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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나들이 2/높고 깊은 산에서

여로(藜蘆) 앞에서 돌아본 여로(旅路)

 

여로

Veratrum maackii var. japonicum (Baker) T.Schmizu

 

높은 산 반그늘에서 자라는 백합과의 여러해살이풀. 높이 40∼60cm.

7∼8월 개화. 자줏빛이 도는 갈색이며, 수꽃과 양성화가 있다.

뿌리줄기를 살충제로 사용하는 유독식물이다.

민간에서는 늑막염에 효과가 있다하여 늑막풀이라고도 한다.

한국, 일본, 중국 동북부에 분포한다.

 

* 흰색 꽃이 피는 것을 흰여로(Veratrum versicolor Nakai)라고 한다.

 

 

 

 

높은 산마루 그늘에서 잠시 쉬며 지나온 길을 돌아보면

오랜 세월 걸어온 여로(旅路)처럼 아득하게 보일 때가 있다.

그런 산등성이 그늘에서 가끔 ‘여로’라는 풀꽃을 만났었다.

그 여로(藜蘆)는 내가 걸어온 여로(旅路)는 아니었다.

명아주 ‘려(藜)’, 갈대 ‘로(蘆)’자를 쓰니 평범한 풀이름이다.

 

‘여로’ 하면 70년대의 인기드라마가 생각나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그 드라마가 방영되는 시간에는 서울 거리가 한산했다고 한다.

60년대는 T.V가 있는 집이 드물었던 라디오의 시대였다.

시골에서는 동네에 라디오가 한두 집 있을까 말까하던 시절이라

저녁을 먹고 나면 온 동네 사람들이 라디오가 있는 집에 모여서

‘섬마을 선생님’같은 연속극이나 뉴스를 들었다.

 

라디오조차 듣기 어려웠던 1950년대 이전의 사람들은

무엇으로 오늘날의 드라마 같은 이야기를 만났을까?

두메산골에서의 나의 어린 시절은 라디오 이전 시대와 잠깐 겹쳐 있었다.

그 때는 장날에 이수일과 심순애가 나오는 ‘장한몽’ 같은 소설책을 사와서

글을 읽을 줄 아는 사람이 글 모르는 이웃들에게 읽어주는 문화가 있었다.

 

나는 이런 신소설을 읽어주던 풍습보다 더 오래된,

이야기꾼의 시대를 체험할 수 있었던 행복한 유년이 있었다.

내 고향 마을 옆 동네에 ‘대바우’라는 노인 머슴이 살았다.

왜소한 노인을 왜 대바우라고 불렀을까하고 요즘 들어 생각해보니,

아마 ‘대단한 이바구꾼’이라는 뜻으로 붙인 별명이었지 싶다.

 

그 시절에는 혼인이나 초상이 나면 한 사나흘 잔치를 했는데,

십리 인근 마을에 잔치가 벌어지면 그 대바우가 꼭 나타나서

사랑방 한구석에 자리를 잡고서는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놓았다.

한마디로 말해서 대바우는 걸어다니는 T.V 였다.

 

나는 그 대바우 덕에 삼국지의 장엄한 드라마를 들었다.

그 이야기를 1962년에 숙모가 시집을 온 혼인잔치에서 사흘 동안 들었다.

대바우의 삼국지가 적벽대전의 절정에 이를 때 혼인잔치가 파했다.

이어지는 이야기를 들으려면 예고 없는 다음 잔치를 기다려야만 했다.

 

지금도 어느 산등성이 그늘에서 여로(藜蘆)를 만나면

그 이름 탓에 지나온 인생 여로(旅路)를 돌아보게 된다.

나의 여로는 짧지만 고맙게도 긴 여로이기도 하다.

 

 

2013. 2. 26. 꽃 이야기 17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