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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조 이성계
1370년 고려 공민왕이 동녕부를 공략할때 정벌군의 사령관이었던 이성계에게 도전하는 남자가 있었다. 바로 우라산성(亐羅山城)을 수비하던 동녕부 동지(同知) 이오로티무르(李吾魯帖木兒)였다. 약간의 교전이 있었지만, 곧 이오로티무르는 갑옷을 벗어던지고 절을하더니 휘하의 300여호를 이끌고 귀순했다. 우리 선조는 본디 고려 사람이니, 원컨대 신복(臣僕)이 되겠습니다 이성계가 신임하는 부하가 된 이오로티무르는 이원경으로 이름을 고치고 조선이 건국하자 재상급인 검교중추원부사에 올랐다. 이 이원경의 아들이 세종때 6진 지역에서의 활약으로 큰 신임을 얻었던 이인화였고, 이인화의 아들이 이시애였다. 아마 대대로 길주지역의 토호로 군림했을 이 가문은 함길도의 여러 토호세력 중에서도 가장 유력한 집안이라 할 수 있었다. 먹고 살기에 불편할 것이 없었을 함길도의 대토호가 왜 반역자가 되었는지 의아하게 생각할 수도 있지만, 실제 이무렵 함길도의 토호들은 하나같이 미래에 대한 위기의식으로 불안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고려말 이성계가 이끌던 무적의 부대는 바로 이 동북면 토호들의 사병조직을 기반으로한 군단이었다. 이들은 남쪽의 지리산 자락으로부터 북쪽의 요동 벌판까지 그야말로 사방의 적을 격파하며 이성계가 고려의 권신으로 성장하고 왕이되어 조선을 건국하는데 혁혁한 공을 세웠다. 하지만 이들의 역할은 거기까지였다. 인구 600만의 국가를 통치하고 유지하는데는 북도의 무식한 싸움꾼보다 남도의 똑똑한 백면서생이 더 필요했다. 중앙정계에서 이들은 점차 소외되기 시작했다. 새로운 국가의 체제와 제도가 정비되면서 그나마 고향에서만은 떵떵거릴 수 있던 이들의 삶에도 변화가 찾아왔다. 국가는 위험하고 후진적인 동북면의 질서를 인정 할 수가 없었다. 태종 11년(1411년) 동북면 토호들의 인적기반이었던 가별초(家別抄)가 혁파되었다. 이에 건국공신 이지란의 아들 이화영이 반발했다. 태종은 이화영을 불러 타일렀다. 태조의 오른팔이자 동북면의 대토호였던 이지란 동북면의 양민이 이미 공역(公役)도 하고, 또 사역(私役)도 하니 곤고(困苦)하기가 심하다. 비록 세전(世傳)이라고 하더라도 의리상 실로 미편하다.....(중략).....나라에서 항상 이를 혁거하고자 하였으나, 나는 경을 어렵게 여겼다. 그러나, 경은 반드시 왕실을 마음에 두니, 어찌 이것을 가지고 괘념하겠는가? 또 이제 중국에서 변(變)이 있으니, 마땅히 그 백성들을 관군에 속하게 하여야 한다 이화영의 경우 일정부분 사역을 인정해주는 선으로 타협을 해주었지만, 대세에는 변함이 없었다. 국가의 대사를 앞세운 가별초의 혁파에 동북면의 토호들이 큰 타격을 입게 된 것은 자명했다. 세조 5년(1458년)에 실시된 호패법 역시 이들을 옥죄는데 충분했다. 국민에 대한 통제력을 강화하고 각종 역을 부과하여 국가의 생산성을 높이려는 목적으로 시행된 호패법은 사실 이미 태종 13년(1413년)에 전국적으로 실시된 적이 있었다. 하지만 폐단이 심하여 3년만에 폐지되었고 조선은 건국 60년이 되도록 아직 전국의 호구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세조는 선대의 그 어떤 왕들보다 강력하게 호패법을 밀어붙였다. 당장 성과가 나지 않자 다시 호패 사목을 반포하여 비협조자에 대한 처벌 규정을 강화했다. 이미 세력이 많이 약화된 동북면의 토호들은 이로 인해 또다시 휘하의 인민들을 국가에 빼앗기게 되었다. 이와 함께 중앙에서 파견된 지방관의 횡포 역시 문제였다. 이 지역은 여진과의 충돌이 끊이지 않는 곳이라 지방관으로도 보통은 무관이 파견되었는데, 무인이 거친 것이야 어쩔 수 없지만 개중에 사리분별을 못하고 탐욕까지 겸비한 자들이 문제였다. 토벌군에 종군했던 유자광은 이시애의 난이 평정된 후 함길도로 파견되는 관리들의 실태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본도(함길도_필자註)의 경계가 야인(野人)과 연접하여 있는데, 현부(賢否)를 가리지 아니하고 모두 무사(武士)로써 수령을 삼으니, 백성들이 하루 아침에 이시애를 따라서 적도(賊徒)가 되었던 것도 심히 괴이하지 않습니다.....(중략).....근년에 수령이 모두 무사로서.....(중략).....한 번 뜻에 불쾌한 일이 있으면 문득 형륙(刑戮)을 더하여 그들을 보기를 흙이나 돌같이 하니, 백성들이 수령을 보는 것도 또한 원수와 같이 합니다 특히 당시 함길도 병마절도사로 재직중이던 강효문의 비행 또한 심각한 수준이었다. 다음은 이시애의 난이 한창일 때, 이시애의 정당함을 주장하는 온성의 주민들이 조정에 고발한 강효문의 비행내용이다. 강효문이 한 지방의 주장(主將)으로서 축성(築城)한다고 핑계하고 바로 농사철을 당하여 종성 행영(行營)에서 토목을 크게 일으켜, 여러 달 동안 유련(留連)하면서, 우후·평사·군관·반인(伴人)·여기(女妓)·복례(僕隷)·종자(從者)가 구름과 같아서 임금의 행차와 비슷하였으니, 그 참월(僭越)하기가 막심하였습니다. 경흥에서부터 5진에 이르기까지 모두 15일에 한 차례씩 공궤(供饋)하고, 한 차례씩 수급한 미곡이 총 80여 석이었고, 그 나머지 물건도 이와 같았으므로, 관부(官府)가 탕진되고 민가의 닭과 개 등이 이 때문에 하나같이 없어졌으며, 날마다 소 한 마리를 잡아서 찬(饌)으로 만들었고, 연음(宴飮)할 때에는 소 두 마리도 오히려 부족하다고 공급하는 사람을 함부로 형벌하였습니다
강효문이 여러 진의 절제사·판관을 행영에 초치하여 연음(宴飮)할 때 소주를 사용하였는데, 1백 60병에 이르렀고, 연회의 폐포(幣布)가 1백여 필이었습니다
군사를 모아서 18일치의 군량을 가지고, 옛 부거(富居)에서부터 바닷가를 따라 사냥하고 놀이를 하면서 방어하는 인마로 하여금 휴식할 수 없게 하였습니다 곳곳에서 불만섞인 목소리가 터져나오고 있었다. 조정에서 파견된 관찰사와 절도사는 이미 백성의 신망을 잃은지 오래고, 자신들을 옥죄는 강력한 정책을 추진하던 왕의 건강 역시 좋지 않다는 소문이 돌았다. 무적군단의 후예들은 때가 무르익었다고 판단했다. (3)으로 이어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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