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소소하다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한공기 May 09. 2017

쇤베르크

클래미식회 ㅣ 이상은



쇤베르크(1874~1951)


쇤베르크는 어려운 현대음악의 대명사로 여겨지고 곡보다 이론이 더 알려진 작곡가이다. 인습을 버리고, 절대적 진리를 추구하려는 강한 의지와 직설적 표현방식 때문인데 당시 19세기 ‘빈’의 문화와 관련이 깊다.


당시 구세대는 합스부르크 왕국의 옛 영광을 잊지 못하고, 새로운 시대에 적응하지 못하던 상황이였다. 

( 전쟁을 했다하면 거의 졌고, 영토도 축소됨 )

→ 현실도피적 : 귀족적이고 경쾌한 왈츠, 따뜻하고 쾌적한 휴식공간 ‘카페’, 화려한 오페레타

 유럽에서 가장 보수적인 도시빈에서 역설적으로 진보적 예술가와 학자들은 서로 교류하며 창조활동을 하면서, 역사에 남을 업적들을 많이 만들어갔다. 

· 대표적으로 : 프로이트, 비트겐슈타인, 말레, 클림트

· 언어학자 ‘크라우스’, 건축가 ‘로스’의 영향을 받아 쇤베르크는 장식적인 것을 제거하고 음악의 본질로 환원할려고 했다. 

  당시 혼란과 공허, 막연한 불안감을 떨쳐버리기 위해 순간의 쾌락, 말초적 자극, 볼거리에 열광하던

청중에게 인간의 깊은 내면을 직설적으로 숨김없이 드러내는 쉰베르크 음악이 쉽게 받아들여지기 힘들었을 것이다. 현대인들도 마찬가지라서 쇤베르크 음악을 즐겨듣지 않는 것 같다.

 쇤베르크도 청중들에게 자신의 음악이 이해되기를 바랬다. ‘현악 4중주 2번’ 2악장에 당시 빈 사람이라면 누구나 아는 대중적인 선율을 인용하면서 사람들의 긍정적 반응을 예상했다. 하지만 변형된 채 다른 선율에 묻혀 간간히 들리는 선율에 사람들은 야유를 보냈다. 쇤베르크와 제자들의 작품 연주회 중간에 청중들이 항의해서 중단되고, 진정시키기 위해 경찰이 출동한 일이 있을 정도로 대중들에게 인정받지 못했다. 세상에서 외면받을수록 고독과 소외감이 더해갔고, 자신의 예술적 신념을 비타협적으로 굳건히 지켜나가려고 했다.


  표현주의는 인간의 내면을 표현 - 회화: 뭉크 '절규' / 입체파, 야수파 / 추상화 '칸딘스키'

쇤베르크 자신도 추상화가였고, 칸딘스키와 친분이 있었다.

'부서져 새로운 틀속에 담겨있다'라는 말처럼, 표현주의는 낭만주의 연장선상에 있다. 

1. 작가의 내면세계를 주관주의적 입장에서 표출

2. 독일, 오스트리아 중심으로 발달/계승

3. 후기 낭만주의의 꼬리를 물고 탄생 : 쇤베르크는 브람스에게서 주제 발전/변형시키는 법을,

      바그너에게서 불협화음, 반음계적 화성을 영향을 받았다.


쇤베르크는 1874년 빈에서 유대계 혈통으로 태어났다. 어릴 때 음악에 소질을 보이긴 했지만 가난한 가정환경때문에 계속 공부하지 못하고 16세때 은행에 취직했다. 틈틈히 연습하면서 실내교향악단에 첼리스트로 입단하게 된다. 정규 음악교육을 받지 않아, 전통적 조성음악을 탈피하는 경향이 강했던 것으로 개인적으로 추측한다.


25살 1899년, 정화된 밤 :현악 6중주곡으로 후기낭만주의의 전형(시에 의거해 쓰임/반음계적 조성중심 )

https://youtu.be/iEfd9s1p9yQ



구레의 노래 

- 후기 낭만주의의 극단

· 대형화 : 5명의 독창자, 세 개의 남성합창단, 최소 140명 이상의 대편성 관혁악단

· 표현의 격렬함

- 조성음악의 범주를 벗어나는 구절들

- 1913년 빈 초연에서 청중들이 오랜만에 박수를 치면서 긍정적 반응을 보였는데, 쇤베르크는 무대에 올라서 연주자들에게만 인사를 하고, 청중들을 무시하면서 내려갔음, ‘그 사람들은 그 동안 나를 알아주지도 않았던 사람들인데, 내가 왜 그들에게 감사해야하나?’라고 냉담하게 반응

- 당시 카바레에서 지휘자로 일하고 있었는데, 구레의 노래를 듣고 감명받은 슈트라우스의 도움으로 음악원에서 작곡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쇤베르크가 살아있을 때부터 뛰어난 교육자로 평가받고 있는데, 청중에게 외면받는 작곡가이다보니 생계를 위해 더 잘 가르치키 위해 노력했다는 평가도 있다.

https://youtu.be/DsDf7Raw1s0



현악 4중주 제1번 :말러가 악보를 처음 보았을 때 '자기는 30단이 넘는 복잡한 음악을 작곡한 적이 있는데, 4단뿐인데도 이해가 안 간다'고 말할 정도로 난해한 곡이였다. 그래도 말러는 쇤베르크를 후원하고 계속해서 친분을 이어갔다. 나중에 쇤베르크는 국제 말러협회의 초대회장이 되기도 하였다.

https://youtu.be/SmDlGYj0y1Y




실내교향곡 제1번- 온음음계, 4도 화성- 후기 낭만주의 + 고전주의적 특성 + 무조성적 특성을 가지며, 관객들은 마음의 안정을 가지지 못하고,  한 신문사에서는 ‘공포의 실내교향곡’이라고 평가했다. 

https://youtu.be/37JV7Pdj-ic



본격적인 무조음악이 시작된다. 자유 반음계주의 시작불협화음의 해방 : 협화음 3화음에 종속되거나 조성적 맥락속에서 기능하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자유로워져 독립된 개체로서 서로 연관된다.


기대 : 한 여인이 애인을 잃은 후 죽은 애인을 찾는 것을 묘사 전체적으로 계속된 변화를 통해, 주인공의 불완한 심리상태를 표현한 것이다.

https://youtu.be/P6PKIraXpIk




달에 흘린 피에로(1912) : 표현주의적 면모와 무조성과 청중의 호응을 얻을 수 있는 가볍고 풍자적 악극으로 쇤베르크의 작품에서 가장 유명한 작품이다.

https://youtu.be/KsIATAaR-X0


초기 무조음악에서는 성악이 많이 쓰였다. 자율성은 높아져도 조성이 없어지면서 작곡가들이 어떻게 전개할지 모르는 상황이였다. 막막함을 메우고, 작품 전체에 의미와 연속성을 부과하는 효과를 주었다. 무조음악의 한계를 느낌(막막함) → 음렬기법(12음 기법)을 고안 : 12개음 ( 하얀 건반 7음 + 검은 건반 5음 )이 똑같은 비율로 사용되고 어느 한 음이 강조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쇤베르크는 이건 기법일 뿐, 창작에서는 작곡가 마음대로 음악을 전개해나간다고 말하면서 자신조차 어기는 경우가 많았다. 조성/무조성 음렬기법 사용했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좋은 음악을 성취하기 위한 여러 가지 작곡방법 중 하나로 선택한 길이었고, 무모하고 험난하더라도 목적지를 향해서 간 것이라고 쇤베르크는 말한다. 후기로 갈수록 조성적 요소가 많아지는데, 조성을 재사용하는 것 역시 진화의 한 국면으로 평가받고 있다.


히틀러가 유대인을 홀대하기 시작(1920년대) → 1933년 학교에서 해임, 은행계좌 동결, 미국에서 교수로서 일하면서 남은 여생을 보냄



지난 수요일 모임에서 어떻게 쇤베르크가 무조성주의 음악을 하게 되었냐는 질문을 받았었는데요. 명확한답을 어제 우연히 알게 되었습니다. 바그너,드뷔시 등 선배작곡가들에 의해서 조성이 점차 약화되다가, 쇤베르크가 19세기말, 20세기초 사람으로서 세기말적 현상을 표현하기 위해 음렬기법을 만들게되었다는 것입니다.  


참고자료 :

세기말의 음악, 음악사의 전환점이 되다  ( 책 : 클래식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꼭 알아야 할 52가지 )

중간에 짤린 내용이 있어도 내용파악에는 큰 무리가 없습니다.


쇤베르크의 음악을 들으면 뭔가 마음대로 안 될때 배우가 피아노를 아무렇게나 쾅쾅 치는 드라마 장면이 떠오릅니다. 암울하고 혼란스러운 사회를 우직하게 자신의 작품에 담았을 뿐인데, 음악을 통해 안식을 얻고싶은 사람들에게 자연스럽게 외면받을 수 밖에 없었던거 같습니다. 


 그의 음악을 들으면 여전히 불편하지만 자신의 소신을 지키는 그를 비롯한 현대음악가들이 새삼 존경스러워지고 현실을 직시하려는 노력을 게을리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면서도 반복되는 선율, 예측가능한 음계사용과 전개방식이 주는 안정감이 중요하다는 생각이 새삼 드네여.



같이 들을 음악은 'Suite op 25, Präludium'입니다.

https://youtu.be/fy6t8yXPcSQ



매거진의 이전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