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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누드 초상 화가 - 모딜리아니
2017년 01월 01일 22시 48분  조회:5498  추천:0  작성자: 죽림
출생일 1884. 7. 12, 이탈리아 리보르노
사망일 1920. 1. 24, 프랑스 파리
국적 이탈리아

요약 비대칭 구도와 길쭉하게 잡아 늘인 인물 및 단순하면서도 대담한 윤곽선을 특징으로 하는 초상화와 누드화를 주로 그렸다. 그의 그림은 약 30점의 여성 누드화 대작들과 4점의 풍경화를 제외하고는 거의 초상화이다. 대부분 사암으로 만든 그의 독창적인 조각은 25점에 이른다. 
모딜리아니는 늑막염과 티푸스의 병력 때문에 일반교육을 포기하고 그림공부를 시작했다. 파리로 간 그는 1908년 앵데팡당 미술전에 5, 6점의 그림을 출품했다. 1912년에는 가을 살롱 전에 돌로 만든 8점의 두상을 출품했는데, 그 길쭉하고 단순화한 형태는 아프리카 조각의 영향을 반영하고 있다. 1914년 전쟁이 일어나자 그의 생활은 어려워졌다. 그림은 팔리지 않았고, 가난과 과로, 술과 약물 때문에 건강은 더욱 나빠졌다. 1917년 그는 커다란 여성 누드화 연작을 그리기 시작했는데, 따뜻하고 선명한 색채와 둥그스름하고 관능적인 형태의 이 누드화들은 그의 걸작에 속한다. 1920년 결핵성 뇌막염으로 사망.

 

비대칭 구도와 길쭉하게 잡아늘인 인물 및 단순하면서도 대담한 윤곽선을 특징으로 하는 그의 초상화와 누드화는 20세기의 가장 중요한 작품에 속한다.

또한 이 작품들은 지극히 개인적인 분위기를 띠고 있는 것으로 인기를 끌었다. 화가와 모델 사이의 말없는 공감이 보는 사람을 끌어들인다.

모딜리아니는 소매상을 하는 유대인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는 1895, 1898년에 늑막염과 티푸스를 앓은 뒤 통상적인 교육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고, 그때부터 그림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1902년 피렌체에 잠시 머문 뒤 베네치아로 가서 1906년 겨울까지 미술공부를 계속하다가 파리로 갔다.

그는 일찍부터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대의 그림(특히 시에나 유파의 그림)을 존경했고, 평생 동안 이 존경심을 잃지 않았다. 파리에서 모딜리아니는 폴 세잔의 그림에 압도당했으며, 이것은 그의 초기 작품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그가 초기에 교제한 주요인물들은 앙드레 살몽, 막스 자코브 등의 시인과 파블로 피카소, 그리고 1907년에 만난 폴 알렉상드르였다. 알렉상드르는 전위 미술가들의 친구로서, 모딜리아니에게 관심을 갖고 작품을 사준 최초의 인물이었다.

1908년 모딜리아니는 앵데팡당 미술전에 5, 6점의 그림을 출품했다. 그는 또한 루마니아의 조각가 콘스탄틴 브랑쿠시를 만나 그의 작품에서 깊은 인상을 받았으며, 그의 충고에 따라 아프리카 조각을 진지하게 연구했다. 그리고 조각가가 될 준비를 하기 위해 열심히 소묘를 했다. 또한 그는 회화적으로 모델링되어 있고 빛의 작용에 민감한 오귀스트 로댕의 조각을 가짜 인상주의라 하여 싫어했다.

그는 드로잉에서 윤곽선으로 덩어리를 제한하거나 둘러싸려고 했다. 1912년 그는 가을 살롱 전에 돌로 만든 8점의 두상을 출품했는데, 그 길쭉하고 단순화한 형태는 아프리카 조각의 영향을 반영하고 있다.

모딜리아니는 곧 그림으로 돌아왔지만, 조각을 해본 경험은 그의 화풍에 근본적으로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모딜리아니의 두상 조각이 갖고 있는 특징들, 즉 기다란 목과 코, 단순화한 이목구비와 긴 타원형의 얼굴 윤곽은 곧 그의 그림의 특징이 되었다. 그는 명암의 점진적인 변화를 이용하여 3차원적 입체 효과를 내는 명암법(chiaroscuro)을 제한하거나 거의 쓰지 않고 힘찬 윤곽선과 강렬한 색면들을 통하여 평면적인 형상에 조각과 비슷한 입체감을 주었다.

1914년 전쟁이 일어나자 모딜리아니의 생활은 더욱 어려워졌다. 알렉상드르를 비롯한 여러 친구들은 전선에 나가 있었다. 그림은 팔리지 않았고, 이미 약해져 있던 건강은 가난과 과로, 술과 약물 남용 때문에 더욱 나빠지고 있었다. 그러나 1914~16년의 2년 동안 영국 시인 비어트리스 헤이스팅스와 함께 살면서 복잡한 연애관계의 소용돌이 속에 빠져 있었다.

그러나 미술상 폴 기욤이 그를 도와주었고, 특히 폴란드 시인 레오폴트 즈보로프스키의 도움이 컸다. 그들은 몇 점의 그림과 드로잉을 사주거나 남에게 팔도록 도와주었다.

모딜리아니는 초상화 전문은 아니었다. 그에게 있어서 초상화는 확고하고 표현력이 풍부한 윤곽선으로 그린 드로잉을 통하여 인물을 조각처럼 표현해낼 수 있는 기회에 불과했다. 그는 파리 미술계와 문단의 유명인사인 친구들을 주로 그렸지만 모델이나 하인, 또는 이웃에 사는 소녀들처럼 평범한 사람들도 그렸다.

1917년 그는 커다란 여성 누드화 연작을 그리기 시작했는데, 따뜻하고 선명한 색채와 둥그스름하고 관능적인 형태의 이 누드화들은 그의 걸작에 속한다. 그해 12월 베르트 베유가 자신의 화랑에서 그의 개인전을 열어주었지만, 경찰은 이 누드화들이 미풍양속을 해친다고 판단하여 그림을 치우게 했다. 그의 마지막 연애사건은 같은 해인 1917년에 시작되었다. 이번 상대는 젊은 화가인 잔 에뷔테른이었는데, 그는 잔과 함께 지중해 연안의 코트다쥐르로 가서 살았다.

그들 사이에 딸 잔이 태어난 것은 1918년 11월이었다. 이무렵 그의 그림도 활짝 꽃피었다. 그의 윤곽선은 점점 더 세련되게 다듬어졌고, 색채는 더욱 섬세해졌다. 그러나 지중해 연안의 평온한 생활과 날씨도 쇠약해진 화가의 건강을 회복시켜주지는 못했다. 그는 1919년 5월 파리로 돌아온 뒤 1920년 1월에 앓아누웠고, 10일 뒤 결핵성 뇌막염으로 사망.

임신중이던 잔 에뷔테른도 이튿날 창문에서 뛰어내려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파리의 전위 예술계 외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던 모딜리아니는 살롱 전에 거의 참여하지 않았기 때문에 1917년 베르트 베유의 화랑에서 열었던 전시회가 그의 유일한 개인전이었다. 그가 사망한 뒤인 1922년 베른하임 죈 화랑에서 열린 전시회와 시인 앙드레 살몽이 쓴 논문을 통하여, 모딜리아니는 마침내 명성을 얻었다.

대부분 사암으로 만든 그의 독창적인 조각은 모두 합해 25점에 이른다.

드로잉의 수는 확정할 수 없다. 그의 그림은 약 30점의 여성 누드화 대작들(1916~19)과 4점의 풍경화(1919)를 제외하고는 거의 모두 친척·화가·작가·음악가·배우·미술상 및 미술품 수집가, 누구인지 확인할 수 없는 수많은 사람들의 초상화이다. 초상화의 모델이 된 콘스탄틴 브랑쿠시, 디에고 리베라, 앙리 로랑스, 파블로 피카소, 샤임 수틴, 후안 그리스, 막스 자코브, 장 콕토, 자크 립시츠 등을 보면 모딜리아니가 자주 드나들던 몽파르나스의 분위기를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다.

몇몇 사람들, 예를 들면 폴 기욤, 한카 즈보로프스키, 레오폴트 즈보로프스키, 비어트리스 헤이스팅스, 잔 에뷔테른 등은 여러 번 그려지기도 했다.

그러나 자화상은 죽기 직전인 1919년에 그린 단 1점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아메데오 모딜리아니 〈누드〉
아메데오 모딜리아니 〈누드〉

약 1916, 캔버스에 유채, 92.4×59.8cm

이 작품은 인상파 작품의 컬렉터였던 새뮤얼 코톨드가 드물게 수집한 20세기 아방가르드 작품이다. 이탈리아 출신으로 파리 몽마르트르에서 그림을 그렸던 아메데오 모딜리아니(Amedeo Modigliani, 1884-1920)는 짧은 화가 생활 내내 여인의 초상화만 그렸던 독특한 개성의 작가다. 가느다란 목과 불균형하게 긴 얼굴의 여인들을 그린 그의 초상은 현대인의 불안과 애수를 절묘하게 표현한 걸작들이라는 평을 얻고 있다. 그러나 모딜리아니의 활동 당시 세간의 평은 그리 관대하지 않았다. 그는 피카소가 ‘두목’으로 있던 몽마르트르의 ‘세탁선(Bateau-Lavoir)’ 그룹에서 작품을 가장 팔지 못했던 화가였고 가난과 병고, 알코올 중독에 시달리다 1920년 서른여섯의 나이로 요절하고 말았다.

이런 초상화의 화가 모딜리아니가 잠시 ‘외도’에 빠진 적이 있었다. 1916년과 1917년 사이에 그는 집중적으로 조각과 누드에 탐닉했다. 그리고 이 누드 작품들을 모아 1917년 12월 3일 파리에서 평생 처음이자 마지막인 개인전을 열었다. 그러나 운 나쁘게도 그의 개인전은 하루 만에 강제 철거당하고 말았다. 하필이면 개인전이 열린 베르트 베이유 화랑 맞은편에 경찰서가 있었던 게 문제였다. 경관들은 화랑 쇼윈도에 걸린 모딜리아니의 누드 작품들이 ‘음란’하다며 당장 전시를 철거하지 않으면 작품들을 압수하겠다고 위협했던 것이다.

잠든 여인을 그린 이 누드에서도 모딜리아니의 독특한 감각을 읽을 수 있다. 단순하고 거친 선으로 그려진 그의 누드는 이탈리아 고전파의 전통을 잇기보다는 무언가 이국적인, 열대의 느낌을 풍긴다. 모딜리아니는 조각 작업 중에 이집트, 아프리카의 여인 조각상들에서 강한 영감을 받았다. 조각에 이어진 누드 작업에도 아프리카 원시 조각의 영향이 분명하게 나타난다. 그는 회색빛 배경과 모델의 피부 표면, 머리카락 등을 긁어내린 듯 거친 붓자국으로 마감하고 있는데, 이 같은 방식은 당시 살롱 화가들이 즐겨 그린 ‘매끈하고 부드러운 상아빛 피부’의 누드와는 너무도 동떨어진 것이었다. 그리고 이 같은 모던함과 사실성 때문에 모딜리아니의 누드는 경찰에게 ‘음란화’라는 오해를 받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더구나 신체 부위를 적나라하게 드러낸 모델의 포즈, 소위 ‘헤어 누드(hair nude)’ 역시 당시 사회 풍조에서는 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 것이었다.

모딜리아니가 누드 말고 늘 즐겨 그리던 여인들의 초상으로 개인전을 채웠다면 ‘전시 하루 만에 철거’라는 불운만은 면치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가난하고 불우한 운명은 모딜리아니를 평생 따라다닐 숙명이었다. 몽마르트르 밤거리의 여자들은 모델을 살 돈이 없는 이 잘생긴 화가를 불쌍하게 여겨 기꺼이 모델이 되어 주었다. 몽마르트르의 카페 ‘로통드(La Rotonde)’에서 늘 사람들을 스케치하거나 단테, 로트레아몽의 시집을 읽던 모딜리아니는 서른셋에 자신의 제자였던 잔 에뷔테른과 동거하며 비로소 짧은 행복을 맛보게 된다. 1918년에는 단 하나의 혈육인 딸도 태어났다. 그러나 늘 병약했던 화가는 1920년 초, 결핵성 늑막염으로 병석에 누운 지 며칠 안 되어 사망하고 말았다.

그리고 이틀 뒤, 정신착란 상태에 빠진 잔이 임신 9개월의 몸으로 투신자살했다.

모델이 누구인가를 막론하고 모딜리아니의 그림에는 늘 애수 어린 분위기가 배어 있다. 이 누드 역시 마찬가지다. 옆으로 고개를 기울인 채 눈을 감고 있는 모델의 표정에서 일말의 슬픔이 느껴진다. 이 애수 어린 느낌은 화가의 독특한 개성으로도, 또 모던한 감각으로도 해석된다. 그러나 내 눈에는 모딜리아니의 슬픈 그림들은 화가 자신의 운명을, 세속적인 행복도, 화가로서의 영광도 얻지 못했던 한 젊은이의 불운한 삶을 예언한 것처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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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메데오 모딜리아니(Amedeo Modigliani), 그는 1884년 이탈리아의 북부 리보르노에서 태어났지만 1906년 프랑스로 온 후 주로 프랑스에서 활동한 세계적인 화가이다. 지금 우리가 그를 세계적인 화가로 칭송하지만 사실 그는 살아 생전에 무척 힘든 삶을 살았다. 그의 애칭이 <모디>였는데 이 말은 발음상 프랑스어로 <저주받은 사람>이라는 의미의 단어와 같았다. 저주 받은 사람, 저주 받은 화가, 저주받은 모딜리아니, 모디, 그는 술에 중독되고 여자에 중독된 그런 삶을 살았다. 하지만 그의 곁에는 한 여인이 있었다. 그 여인의 이름은 잔느 에뷔테른(Jeanne Hebuterne)이다. 

모딜리아니
잔느 에뷔테른

잔느 에뷔테른은 모딜리아니에게 순진무구한 사랑을 바친 여인이자 영감의 원천이었다. 둘의 사랑은 열정적이었다. 하지만 그들의 사랑은 그렇게 뜨거웠는데 현실은 겨울이 닥쳐도 난로를 피울 수도 없는 가난이 지배하였다. 가난이 그들을 힘들게 할수록 그들의 사랑은 더욱 깊어갔지만, 어린 딸을 그 추운 냉방에서 계속 있게 할 수는 없었다. 그리하여 잔느 에뷔테른은 딸을 데리고 친정으로 갔다. 모딜리아니가 잔느 에뷔테른을 만나기 위하여 그녀의 집으로 찾아가곤 했지만 그들의 사랑을 반대하던 그녀의 부모는 끝내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 모딜리아니는 문앞에 쪼그리고 앉아서 잔느를 기다리다가 하는 수 없이 돌아오곤 하였다. 그리고 1920년 1월 모딜리아니는 이 세상을 떠났다. 그런데 모딜리아니가 죽자 시체 안치실에서 모딜리아니의 죽음을 확인 한 잔느는 그 이튿날 역시 자신의 집 6층에서 뛰어내려 생을 마감하였다. 하지만 잔느 부모의 강력한 반대 때문에 죽어서도 그들의 육신은 만날 수 없었다. 그리고 몇 년이 지난 후에 겨우 합장을 할 수 있었고 그들의 사랑은 영원히 하나가 되었다.

잔느 에붸테른이 그린 그림으로 자살을 예고하는 듯 하다

모딜리아니, 그림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대부분 그의 이름을 안다. 그리고 그를 천재라고 부른다. 그러한 그의 그림은 첫 눈에 알아볼 수 있다. 두 가지 특징 때문이다. 하나는 여인들의 목이 유달리 길게 표현되기 때문이다. 다른 하나는 여인을 그린 대부분의 그림에서 여인의 눈동자가 그려져 있지 않기 때문이다.

모딜리아니와 잔느 에뷔테른의 소설 같은 이 슬프고도 아름다운 사랑이 그의 삶을 신화로 승화시켰는지도 모른다. 실제로 사람들의 주목을 받지 못하고 가난하게 살던 모딜리아니는 이 죽음 이후 오히려 유명해지기 시작한다. 사람들은 그의 사랑에 관심을 가지고 그의 작품을 다시 바라보기 시작하였다.

노천명은 <사슴>이라는 시에서 "목이 길어서 슬픈 짐승이여"이라고 노래한 적이 있다. 긴 목, 긴 얼굴, 그것은 어떤 기다림일까? 그것은 어떤 그리움일까? 아니면 저 먼 곳을 향한 영혼의 몸짓일까? 얼굴 선은 분명하고 표정은 꿈을 꾸는 듯 하다. 내면이 들여다 보일 정도로 ..... 내면? 아 그러고 보니 모딜리아니가 그린 대부분의 여인들 그림에 눈동자가 없다. 눈이 휑하다. 왜 그랬을까? 우리더러 그녀의 내면을 들여다 보라고 비워 둔 것일까?

눈은 많은 사람들이 마음의 창, 영혼의 창이라고 한다. 눈은 말보다 표정보다 더 빨리 자신의 감정을 드러낸다. 그런데 모딜리아니는 상당수의 많은 그림에서 그러한 눈의 눈동자를 그리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잔느 에뷔테른이 모디에게 이런 질문을 한 적이 있다. "왜 눈을 그리지 않나요?" 그러자 모디는 대답하였다. "당신의 영혼을 보고 이해할 수 있을 때 눈동자를 그릴 것이다"고. 하지만 그 눈은 단순히 모델의 영혼을 이해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비워 둔 것일까? 그럴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모딜리아니의 내면을 허허롭게 하던 채워질 수 없는 공허가 아닐까?  

그가 그린 긴 목에는 그리움이 있고, 기다림이 있다. 그가 비워 둔 눈에는 우수가 있고 슬픔이 있고 공허가 있다. 그런데 그의 그림에서 또 하나 주목해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대부분의 그림을 보면 여인의 모델의 몸이 굽이치며 흐르는 하나의 강물 같다는 사실이다. 모딜리아니는 늘 풍요로운 강물을 꿈꾸었다. 그것은 모딜리아니가 꿈꾸던 하나의 이상을 상징하는 것이다. 그 강물이 굽이치며 흐르는 소리가 선이 되고 색채가 되고 마티에르가 되었다. 그것은 우울이 되기도 하고, 우수가 되기도 하고, 이상이 되기도 하였다.

모딜리아니, 목이 긴 여인, 공허하게 비워 둔 눈, 강물처럼 흐르는 선과 색 그리고 마티에르, 모딜리아니의 작품에서 이러한 것들을 주목해 보면 그의 그림이 더욱 가슴 깊숙한 곳으로 들어온다.    

 

[그림]Amedeo Modigliani ◈ Jeanne Hebuterne (1917-8) 


Queen ◈ Love Of My Life 

그림을 클릭하면 큰그림으로 감상할 수 있습니다


 

운명적인 사랑

   
    1917년 7월 어느 날 그는 가난 속에 과음과 방랑을 일삼다가 몽파르나스의 로톤드(카페 이름)에서 눈동자도 머리 빛도 밝고 창백할 정도로 하얀 피부를 가진 잔느를 만나게 되었다. 이 숙명의 여인은 그 때 갓 열아홉 살이었고, 모딜리아니는 서른세 살이었다. 잔느는 그 동안 모딜리아니가 만난 모든 여인 중 가장 믿을 수 있고 헌신적이며 가장 순정적인 여자였다.
[그림]Amedeo Modigliani ◈ Portrait of Jeanne Hebuterne (1917)
    한 모델을 대상으로 여러 점의 작품을 남겨 우리에게 친숙하게 알려진 모딜리아니 평생을 모딜리아니의 곁에서 모델이 된 여인은 이 작품의 주인공인 그의 아내 쟌느 모딜리아니의 부모는 유태인으로 스스로 유태인임을 자랑스러워 했고 잔느의 집안은 독실한 카톨릭 집안이었다. 사랑했으나 부모들의 반대로 결혼식도 올리지 못한채 잔느는 사랑하는 그를 따랐다.
[그림]Amedeo Modigliani ◈ Portrait of Jeane Hebuterne, Left Arm behind Head (1919)
    20세기 초엽 인상주의 물결이 휩쓸던 유럽에는 많은 화가들이 파리에 모여들었다. 새로운 시각이 고정된 형태나 관념을 탈피해 다양한 형태(양식)로 시도되는 시기였다. 고전적인 초상화의 틀에서 벗어나 왜곡된 얼굴의 형태(유달리 길다란 목과 얼굴)속에서도 우수에 찬 표정에 담겨져 있는 인물의 심성을 반영하는데 조금도 모자람이 없어 보인다. 파리의 몽마르뜨나 몽파르나스지역에 모여 활동하던 `에콜 드 파리(Ecole de paris: 파리파) 사이에서도 로맨티스트로 유명했던 모딜리아니를 사랑했던 쟌느는 `얼굴이 길어 슬픈 여인' 이라는 그만의 캐릭터를 완성시키는 원천이 되었다. 이러한 목이 길쭉한 인물 스타일은 아프리카 원시 조각이나 모딜리아니가 활동하던 시기에 유럽에서 유행한 일본의 우끼요에서 영향을 받고, 세잔느와 입체주의가 가미된 그만의 독특한 양식으로 자리잡았다.
[그림]Amedeo Modigliani ◈ Little Girl in Blue (1918)
    이 작품은 모딜리아니와 쟌느 사이에 여자 아이가 생기기 얼마 전에 그려진 것이다. 웨르나의 해석에 의하면 모딜리아니는 몽파르나스의 이웃에 살고 있는 하층 계급의 어린이들을 좋아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는 아이들을 많이 그렸으며 이것은 그 가운데의 하나이다. 이 꼬마아이는 고운 옷을 입고 있는데, 아마 단벌 옷일 것이다. 소녀의 얼굴은 밝지도 쾌활하지도 않다.그녀의 표정은 훨씬 연상의 다른 모델들의 경우처럼 쓸쓸하고 체념마저 하고 있다. 모딜리아니가 그린 어린이들의 그림은 참다운 자애의 감정을 불러일으켜 주고 있다. 이 소녀는 천진 무구하지만 애처로움이 소리 없이 흐르고 있는 화면을 통해 우리는 모딜리아니의 진심을 엿볼 수 있으며, 깊은 애정을 함께 느낀다
[그림]Amedeo Modigliani(伊,1884-1920)◈ The Servant Girl (La jeune bonne,1918)
    파리라는 도회지로 나온 시골 처녀.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하녀라는 직업이며, 이런한 유형은 동. 서가 같다. 하루 종일 허름한 옷차림으로 근면하게 일 해야만 되는게 이들의 인생이었다. 특히 유럽인들의 사람 씀씀이는 고약할 정도로 가차 없고 지독하다. 그러나, 그들은 이러한 일들, 어린애를 돌보고 주부의 잔심부름을 도맡고 하는 것을 묵묵히 감당해 낸다. 이들을 프랑스 말로 본느라고 부른다. 인생의 뒤안길에서 살고 있는 애환의 표정들 모딜리아니는 이러한 이웃을 사랑했고 그가 즐겨 그린 서민의 한 표정을 그녀는 대표하고 있다. 이 모델은 카뉴슐멜 출신이며, 마리훼레라는 이름의 처녀였다.그녀의 아버지는 농부였으며, 이 젊은 처녀의 삶을 모딜리아니는 공감했고 그것을 표현하고 있다
[그림]Amedeo Modigliani(伊,1884-1920)◈ Portrait of Jeanne Hebuterne (1919)

이그림은 2004년 소더비경매에서 3130만달러(347억6000만원)가 넘는 가격에 익명의 입찰자에게 팔렸다.

너의 영혼을 알게 될때 눈동자를 그릴 수 있어..
    1919년 무렵 모딜리아니는 파리에서 화가로 널리 알려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잔느는 둘째 아이를 임신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처럼 좋아진 상황과 한 아이의 아버지라는 처지에도 불구하고, 모딜리아니는 작품에 대한 열정과 끝없는 음주벽을 놓지 못했다. 모딜리아니의 그림 <잔느 에뷔테른느>(1919년작)는 이때에 그려진 것이다. 임신한 잔느의 모습은 왠지 처연하다. 그 눈동자 없는 눈은 그에 대한 연민과 사랑을 담아 슬프게 바라보고 있는 듯 하다. 사진의 인물작품에서 눈동자를 표현하지 않은 점은 매우 특이한데 오히려 푸른색만으로 표현한 눈의 표정은 모든 것을 수용하고 받아들이는 영원으로의 응시 같은 느낌을 자아낸다.



얼굴이 긴 여인의 초상화를 그린

모딜리아니

▲ 아메데오 모딜리아니(1884~1920)

 

   

 

 

 

    열정의 보헤미안고독한 영혼을 표현한 화가가난하지만 자유로운 영혼의 화가모가지가 길어 슬픈 에콜 드 파리의 위대한 화가몽파르나스의 전설 등등…….

 

    이렇게 모딜리아니의 작품과 일생을 다룬 여러 책들의 제목을 쭉 살펴보면 그가 어떤 화가였는지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습니다.

 

    에콜 드 파리(École de Paris)는 파리의 학교란 뜻으로주로 제1차 세계 대전 후부터 제2차 세계 대전까지 파리의 몽파르나스나 몽마르트르 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한 여러 외국인 화가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다른 말로는 파리파라고도 부릅니다.

 

    이들은 국적을 떠나 미술의 중심지였던 파리에 모여 작품 활동을 했는데대표적으로 모딜리아니(이탈리아), 수틴(리투아니아), 파스킨(불가리아), 샤갈(러시아), 자크(폴란드등의 화가를 꼽을 수 있습니다넓게 보면 피카소(스페인)도 포함됩니다이들은 일정한 사조나 표현 형식에 얽매인 집단이 아니었고각자 개성이 강하게 드러나는 작품 세계를 펼쳤습니다.

 

 

    이렇게 미술의 역사에서 혁명적인 변화와 새로운 물결이 넘실대던 20세기 초에 모딜리아니는 전 세계에서 몰려든 화가들이 자신들의 방식으로 재능을 펼치던 파리에서 작품 활동을 한 화가 중 하나였습니다.

 

   

 

 

 

▲ <폴 기욤의 초상화> (1915)

 

 

  

▲ <파블로 피카소의 초상화> (1915) - 당시 34살의 화가였던 피카소를 그린 작품이다.

 

 

 

 

 

    모딜리아니는 1884년에 이탈리아의 리보르노에서 유태계 은행가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아버지는 한때 성공한 은행가였지만 모딜리아니가 태어날 무렵에는 거의 파산 직전이었습니다그래서 모딜리아니의 집안은 가난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모딜리아니는 14살 때부터 미술을 공부하였고피렌체와 베니스 등에서 미술 학교를 다녔습니다그러다가 22살 때인 1906년에 파리의 몽파르나스로 이주하였습니다.

 

 

    당시에 파리의 몽마르트와 몽파르나스는 화가들이 특히 많이 모여 살던 지역이었습니다모딜리아니는 이탈리아에서 어머니가 보내오는 적은 생활비와 간간히 작품을 팔아 버는 돈을 합쳐 어렵게 생활을 꾸려야 했습니다그러나 그는 생전에는 거의 무명 화가였으므로 그림을 팔아서 돈을 벌지는 못했습니다.

   

 

   1908모딜리아니는 처음으로 앙데팡당(independent) 전시회에 작품을 출품하여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습니다앙데팡당은 19세기 말부터 살롱의 엄격한 심사와 보수적인 틀에서 벗어나 자유롭고 새로운 시도를 하는 신진 작가들을 알리기 위해 매년 개최된 미술 전시회로살롱과 달리 심사를 받지 않고 출품과 전시가 가능했습니다.

   

    신인상주의와 점묘법으로 유명한 조르주 쇠라(1859~1891)와 폴 시냐크(1863~1935)가 주도한 이 전시회를 통해 젊고 진보적인 많은 화가들이 세상에 이름을 알렸는데세잔마티스로트레크반 고흐샤갈모딜리아니 등 인상파 이후의 훌륭한 화가들이 앙데팡당을 거쳐 갔습니다.

 

   

 

 

▲ <장 콕토의 초상화> (1916)

 

 

 

    모딜리아니는 파리에서 수많은 예술가들과 교류하였으며점차 독특한 화풍으로 주목받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대중의 인정을 받지는 못해 항상 가난에 시달려야 했습니다개인전을 열어도 외설적이라는 비판을 받으며 실패하기 일쑤였습니다.

 

    파리에 정착한 지 4~5년이 지났지만 화가로서 그는 성공하지 못했습니다그는 이 때문에 한때 조각으로 눈을 돌려 약 3년 정도 조각에 몰두하기도 했습니다그러나 어릴 때부터 결핵에 걸려 쇠약했던 그는 돌을 쪼개며 먼지를 마셔야 하는 고된 작업에 어려움을 겪었습니다게다가 조각에 필요한 비싼 재료비도 감당할 수 없었습니다.

    이런 여러 가지 이유 때문에 모딜리아니는 조각을 완전히 포기하고 다시 그림 그리는 일에만 전념하게 되었습니다.

 

 

 

 

▲ <잔 에뷔테른> (1918)

 

 

 

 

    조각을 포기하고 다시 붓을 든 이후로 모딜리아니의 화풍은 이전보다 더욱 더 간결해지고 개성이 넘쳤습니다.

 

    오늘날 남아 있는 모딜리아니의 작품은 풍경화는 거의 없고 대부분 인물을 그린 초상화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초상화와는 많이 다릅니다. ​특히 달걀처럼 생긴 타원형의 긴 얼굴과 사슴처럼 가늘고 길게 늘어진 목부드럽고 우아한 곡선초점 없는 눈 등이 특징입니다.

   그는 파리의 가난한 사람들이나 여인의 얼굴그리고 여인의 누드화를 즐겨 그렸습니다.

 

 

 

 

 

▲ 잔 에뷔테른

 

 

 

▲ <잔 에뷔테른의 초상화> (1918)

 

 

 

▲ <큰 모자를 쓴 잔 에뷔테른> (1918~1919)

 

 

 

 

    보기 드믄 미남이었던 모딜리아니는 파리에서 많은 여인들을 사귀었습니다가난한 경제적 상황에도 불구하고 그는 술에 빠져 방탕한 생활을 일삼았고 수많은 이야깃거리를 남기기도 했습니다.

    그는 어릴 때부터 결핵을 앓아 건강이 좋지 못했는데가난하고 방탕한 생활이 이어지자 건강은 더욱 더 악화되어 갔습니다.

 

    모딜리아니는 1917년부터 많은 여인들과의 염문을 뒤로 하고 잔 에뷔테른이라는 여인을 만나 동거를 시작했습니다.

 

   잔 에뷔테른은 그림을 공부하며 화가들의 그림 모델을 하던 여인이었습니다두 사람은 화가와 모델로서 만나 사랑에 빠졌지만잔 에뷔테른의 부모는 두 사람 사이를 결사적으로 반대했습니다.

   부모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동거를 시작한 두 사람은 1918년 딸을 낳았지만모딜리아니의 건강은 점차 나빠졌습니다.

 

   그리고 1920년 건강이 급속도로 악화된 모딜리아니는 파리의 한 자선병원에 입원하였다가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이때 잔 에뷔테른은 임신 중이었는데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 모딜리아니가 세상을 떠난 바로 다음날 건물에서 뛰어내려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 <아기를 안고 있는 집시 여인> (1919)

 

▲ <부채를 든 여인> (1919)

 

 

   

 

   불과 36살의 짧지만 열정적인 삶을 살다 간 모딜리아니의 삶은 훗날 여러 차례 영화와 소설연극으로 만들어지기도 했습니다.

 

    비록 생전에는 거의 인정을 받지 못했지만 세월이 지날수록 그에 대한 평판은 올라갔습니다오늘날 모딜리아니는 미술의 역사를 통틀어 자신만의 독창적인 표현 방식을 만들어 낸 몇 안 되는 뛰어난 화가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 <자화상> (1919)

 

 

Portrait of Lunia Czechovska.

1919. Oil on canvas. 46 x 33 cm.

Private collection.

 

Amedeo Modigliani (1884-1920)

 

Portrait of Paul Alexandre Against a Green Background. 
1909. Oil on canvas. 100 x 81 cm. Private collection. 
Amedeo Modigliani (1884-1920)
 

modigliani32_The Sculptor Jacques.jpg

The Sculptor Jacques Lipchitz and His Wife Berthe Lipchitz.

1916. Oil on canvas. 80.2 x 52.5 cm.

Art Institute of Chicago, Chicago, IL, USA.

 

Amedeo Modigliani (1884-1920)

 

Self-Portrait.

1919. Oil on canvas. 100 x 64.5 cm.

Museu de Arte Contemporanea da Universidade, San Paulo, Brazil.

 

Amedeo Modigliani (1884-1920

 

Stone Head.

1911/12. Limestone. 71.1 x 16.5 x 23.5 cm.

Philadelphia Museum of Art, Philadelphia, PA, USA.

 

Amedeo Modigliani

 

1917 Oil on canvas 25 3/8 x 39 1/8 in. (64.5 x 99.5 cm)

Barnes Foundation, Merion, PA, USA

Amedeo Modigliani (1884-1920)

 

Landscape.

1919. Oil on canvas. 61 x 46.5 cm.

Galerie Karsten Greve, Cologne, Germany.

Amedeo Modigliani (1884-1920)

 

생애

1884년 이태리 토스카나 주 리보르노에 있는 유태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의 어머니 에우제니아는 철학자 스피노자의 혈통을 이어받은 마르세유의 명문가 출신으로 높은 지성과 교양을 갖추고 있었다.[1] 부친의 사업이 어려워지자 직접 단눈치오의 시를 번역하거나 서평을 써 생활을 유지할 정도였다.[1] 모딜리아니가 태어났을 당시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집안은 어려웠지만 에우제니아는 어린 시절부터 그림에 대한 재능을 보인 아들을 굴리엘모 미켈리의 아틀리에에 데리고 가기도 했다. 

 

그러나 모딜리아니는 늑막염, 폐결핵, 폐렴 등 병치레가 잦아 평생을 고통받았다. 14세에는 병으로 학교를 그만두었고, 17세에는 결핵에 걸려 이탈리아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며 요양을 해야 했다.[2] 베네치아·피렌체 미술 학교에서 공부한 모딜리아니는 1906년 파리로 나가 몽마르트에 아틀리에를 빌렸고 세잔의 영향을 받았다. 독립 미술파에 속하며, 파리 화단의 특이한 화가로서 인정되었다. 조각도 하여, 브랑쿠시, 콕토 등과도 사귀었다. 그러나 돌조각에서 나오는 먼지로 폐가 나빠지자 조각을 그만두고 그림만 그렸다. 

 

1912년 파리 가을 미술전에 작품을 출품했지만 주목받지 못했고 초상화 한 점 당 10프랑밖에 받지 못했다. 그러나 미남으로 유명했던 모딜리아니에겐 모델을 자청하는 여성들이 많이 있었다.[3] 1917년 몽파르나스의 카페에서 모딜리아니는 러시아 조각가 차나 오를로프(Chana Orloff)의 소개로 14세 연하의 화가 지망생 잔 에뷔테른(Jeanne Ebuterne)을 만났다. 잔은 모딜리아니와 같은 아틀리에를 쓰는 일본인 화가 후지타 쓰구하루의 모델이었다. 

 

보수적인 부르주아 가정이었던 잔의 가족은 가난하고 병약하며 마약을 하는 유대인 모딜리아니와의 교제를 싫어했지만 두 사람은 동거에 들어갔다. 같은 해 모딜리아니는 폴란드 화상 레오폴트 즈보로프스키의 주선으로 개인전을 열었지만 외설적이라는 비판만 받은 채 전시회는 실패로 돌아갔다. 이듬해인 1918년 모딜리아니는 잔과 니스에서 요양을 했고 딸 지오바나를 얻었다. 1920년 파리로 돌아온 모딜리아니는 자선 병원에서 결핵성 뇌막염으로 36세에 요절하였다.[2] 당시 임신 8개월째였던 잔은 모딜리아니가 죽고 이틀 뒤에 투신 자살했다. 모딜리아니는 파리의 페르 라 셰즈 묘지에 묻혔고, 10년 뒤 잔의 가족들은 잔을 모딜리아니 곁에 묻어주었다.

 

 

화풍

모딜리아니는 폴 세잔와 툴루즈 로트렉의 영향을 받았다.[2] 그는 항상 인물만을 그렸는데 파리의 뒷거리에 사는 가난한 사람들 및 여성의 나체 등을 즐겨 그렸다. 그의 인물화는 가늘고 긴 목이나 달걀 모양의 얼굴을 가는 선으로 둘러 독특한 기품과 아름다움을 나타냈다. 모딜리아니는 총 314점의 작품을 남겼는데 주요 작품으로 <꽃 파는 소녀> <문지기의 아들> <벌거벗은 에리부리> <폴 기용의 초상> <잔 에뷔테른의 초상> 등이 있다.

 

 

그밖의 자료

스토리&스토리 - 예술가의 사랑 (18)

 

*가난·술에 찌들었던 화가

*미술지망생과 운명적 만남…헌신적 사랑이 명작 꽃 피워

 모딜리아니의 사망 소식에 그녀도 투신자살로 生 마감

 

20세기 초의 이탈리아 화가 아메데오 모딜리아니(1884~1920)는 소명의식에 충실한 화가의 전형이었다. 토스카나 지방의 항구도시 리보르노의 부유한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나 ‘즐겁게 흘러가는 아름다운 강물 같은 인생’을 꿈꿨던 그의 삶은 자신의 의도와는 달리 잠시도 수그러들 줄 모르는 격랑으로 점철됐다.

 

 

그 험난한 여로의 처음과 끝에서 그의 손을 붙잡아준 것은 모성애로 충만한 두 명의 헌신적인 여인이었다. 첫 여인은 바로 그의 어머니 에우제니아. 프랑스계 유대인이었던 그는 철학자 스피노자의 피를 이어받은 마르세유의 명문가 출신으로 높은 교양의 소유자였다. 에우제니아는 1872년 이탈리아의 사업가 플라미니오 모딜리아니와 결혼했는데 남편의 사업이 어려워지자 단눈치오의 시를 번역하고 가명으로 서평을 발표, 가계를 꾸릴 정도로 고고한 지성을 갖추고 있었다.

 

 

모딜리아니를 예술의 세계로 인도한 것은 바로 어머니 에우제니아였다. 그는 12세의 어린 아들이 그림을 배우고 싶다고 하자 주저 없이 풍경화가 굴리엘모 미켈리의 아틀리에로 데리고 갈 정도였다. 모딜리아니는 이때부터 학교 공부에 흥미를 잃고 오로지 그림을 그리는 데만 몰두했다.

 

 

1900년 모딜리아니가 폐렴에 걸리자 요양차 나폴리, 로마, 피렌체, 베네치아 등 이탈리아의 명소를 데리고 다니며 고전문화의 진수를 맛볼 수 있게 배려한 것도 그였다. 그는 모딜리아니에게 있어 어머니이자 정신적 멘토였다. 모딜리아니의 내면에서 예술가가 되려는 강렬한 욕구가 샘솟은 것도 이 여행을 통해서였다. 그는 특히 미술관과 박물관에서 만난 그리스·로마의 예술품 속에서 미의 이상을 발견했고 14세기 시에나 화가들이 그린 기독교 성화를 통해 영혼이 고양됨을 느꼈다. 여행을 다녀온 지 얼마 안 돼 그는 고향 리보르노를 떠나 피렌체의 누드학교에 입학한다. 그곳에서 그는 유럽을 풍미하던 상징주의 미술과 접한다. 1903년에는 베네치아에서 유럽 현대미술의 다양한 경향을 접한 뒤 1906년 당대 세계 예술의 중심지인 파리에 정착한다.

 

 

그는 파리에서 세잔과 툴르즈 로트레크로부터 영감을 얻었고 상징주의 미술에도 관심을 보인다. 그는 술과 여자에 탐닉하며 방탕한 생활에 빠져드는 한편 야수파, 입체파 같은 당대의 사조에 휩쓸리지 않은 채 자신만의 세계를 고집했다. 아무도 그의 작품을 주목하지 않았다. 가난이 어느새 그의 숨통을 죄기 시작했고 건강은 날로 악화됐다. 싸구려 독주가 그의 유일한 동반자였다.

 

 

그런 고통의 나락에서 모딜리아니 앞에 어머니에 이은 두 번째 운명의 여인이 나타난다. 1917년 몽파르나스의 카페에서 잔 에뷔테른을 만난 것이다. 화가는 청순함과 우아함을 겸비한 19세 미술지망생에 반해 그의 초상화를 그려주며 즉석에서 사랑을 고백한다. 그때까지 남자라고는 사귀어 본 적이 없는 이 우아하고 순수한 여인은 술에 전 화가를 자신의 운명적 사랑으로 받아들이고 정신적 구원자가 된다.

 

 

에뷔테른은 한시도 그의 곁을 떠나지 않고 그의 지친 마음을 어루만져줬다. 작업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모델이 화실에 들어오면 자리를 비워줬고 모딜리아니가 친구들을 만날 때도 합석하지 않고 밖에서 기다렸다. 에뷔테른이 첫 아이를 낳았을 때는 외면했던 부모들도 딸이 둘째를 임신했을 때는 손을 내밀었다. 그들은 딸을 모딜리아니로부터 격리, 자신들의 집으로 옮겨 보살폈다. 그렇지만 때는 늦었다. 그 와중에 모딜리아니는 병세가 악화돼 숨을 거뒀고, 소식을 전해들은 에뷔테른은 6층 창 밖으로 몸을 던졌기 때문이다. 그는 아마도 화가를 천국으로 인도하기 위해 지상에 내려온 천사였는지 모른다.

 

 

 

 

 

 

 이런 불 같은 삶과 달리 모딜리아니의 작품에는 의외로 차분한 분위기가 감돈다. 그는 평소 감정에 치우친 작품을 경멸했다. 야수파가 뿜어대는 색채의 광기와 입체파가 집착한 형태의 해체에 몸서리쳤다. 그는 세잔과 마찬가지로 변치 않는 영원의 미를 갈망했다. 그의 화폭 가득한 눈동자 없는 목이 긴 사람들, 고전적 형태미와 부드럽게 포즈를 취한 애수 어린 누드의 여인들은 그리스·로마 조각상의 이상적인 아름다움에 현대의 옷을 입힌 것 같다. 그는 비록 알코올에 취해, 감정에 취해 무질서한 삶을 살았지만 늘 영원의 미를 꿈꿨다. 그리고 그 소망은 어머니의 모성애적 사랑으로 씨앗이 뿌려졌고 에뷔테른의 헌신적 사랑 속에서 그 꽃을 피웠던 것이다

 

 

피카소, Andre Salmon과 함께한 모딜리아니

 

 

모딜리아니는 1920년 1월 24일 파리의 한 자선병원에서 세상을 떠나고 맙니다.

 

그리고 다음날 소식을 들을 잔느 역시

머물던 아파트 6층에서 미련없이 몸을 던져 모딜리아니를 따라갑니다.

영화 '모딜리아니​'

잔느 역시 세상을 떠나자 충격에 빠진 그녀의 가족들이 둘의 시신이 함께 묻히는 것을 반대하지만
모딜리아니 지인들의 요청으로 10년 뒤 둘은 함께 묻힐 수 있었습니다.​

 

 

 

 

모딜리아니의 묘비에는 이탈리아어로 다음과 같이 새겨져 있습니다.

​1920년 1월 24일

이제 바로 영광을 차지하려는 순간에 죽음이 그를 데려가다.​

그 밑에는 만삭의 몸으로 그를 뒤쫓아 투신자살한 아내 잔나의 묘비가 나란히 세워져 있습니다.

그리고​ 묘비에는

1920년 1월 25일

'모든 것을 모딜리아니에게 바친 헌신적인 반려자' 파리에서 죽다​

​라고 새겨져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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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파나마 페이퍼스 연루돼 몰수

기구한 ‘남자’ 모딜리아니 작품 소유권 분쟁
 

이탈리아 천재 화가 아메데오 모딜리아니의 1918년 작품 ‘지팡이를 들고 앉아 있는
남자’(사진)의 운명이 기구하다. 이 그림은 제2차 세계대전 때 프랑스 파리를 점령한
나치의 손에 넘어간 후 수차례 주인이 바뀌고 긴 소유권 분쟁에 휘말린 끝에 이제는
‘파나마 페이퍼스’로 수사대상에 올라 몰수되는 처지에 놓였다. 

프랑스 거주 유대인 미술상 오스카 스테티너의 유족과 미술계의 ‘큰손’ 나흐마드 가문은
2011년부터 이 그림의 소유권을 놓고 법적 다툼을 벌이고 있다. 이 그림은 파나마에 소재한
국제미술센터(IAC)가 1996년 런던 크리스티 경매에서 220만달러에 사들여 갖고 있다.
지금은 2500만달러(약 280억원)를 호가한다. 

스테티너 측은 1939년 스테티너가 파리에서 도주하면서 놓고 간 그림을 나치가 가져간 것이고
그림을 손에 넣은 IAC가 나흐마드 가문의 유령회사이니 돌려받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나흐마드 측은 IAC는 우리가 소유하지도, 통제하지도 않는다고 주장해왔다. 

 

그러나 ‘파나마 페이퍼스’로 IAC의 실제 주인이 나흐마드 가문임이 드러났다.
스위스 검찰은 2016년 4월 11일 모딜리아니 그림과 관련한 수사에 들어갔고
그림은 몰수돼 제네바 프리포트(귀중품·미술품들을 보관하는 물류창고지대)의
창고에서 특별관세구역으로 옮겨졌다. 

==========================

(제네바=연합뉴스) 류현성 특파원=
스위스 제네바 검찰이 사상 최대 규모의 조세회피처 자료인 '파나마 페이퍼스'의
유출로 알려진 이탈리아 화가 아메데오 모딜리아니의 1918년 작 '앉아있는 남자'를
압수했다고 스위스 언론이 2016년 4월 12일(현지시간) 보도했다.

스위스 검찰은 제네바 자유무역항을 수색해 2천500만 달러(약 288억 원)의 가치를
지닌 것으로 추정되는 이 작품을 지난 8일 압수했으며 이 작품은 세계 2차대전
당시 프랑스 파리로 진격한 나치가 강탈한 것으로 알려졌다고 스위스 방송인
스위스엥포는 전했다.

이 작품을 둘러싸고 뉴욕의 유명 화랑인 헬리 나마드 갤러리와 유대인 미술품
수집가의 손자인 필리페 마에스트라치는 각각 소유권을 주장하며 뉴욕 법정에서
팽팽히 맞서고 있다.

마에스트라치는 자신의 할아버지가 소유한 이 작품이 1940년에
프랑스 파리로 진격한 나치에 의해 강탈된 것이라며 2008년 소더비 경매에서
이 그림을 사들인 나마드 갤러리 측에 반환 소송을 냈다.

그러나 나마드 갤러리 측은 문제의 작품이 1995년 파나마에 설립된
인터내셔널 아트센터(IAC)라는 회사에 먼저 팔렸기 때문에
자신들은 반환 책임이 없다고 주장해왔다. 파나마 페이퍼스에는
IAC가 나마드 가문에 의해 설립돼 스위스 제네바에 있는
법률회사를 통해 지난 20년간 운영됐다는 내용이 포함됐다고
영국 일간 가디언 등은 보도했다.

제네바 자유무역항은 관세 없이 각종 물건을 보관하고 선적할 수 있는 구역이다.
제네바 자유무역항에는 박물관에 전시될 수준의 예술품들이 많이 보관된 것으로 알려졌다.

한편, 제네바 검찰은 제네바에 본부를 둔 법률회사와 은행 등의 이름이
파나마 페이퍼스에서 거론됨에 따라 수사에 착수한 바 있다.

 

스위스 제네바 자유무역항 모습
사진출처:스위스 방송 스위스엥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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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8 {쟁명} = 칭찬 일색이던 사회 분위기를 대담하게 뒤번지다... 2017-10-22 0 2587
417 {쟁명} = 아방가르드적 락서 행위도 예술일까???... 2017-10-22 0 1744
416 {쟁명" = "수염 난 모나리자" 시집 잘 가다... 2017-10-22 0 2160
415 꽃은 그 언제나 말이 필요 없다... 2017-10-22 0 1644
414 세상에 버려질 물건이란 있다?... 없다!... 2017-10-22 0 2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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