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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검무적 Sep 02. 2022

서두르지 말고 눈앞의 작은 이익을 탐하지 말라.

작은 이익도 이루지 못하면서 큰 일까지 망치는 자들에게.

子夏爲莒父宰, 問政, 子曰: “無欲速, 無見小利. 欲速, 則不達; 見小利, 則大事不成.”     
子夏가 莒父의 邑宰가 되어 정사를 묻자, 孔子께서 말씀하셨다. “속히 하려고 하지 말고 작은 이익을 보지 말아야 하니, 속히 하려고 하면 달성하지 못하고 작은 이익을 보면 큰일이 이루어지지 못한다.”     

이 장에서는 자하(子夏)가 다스림에 대해 묻고 스승이 답한다. 단순히 질문만을 기술하지 않고 굳이 자하가 실제로 노 나라의 한 지역에서 실제 정치를 하고 있을 당시라고 설명한 것은 막연한 다스림에 대한 형이상학적 질문이 아닌 자하(子夏)가 당시 처했던 상황에 대해 배우는 자들이 염두에 두고 비교해보라는 의미도 포함하고 있다.     


자하(子夏)가 어떤 사람이었는지에 대해서는 자세한 기록들이 남아 있지 않지만 <논어>에 등장하여 스승 공자와 문답을 하는 것만으로도 공자의 눈높이 교육을 통해 그가 어떤 성격이었고 어느 정도의 인물이었는지 추정하는 게 결코 부족함이 없다.     


앞서 공부했던 ‘안연(顏淵) 편’의 14장에서 자장(子張)이 질문한 내용과 비교하더라도 똑같은 다스림에 대한 질문이지만 얼마나 두 사람의 성격이 판이하게 다른지에 대해서 확인해볼 수 있는 기준이 되기도 한다. ‘팔일(八佾) 편’ 8장에서는 공자에게 새로운 시각을 제공하는 모습도 볼 수 있었고, ‘옹야(雍也) 편’ 12장에서는 그가 어느 정도의 그릇인지를 확인할 수 있는 단편도 보여주었다. ‘선진(先進) 편’ 15장에서도 그렇고, ‘안연(顏淵) 편’ 5장에서 사마우(司馬牛)에게 충고하는 모습이나 22장에서 번지(樊遲)에게 스승을 대신하여 설명해주는 출중한 모습 또한 확인할 수 있었다.     


실제로 자하(子夏)에 대한 기록이나 그에 대한 자료를 살펴본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스승의 답변을 하고 대화는 나눈 것만으로 그에 대해 이렇게 깊이 있게 유추할 수 있다는 것은 공자 특유의 눈높이 방식의 방편 설법이 얼마나 상대에 대해서 깊이 있는 이해를 바탕으로 하였는지를 다시금 확인할 수 있게 한다.     


그렇다면 먼저 이 장의 가르침에 대해 주자가 어떻게 설명하고 있는지를 살펴보기로 하자.      


莒父(거보)는 노나라 邑(읍) 이름이다. 일이 속히 이루어지기를 바라면 너무 급하여 순서가 없어서 도리어 달성하지 못하고, 작은 이익을 보면 이루는 것은 적고 잃는 것은 크게 된다.     


전술했던 바와 같이, 이 장에서 자하(子夏)가 실제 거보(莒父)라는 땅의 읍재(邑宰)를 할 당시라는 상황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언급을 한 것은, 당시의 상황에 대해서 충분히 고려하여 공자의 가르침이 향하는 방향을 명확하게 이해하라는 가이드라인에 해당한다.     

다시 말해, 문장의 시작에서 공자가 먼저 ‘서두르지 말고 작은 이익을 보지 말라’고 한 것은 막연한 형이상학적인 이론적인 가르침이 아닌 당시의 자하(子夏)가 고민하고 있었거나 실제로 처한 상황에 해당하는 비유에 맞닿아 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렇게 하지 말라고 먼저 일러준 다음, 그렇게 해서는 안 되는 이유와 근거로 ‘속히 하려고 하면 달성하지 못하고 작은 이익을 보면 큰일이 이루어지지 못한다.’는 부연설명을 덧붙인 것이다.     


그저 공자의 말씀이고 지극히 당연한 말씀을 하셨으니 그럴 것이라고 고개만 끄덕이며 받아들이는 것과 자신이 직접 처한 상황에 직접적인 도움이 되는 말로 받아들이는 것은 엄청나게 큰 차이가 있다. 몸으로 익히는 운동이나 무예의 경우에도 자신이 직접 노력하여 어느 정도 경지에 올랐는데 결국 마지막 단계에 막혀 오르지 못할 경우에 그것을 먼저 통과한 스승의 한 마디와 아직 그 단계에 오르지도 못했는데 더 위의 결론에 해당하는 조언이나 가르침을 듣는다 한들 그것이 그에게 피가 되고 살이 될 리 만무한 것과 같은 이치이다.     


<논어>나 여타 성현들의 인문고전을 읽으며 그것이 나에게 피가 되고 살이 되는 시점은, 내가 내 삶의 실제적인 경험을 통해 그 말들이 직접 피부와 와닿는 경험을 하고 나서 그 말이 내 영혼을 울리는 때이다. 그래서 한문 고전이라고는 제대로 공부해보지도 못한 이들이 마흔이 되고 노년이 되어 그 영혼을 울리는 몇 마디만으로 자신도 모르게 이끌려 고전을 공부해야 한다는 목마름을 심하게 느끼게 되는 것이다.     

앞서 설명했던 자장(子張)이 같은 질문을 했을 상황에 대해 언급하면서 정자(明道(명도))가 이 장에서 자하(子夏)의 경우와 비교하며 공자가 어떤 부분을 강조하여 제자를 일깨워주려고 하였는지에 대해 다음과 같이 그 내용을 정리한다.     


“子張(자장)이 정사를 묻자 공자께서 ‘마음에 두기를 게으름이 없음으로써 하고 행하기를 忠(충)으로써 해야 한다.〔居之無倦 行之以忠〕’ 하셨고, 子夏(자하)가 정사를 묻자 공자께서 ‘속히 하려고 하지 말고 작은 이익을 보지 말라.’고 하셨으니, 자장(子張)은 언제나 지나치게 높아 仁(인) 하지 못하였고, 자하(子夏)의 병통은 항상 淺近(천근)하고 작은 데 있었다. 그러므로 각각 그들 자신에게 절실한 일로 말씀해 주신 것이다.”     


이 주석과 기존의 <논어>에 언급된 두 사람에 대한 공자의 언급으로 추정컨대 자장(子張)과 자하(子夏)는 상당히 반대 성향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마침 공자의 제자들에 대해 성향과 그들의 캐릭터를 통해 배우는 별권으로 원고를 써둔 것이 있어, 앞서 언급했던 <논어>에 등장한 자하(子夏)의 언급들을 통해 그에 대해 조금 깊이 있게 살펴보기로 하자.     

자하(子夏)는 공자가 자유(子游)와 함께 문학(文學 : 시·서·예·악)에서 가장 뛰어난 재주와 능력을 지니고 있다고 칭찬받은 제자였다.


복상(卜商)은 자(字)가 자하(子夏)이다. 공자보다 나이가 마흔네 살 적었다. 자하(子夏)가 공자에게 물었다. 

“(『시경(詩經)』에) 방긋 웃는 입가의 아름다움이여, 맑고 검은 눈동자의 아름다움이여, 흰 바탕으로 아름다움을 이루었네,라고 한 것은 무슨 뜻입니까?” 

이에 공자가 말했다. 

“그림을 그릴 때 먼저 흰 바탕이 있은 후에 색을 칠해 아름답게 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한다.” 

자하가 다시 말했다. 

“그러면 예(禮)가 뒤에 따른다는 말입니까?” 

공자가 말했다. 

“나를 일깨워주는 제자가 바로 상(商)이다. 이제 비로소 너는 나와 더불어 시(詩)를 논할 수 있는 실력을 갖췄구나.”      
                                                                                  - <논어(論語)>, ‘팔일(八佾) 편’     


시(詩) 이외에도 자하(子夏)는 문자와 문장에 관한 정확한 해석으로 크게 명성을 떨쳤다. 그는 공자 밑에서 학문을 배운 후 자신의 고향인 위(衛) 나라로 돌아가서, 위(衛) 나라의 역사서에 잘못 기재된 글자를 찾아내어 일약 성인(聖人)으로 존경받는 명예를 누렸다.

  

(자하는) 일찍이 위나라에 돌아와, 위나라의 역사 기록을 읽었다.

그때 그는 ‘晋師伐秦 三豕渡河’라는 구절을 보고, “이것은 잘못된 기록이다. 삼시(三豕)는 틀림없이 기해(己亥)를 잘못 쓴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 후 위나라의 역사 기록을 공부하는 사람이 진(晋) 나라의 역사를 살펴보았는데, 자하(子夏)의 말이 맞았다. 이때부터 위(衛) 나라 사람들은 자하(子夏)를 성인(聖人)이라 부르면서 존경했다.   
 
                                                                    - <공자가어(孔子家語)>, ‘제자행(弟子行)」편’     


공자가 사망한 후, 자하(子夏)는 서하(西河 : 황하의 서쪽 지역)에 살면서 제자들을 가르쳤다. 자하(子夏)의 문하(門下)에서는 뛰어난 제자들이 많이 나왔다. 그 아들이 죽자 슬퍼하다가 눈이 멀었다.     


전자방(田子方)·단간목(段干木)·오기(吳起)·금활리(禽滑釐) 등은 자하(子夏)에게서 학문을 전수받아 왕자(王者)의 스승이 되었다.  

                                                                                 - <사기(史記)>, ‘유림열전(儒林列傳)’     

자하(子夏)는 위(魏) 나라 제후인 문후(文侯)의 스승이자 국정 자문 역할을 하기도 했다. 당시 수많은 제후(諸侯)들 중 문후(文侯)는 유일하게 학문을 숭상한 사람이었다. 이렇듯 자하(子夏)는 공자가 사망한 후에도 후학들을 가르치고 제후(諸侯)들을 깨우쳐 스승의 가르침을 널리 전파하는 역할을 했다.     


자하(子夏)는 아름다운 여인을 좋아하는 마음으로 어진 사람을 좋아해야 한다면서, 효(孝)와 충(忠)과 신(信)이 곧 학문(學文)의 근본이라고 여겼다.     


어진 사람을, 아름다운 여인을 좋아하는 마음으로 대접해야 한다. 또 부모를 모실 때는 온 힘을 다 쏟아 효도한다. 군주를 섬길 때는 온몸을 바쳐 충성을 다한다. 친구와 사귈 때는 믿음을 지켜 말한다. 이와 같이 할 수 있다면 비록 배우지 못한 사람이라고 해도, 나는 반드시 그를 학문한 사람이라고 부르겠다.     

                                                                                   - <논어(論語)>, ‘학이(學而) 편’     


자하(子夏)는 학문의 도(道)는 심오한 진리 속에만 있지 않고 일상생활의 작은 예절에도 있으므로, 모든 것을 정성을 들여 익히고 배워야 비로소 학문(學問)의 참뜻을 깨달을 수 있다고 여겼다.     

자유(子游)가 말했다.

“자하(子夏)의 제자들 중 나이가 어린 사람들은 물을 뿌리고 마당을 쓸며, 부르고 물으면 대답하고, 나아가고 물러나는 예절(禮節)에 대해서는 잘 안다. 그러나 그것은 보잘것없는 일들일뿐이다. 자하의 가르침에는 도(道)의 근본이 없다.”     

이 말을 듣고 자하(子夏)가 말했다.     

“자유(子游)의 말은 잘못되었다. 군자의 도(道)를 가르치는 데 어떤 것을 먼저 하고 어떤 것을 뒤로 미루어 소홀히 하겠는가? 비교하자면 초목은 종류에 따라 구분할 수 있듯이, 심오한 진리만 가르쳐 군자의 도(道)를 속일 수는 없다. 시작과 끝이 있는 사람은 오직 성인(聖人)뿐이다.”  

                                                                          - <논어(論語)>, ‘자장(子張) 편’     


사람마다 제각각 특성이 있고 능력에 차이가 있는데, 그것을 무시하고 무조건 심오하고 고상한 진리만을 가르친다고 해서 모두 군자나 성인이 되지는 않는다. 올바른 학문의 방법은 작은 것과 큰 것을 두루 아울러 꿰뚫고 있어야 한다. 그래서 자하(子夏)는 학문이란 "가까운 곳에서부터 생각하고 넓게 배우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널리 배우고, 뜻을 확고하게 하며, 모르는 것은 간절하게 묻고, 가까운 곳에서부터 생각하면 진리(仁 : 인)는 그곳에 있다.     

                                                                          - <논어(論語)>, ‘자장(子張) 편’     

공자는 자하에게 “너는 군자유(君子儒)가 되어야지 소인유(小人儒)가 되어서는 안 된다.”라고 했다. 공자가 세상을 떠나자 자하는 서하(西河)에 머무르며 가르침을 베풀면서 위(魏) 문후(文侯)의 스승이 되었다. 그 아들이 죽자 슬퍼하다가 눈이 멀었다.     


살피건대, 자하(子夏)는 부족하였지만 그 부족함이 얼마든지 채울 수 있는 역량과 여지가 있었기에 스승의 가르침을 늘 금과옥조처럼 여겨가며 자신을 발전시키고자 평생을 노력했다. 


지금 정치하는 자들을 포함하여 바로 당신들에게 금과옥조(金科玉條)로 삼을 가르침이 없기에 지금의 사회가 이 모양 이 꼴이라고 생각하는가? 무엇이 부족한지 아직도 모르겠는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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