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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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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흔한 반전개그, 이건 아니잖아~

등록 2006-08-17 15:00 수정 2020-05-02 19:24

에 속터지게 넘치는 반전코드들… 개성 대신 트렌드 쫓기에 몰두… 어설픈 ‘여장남자’들은 이제 그만

▣ 신윤동욱 기자 syuk@hani.co.kr

“뒤집어라, 그리하면 웃길 것이다.”

태초에 개그의 신은 그렇게 말했을지 모른다. 상황을 뒤집고, 앞뒤를 어긋나게 하고, 언행을 불일치시키는 ‘반전’은 웃음을 만들어내는 고전적 기법이다. 시절은 바뀌어도 고전은 영원하다. 오늘도 텔레비전에서는 반전 개그가 끊임없이 재생된다. 최근에는 ‘언행일치’처럼 맥락 없는 반전까지 등장했다.

물론 반전은 재미있다. 개그맨이 잘 뒤집으면 시청자는 뒤집어진다. 하지만 반전이 관습화되면 반전의 묘미를 잃게 마련이다. 반전이 개그의 영원한 기법이되 유일한 기법은 아니지 않는가. 진한 웃음을 만들어내는 풍자도 있고, 깊이 있는 웃음을 자아내는 아이러니도 있다. 하지만 (조금 과장하면) 작금의 방송에는 반전에 반전만 거듭된다. 그래서 가끔 보면 재미있지만 자꾸 보면 질리기도 한다. 너무 흔한 반전 개그를 보면서, 가끔은 속 터져 외친다. “이건 아니잖아~ 이건 아니잖아~.”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는 한국방송 (이하 ), SBS (이하 ), 문화방송 를 뒤집어보았다.

날카로운 비판 없고 역할 뒤집기만

13개의 코너 중에 7개. (2006년 8월6일 방송분)에 반전 코드가 들어간 개그의 비율이다(반전 코드의 경계가 명확하지는 않으므로 ‘대략’이라고 해두자). 이날 도 반전에 반전을 거듭했다. 소심남이 상심한 이유가 너무나 하찮은 것으로 밝혀지는 ‘B.O.A’로 시작해 지하철 2호선의 외로운 벤처사업가 노마진의 촌철살인 반전 개그로 마무리됐다. ‘고교천왕’ ‘패션 7080’ ‘집으로’ 같은 코너에도 반전 기법이 사용됐다. (2006년 8월3일 방송분)에도 14개의 코너 중 8개가 반전과 직·간접적으로 연결됐다. 이날 도 외모에 대한 편견을 뒤집은 ‘퀸카 만들기 대작전’으로 시작해 새로운 반전 개그의 기법을 선보인 ‘언행일치’까지, 심심하면 반전에 반전을 거듭했다. (2006년 8월7일 방송분)에서도 반전 코드는 12개의 코너 중 4개에 등장했다. 가히 반전 개그의 천하통일이라고 할 만한 현상이다. 강명석 대중문화평론가는 “예전에는 방송사마다, 개그맨마다 개성이 강했다”면서 “최근에는 개그에도 트렌드가 생기면서 개그의 패턴이 비슷해졌다”고 분석했다.

아예 ‘반전 개그’라고 불리는 코너가 있다. 의 ‘언행일치’는 언행의 불일치 혹은 행동에 대한 말의 반전을 뼈대로 삼는다. 남편이 아내에게 “비키니 준비했어?”라고 물으면 아내는 비키니를 꺼내 보이고, 갑자기 남편이 아내에게 주먹을 ‘먹이다가’ 뜬금없이 “섹시하구만”이라고 말하는 방식이다. 행동의 산만함과 말의 단호함이 두서없이 뒤섞이는 부조리한 반전 개그다. 에서는 ‘고교천왕’이 반전 개그의 골격을 따른다. ‘고교천왕’은 폼은 일진처럼 잡지만 속은 소심한 고교생 캐릭터에서 반전의 묘미를 찾는다. 이렇게 겉과 속, 혹은 행동과 말의 불일치를 통해 반전을 도모하는 개그가 있다면, 아예 상황의 반전을 전제하고 들어가는 개그도 있다. 의 ‘퀸카 만들기 대작전’은 예쁜 언니들을 안 예쁘다고 설정하고, 의 ‘패션 7080’은 촌스러운 스타일을 쿨한 강남 패션이라고 전제하고 들어간다. 상황의 반전은 웃음을 만들어내지만 뼈 있는 농담으로 발전하지는 못한다. 강명석 평론가는 “현실을 뒤집은 개그들이 외모지상주의, 명품 소유욕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이 되지 못하고 단순한 역할 뒤집기에 그치고 있다”며 “개그 프로그램에서라도 뒤집어놓고 웃자는 식의 자조적 반전에 머물고 있다”고 말했다.

반전 개그의 트렌드도 드러난다. ‘괜찮아요’()에서는 ‘이건 아니잖아’()의 향기가 나고, ‘패션 7080’()은 ‘퀸카 만들기 대작전’()의 남성판으로 보이기도 한다. ‘퀸카 만들기 대작전’과 ‘패션 7080’은 외모지상주의를 비판하는 측면에서 ‘출산드라’와도 닿아 있다.

“저거 남성국극 같은데…”

이렇게 대놓고 반전을 뼈대로 하는 개그들뿐 아니라 디테일에서 반전을 도모하는 개그도 흔하다. “아버지께서 태어날 때부터 웃찾사를 좋아하라고 지어주신 이름” “김개콘” “이건 아니잖아~”. 의 ‘이건 아니잖아’처럼 순간순간 말의 반전을 웃음을 무기로 삼는 개그도 흔하다. 반전 개그가 많은 게 문제가 아니라 반전 개그의 깊이가 문제라는 지적도 있다. 이명석 대중문화평론가는 “과 는 흥겨운 음악이 곁들여진 콘서트형 개그 프로그램”이라며 “흥겨운 분위기를 살리기 위해 풍자적 본질보다는 유행어를 되풀이하고, 특이한 행동을 해서 웃음보를 자극한다”고 말했다. 이야기가 있었던 과거의 개그 프로그램에 견줘 아무래도 말초적인 웃음을 자극할 수밖에 없는 형식이라는 것이다. 또 반전의 형식도 단순한 ‘반대로 뒤집기’를 벗어나지 못하는 한계를 보인다.

개그 프로그램을 보다가 ‘남성국극 같은데’라는 얄궂은 생각도 든다. 여성국극이 여성이 남성 역할까지 하는 형식이었다면, 요즘 개그는 남성이 여성 역할까지 해서 마치 남성국극 같다는 것이다(물론 남성국극이란 장르는 없다). 그만큼 남성이 여성 복장을 입고 여성 역할을 하는 ‘여장남자’도 하나의 관습이 됐다. (2006년 8월3일 방송분)에서는 여장남자가 등장하는 코너가 14개 중 5개, (2006년 8월6일 방송분)에서는 13개의 코너 중 3개(봉숭아학당에는 “인생 뭐 있어” 하는 아주머니, 마술 묘기를 선보이는 샤론 2명이 등장한다)였다. (2006년 8월7일 방송분)도 예외는 아니어서 12개의 코너 중에 3개의 코너에 여장남자가 등장했다. 한 코너 건너 한 명은 아니어도 두 코너 건너 한 명은 등장한 셈이다. 2000년 에 ‘황마담’이 등장한 이래로 여장남자 역할은 꾸준히 존재했고, 은근히 확산됐다. 얼마 전까지 의 ‘봉숭아학당’에는 제니퍼, 스테파니, 에어로 홍까지 3명의 여장남자가 등장했으니, 최근에는 여자남자가 줄어든 셈이다.

도 꾸준히 여장남자 캐릭터를 ‘밀어’왔는데, 얼마 전까지 인기 코너였던 ‘퀴즈야 놀자’에서는 씨름선수 같은 체격의 문세윤이 여성 간호사 역할을 맡아서 인기를 얻었다. 산만한 덩치의 문세윤이 가느다란 목소리로 애교를 떨면서 “몰라요~”라고 말하면 시청자는 뒤집어졌다. 문세윤의 간호사는 생김새와 체격이 전혀 여자 같지 않은 남자가 여장남자 역할을 하는 고전적인 여장남자 캐릭터의 한반도 버전이었다. 그렇게 여장남자 캐릭터는 진화해왔다. 이명석 평론가는 “여장남자도 성별을 반전시킨 반전의 일종”이라고 지적했다.

여장남자, 여성성에 대한 강박을 버리다

이제는 여장남자가 너무나 익숙해져서, 가끔은 그 캐릭터가 여장남자 캐릭터라는 사실을 잊게 된다. 그저 무심히 여장남자 개그를 보다가 ‘참, 원래 남자였지’ 하는 것이다. 여장남자 캐릭터가 정말 여자 같아서가 아니라, 너무나 익숙한 관습이 돼서 새삼 ‘느끼기’ 쉽지 않은 것이다. 여장남자 캐릭터는 점점 세분화되고, 옷차림은 과격해지면서 진화하고 있다. 의 인기 코너인 ‘육아일기’는 여자 같은 여장남자, 남자 같은 여장남자로 여장남자 캐릭터를 ‘세분화’해서 웃음을 만들어낸다. 예쁜 (여장남자) 임산부가 “막 그르그든요~” 하면, 안 예쁜 (여장남자) 임산부는 “이 때끼야” 하면서 장단을 맞춘다. “때끼야”에 앞서 “우리는 깐죽 깐죽 깐죽이야~ 놀아줘~” 하면서 ‘깐죽이’가 등장한다. ‘깐죽이’는 클레오파트라 머리에 꽃무늬 쫄바지를 입고 등장하는데, 성별이 분화되기 전의 모호한 캐릭터를 보여준다(차림새에서는 여장남자 특유의 과장된 여성성(Glamorous)이 과격하게 표현돼 있다). 여성이라고 추정되지만 여성이라고 단정하기 어려운 캐릭터를 남성이 연기하는 형식인 것이다.

또 이제는 여장남자 캐릭터가 여성성에 대한 강박을 버렸다. 의 ‘언행일치’에 등장하는 엄마 캐릭터는 굳이 여성의 목소리를 내려고 애쓰지 않는다. 구태여 화장도 하지 않는다. 그저 여성옷만 입으면 여성이라고 치자, 이런 암묵적 합의가 여장남자 캐릭터에 익숙해진 시청자에게도 자연스레 전달되는 것이다. 강명석 평론가는 “예전에는 여장남자를 우스꽝스럽게만 그렸다면, 요즘에는 섹슈얼 코드와 연결된다”며 “남자도 예뻐질 수 있다, 여자들 사이에서 수다도 떨 수 있다, 이런 측면이 강조된다”고 말했다.

‘황 마담’을 즐기면서도 거북해하던, 여장남자에 대한 이중적인 태도가 그래도 누그러졌다. 황 마담 역할을 했던 황승환이 호소했듯이, 여장남자를 했던 개그맨들에게는 일종의 낙인이 찍혔다. 여장 개그는 즐기지만 여장 개그맨은 좋아하지 않는 태도가 여장 개그의 홍수 속에 누그러졌다. 잠시 다른 이야기를 하자면, 의 ‘사랑의 카운슬러’에 등장하는 강유미가 ‘더욱’ 웃기는 이유는 그가 여자 역할을 해도 남자 냄새를 풍기고, 남자 역할을 하면 여자 향기가 나기 때문이다. 단순히 중성적이라기보다는 성별을 묘하게 가지고 노는 매력이 강유미에게는 있다. 그의 수더분한 외모 외에도 중저음에 탁성이 섞인 목소리가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래서 ‘봉숭아학당’에서 강유미가 남성은 아니지만 남성스러운 목소리를 내는 강 기자 역할을 할 때, 평범한 개그에도 설득력이 생긴다. 강유미가 ‘고고 예술 속으로’ 등에서 선보였던 여자가 하는 남자 역할은 새로운 웃음을 선사했지만, 개그마다 소모되는 여장남자 역할은 더 이상 새롭지 않다. 여장남자들을 보면서 보라돌이처럼 말하고 싶어진다. “어설픈 여장남자는 이제 그만~ 이제 그만~.”

낙천 혹은 비관 “인생 뭐 있어?”

한편 꾸준하게 진화해온 ‘자족 개그’도 있다. ‘봉숭아학당’의 문을 여는 몸빼 입은 아줌마는 외친다. “인생 뭐 있어!”, 그리고 허리를 흔드는 관광버스춤. 아줌마를 연기하는 안일권은 “언젠가 보았던 아줌마 춤에서 힌트를 얻었다”고 말했다. 그리고 어느날 한국방송 희극인 야유회에서 원로 개그우먼이 되풀이하는 “인생 뭐 있어”를 귀담아들었다고 했다. 안일권은 자신의 유행어에 대해 “행복해서 웃는 것이 아니라 웃어서 행복해지자는 뜻”이라고 설명했다. 아줌마의 도저한 말씀에는 안 되는 일에 집착하지 말자는 일종의 낙천주의 혹은 노력해도 안 된다는 숨겨진 비관주의, 두 가지 코드가 동전의 앞뒤를 이루고 있다. 그러니까 희망이 사라졌지만 절망에 짓눌리지도 말자는 충고처럼 들린다. 21세기형 ‘안빈낙도’라고나 할까? “인생 뭐 있어”는 경비 아저씨의 “그까이꺼 대충~ 대충~”의 아줌마 버전처럼 들리기도 한다. 이렇게 자족형 유행어는 하나의 계보를 형성하고 있다. 최근 의 새로운 코너인 ‘59년 노하우’에서도 요리의 달인으로 알려졌지만 실제로 요리의 노하우는 별로 없는 할아버지가 등장해 “아따~ 대충 해!”라고 외치기 시작했다. 이명석 평론가는 “생활백수도 같은 맥락으로 볼 수 있다”며 “진지하고 열렬하게 인생을 살아가는 것에 대한 반기이자, 자신이 사회적 마이너리티라는 것에 대한 수긍”이라고 해석했다. 그렇게 개그는 세상을 반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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