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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당고리(大唐鼓吏)

2008년 03월 18일

수(隋)나라 말년 양제(煬帝) 양광(楊光)은 포악하고 황음무도하며 사치를 즐겼다. 게다가 대형 토목공사와 전쟁을 잇달아 벌이자 민심이 크게 이반되었다. 대업(大業) 9년 월국공(越國公) 양현감(楊玄感)이 군사를 일으켜 반란을 일으킨 이후 천하호걸들이 봉기를 일으켜 “18로(路)가 반란을 일으키고 82로가 혼란에 휩싸였다.”

대업 13년인 서기 617년 당국공(唐國公) 이연(李淵 후의 당 고조)이 태원(太原)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당군(唐軍)은 기의(起義) 후 서쪽 가호보(賈胡堡)로 향하니 수나라 무아낭장(武牙郎將) 송노생(宋老生)이 2만 정병을 이끌고 곽읍(霍邑)에 주둔하며 당군에 맞섰다.

곽읍(霍邑)전투

“둥, 둥, 둥….” 무거운 북소리가 울려 퍼졌다. 송노생은 이미 몇 차례나 당군의 북소리를 들었는지 몰랐다. 북소리를 듣는 그의 마음속에 점점 번민이 생겼다. 당군은 멀리서 온 탓에 피로하긴 했지만 송노생은 부임한 지 얼마 되지 않은 관계로 아직 그 입지가 탄탄하지 못해 공격하고자 해도 손을 쓸 수 없었다. 게다가 생각지도 못한 큰 비를 만나 군대를 동원하기엔 적당하지 않았다. 송노생은 마음속으로 탄식하면서 “하늘이 정말로 나를 돕지 않는구나!”하고 생각했다.

심사가 우울해졌지만 잠시 후 또 다른 생각이 떠올랐다. “지금 반란군이 도처에서 봉기해 우리 대 수(隋)나라도 시련을 겪고 있다. 하지만 이런 때야말로 우리가 공명을 성취할 좋은 때이다. 내 손에 2만의 정예 병사들을 장악하고 있으니 하찮은 당군 오합지졸들이야 곽읍성 아래에서 평정할 수 있을 것이다.”

어제 또 첩보가 있었는데 돌궐(突厥)이 유무주(劉武周)와 결탁해 당군(唐軍)의 빈곳을 틈타 기습하기로 했다고 하니 당군은 앞뒤로 협공을 당할 것이다. 설사 이 말이 유언비어라 해도 당나라 군대의 군심(軍心)이 동요할 것이니 나는 단지 그들의 식량이 떨어질 때까지 기다리기만 하면 결전의 날이 올 것이다.

“흥”하면서, 여기까지 생각이 미친 송노생은 앞에 있는 탁자를 치면서 갑자기 모든 근심이 사라지는 것 같았다.

“장군께, 아룁니다….” 이때 갑자기, 급박한 발걸음 소리와 함께 전령이 장막 안으로 달려 들어와 무릎을 꿇고 송노생에게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장군님께 알립니다, 당군(唐軍)이 또 나타나 우리 진영 앞에서 욕을 해대고 있습니다.”

“또 정탐하러 왔군.” 막 울적한 마음에서 벗어났던 송노생은 순간적으로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장군들은 나를 따르라.”

당군의 기병교위(騎兵校尉) 모천(慕天)이 흥분을 참지 못하고 송노생과 결전을 치르려 했다. 대장군 이연(李淵)이 몸소 성(城) 동쪽에 나와 적을 유인했고 좌군(左軍) 대도독(大都督) 이건성(李建成 이연의 큰아들)과 우군(右軍) 대도독 이세민(李世民)이 각기 수십 기의 병사들을 이끌고 송노생의 출전이 두렵지 않다는 듯이 성을 포위하려 했다. 이세민의 뒤를 쫓아 달리는 말들이 한바탕 먼지를 일으키며 단번에 남문(南門)까지 이르렀다.

송노생은 성루에 올라 멀리 먼지가 나는 곳을 바라보았다. 동문(東門)에 수백의 기병이 말을 타고 전투를 준비하고 있었고 중간에 있는 대장이 채찍을 들어 직접 성루를 가리켰다. 마치 군대를 지휘하는 것 같았다. 당(唐)의 후군(後軍)이 또 서서히 다가오고 있었다. 도도하게 밀려오는 당군을 보자 성을 압박하기 위해 진영을 설치하고 성을 포위하려는 의도임이 분명했다. 송노생은 화가 나서 큰 소리를 질렀다. “오너라, 내 직접 나가 적들을 맞이하리라.”

송노생은 군대를 두 갈래로 나누어 동문과 남문으로 각각 출정했다. 송노생이 단기(單騎)필마로 직접 이연을 공격하려 하니 뒤에 있던 당나라 병사들이 벌떼처럼 밀려왔다. 이연이 건성에게 싸우다 뒤로 후퇴할 것을 명령하니 송노생은 당나라 군사들이 겁을 먹은 것으로 오판했다. 이에 성을 등에 지고 진을 쳤다.

송노생이 마침 당군과 더불어 결전을 치르려 준비할 때였다. 진영 뒤편에서 갑자기 아주 어지러운 소리가 들렸다. 한 무리 기병들이 남문에서 달려왔는데 그중 선두에 선 한 기병이 좌충우돌하면서 주위를 휩쓸고 다녔다. 그 뒤로 큰 깃발 하나가 선명하게 눈에 들어왔다. 깃발 위에는 “우군대도독 이(李)”라고 씌어 있었다. 바로 이세민의 정예 기병들이었다.

송노생은 속으로 낭패라고 여겼다. 보아하니 남문은 이미 전투에 패한 것 같고 이렇게 되면 앞뒤로 협공을 당하게 생겼으니 어떻게 당군을 대적하랴. 송노생은 이에 명령을 내려 군사를 뒤로 물리고 뒤에 있는 적을 먼저 공격하려 했다. 그러나 이때 앞에 있던 당군의 북소리가 크게 울렸다. 소리가 점점 커지면서 “송노생의 목이 이미 잘렸다.”라는 함성이 들려왔다.

당군이 승기를 잡고 반격에 나서니 수나라 병사들은 앞뒤로 협공을 당해 당황해서 어쩔 줄 몰랐다. 또 자신들의 대장이 죽었다는 소리를 들으니 순식간에 사기가 꺾여버렸다. 수나라 군사들은 혹 당나라 병사들과 일대일로 접전을 벌이거나 혹은 당군을 보고 도망치기 바빴다. 송노생은 이미 형세를 돌이킬 수 없음을 알았다. “나를 따라 동문(東門)으로 가자!”라고 크게 소리를 지르며 퇴각했다.

그러자 당나라 우군(右軍)도 더불어 싸우는 대신 말머리를 돌려 동문을 향했다. 당시 정황은 이러했다. 당군이 동문을 공격하자 이곳을 지키던 수나라 병사들이 전투에 패하면서 다급한 김에 성문을 걸어 잠그고 안에 들어가 나오지 않고 있었다. 그러니 송노생이 군대를 퇴각시켜 돌아가려 해도 이미 성문을 열 수 없는 상황이었다. 돌아가려 해도 안 되고 그렇다고 싸울 수도 없었다.

결국 성 아래에서 수와 당 군사들 사이에 한바탕 혼전이 벌어졌고 송노생을 따르던 병사들도 이리저리 흩어져 불과 얼마 남지 않았다. 송노생이 어쩔 수 없이 말에서 내려 고삐를 잡고 성으로 몰래 돌아가려던 찰라 당나라 장수 유홍기(劉弘基)가 갑자기 나타나 송노생을 단칼에 베어 버렸다.

결국 동문의 전투는 수나라 군대의 큰 패배로 끝났다. 또 주장(主將)인 송노생이 죽었다는 소문이 들리자 성안에 있던 병사들도 더 이상 전의를 상실했고 당군은 사기가 크게 올라 곽읍성을 점령했다.

고리(鼓吏)

“의로운 군사를 일으켜 포학을 토벌한다(興義師討暴虐)”

다음날 당군은 곽읍성 아래에 이와 같은 방을 붙이고 병사들을 모집했다. 곽읍 백성들이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이번에 군사 모집을 주관한 모천(慕天)은 이세민의 수하로 자연히 우군(右軍)에서 우수한 병사를 선발할 수 있는 이번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당시 군사를 선발하는 데는 3가지 관문이 있었다. 먼저 그 의용(儀容 겉모습)을 보아 신체에 다른 문제가 없어야 두 번째 관문에 도전할 수 있었다. 곽읍 백성들은 무예를 숭상하는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에 활을 쏘고 큰 돌을 들어 올려야 하는 두 번째 관문을 통과한 사람도 적지 않았다.

무예를 시험하는 제 2관문 시험장은 시험을 보기 위해 몰려든 사람들로 가득찼다. 갑자기 큰 갈채소리가 나더니 한 거구의 남자가 3석(石 1석은 120근에 해당한다.)에 달하는 큰 활을 당겼다. 활이 보름달처럼 둥글게 구부러지자 주위에 있던 사람들이 숨을 죽이고 바라보았다. 갑자기 폭발할 듯한 큰 소리가 들리더니 거한이 서서히 활줄을 풀었다. 그는 사방을 둘러보며 아주 자랑스러워했다. 시험관이 큰 소리로 우승(優勝)이라고 하는 소리가 들렸다. 모천은 미소를 지으면서 고개를 끄덕였고 마음속으로 아주 만족스러워했다.

다음에 시험에 나선 청년은 겉보기에 신체가 좀 왜소해보였다. 그는 일단 2석짜리 활을 잡았지만 한참을 당겨도 당길 수 없었다. 주변 사람들이 모두 비웃자 청년의 얼굴은 벌겋게 변했다. 하지만 그는 포기하려 하지 않았다. 다시 1석짜리 활을 잡고(당시 시험의 표준은 1석을 당기면 합격, 2석은 양호, 3석은 우승이라고 했다) 당기자 주위 사람들의 비웃음을 자아냈다. 그는 이번에 안간 힘을 써가며 얼굴이 붉어질 정도로 힘을 썼지만 겨우 반밖에 당기지 못했다.

시험을 주관하던 병사가 이를 보고는 “탈락, 다음!”이라고 말했다. 그러자 청년은 다급히 병사를 붙잡고 자신에게 한번만 더 기회를 달라고 통사정을 했다. 그러자 시험을 주관하던 병사는 “자네는 활을 당길 힘이 없으니 달리 할 줄 아는 것이 있는가. 내가 보기에는 취사병 밖에 할 수 없을 것 같은데.”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또 한바탕 웃었다.

“취사병이라고요? 취사병도 전투에 참가할 수 있나요?” 그 청년은 지푸라기 같은 희망이라도 붙잡으려는 듯 다급히 물었다. “취사병이 무슨 전투에 나가겠나, 불 때고 밥 짓는 일을 하면 그만이지. 적을 죽이는 그런 일은 취사병의 일이 아니야.” 그 병사가 우습다는 듯이 대답했다. 그러면서 “자네가 원한다면 내가 이 일을 주관 하시는 어른께 사정해서라도 자네를 취사병으로 만들어줌세.”

청년은 병사가 분명히 자신을 희롱하는 모습을 보고는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지만 그래도 이를 악물고 “좋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이 모습을 지켜보던 모천은 청년의 인내심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마치 자신의 옛날 모습을 보는 것 같았다. 그는 청년 옆으로 다가갔다. 시험을 주관하던 병사에게는 계속해서 다른 사람을 시험보게 했다. 그리고는 몸을 돌려 청년에게 물었다. “자네 이름이 어찌 되는가?”

청년은 모천이 병사와 나누는 대화를 듣고 그가 이번 시험의 책임자임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자신에게 이런 질문을 하자 잠시 당황해서 멍하고 있다가 겨우 대답을 했다. 모천이 이어서 물었다. “자네는 노나라의 대부 조귀(曹劌)가 전쟁을 논한 이야기를 아는가?”

그러자 청년은 『춘추 좌전』에 나오는 “한 번 북을 치면 병사들의 투지가 치솟고, 두 번 북을 치면 투지가 떨어지며, 세 번 북을 치면 투지가 완전히 소실된다”고 한 조귀의 일화를 정확히 대답했다. 모천은 이에 고개를 끄덕이며 마음속으로 흡족해했다. 이번에 대답할 때는 좀 전보다 자신감이 있었다.

모천이 “그럼 오늘 이것으로 자네가 3가지 관문을 돌파한 것으로 치겠네. 이렇게 하세. 자네는 이름을 기록하는 곳에 가서 등록하도록 하게. 내 우선 그대를 우리 당군의 고리(鼓吏)로 삼겠네.”

북을 논함(論鼓)

이 청년은 본래 몰락한 관리 집안의 자제로 성은 조(趙), 이름은 회의(懷懿), 자는 선덕(先德)이었다. 그가 군대에 투신하려던 이유는 공을 세워 이름을 날리기 위해서였다. 그는 남자라면 모름지기 전투에 참가해 공을 세워야 한다고 여겼는데, 평소에 이런 포부가 있었다.

이번에 비록 전투병으로 직접 전투에 참가하진 못하지만 북을 치는 고리(鼓吏)가 되어 전장(戰場)에 좀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고 여겼고 어쩌면 나중에 자신도 직접 전투에 참가할 기회를 얻을 수 있으리라 여겼다.

조회의가 이렇게 생각하긴 했지만 도대체 북을 치는 고리와 조귀(曹劌)의 전투이론이 무슨 관계가 있는지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아마 시험을 주관하시는 분이 생각나는 대로 질문한 것일 게야.” 조회의는 마음속으로 이렇게 추측했다.

그는 원래 “고리(鼓吏)란 북을 치는 것이 아닌가? 이게 무슨 어려움이 있겠는가?”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나중에 알고 보니 북에도 큰 것이 있고 작은 것이 있으며, 세워서 치는 것도 있고 눕혀서 치는 것도 있었다. 세워서 치는 큰 북은 3사람이 함께 에워싸야 하며 큰 북채를 들고 북을 치는데 소리가 백 리 밖까지 울린다. 반면 눕혀서 치는 북도 길이 8척에 북 면이 4척 가량 되며 양면은 가죽으로 덮었다. 한번 울리면 그 기세가 아주 웅장했다.

조회의는 이렇게 북을 치느라 허리가 시큰거리고 등이 아팠으며 적지 않은 고생을 겪어야 했다. 결국 그는 제대로 북을 칠 수 있게 되었고 힘도 기를 수 있었다. 그는 몇 달 동안 북을 치면서 전투를 응원했고 당군 역시 연전연승을 거두며 단번에 수도인 장안까지 진격했다.

어느 날 조회의는 모천(慕天)의 부름을 받고 우군도독부로 향했다.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도독부 안에 있는 편당(偏堂)으로 들어갔다. 가서 보니 모천이 한 청년장군과 함께 앉아 있었다. 황급히 예를 갖추려 하자 모천이 제지하면서 “오늘은 군영(軍營)이 아니니 그리 예의를 차릴 필요 없네. 오늘 자네를 이리로 부른 것은 최근에 자네를 고리의 도두(都頭)로 삼고자 하는데 평소 자네가 늘 전투에 직접 참가해 적을 죽이고 싶어 하기에 한번 물어보려는 것일세.”

조회의는 청년장군을 몰래 바라보면서 알 수 없는 위엄과 그러면서도 아주 친근한 느낌을 받았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땅에 엎드려 절을 올리고 싶었다. 청년장군은 그를 보면서 미소를 지었다. 조회의는 순간 마음이 편안해지면서 겨우 입을 열었다. “회의(懷懿)는 여전히 전투에 나가 적을 죽이고 싶습니다. 비록 소졸(小卒)이라 해도 좋습니다. 장군께선 저의 소원을 들어주십시오.”

“아!” 이번에는 청년장군이 말했다. “자네 이름이 조회의, 조선덕이라 했지, 음, 의덕(懿德)이라 좋은 이름일세. 사람이 덕이 없으면 설 수 없는 법이지.” 모천을 바라보는 청년장군의 눈에 웃음기가 보였다. 마치 조회의의 뜻을 미리 짐작하고 있었던 것 같았다. 장군은 이어서 “그럼 내 자네에게 하나 묻겠네, 왜 전투에 참가하려 하는가? 감추지 말고 단도직입적으로 솔직히 말해보게나.”

조회의는 잠시 생각해본 후 남아(男兒)라면 모름지기 종횡으로 전장을 누벼야 한다고 대답했다.

“아, 정말 좋은 생각일세. 전에 모(慕)장군에게 들으니 자네가 글을 익혔고 또 군사전략에 대해서도 잘 안다고 하더군. 그럼 오늘 내 자네에게 문제를 하나 내겠네.” 청년장군은 흥미 있다는 듯이 물었다. “무엇을 일러 장수의 오덕(五德)이라 하는가?”

조회의는 대답했다. “장수의 오덕(五德)이란 지(智), 신(信), 인(仁), 용(勇). 엄(嚴)입니다. 지혜가 있어야 상대를 알고 나를 알 수 있으며 그런 후에야 지모(智謀)가 나옵니다. 믿음이 있어야 상하가 한마음이 될 수 있고 그런 후에 전투에 임하면 불리하지 않습니다. 어진 마음을 품어야 백성들을 사랑할 수 있고 그런 후에야 병사들을 아끼고 위험을 알 수 있습니다. 용맹이 있어야 좁은 길에서 적과 마주쳐도 그 뜻을 꺾을 수 있습니다. 군령이 엄해야 명령이 행해지며 그런 후에야 병사들을 뜻대로 부릴 수 있습니다.”

“자네가 기왕 장수의 오덕을 안다면 그럼 북에도 오덕이 있음을 아는가?” 청년장군이 잇달아 물었다. 조회의는 “북에도 오덕이 있단 말인가?”하고 놀랐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무엇을 뜻하는지 알 수 없었다. 이에 장군에게 답을 하교해주십사 청했다.

청년장군은 미소를 지으면서 조회의에게 말했다. “그렇게 겸손할 필요 없네. 내가 자네보다 나이가 많은 것도 아닌데 무슨 하교를 한단 말인가. 그저 우리가 서로 교류한다고 생각하게.”

“예전에 황제(黃帝)가 탁록(涿鹿)에서 치우(蚩尤)와 전투를 치를 때 기(夔)를 죽여 그 가죽으로 북을 만들었는데 그 소리가 5백리까지 들렸다고 하니 이것이 바로 전고(戰鼓)의 시작일세.” 청년장군은 약간 생각에 잠긴 듯 하더니 이어서 말했다.

“그런데 이런 전고(戰鼓)는 바로 신(神)이 만든 것이니 구하고자 해서 구할 수 있는 것이 아닐세. 오늘날의 전고는 대소를 막론하고 그 작용은 같지만 그 효과는 사람에 따라 달라진다네.”

“사람에 따라 달라진다고요?” 조회의가 참지 못하고 질문했다.

청년장군은 “그렇다네. 군대의 위엄(軍威)는 북에서 성대해지는데 북을 치는 사람이 덕(德)이 있으면 북에 혼(魂)이 생기고 북에 혼이 있으면 군대의 위엄이 저절로 성대해지기 마련이라네. 그러므로 북을 우레처럼 울려 군대의 사기를 올리는 것을 일러 북의 지혜(鼓智)라 하고, 한번 울려 떨쳐 일어나고 두 번 울려 다그쳐 전진하며 세 번 울려 전투 대형을 갖추는 것을 일러 고신(鼓信)이라 하네. 북이 우(羽)음을 내면 대장부의 강건한 뜻이 덕(德)에 서니 이를 일러 고인(鼓仁)이라 하고, 한번 울리면 투지가 치솟는 것을 일러 고용(鼓勇)이라 하며, 북을 울려 전투할 때 멈추거나 휴식하지 않는 것을 일러 고엄(鼓嚴)이라 하네.”

청년장군은 여기까지 말한 후 조회의에게 몸을 돌리고는 그의 어깨를 치면서 말했다. “장수가 되는 것도 싶지 않지만, 고리(鼓吏)가 되는 것 역시 싶지 않네. 장수 혼자 공을 세울 수 있다면 고리(鼓吏) 무슨 필요가 있겠는가? 회의 자네의 마음은 내 이미 잘 알았으니 우선 이 고리(鼓吏)의 임무를 잘하도록 하게.”

조회의는 뜨거운 눈물이 솟구쳐 올라왔다. 어찌 생각이나 했으랴, 하찮은 고리가 군대의 사기를 올릴 수 있다는 것을! 회의는 장군의 명령을 받들어 “당군의 고리(鼓吏)가 되길 원하옵니다.”라고 대답했다.

진왕파진악(秦王破陣樂)

당 무덕(武德) 3년(서기 620년) 진왕(秦王) 이세민은 반란군 두목 유무주(劉武周)를 깨뜨리고 곤경에 처한 당나라를 구했다. 당시 이를 기뻐한 하동(河東)의 백성들이 길에서 춤을 추고 노래했고 군인들은 군중에 있던 옛날 악곡에 새로운 가사를 붙여 승리를 경축했다. 이리하여 마침내 진왕파진(秦王破陣 진왕 이세민이 적진을 깨뜨렸다는 의미)의 악곡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고 이후 악부(樂府)에 편입되었다.

그때 조회의는 이미 여러 차례 군공을 세워 효기위(驍騎尉)로 승진했고 예전의 청년장군은 바로 지금의 우군대도독이자 진왕(秦王)인 이세민이다. 조회의는 이때 비록 더 이상 고리는 아니었지만 고리에 대해 더욱 자부심을 갖게 되었다.

정관(貞觀) 원년(서기 627년) 당태종은 위징(魏徵) 등에게 명해 7수의 가사를 짓게 하고 여재(呂才)의 협률도곡(協律度曲)을 “진왕파진악(秦王破陣樂)”이라고 고쳐 부르게 했다.

정관 7년 태종이 직접 “파진무도(破陣舞圖 진을 깨뜨리는 무용도)”를 만들어 무용을 수정했다. 이 작품은 한편의 웅장한 무무(武舞)에 해당하며, 공연에 필요한 인원만도 무용수 120명, 합창단원 100명, 악단 100명이나 된다. 원래 예전에 유행하던 음악을 여재(呂才)의 수정을 거쳐 완성한 것이다. 춤 동작 하나하나는 모두 태종이 직접 구상한 것이다. 무용대열의 왼쪽은 원형, 오른쪽은 장방형을 이루며, 앞에는 전차(戰車)가 있고 뒤로는 보병들이 따른다. 무용은 3번 변(變)하는데 매 변(變)마다 4개의 진법(陣)이 나오기 때문에 총 12가지 진법이 가사에 따라 바뀐다. 이것을 일곱가지 덕을 지닌 무용이란 의미로 “칠덕지무(七德之舞)”라고도 한다.

원래 이 작품은 3품 이상의 관원들과 “외국에서 온 추장”들이 현무문(玄武門) 밖에서 연주했었다. 당시에 큰북을 울리면 백리 밖까지 북소리가 진동해 그 기세가 아주 대단했다고 한다. 나중에는 또 기병 2천명을 동원해 대열을 이뤄 입장하게 했는데 이 또한 더욱 장관이었다.

나중에 당나라의 유명한 시인 백거이(白居易)는 시를 통해 “칠덕(七德)을 노래하고 칠덕을 춤추니, 성인께서 복을 내리심이 끝이 없도다. 이 어찌 한낱 무력을 떨치고 성스런 문채를 과시하려 함이랴. 태종의 뜻은 왕업(王業)을 다지려는 것으로 왕업의 어려움을 자손들에게 보이시기 위함이라.”라고 노래했다.

정관 17년 2월 태종은 능연각(凌烟閣)을 설치하고 24명의 공신들을 그려두고 늘 옛일을 잊지 않았다. 태종이 칠덕의 춤을 만든 이유는 왕업을 다지고 창업의 어려움을 보여주기 위함이었다. 또 이렇게 한 후에야 뇌정(雷霆)의 위엄 뒤에는 북을 치는 고리(鼓吏)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대당고리(大唐鼓吏)

서기 2008년 1월 30일 신당인 전 세계 화인(華人) 신년만회가 뉴욕 라디오 시티 공연장에서 개최되어 “대당고리(大唐鼓吏)”가 울려 퍼졌다. 대당의 북소리가 바람처럼 천둥처럼 울려 퍼지니 마치 만 마리 말이 달리는 듯하고 보는 이들의 마음을 진작시켰다. 그야말로 중화 남아(男兒)의 양강(陽剛)한 기운을 유감없이 표현해 냈다. 춤과 노래가 일제히 펼쳐지며 대당천조(大唐天朝)의 성세천위(盛世天威)를 찬양한다.

이것을 시로 표현하면 다음과 같다.

나는 대당남아

높고 큰 만리 산하에

뇌정천위(雷霆天威)가 진동하며

나를 도와 마귀와 간사함 제거하노라

我爲大唐儿男,

巍巍萬里河山,

雷霆天威震蕩,

助我掃魔除奸。

출처: 정견망(正見網) 글:고도(古道)