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lture & Hitstory Traveling

Since 2008, Korea & World by younghwan

경주 교촌마을 최부자댁, 경주 대지주계층 대저택

경북 경주시 교동에 있는 고택인 경주 최부자댁이다. 1700년 대에 건립되었다고 전해지는 가옥으로 99칸 규모의 대저택이었다. 저택은 사랑채, 안채, 문간채, 곳간, 사당으로 구성되어 있다. 영남일대에서 손꼽히는 부호이지만 저택의 건물규모가 크거나 화려하게 꾸미지는 않고 있다. 조선시대에도 신라 고도 경주를 찾는 사람들이 많았던 것으로 보이며, 지위가 높은 사람 대부분은 이 집에서 묵었다고 한다. 전통주인 교동법주를 비롯하여 손님접대를 성실히 했다는 이야기들이 전해온다. 일제강점기 황태자시절에 서봉총 발굴에 참여했던 스웨덴의 구스타브 국왕도 이 저택에서 머물렀다고 한다. 강릉의 대저택인 선교장과 비슷하게 찾아오는 손님을 맞기 위해 저택 규모가 확장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경주 교촌마을 최부자댁 솟을대문>

솟을대문 앞에는 고택과 독립운동가 최준에 대한 설명이 적혀 있는 안내판이 양쪽에 세워져 있다.

<사랑채>

사랑채는 1970년대 화재로 불타버린 것을 다시 중건한 건물이다. 경주 지역의 특징을 보여주는 잘 다듬은 화강석으로 기단을 쌓고 그 위에 건물을 올렸다. 기단을 쌓은 석재나 주춧돌은 통일신라 절터에서 사용했던 것을 재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옆에 있는 경주 향교보다 낮게 보이기 위해 기단과 건물을 낮게 지었다고 한다.

<사랑채 누마루>

<뒷편에서 본 누마루>

사랑채는 앞면 5칸 규모로 왼쪽 2칸은 대청마루, 가운데 2칸은 온돌방, 오른쪽 1칸은 온돌방과 누마루로 구성되어 있다.

<사랑채 툇마루>

<절터 주춧돌을 재사용한 것으로 보이는 주춧돌>

경주 최부자로 잘 알려져 있는 이 집안은 바람직한 모습을 보였던 조선시대 부호로 잘 알려져 있다. 조선중기부터 터를 잡고 살아온 경주최씨 집안은 9대 진사, 12대 만석군을 배출하였다. 벼슬은 체면유지용으로 진사까지만 하고 정치에 끼어들지 말라는 유지가 있었고 실제를 대부분의 후손들이 이를 실천했다고 한다. 다만 마지막 부자라 할 수 있는 최준은 독립군에 군자금을 대고 백산상회를 설립하는 등 일제강점기에 독립운동에 참여했고, 해방 후에는 전 재산을 기부하여 현재의 영남대학교를 설립하는 등 적극적으로 사회에 참여했다.

<사랑채 뒷편에 있는 사당>

안채는 트인 ‘ㅁ’자형으로 보이나 실제로는 ‘ㄷ’자형 안채와 ‘-‘자형 중문채로 구성되어 있다. 중문채는 ‘-‘ 자 형으로 오른쪽에 작은 행랑방과 부엌이, 가운데 중문과 창고가 있다.

<안채 앞 ‘-자형 중문채>

<안채를 출입하는 중문>

<안채에서 보이는 중문채>

안채는 앞면 7칸 규모의 본채를 중심으로 양쪽에 4칸 규모의 날개채를 달아 내었다. 안채는 집안 식구들이 생활하던 공간으로 작은 방을 많이 두고 있다. 앞쪽에는 통로로 툇마루를 달아내어 놓고 있다. 안채 대청마루는 2칸 규모로 저택 규모에 비해 넓지 않은 편이다.

<안채와 안마당>

<본채>

<안채 대청마루>

<동쪽편 날개채>

<서쪽편 날개채>

<사당이 있는 뒷마당과 연결되는 서쪽 날개채 마루>

안채 앞 마당에는 앞면 2칸에 맞배지붕을 하고 있는 큰곳간이 있다. 대문채에도 큰 곳간이 있어 대대로 만석군 집안임을 잘 보여주고 있다.

<큰 곳간>

<대문채>

<마당 정원에 있는 주춧돌>

<석조>

<석탑 지붕돌로 보이는 석재>

<담장 너머로 모이는 별채와 큰 나무>

경주 교동 최씨 고택(慶州 校洞 崔氏 古宅), 경북 경주시 교동 69
이 가옥은 경주 최씨(慶州崔氏)의 종가로 1700년경에 건립되었다고 한다. 월성(月城)을 끼고 흐르는 남천 (南川) 옆 양지바른 곳에 자리 잡았고, 문간채·사랑채·안채·사당·고방으로 구성되어 있다. 원래는 99칸 이었다고 하는데 사랑채와 별당은 1970년에 불타고 주춧돌만 남았다. 안채는 ‘ᄆ’자 모양이고 대문채는 ‘-‘자 모양이다. 사당(祠堂)은 사랑채와 서당으로 이용된 별당 사이에 배치되어 공간적 깊이를 느끼게 한 특징이 있다. 조선 시대 양반집의 원형을 잘 보존하고 있어 가치가 크다. 최씨 집안이 경주시 내남면 이조리에서 이곳 교동으로 이주하여 정착한 것은 조선 중기 무렵이다. 여기에서 12대 동안 만석지기 재산을 지켰고, 학문에도 힘써 19대에 걸쳐 진사(進士)를 배출하였다고 한다. (안내문, 경주시청, 2011년)

독립유공자 최준(崔浚) 선생 생가
문파(汶坡) 최준(崔浚, 1884 ~ 1970) 선생은 이른바 9대 진사 12대 만석의 마지막 부자로 이곳 교촌에서 태어났다. 선생은 영남의 대지주(大地主) 로서 조선국권회복단(朝鮮國權回復團)과 대한광복회(大韓光復會)에 군자금을 제공하는 등 독립운동을 지원하였으며, 특히 대한광복회에서 재무를 맡아 총사령관 박상진(朴尙鎭) 의사와 더불어 항일투쟁을 전개하다 일본 헌병대에 체포되어 심한 옥고(獄苦)를 치렀다. 선생은 또 이곳 사랑채에서 백산(白山) 안희제(安熙濟, 1885~1943) 선생과 함께 백산상회(白山商會) 설립을 결의하고 대표에 취임하여 비밀리에 독립운동 을 자금을 지원하였으며,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주석 백범(白凡) 김구(金九) 선생 에게 거액의 군자금을 보내는 등 독립운동사에 빛나는 공적을 남겼다. 이 밖에 선생은 민족혼을 일깨우기 위해 문화사업에도 관심을 기울여, 1920년에 경주고적보존회를 설립하고 1932년 정인보선생 등과 「동경통지」 를 편찬하는 등, 신라문화의 유산을 지키고 널리 알리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해방 직후 선생은 나라를 이끌어 나갈 인재를 길러야 한다며 모든 재산을 기증하여 계림대학과 대구대학을 설립하니, 곧 오늘의 영남대학교 전신이다. 정부는 선생의 공적을 기려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이제 애국애족의 일념으로 일생을 항일운동에 헌신한 선생의 숭고한 정신과 실천적 삶을 여기 기록하고, 길이 후세의 귀감으로 삼고자 한다. (안내문, 경주시청, 2011년)

<출처>

  1. 안내문, 경주시청, 2011년
  2. 국가문호유산포털, 문화재청, 2022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