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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으네제인장 Sep 22. 2023

루이 16세처럼 포도 먹기

 


검보랏빛 포도알을 하나 따서 입에 문 다음, 이로 살짝 깨물어 알맹이를 꺼낸다. 껍질 안에 남아있는 과즙을 한 번 더 쪽 하고 빨면 그 안에 남아있던 단물이 더해져 입맛에 포도향이 가득 찬다. 알갱이 안에 박힌 씨앗을 혀로 발라내는 일은 성가시지만 귀찮다는 이유로 삼키거나 깨물어 먹을 수 없다. 컴벨 포도는 껍질을 빨아먹고 씨앗을 발라내는 모든 과정을 거치겠다는 각오가 없이는 결코 먹지 않는다. 아주 좋아하는 편은 아니지만 맛있는 컴벨 포도가 있을 때는 한 자리에 잠자코 앉아 풍성한 포도송이가 앙상한 뼈만 남을 때까지 한 알을 똑 떼고, 알맹이를 먹고, 껍질을 빨고, 씨앗을 내뱉는 행위를 반복한다. 손끝이 끈적거리는 보랏빛으로 물들 때까지 먹다 보면 입안뿐만 아니라 온 얼굴에서 포도향이 풍긴다.




아빠는 캠벨 포도를 좋아해서 한 박스를 사두면 혼자서 순식간에 다 먹어치운다. 마른 체형이지만 먹는 양이 많아 포도든, 감이든 좋아하는 과일은 박스채 사야 성에 찬다고 한다. 우리 집 어린이도 어릴 때 포도를 좋아해서 껍질과 씨앗을 제거해서 주면 한 송이를 거뜬히 먹었다. 밥은 깨작거리는데 포도는 잘 먹어 알을 까주는 게 귀찮아도 종종 먹였는데 아이의 변덕스러운 식성이 늘 그렇듯 한 해가 지나고 나니 언제 그랬냐는 듯 거부해 버리기 시작했다.


포도에도 선택지라는 것이 생겼다. 어릴 땐 컴벨얼리 포도 아니면 거봉이 다였다. 어린이 었던 시절 그냥 포도는 쳐다도 안 보면서 거봉에는 조금 입을 댔던 터라 엄마가 가끔씩 사다 주곤 했다. 조금 큰 후로는 미국산 씨 없는 포도라는 게 팔기 시작해서 한동안 그걸 즐겨 먹었다. 지금 우리나라에서 가장 인기 있는 포도는 샤인머스켓일까, 아니면 캠벨 포도일까. 샤인머스켓은 처음 나왔을 때 지금의 써니돌체처럼 비싸서 먹기 힘들었는데 요즘은 가격이 많이 내려서 올해는 우리 집에도 자주 사두고 먹는다. 샤인머스켓을 처음 먹었을 때 느꼈던 상큼하고 향긋한 맛의 감동은 사라졌지만, 그래도 특유의 아삭 거림이 좋아 나도, 아이도 한결같이 잘 먹는다. 오히려 캠벨포도는 요 근래 가격이 많이 올라 내 돈 주고 사진 않아도 누가 준다고 하면 사양 않고 받아두는데, 샤인머스켓을 아무리 좋아한다고 해도 그것만 먹다 보면 캠벨 포도의 맛이 그리워질 때도 있어 가끔은 누가 안 주나, 하고 기대마저 하게 된다.


 요즘은 술을 마시지 않지만 마실 땐 와인도 맛있게 마셨다. 어릴 땐 엄마가 포도주를 담그곤 했는데 두 돌이 막 지났을 쯤일까, 집에 놀러 온 사촌오빠가 장난으로 포도주를 먹이는 바람에 큰일 날 뻔한 적이 있다고 한다. 아직 어린이라고도 불리지 못한 어린아이에게 술을 마시게 하다니 도무지 이해하기 어렵지만 생각해 보면 옛날에는 다른 집에서도 어른들이 장난으로 아이 입에 소주잔을 갖다 대거나 하는 일도 있었던 거 같다. 옛날에는 집에서 포도주를 담그는 것이, 그리고 몇 년 전에는 착즙기로 포도주스를 내려먹는 것이 유행이었다면 요즘은 와인이 포도주스만큼이나 대중화된 세상인 거 같다. 세월이 흐르면서 다양해진 건 포도뿐만이 아니라서 포도로 담근 술은 오히려 선택지가 더 넓어졌다.


사실 내게는 포도 하면 떠오르는 만화와 로망이 있다. 바로 <베르사유의 장미>와 거기서 나온 포도 먹는 법이다. 루이 16세가 소파인가 침대에 누워 포도를 먹는데 한 송이를 통째로 입에 넣었다 빼면 가지만 쏙 나오던 장면이 삼십 년이 지난 지금도 기억이 난다. 그때만 해도 포도는 껍질과 씨앗을 뱉어야 하는 과일이어서 만화 속 루이 16세가 포도를 먹는 방식에 이질감을 느꼈다. 그래도 왕인데 맛있지 않으면 굳이 저렇게 먹을 필요가 없을 거란 생각에 훗날 그 장면을 떠올리며 포도송이의 일부를 입에 넣고 왕창 뜯어먹는 걸 시도해 본 적이 있다. 상상만큼 맛이 있지도, 먹기 쉽지도 않아 결국 다 뱉어버렸지만 만화가 잘못되었다기보다는 루이 16세가 먹은 포도종과 내가 먹은 종이 달라 그런 거란 걸 알았다. 언젠가 델라웨어 포도 같이 알이 작은 포도로 다시 시도를 해보면 얼추 비슷한 느낌이 나지 않을까 싶지만 아직 해본 적은 없다. 시간이 한참 지나고 나이를 먹고도 여전히 루이 16세식 포도 먹기를 포기하지 못했다.


아직은 알이 작은 포도가 대세가 아니지만 언젠가 알이 작은 포도송이가 유행을 한다면 그때는 나도 푹신한 소파에 모로 누워 루이 16세처럼 포도송이를 한 입에 다 넣는 일을 해보고 싶다. 누군가는 만화 따라 바비큐를 통으로 뜯어먹고 싶어 하는 것처럼 내겐 루이 16세식 포도 먹기가 오랜 로망이다. 한 자리에 잠자코 앉아 먹는 컴벨 포도도, 저렴해진 김에 먹는 샤인머스켓도 좋지만 그래도 가장 궁금한 건 역시 만화 속 루이 16세가 먹던 포도라서 매년 새로 개발된 품종 속에서 작은 포도송이를 찾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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