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파세계도 및 통계

재령이씨 분파(分派) 세계도(世系圖) 해설

秉錫 2017. 11. 4. 21:11

 

 

  재령이씨는 비조 표암공(휘 謁平)께서 기원전에 경주의 표암(瓢巖)에 내려오신후 이씨로 사성받았으며 약 천년이 지나 소판의 벼슬을 지낸 휘 거명(居明)이 경주이씨의 중시조 격이 되고 소판공의 6대손인 휘 우칭(禹偁)께서 재령군(載寧君)에 봉군됨으로서 비로소 경주이씨에서 분관하였는데 그 시기는 고려 초중기로 알려져 있다.
  고려시대의 기록이 미비하여 분관시조로부터 정확히 몇대가 흘렀는지 알 수는 없으나 고려말경에 공민왕의 부마이신 상장군 휘 소봉(小鳳)부터 계대가 정확하게 기록되어 있어 상장군(上將軍)을 중시조라 부르기도 한다.  
상장군의 아드님은 두분인데 중랑장(中郞將)공 휘 일상(日祥)과 사재령(司宰令)공 휘 일선(日善)이다.

    중랑장공(中郞將公, 諱  日祥)은 묘소가 실전되고 기록이 미비하나, 좌우위보승 중랑장을 지냈으며 후손은 경북의 청도와 김포 및 상주에 세거하여 왔다. 
 청도에 이거한 파는 임진왜란에 큰 공을 세워 식성군(息城君)에 봉군되신 이운룡(李雲龍) 장군의 업적이 크기 때문에 기강-금호서원에 위패를 모시고 향사하고 있어 우리는 통칭 식성군파라 부른다.  

김포와 상주에 이거한 파는 김포에서는 휘 일상(日祥)공의 시호가 문헌이라는 설이 있어 문헌공파라 부른다.  그러나 기록을 살펴보면 휘 일상(日祥)의 아드님에 지보주사(경북 예천군수)를 역임한 단활재(短豁齋, 휘 惠)공의 기록이 더확실하고, 이분은 조선초기에 한시(漢詩)을 잘 지은 것으로 청구풍아(김종직편찬)와 춘정집(변계랑 저)에 전하며  고려가 망하자 진주의 태기태(현 진성 상촌리)로 은거하였는데 단활재공의 유사가 진양지에 실려 있으므로 필자는 단활재공파라 부르고 있다.
  좌우위보승 중랑장의 직위는 진주 강씨묘역에 있는 손녀 정경대부인의 기록이 유일하다.

휘 일선(日善)은 사재령을 역임하여사재령공이라 부르고, 고려가 망하자 고려왕조의 외손으로서 자녀 6남 1녀를 데리고 경남 밀양의 서남쪽 조음리에 은거하였다.  밀양의 사재령공 묘소가 현재 남한의 재령이씨 묘소중에서는 가장 윗분에 해당된다. 
 

장자는 휘 신(申)인데 고려말에 사헌부 지평을 역임하여 이성계 일파와 대적하다가 포은 정몽주선생이 살해되고 간관 김진양등과 함께 유배를 가셨는데 불행하게도 유배지에서 별세하였고, 밀양의 효자로 알려져 있으며 호를 계은이라 하므로 5대를 지나 후손이 끊어졌지만 계은공파(溪隱公派)라 부른다.

둘째는 휘 술(戌)인데 사정을 역임하여 후손이 주로 청도 금촌과 김해여래에 뿌리를 내린 파로 우리는 사정공파(司正公派)라 부른다.  사정공의 손자중 휘 계손은 고부군수를 역임하고 밀양무량원에서 청도금촌으로 입향하셨는데  군수공의 증손은 휘가 백신(白新)으로서 임진란의 금성전투에 공을 세웠으며 현손이신 휘 결(土+潔)은 학문이 일천하여 유림의 사표가 된 분인데 호가 지암이라 금촌의 종친들은 지암종중이라 부르기도 한다.

 양산의 원동 등지에 세거하였던 양산파는 수년전까지 영해 현령공파로 기록되었으나 최근에 사정공파 청도금촌의 큰집으로 뿌리가 확인되어 사정공파-양산파라 부른다. 
셋째는 휘 축(丑)으로 고려말 생원을 지냈기 때문에 생원공파라 부르고 후손은 밀양일원과 김해 진영에 살고 있다.

넷째는 휘 오(午)이며 밀양에서 함안의 모곡으로 은거하신 성균진사이며 스스로 호를 모은(茅隱)이라 불렀기 때문에 모은공파라 한다.    모은공파는 그 후손이 전체 재령이씨의 80%이상을 차지하고 그후대에 계속해서 분파되어 이해하기가 대단히 복잡하다.(뒤에 다시 설명) 

다섯째는 휘 유(酉)인데 밀양의 효자로 알려져 있으며 후손은 함안도항을 근거로 함안-의령 등에 뿌리를 두고 있는 처사공파이다.
여섯째는 휘 인(寅)인데 후손이 없으므로 기록이 미비하다. 
따님 한분이 계셨는데  진양하씨에게 시집갔으며 진주수곡의 하씨가 그 후손으로서 현재 수곡의 묘소는 도기념물로 제정되어 있다.

<모은공파>
 모은공(휘 午)은 함안의 모곡으로 은거한 후 손자가 넷인테, 첫째인 근재공(휘 孟賢)과 둘째인 율간공(휘 仲賢)은 문과에 급제하여 관직에 있었으며 넷째인 사의공(휘 季賢)은 모곡에서 부모님을 봉양하였다.
 

근재공파 : 근재공(휘 孟賢) 1460년에 문과에 장원급제하여 황해도관찰사 홍문관부제학을 역임하고

아들이 일곱인데

장자는 휘 상()으로 문과급제하여 사간원정언을 거쳐 교리까지 이르러 교리공파라 부르고 임진난전후에 면천에 이거하였기 때문에 면천파라 부른다. 영양답곡 면천 서산 해미 등지에 세거하고 있다.
제2자는 휘 위(瑋)로 사헌부감찰을 역임하였기 때문에 감찰공파라 부르고 인천 원주 남원에 살고 있다.

제 3자는 휘 래()인데 은진현감을 역임하였기 때문에 현감공파라 부르고 세거지는 남양주 덕소인데 양주파를 일명 은진공파라고도 한다
제 4자는 휘 속(王束)인데 손자가 문과에 올라 참의까지 역임했으나 후손이 없어 잘모른다.  그러나 필자가 몇년전에 충북 옥천에 묘소를 찾았다.
제 5자는 휘 종(瑽)이며 진주판관을 역임하여 판관공파라 부르고 묘소는 경기도 포천에 있지만, 후손은 주로 진주에 살고 있으므로 근재공파에서는 진주파라 부르기도 한다.

  판관공의 손자가 둘인데 초주공(휘 衎)과 목사공(휘 徹)이다.  초주공의 손자는 진주의 사봉에 터를 잡은 행와공(杏窩公, 휘 중영)과 지수면 청원리로 이거한 행정공(杏亭公, 휘 중광)이며 행정공은 부용당 성안의의 문인으로 병자호란을 맞아 찰방의 벼슬까지 했으나 삼전도의 굴욕에 항의하여 청원리에서 학문으로 일생을 마쳤으며 장자는 휘가 현근이며 호는 백촌이며 차자는 휘가 현재이며 진사로서 호가 죽촌이고 계자는 휘가 현주인데 통덕랑으로 호가 매촌이다.  따라서 진주에서는 행정공파의 지파로서 백촌공파 죽촌공파 매촌공파라고도 한다.

 목사공의 후손은 경기도 이천에 세거하고 있다. 

제 6자는 휘 애(璦)인데 작은아버지이신 율간공이 영해부사로 외직에 가실적에 책실로 따라가서 영덕의 창수면 나라골에 뿌리를 내렸다.  울진현령을 역임하셨기 때문에 영해파현령공파라 부르며 후대에 가장 많은 유학자를 배출하여 영남- 성리학계의 한 축을 이루기도 하였던 파이다.
  현령공의 손자인 운악공(휘 涵)은 문과에 급제하였고 그 아드님은 모두 학문을 게을리 하지 않았는데 장자는 휘가 시청이며 호는 청계이고 둘째는 휘가 시형이며 호는 우계이고 셋째는 휘가 시명이며 호가 석계이고 넷째는 휘가 시성이며 호군을 지냈다.  따라서 영해에서는 청계공파 우계공파 석계공파 호군공파로 세분하여 부르기도 하며 석계공의 아드님은 대학자가 배출되여 퇴계학파의 종장을 역임하여 재령이씨의 큰 업적을 남긴 파이다.  존재선생(휘 徽逸) 갈암선생(휘 玄逸) 등을 위시하여 정묵재(휘 尙逸) 평재(휘 隆逸) 정우재(휘 靖逸)등 모두 학업에 전념하신 선조이며 손자는 밀암(휘 栽) 고재(휘 槾)등이 영남의 유학계에 큰 영향을 미친 거유이다.

 운악공이 의령현감을 역임하였기 때문에 현령공파의 의령지파(통정공파)가 있으며 의령과 진주진성에 살고 있다.
 영해파에서는 위에 열거한 선조의 호를 따서 존재파 갈암파 밀암파 평재파 고재파 등으로 지파를 부른다.
제 7자는 휘 구(玖)이며 진사로서 원주에 후손이 살고 있으므로 원주파 또는 진사공파 라 한다.

 병조참지를 거처 부제학까지 역임하신 율간공은 아드님이 둘인데
장자인 휘 포(玸)는 김해 삼방동으로 이거하여 김해 사직공파라 부르고 사직공의 손자는 휘가 대형(大亨)인데 임진난에 김해성을 사수한 공로로 판결사에 증직되어 김해에서는 판결공파 라고도 한다.
 차자는 함안의 모곡을 위시하여 함안일원에 세거하고 있어 함안파라 부르고  휘가 무(珷)인데 호를 덕고(德皐)라 부르므로 덕고공파라 한다.
함안 덕고공파는 후손의 숫자가 많아 손자대에 더 분파되어 4손자중
장손이신 휘 沔은 장악원주부를 역임하였고 호를 미촌이라 하여 주부공파 또는 미촌공파이다.   함안 일원에 널리 살고 있으며 인구수가 상당히 많다.

둘째 손자는 휘가 익이며 호는 간옹(艮翁)이라 간옹공파라 한다.

셋째 손자는 휘가 정(瀞)이며 남명 조식의 문인으로 임진난에 창의하여 공을 세우고 창원대도호부사 청주목사까지 마치고 만년에 함안에서 진주 수곡의 원당으로 이거하여 남명의 덕천서원의 산장을 역임하였다. 호는 모촌이며 문집이 전하고 이파를 모촌공파라 부르며 주로 하동양구에 살고 있다.
넷째 손자는 휘가 숙(潚)이며 호는 갈촌이라 갈촌공파라 부르는데 임진난에 창의하였으며 장성현감 합천군수직을 역임하여 합천파라고도 한다.  후손의 숫자가 많으며 함안과 진주에 널리 세거하고 있다.

모은공의 넷째 손자인 휘 계현은 두 형이 관직에 나아갔으므로 부모님을 봉양하시다가 셋째형(후손은 알 수 없음)을 대신하여 옥살이를 하시다가 돌아가셨는데 사의(司議)의 벼슬을 제수받았기 때문에 사의공파라 부른다.

 사의공의 아드님은 넷인데 함안의 서쪽과 진주로 이거하여 세거해왔다.
장자는 휘 변(玣)으로 첨지의 벼슬에 있었기 때문에 첨지공파라 하고 창원-진해 등지로 이거하여 오늘에 이르며 창원파라고도 한다. 진주-밀양(서가정) 일대에도 살고 있다.
둘째아드님은 휘가 침(琛)이며 부호군 통정에 이르러 통정공파라 부르고 통정공의 손자는 휘가 예훈(禮勛)인데 생원시에 합격하고 호는 성재이기 때문에 성재공파 라고도 한다.  성재공의 장자는 진주의 진성면 일원에 세거하였으며, 차자는 휘가 강(堈)이며 호는 도산으로 진주의 대곡면 마진리 소도산아레 세거하였으므로 도산공파라 한다.  마진에서 남원으로 이거한 파를 자성당공파(自省堂公派)라 한다.
  또한 통정공의 셋째 아드님은 휘가 희성(喜誠)인데 임진난 전후에 함안의 지곡에 살았으므로 지곡파 또는 호가 도암(陶庵)이라 도암공파라 칭한다.

셋째 아드님은 휘가 종(琮)이며 군자감주부를 역임하여 주부공파라 부르고 처가인 진주의 운곡(현 하동군 옥종면)으로 이거하여 진주파(하동파)로도 불리웠으며,  현손인 휘 영국(榮國)은 진주의 수곡으로 입향하였는데 호에 따라 심운재공파라 부른다.  또 후손의 일부는 전남의 광양에 까지 세거하므로 광양파도 여기에 속한다.

넷째 아드님은 휘가 전(琠)이며, 산림에 뭍여 학문을 하면서 제자를 길맀기 때문에 처사로 알려져 있으므로 처사공파라 부른다. 함안의 고문헌에 이처사 사적이 전한다.   임진왜란의 전란으로 후손의 숫자가 적으며, 함안지곡의 도암공파와 가까운 집안이다.

 이상 열거한 파는 대체로 지리적으로 가깝게 살았기 때문에, 계속해서 파보를 만들어 왔으며, 앞으로 우리 재령이씨의 족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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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개파의 파보가 합쳐서 대동보가 되기를 기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