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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검무적 Jun 22. 2021

그 나이 먹도록 자넨 뭘 했는가?

누가 세워둔 기준 따위에 휘청거리지 마란 마리야!

子曰: "吾十有五而志於學, 三十而立, 四十而不惑, 五十而知天命, 六十而耳順, 七十而從心所欲不踰矩."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나는 열다섯 살에 학문에 뜻을 두었고, 서른 살에 자립하였으며, 마흔 살에는 사리에 미혹되지 않았고 쉰 살에는 천명이 무엇인지를 알았으며, 예순 살이 되어서는 한번 들으면 그대로 이해가 되었고, 일흔 살에는 마음속으로 하고 싶은 대로 해도 법도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논어>의 '위정'편 4장에 나오는 그 유명한 공자의 일생, 성인의 기준이 되시겠다.

처음 <논어>를, 움직이는 이동도서관의 차 안에서 잡았던 10살 무렵, 뜻도 잘 모르면서 선생도 없이 그것을 암송하겠다고 시도했던 무렵부터, 아마도 나는 학문에 뜻을 두고 싶었던 것 같기는 하다.

지기 싫어했고, 시험에서 한 개만 틀려도 책상에 머리를 엎어놓고 눈물을 찔끔 흘리고, 전국 시험이라고 대표로 나갔다가 한 개 틀렸다고 칭찬하며 나서는 담임선생을 붙잡고 미안하다고 사과를 하였으니.

서른 살에?

자립했다. 그 자립이 무엇인지 사족을 달자면 한도 끝도 없겠으나 가정을 이루면 살 집을 마련하였고,

내가 무엇을 하며 살 것인지에 대해 명확하게 걷고 있었으니 대략 그 뜻에 부합하였다고 자위하며 살아갔다.

마흔 살부터가 문제였다.

사십춘기를 지나 보내고 난 지금 생각해보면, 사리에 미혹됨이 무엇인지 명확하게 이해하지 못했고,

그것을 이해한 연후에도 정녕 그러했는지에 대해 알 수 없었다.

그러면 지금 천명은 아느냐고?

알 리가 있나.

그래서 공자의 위 말씀에 대해 아래와 같은 글을 요즘 사람들이 화답이랍시고 적었는지도 모르겠다.

주자의 해석에 따르면,

50에 천명을 아는 것은 40대에 의혹됨이 없이 학문에 정진하여 아는 것이 지극히 정밀해져 의혹하지 않는 것은 굳이 말할 것도 없는 수준이 됨을 말하는 것이라 하였다.


그러니 내가 40에서부터 해석이 막힌 것이 50에 의문으로 이어짐은 이상한 것이 아니다.

'불혹'에 대해 주자가 주석을 달며 다음과 같이 해석하였다.


"사물의 당연한 것(도리)에 대하여 의혹하는 바가 없다면, 아는 것이 분명하여 지킴을 일삼을 필요가 없다."


나는 마흔이 되면서 의혹하는 바가 더더욱 많아졌고, 불합리에 대한 것에 더 많은 것을 알고 분노하게 되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이루어지는 불합리에 대해 바로잡고 고쳐야 할 것들이 발에 채여 생채기가 나고 발톱이 부러져 나갔고 그 원인에 대해 더 알고자 했다.

쓸데없는 배부른 헛짓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최소한 나에게 사물의 당연한 것, 이른바 도리를 알아가는 것에서는 '의문'이라는 것이 생겨났다.

이러하니, 내가 사십춘기에 거슬림이 걸린 이후, 50, 60, 70의 진도를 빼는 것은 당분간 무리였다.

그런데 이 글을 논하며 내가 강조하여 말하고자 하는 부분은 70이다.

 <주자 집주>를 보면, 이 장에서 가장 많은 해석이 달린 구절이 바로 이 70에 대한 부분이다. 결론에 해당하는 부분이고 공자가 왜 이런 엄청난 기준을 제시하고 있는지에 대한 부연설명이 필요하기 때문이기도 하겠으나 무엇보다 논란의 여지가 있는 부분이기 때문이다.

정자(程子)가 말한다.

"공자께서 덕에 나아간 순서가 이와 같다고 스스로 말씀하신 것은, 성인이 반드시 그러한 것이 아니요, 다만 배우는 자들을 위하여 법을 세워서 그들로 하여금 구덩이를 채운 뒤에 나아가고, 문장을 이룬 뒤에 달하게 하신 것을 뿐이다."


행여 누구나 다 그럴 수 있는 것이라고 착각하여 좌절할까 싶어, 호씨(胡氏)의 부연설명을 더해준다.


"성인의 가르침에는 방법이 많으나, 그 요점은 사람으로 하여금 그 본심을 잃지 않게 할 뿐이다. 이 본심을 얻고자 하는 자는 오직 성인이 제시하신 배움에 뜻을 두어 그 차례를 따라 나아가야 할 것이니, 한 가지 흠도 남아있지 않고 모든 리를 밝게 깨달은 뒤에 이르게 되면, 일상생활하는 사이에 본심이 밝아져서 뜻에 하고자 하는 바를 따라도 지극히 당연한 도리 아님이 없을 것이다."


아직 노환으로 죽은 친구들이 많은 것은 아니지만,

주위에서 슬슬 부모님 연배의 분들에 대한 부고를 넘어서 , 지인들의 부고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처음 중앙지법 판사실에 선배를 도우러 들어갔던 그날이 기억났다.

선배는 고등학교와 대학교 연이은, 말 그대로 직속 선배였다.

서울대 법대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판사가 되어 동기들이 늘 말하는 외길 수순을 그대로 밟았다.

내가 모종의 사건을 계기로,

그 길을 걷지 않겠다며 때려치우고

10여 년이 넘게 그쪽을 바라보지도 않으며

세월이 지나던 어느 날,

법복을 벗고 서초동에 삐까번쩍하게 개업한 그가 말했다.

"법대가 밥대니라. 그냥 나처럼 지냈으면 딱 좋잖아. 왜 그리 힘들게 살아?"


15년간 판사를 하며 부장판사로 옷을 벗었다고

인터넷에 자기 얼굴 캐리커쳐까지 그려 광고를 하며 10여 년이 넘게 부동산 전문 변호사를 자처하던 그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말 그대로 황망하였다.

귀가 순해지기도 전에, 그는 죽음의 사유도 제대로 알리지 못하고 '돌연사'라는 이름으로 서초동에서 증발하듯 사라졌다.

그게 1년 전 어느 봄날의 일이었다.


장례식장에 다니기 시작할 즈음에는, 내 주변의 누군가가 먼저 가서가 아닌, 그 부모님들이 상때문인 경우가 많다.

하지만 그것이 쌓여 세월이 흘러,

내 주변에 있던 누군가가 떠나는 경험을 하게 되면

마음이 참 이상해진다.


단순히 상실의 아픔이 아닌,

황망한 무언가가

속 안에서 꿈틀거리며

욕지거리를 내뿜을 듯한다.


나는 잘 살고 있나?

뭘 위해 살았나?

지금은 뭘 위해 이렇게 살고 있는 거지? 등등

순간, 모든 것이 부질없고 의미 없다고

다 놓아버리고 싶다고 생각할 때가 있다.

문득문득

이렇게 잠이 들어

다시 일어나지 못하면

편안할까 하는

무시무시한 생각도 아무렇지도 않게

들기도 한다.


내가 60이 되고 70이 되었을 때

마흔전에 그랬던 것처럼

공자가 제시한 기준에 맞게 살고 있다고

자부한 삶을 살았을지는 아직은 모른다.


성인의 가르침은 이전 장에서도 풀어 읽어주었지만,

늘 그 위를 향하게 하기 위한 교육방법의 일환인 것인지 절대적 기준이거나 목표이지 않다.

그렇게 생각하는 녀석이

덜 떨어진 것이다.


그 사람의 삶에 대한 평가는

그 사람만이 내릴 수 있는

온전히 그 만의 것이지,

후세의 역사가들이나

호사가들의 입에서 나올 것이 아니다.


당신이 행복한 날들을 그려나가고 있다면

그리고 그래서 행복하다면

그 하루가 중요한 것이지,

성인이 되지 못하였다고 하여

다른 이들에게 칭송받는 위인이 되지

못했다고 하여 당신의 삶이 평가절하되어야 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


같잖은 정신승리도 문제일 수 있겠으나,

당신이 자꾸 곁눈질을 하며

주변의 평가에 귀를 기울이는 순간

불혹이고, 이순이고, 지천명은

애저녁에 글러버리게 된다는 뜻이다.


흔들리지 마라.

당신의 기준은

당신이 세우고

당신이 만들어 나가라.


당신의 삶이지 않은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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