을 위한 갱신 운동은 말씀선포에서 확연하게 나타나고 있다. 예배의 목표는 무엇인가? 예배의 목표는 하나님과 안간이 만나는 데에 있으므로 하나님을 더 잘 알고 우리 자신에 대해서 더 깊이 아는 것이며, 이 같은 지식을 통해서 그의 이름을 찬양하고 섬기는 데에 있다고 하겠다. 39) 그러므로 설교자는 “그들의 선포를 통해서 하나님과의 만남에 이르게 해야 하며 말씀을 통해 방향을 잃은 사람에게 방향을 제시함으로 궁극적으로 하나님과 만날 수 있도록 하는 것을 화제로” 해야 하는 것이다. 40) 그러므로 역사적으로 유능한 설교자가 탄생하고 설교가 발전했던 시대는 교회가 건강하게 부흥하는 시대이기도 한 것이었다.

그러면 설교의 중심내용은 무엇인가? 정용섭은 “그것은 케류그마이다”라고 말한다. 41)신약성서에서 사도들도 “예수” 또는 “그리스도”를 전하며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고 있고, 바울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사건을 의미심장한 종말론적 정황에서 선포하고 있다는 것이다.42)

이러한 면에서 이용도 목사의 설교는 지극히 성서적이며 사도들과 바울의 케류그마에 입각한 설교 이었던 것이다. 다시 말해서 그는 교파간의 분열로 교리적 설교가 다수 행해지고 있고, 선교사들의 한국 현실을 외면한 나약한 피상적 설교가 주로 행해지고 있었던 당시 한국교회를 향해 초대교회의 사도들의 케류그마의 선포로 한국교회의 갱신을 이루고자 하였던 것이다. 그 결과 이용도 목사는 교파를 초월하여 장로교 성결교회 등의 부흥회를 인도하게 되었고,  교파간의 벽을 넘어 하나 괄 수 있는 한국교회의 새로운 선교의 장을 열기도 하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이용도 목사는 자신이 설교자로서 월급쟁이, 강도업자, 연설객의 지위에 머무르게 됨을 경계 하며, 목사직임은 하나님의 사신으로 직업 중에 가장 높은 것으로 여기고 있었다.43) 그러나 이러한 성직이 어떤 사람의 일신의 영달이나 생활의 도구로 이용되고 또한 교만하게 될 때 그의 무자비하고 날카로운 공격이 무차별적으로 가해졌던 것이다. 그러므로 선교사들에 대한 이용도 목사의 비판은 마치 성난 사자와도 같았다.

 

아, 선교사들의 교만함이여, 너희에게 화가 있으리로다. 겸비하여 배울 줄을 모르고 남을 인도하고 가르치는 차로만 자처하였으니 너희의 눈을 막아 의인을 보지 못하게 하였도다. 예수를 잡아 죽인 유대교의 대제사장과 장로와 영수들이 곧 너희들이었느니라.44)

 

 

 

 

 

 

    하나님의 사신으로 오직 예수만을 닮기 원했던 이용도 목사는 설교의 초점을 오직 예수에게만 두었다. 그는 그저 예수만을 증거 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예수는 그의 전부요 소망이었고, 다의 설교의 유일 하고도 핵심적인 주제요 내용이었다.

 

39) 정용섭, 『교회갱신의 신학』 p. 57.

40) 정용섭,  『교회갱신의 신학』 p57

41) 정용섭,  『교회갱신의 신학』 p. 66.

42) 정용섭은 사동행전과 바울서신의 케류그마를 대조하면서 원시 그리스도교회의 설교는 세 가지의 큰 제목을 가지고 있는데 첫째, 구약

      성서가 완성되었다는 것이고, 둘째,  예수님의 생애와 죽으심, 부활과 높임 받으심을 역사적 정황에서 설명하려 하고,  셋째,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죄의 용서를 받으라는 것이었다. 정용섭, 『교회갱신의 신학』. pp. 67-69

43) 변종호편저, 『이용도 목사전집』일기,  p. 70.

44) 변종호편저, 『이용도 목사전집』일기, p. 170.


 

예수다!,  우리 신앙의 초점은 예수다! 소망에도 예수요,  인내에도 예수요,  기도에도 예수요,  찬송에도 예수다. 떠들어도 예수요, 잠잠해도 그저 예수뿐이다. 생시에도 예수! 꿈에도 예수! 그리고 잠꼬대에도 예수다! 먹어도 예수요,  입어도 예수요, 자도 예수여,  일하여도 예수다! 그저 우리 생활의 중심초점은  예수뿐이다.45)

 

주만 나의 주요 그의 진리만이 나의 진리요 그의 말만이 나의 말이요 그의 운동만이 나의 운동이 될지라. 여기에서 一毫라도 어르러져! 나는 반역자요 변절자(變節者)이라 그 이름이 마귀었느니라.46)

 


    철저히 예수를 닮으려고 했고,  철저히 예수만을 증거 했던 그의 삶은 성도들에게 “예전 생각, 예전 혈기, 예전 풍속, 예전 인생, 예전 행동은 다 죽고 주님과 진리를 향하여 새로이 살아서 새 생각, 새 정신, 새 관념, 새 풍속, 새 습관, 새 인정, 새 말씨, 새 행동으로 나타나야 함을 강조하였다.

그러나 이용도 목사에게 있어서 예수는 기쁨과 영광이기보다 고난당하시고 십자가에 죽으신 분이시었다. 그가 이해한 예수의 생의 핵심은 고난과 아픔이었고 이러한 그의 고난의 십자가상은 1930년대의 한국 겨레의 비운과 교회의 참담한 시련으로 말미암아 더욱 처절하게 가슴에 메어 왔던 것이다.

 

예수의 모든 아름다운 성격은 그의 십자가에 모두 집중되었습니다. 그 피에 모였습니다. 그것을 바라볼 때에, 그 신의 성품을 바라볼 때에 우리는 내 죄를 깨닫습니다. 그리고 죄에서 나오게 됩니다.47)

 

이용도 목사는 1930년대 전 후 무미건조하여 형식화되고, 제도와 이론에 치우친 나약하고 생기 없는 조선교회와 억압과 핍박으로 허덕이고 있던 성도들을 향해 십자가상의 예수를 선포하고 그 만을 바라보게 한 것이었다. 이를 통해 성도들은 신령한 은혜와 믿음의 능력을 체험하게 되었고 새 힘을 얻게 됨으로, 새 생명을 얻게 되어 새로운 한국교회의 선교의 장을 열었던 것이었다.


 

    3. 성례전의 갱신


    종교개혁 이후의 개신교의 성례에는 세례와 성만찬이 있다. 이용도 목사는 이 성례전을 어떻게 이해 하였고 어떻게 갱신하고자 하였을까? 먼저 신학적인 의미를 찾아보고 이용도 목사의 부흥을 위한 “교회 갱신의 선교 신학”을 분석하여 보기로 하자.

    아주 오랜 고대부터 물은 정결과 치료를 할 수 있는 것으로 여겨져 왔고 유대교외에 이방종교에서도 물을 사용하는 의식이 있었다.48) 그러면 그리스도교에서의 세례의식의 의미는 무엇인가? “그리스도교 세례의 가장 특징적인 모습은 옛 사람이 죽고 새 사람으로 다시 살아난다는 것이다."49)다시 말해 예수의 이름으로 죽고 다시 예수의 이름으로 새롭게 살아나는 것을 뜻한다. 이는 예수님 또한 예외일 수는 없었다. “내가 받아야 할 세례가 있다. 이 일을 다 겪어 낼 때 가지는 내 마음이 얼마나 괴로울지 모른다.”(눅 12:50) 여기서 예수님의 세례는 십자가를 말하는 것이며,  대제사장적인 죽음과 부활을 의미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 세례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한 그리스도의 인간의 구원의 완성을 이루심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로마서 6:3에서 “세례를 받고 그리스도 예수와 하나가 된 우리는 이미 예수와 함께 죽었다는 것을 모르십니까? 과연 우리는 세례를 받고 죽어서 그분과 함께 묻혔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영광스러운 능력으로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것처럼 우리도 새 생명을 얻어 살아가게 된 것입니다.”고 말하고 있다. 세례를 받은 사람은 그리스도와 함께 성례전적인 의미에서 죽고 장사되고 그리고 그와 함께 다시 살아난 것이다.

 

45) 변종호 편저, 『이용도 목사 전집』 용도신학,  p. 26.

46) 변종호편저, 『이용도 목사 전집』 용도신학, p. 39.

47) 변종호편저, 『이용도 목사 전집』 용도신학, p. 20.

48) 정용섭, 『교회갱신의 신학』 pp. 86-102.

49) 정용섭, 『교회갱신의 신학』 p. 104.

 

 

    세례를 받음으로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와 하나가 된 성도는 성만찬에서 그리스도의 신비한 몸을 받음으로써 그리스도와 한 몸을, 즉 연합을 이루고 하나님께 나아가게 된다.50) 우리는 세례를 받음으로 하나님의 자녀로 인정받고 거기에 근거한 제사장이 되는 것인데, 우리는 아직도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자각과 거기에 순응한 생활을 하는 성장과정에 있으므로 변화되어야 할 존재인 것이다. 이에 성만찬은 우리가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시는 신분에 동참하기 위해 거행하는 의식이며, 반복적인 성만찬에 참여함으로 우리는 완전한 하나님의 자녀로서 성장하게 되는 것이다.51)

    그러므로 이 두 성례전은 우리가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기 위해, 그래서 그와 함께 죽고 새 생명으로 다시 살아나기 위한 방편인 것이다. 이처럼 세례와 성만찬은 종말론적인 것으로, 세례는 우리를 그리스도의 복종으로 그래서 그의 선교적 사명 안으로 인도되고, 성만찬은 하나님께 대한 복종으로 그래서 선교에 대한 복종으로 갱신하게 되는 것이다.

    이용도 목사는 비록 성만찬과 세례에 대한 많은 예식을 행하고 언급은 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이 성례전의 신학적인 의미를 꿰뚫고 있었고, 몸으로 몸소 보여주는 삶을 살았던 사람임에 분명하다. 사실 그는 많은 신학적인 연구를 하고 지식을 소유고 있지는 않았지만,  그는 이론으로 말만을 앞세우는 사람이 아니라, 말한 것을 몸소 몸으로 행하고 실천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진리는 말하는데 있지 않고 사는데 있으며 종교는 설교가 아니라 삶이라고 선언하였다.” 52)그는 “언을 버리고 행에 삽시다”, “이 솟아올라 차고 넘치는 느물느물한 감동을 어째서 느끼는 그대로 표연할 수 없는고. 아! 말로 만들면 벌써 그 심정은 사라져 버리는 것이었도다.”고 하였다. 이처럼 그는 말로 표현할 수는 없지만 예수 그리스도 와 하나 되고 그 은혜에 전적으로 헌신하는 가운데 주체할 수 없는 큰 감동에 사로 잡혔던 사람이었다. 이것이 바로 그의 ‘사랑의 신인합일의 신앙’ 으로 나타나고 있다고 하겠다.

    이용도 목사는 예수의 품에 안기므로 신성과 사랑의 무한한 환희와 황홀을 맛보았던 것이다. 또한 그 길이 비록 영혼이 찢어지는 듯한 아픔과 고난이 있을지라도 주를 향한 사랑으로 인내하고자 하였다. 주님과 사랑의 완전한 합일은 이용도 목사에게 있어서 성례전적인 의미의 주님과 함께 영원에 이룰 수 있는 그의 마지막 신앙의 단계이기도 하였다.

 

오 주여 나를 숨겨 주소서. 주는 신랑! 나는 신부. 주여 침방에서 사괴이는 사랑의 사괴임의 때를 허락하소서.53)

 

그대는 주소(晝宵)로 념념사지(念念思之)하여 주님의 사랑을 찾고 찾으라. 그리하여 저 깊은 사랑의 내전까지 찾아 들어가라. 그곳은 한번 들어간 자 나올래야 나올 수 없는 애()의 지성소니라. 거기서 그대는 주의 정체를 포옹(抱擁)하리라.54)

 

 

    또한 이용도는 주님과의 사랑을 옷자락, 입마춤, 사랑의 유방과 같이 성애적으로 표현하며55) 그는 하나님과 영과 육적인 차원에서 완전히 하나 되기를 원하였고 그리함으로 완전한 믿음의 복종과 헌신의 단계에 이르기를 원하였다.


50) 이장식, 『교회의 본질과 교회개혁』 대한기독교출판사, 1988, pp. 99-103.

51) 정용섭, 『교회갱신의 신학』 p. 131

52) 민경배, 『한국기독교회사』 p. 436.

53) 변종호편저, 『이용도목사전집』 제1권 서간집, 장안문화사, 1993,  p. 107.

54) 예수교회, 『시무언』 p. 133.

55) 변선환아키브편집, 『한국적 신학의 모색』 한국신학연구소, 1997,  p. 329



나는 다시 나를 주께 드리나이다.  맡기나이다.  주께서 마음대로 주무르시옵소서 주무르시는 대로 주물림을 받을 姑土(진흙)와도 같읍니다.... 나는 주의 놀리시는 대로 놀-공이올시다.... 주여 사랑의 줄로 나를 매시옵소서. 그리고 마음대로 주께서 놀리시옵소서…. 나의 ,  ,  口,,  , ,   무슨 필요가 있겠나이까. 곧 주의 눈이 나의 눈이오, 주의 귀가 나의 귀였느니라. 나의 눈은 내 자체에 있지 않고 주에게 있나이다. 그런고로 나는 주를 통하여서만 듣고 주를 통하여서만 걷고 동작하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연이로소이다 줄을 매어서 임자의 놀리는 대로 노는 연이로소이다.... 주여 나를 얼싸안아 주소서.56)

 

 

    또한 이용도 목사의 완전을 향한 신인합일의 사랑은 “무차별의 사랑”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그는 비록 자기 자신이 비극적인 종말을 맞게 된다고 할지라도 그 완전히 하나님과 합일됨을 져버리지 않았던 것이다.57)


나는 희생 되려나이다. 참 희생이 되려나이다. 호랑이가 나와서 나를 해치려고 해도 나는 반항치 않으렵니다. 동네를 지날 때 개가 짖고 쫓아 나와도 나는 대꾸하지 않으렵니다. 와서 물면 그냥 물리려나이다. 짐승에게까지 이유 없이 그냥 희생이 되겠나이다.... 나는 다만 주의 뜻만 품고 그냥 죽임을 당하려나이다.... 예수 우리 주님같이,  털을 깍이는 양과 같이.58)

 

    이처럼 이용도 목사는 암울한 현실 속에서 종말론적 피상적인 신앙과 생명을 잃어 화석이 된 한국 교회에 그리스도 사랑의 완전한 합일을 강조하고 또한 말로만이 아닌 삶으로 그렇게 살다가 주님 품에 안긴 사람이었다. 그는 진정한 한국 교회의 부흥을 소망하며 성례전적 의미의 회복을 통해 교회의 갱신을 꿈꾸었고 또한 이룬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Ⅳ. 결론


    지금까지 이용도 목사의 교회부흥을 위한 갱신의 선교신학을 교회의 구조적인 면과 예배의 가장 중요한 요소인 말씀과 성례전을 통하여서 살펴보았다. 이제 50년의 교회 역사를 간직하고 첫 희년을 맞이하는 1930년대의 한국교회를 유동식은 한국 신학의 “정초기” 라 규정하고 있다.59) 박형룡, 김재준, 정경옥 등에 의해 각각 자신들의 신학적 사상의 기초가 구축되고 신학적 논쟁이 일어나리만큼 한국 교회가 성장하게 되었음을 이 시기의 특징으로 보았던 것이다. 또한 한국교회는 선교사들의 영향 하에 1907년 “평양 대 부흥운동”이후 길선주, 김익두 등의 목사들에 의해 부흥회를 통한 교회의 부흥 성장을 주도하고 있었다.

    각각 신앙의 노선이 구축되고, 신학적 논쟁이 한국 신학자들에 의해 처음으로 일어나게 되는 이즈음에 이용도 목사는 당시의 침울하고 나약하기만 한 한국교회에 새 부흥을 갈망하며, 새로운 부흥회의 형태를 통한, 교회 갱신운동에 그의 짧은 생애를 바쳐 불살랐던 것이다. 그는 교회의 형식이나, 기구, 제도, 신학적 사상이 아닌 순수한 복음, 교회 그리고 선교의 본질을 회복하게 되어 희년을 맞이하는 한국 교회에 오순절의 부흥이 있기를 갈망하였고, 한국인으로 주체적인 부흥회를 통한 교회 갱신운동을 펼치었다.

 

56) 변종호편저, 『이용도 목사 전집』 용도신학, pp. 71-72

57) 한준명 사건이 발생했을 시 그를 부인하는 발언을 할 것을 권유받았으나 거부하게 되어 감리교회로부터 휴직 및 금족령을 받게 되었

     다.

58) 변종호편저,  『이용도목사전집』 일기, p. 83.

59) 유동식, 『한국신학의 광맥』 p. 137.

 

 

    부흥회를 통한 그의 갱신운동에서, 이용도 목사는 무엇보다도 먼저 성도들의 회개를 촉구하고 청빈의 삶과 기도생활을 강조하였으며 주님과의 사랑으로 온전한 주님과의 합일을 이루어 영생의 삶으로 들어가게 됨을 선포하였다. 그러나 초기 미국의 보수주의 선교사들에 의해 전해진 보수 근본주의적 신앙 형태의 한국교회와 교계 지도자들 그리고 선교사들의 장애의 벽을 넘어서기에는 너무나 연약하였고, 이른 시기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당시 한국교회의 부흥을 소망하며, 부흥을 이루기 위해 펼쳤던 그의 “교회갱신의 선교신학”은 오늘날 교인의 수는 점점 줄어들고 있고 교회의 수는 자꾸만 늘어나는 기이한 현상 속에, 새로운 부흥을 갈급해하고 있는 오늘의 한국교회에 하나의 중요한 대안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이용도 목사의 부흥을 위한 “교회갱신의 선교신학” 즉, 교회의 부흥을 이루기 위한 갱신운동이 지나치게 개인의 회심과 죄의 회개, 그리고 개개인의 영혼구원을 강조하고 있다는 것이다. 선교를 개인의 회심에만 강조점을 둘 때 이것은 인간을 현실로부터 도피시키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는 것이다. 또한 선교를 교회 확장의 의미로만 이해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것이다. 선교를 교회의 확장에만 둔다면 각 교단별로 각 교회 별로의 확장만을 의미하게 되고, 결국 교회의 증가와 더불어 교회의 분열 상태라는 모순을 만들게 되는 것이다. 결국 이러한, 그 당시 한국 교회전반에 자리 잡고 있던 교회 부흥 및 성장의 선교신학의, 결과로 이용도 자신마저도 희생된 것은 아닐까? 한다. 마지막으로 이용도 목사는 그 시대에 지나친 반세속주의자는 아니었는가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은 왜일까?

    그러나 첫 희년을 맞이하는 한국교회에 그리고 나약하고, 민중의 소리를 외면하며, 현실에 안주하려고만 하던 부패한 한국교회에 오직 예수의 이름으로, 십자가를 스스로 달게 지며 주님과 하나 되어 한국교회의 부흥을 이루고자 쉬지 않고 회개와 기도 그리고 사랑을 외치며 청빈의 삶을 살며 교회 갱신운동을 펼쳤고, 또한 갱신을 이루다가 살다가 그의 믿음과 열정 그리고 그 사랑이 부럽고 그립기만 하다. 오늘 한국교회에 새로운 부흥을 일으킬 하나의 대안임에 분명하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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