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왕비 22대 국왕 정조(이산)의 부인 - 두번째(후궁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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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10. 20. 22: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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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22대 국왕 정조(正祖) 이산(李祘) 1752년 10월28일 - 1800년 8월 18일

드라마 "비밀의 문"에서 정조역을 맡은 이제훈

정조의 왕비에 대해서는

: http://blog.naver.com/bara_kim_lv/220817426065

2. 의빈 성씨 (宜嬪 成氏) 1753년 - 1786년  

드라마 "옷소매 붉은 끝동"에서 의빈 성씨 역을 맡은 이세영

드라마 "이산"에서 의빈 성씨 역을 맡은 한지민

한지민씨는 개인적으로 가장 예쁘다고 생각하는 배우입니다. 눈에 그렁그렁 눈물 연기가 진짜 최고인듯

본관은 창녕(昌寧)으로, 본명은 덕임(德任)이다. 조선시대 후궁 중 드물게도 이름이 알려져 있다. 정조의 후궁들 중 유일한 승은 후궁으로 정조의 첫번째 자녀인 문효세자의 어머니이기도 하다. 

이후 찬성(贊成)에 추증되는 성윤우(成胤祐)와 정경부인으로 추증되는 임씨 사이에 태어난  딸로, 최소한 두 명의 오빠와 두 명의 언니가 있었다. 아버지 성윤우는 혜경궁 홍씨의 친정집인 홍봉한 집안의 집안을 관리하는 청지기였고 그 언니는 혜경궁 홍씨의 6촌인 홍낙성의 첩이였다고 한다. 그녀의 신분이 그다지 신분이 높지는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이런 인연으로 성씨 역시 혜경궁 홍씨의 처소의 궁녀로 있었던 것으로 추즉되는데 혜경궁 홍씨가 데려다 길렀다고 표현을 한다. 물론 왕실의 여성들은 자녀없이 홀로 늙어 가는 경우가 많아서 어린 친척이나 아이들을 데려다 재미삼아 기르는 경우가 있기는 했지만 혜경궁 홍씨는 성씨와 비슷한 나이대의 자녀가 3명이나 있었는데 왜그랬는지는 의문. 성씨는 10살때인, 1762년 입궁을 하게 되는데 이 시기는 사도세자가 죽임을 당해서 혜경궁 홍씨가 자녀들을 모두 데리고 친정집으로 잠시 갔던 시기이다. 아마도 이 시기에 정조는 성씨를 만났을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영조는 혜경궁 홍씨와 정조는 다행이도 예뻐하고 아꼈기 때문에 정조는 경희궁으로 혜경궁 홍씨는 다시 원래 살던 창덕궁으로 돌아 갈 수 있었고 어쩌면 이때 함께 입궁했을 수 있다. 혜경궁 홍씨가 거두고 친히 길렀다고 하니 정조를 비롯해 그 여동생들과 나이가 거의 비슷하여 친했던 것 같다. 의빈은 정조의 여동생들과 사이도 좋았던지 궁녀이던 시절 청연, 청선군주와 함께 소설 곽장양문록을 필사하기도 했다한다.

의빈 성씨가 사망한 이후 정조가 직접 지은 어제의빈묘지명에 따르면 세손시절 정조는 아마도 1766년 쯤으로 예상, 당시 10대 중반의 의빈을 좋아해서 동침을 요구했는데 당시 의빈은 세손빈(이후 효의왕후)가 아직 자녀가 없기 때문에 따를수 없다고 사양하고 죽음을 맹세했다고 한다. 당시 궁녀가 세손의 명의 거역하는 것은 벌을 받을 일이였지만 정조는 의빈의 뜻을 받아 들이고 물러 났다고 한다. 1776년 세손 정조는 할아버지가 사망하여 왕위에 오르게 된다. 하지만 아직 후계자가 없었고 자녀도 하나도 없었다. 더군다나 부인인 효의왕후와는 사이도 좋지 않았다고 한다. 신하들은 아직 젋은 효의왕후를 두고 후궁을 간택하라고 하고 1778년 정순왕후가 후사를 위해서 후궁을 간택하라는 명을 내린다. 이때 정순왕후의 말에 따르면 정조는 궁녀들에게 그다지 관심이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그 해 정조의 총신은 홍국영의 여동생 원빈 홍씨가 요란하게 입궁을 하게 되지만 입궁한지 채 1년도 지나지 않아 사망하고만다. 그 이후 1780년 또 다른 양반가의 출신인 후궁인 화빈 윤씨가 정식 간택을 통해서 후궁으로 입궁하게 된다. 하지만 화빈도 정조와의 사이에 자녀를 낳을 수는 없었다.

20대 후반이 된  1781년경 정조는 또 다시 의빈에게 승은을 내리려고 했는데 이때 또 의빈은 정조를 거절한다. 이유는 나오지 않았지만 자신을 딸과 같이 잘 돌봐준 혜경궁 때문일 수도 있고, 어린시절부터 함께 자라온 왕비 효의왕후 때문일 수도 있고 자신을 뒷받침 해줄 친정이 없는 상태에서 후궁이 되고 싶지 않았을 수도 있고, 그녀의 꿈이 일을 열심히 하는 궁녀일 수도 있고, 결정적으로 정조가 남자로 마음에 안들었을 수도....;; 있고 이유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정조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빈 성씨를 아꼈던지 왕의 승은을 거절한 궁녀에게 벌을 내리지 않고 다만 그녀의 시종을 크게 혼내고 벌을 내렸다고 한다. 하지만 본인의 시종이 벌 받은 건 본인이 벌 받은 것이나 마찬가지이니 아마도 궁내에 소문이 파다하게 났을 것이다. 당시 정조에게 자녀도 없었고 정조가 마음에 들어하는 궁녀도 없었으니 아마도 누군가 (혜경궁 홍씨나, 청연, 청선 군주나, 정순왕후나, 효의왕후)가 그녀에게 정조를 받아들이라고 설득 했을 수도 있다. 결국 그녀는 정조를 받아 들였고 그 결과가 그녀의 임신으로 나타났다. 당시 성씨는 정5품 상의(尙儀)의 신분이였다. 1782년 의빈의 해산할 달의 거의 다 되어 권초관을 임명한다. 그 이전까지 보통 왕비나, 세자빈 등이 출산할 때 권초관을 삼았는데 이때는 단지 정5품 상의의 후궁이 아이를 낳는다고 권초관을 임명 한것 이였다. 자신이 사랑하는 여성이 낳을 첫 자녀를 기다리는 정조의 기대가 느껴진다. 1782년 음력9월 정조의 첫 아이 문효세자를 낳은 성씨는 아들을 낳은 날 정3품 소용(昭容)으로 봉해진다. 실록 기록에 같은해 말에 소용으로 봉작되었다는 기록이 또 있는데 아무래도 출산 후 몸을 추스린 이후에 정식으로 후궁이 되어 축하를 받는 연회를 배풀은 것이 아닐까 짐작해 본다. 그리고 다음해인 1783년 2월 성씨는 정1품 빈(嬪)에 봉해져서 후궁으로는 최고의 위치에 올랐다. 이 때 좌의정과 우의정이 ‘철(哲), 태(泰), 유(裕), 흥(興), 수(綏)' 자를 빈호로 내밀었는데(철, 태, 흥등이 빈호에 쓰인적이 없는데 살짝 쌩뚱...) 정조가 저들의 작명 센스가 마음에 안들었던지 정조가 마땅할 의(宜)자를 빈호로 정했다. 마땅히 후궁이 되었어야 한다는 의미인가...;

다음해인 1784년 3월 의빈은 둘째로 딸을 낳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했고, 같은해 7월에는 3살의 어린 아들이 세자로 봉해졌다. 물론 후궁이 낳은 아들로 왕비인 효의왕후에게 아들은 입적되었다. 의빈은 1785년 말쯤 정조의 3번째 자녀를 임신했는데  의빈의 아들인 문효세자가 홍역을 이기지 못하고 5살의 나이로 사망하게 된다. 이 때문에 충격을 먹었던 것인지 몇달 후 아이를 낳을 달에 의빈 성씨가 갑자기 사망하게 된다. 이때 정조는 의빈의 병이 이상하더니 결국 이 지경이 이르렀다며, 본인이 마음을 위탁할 곳이 없다 라고 말하며, 슬픈 마음을 나타냈다. 의빈이 하도 갑작스럽게 죽어서 당시에 독살을 의심하기도 했다고 하지만 독살의 증거는 없다. 어린시절의 정조와 함께 오랜기간을 보고 지냈고, 정조의 후궁으로 지냈던 기간은 5년 남짓이지만 그 사이에 3번의 임신을 하여 정조의 아낌을 받았다는 것을 반증한다. 이재난고에는 의빈이 5번 임신을 했다고 한다.

1) 문효 세자(文孝世子) 이순李㬀) 1782년 - 1786년 

드라마 "이산"에서 문효세자 역을 맡은 차재돌

정조와 의빈 성씨 사이에 태어난 첫번째 아이이자 정조의 첫번째 아이이다. 신하들은 문효세자가 선대왕(영조)과 같은 달에 태어났다며 기뻐했다. 이 아이의 탄생을 매우 기다렸던지, 후궁인 의빈 성씨가 아이를 출산하기 전 보통 세자빈이나 왕비의 출산에 임명하는 권초관을 임명한다. 당시 의빈 성씨는 정식 후궁도 아니고 상의로 정5품에 불과했다. 정조의 첫 아이를 낳는 의빈을 위하여 세자의 할머니인 혜경궁 홍씨는 자신의 늙은 유모를 그 자리에 보냈다. 조선시대의 세자로 봉해졌던 왕자중에 유일하게 왕이 되지 못했다. (사후 왕으로 추숭되던, 실제 왕위에 오르던) 

정조는 20대 후반의 나이에 그동안 후계자를 보기 위해서 정식으로 간택 후궁을 뽑았으나 후계자를 얻지 못하다가 오랜기간 동안 후계자가 없던 정조의 첫번째 아이로 태어난 문효세자이니 모두가 매우 기뻐했을 것은 당연하다. 문효세자의 탄생으로 그 어머니인 의빈 역시 정식 후궁이 되었고, 정1품 빈이 된다. 문효세자의 어머니는 정조가 스스로 선택한 유일한 후궁이다. 어린 문효세자는 3살이 되는 1784년 세자에 봉해진다. 후궁의 아들로 정조의 정비인 효의왕후에게 입적되었지만 실제 양육은 생모인 의빈 성씨가 맡았다고 한다. 아마도 사도세자의 이상해 짐이 어릴때부터 생모와 떨어져 산것에서 이유를 찾았던 혜경궁 홍씨의 건의였을 수 있다.

1784년 3살 (만으로는 1살)때 세자에 봉해진다. 세자가 사망하고 4년 후 태어난 이복 남동생인 순조가 11살이 되어서야 세자에 책봉된 것에 비하면 매우 빠른 책봉이였다. 

세자로 봉해진 해 동복 여동생이 태어났지만 곧 사망했다.

5살이 되던해인 1786년 홍역을 앓게 되었는데 병세가 좋았다 나빴다 하다가 순하게 치뤘다며 기뻐했지만 다시 심해졌고 결국 회복하지 못하고 창덕궁의 별당에서 사망하였다. 세자의 병세에 약을 쓸때마다 약에도 조예가 깊었다는 정조가 직접 점검을 하고 약을 썼는데, 세자가 사망한 이후 의관에게 벌을 주자고 했지만 정조는 허락하지 않았다. 

세자가 사망할 당시, 어머니는 셋째를 임신한 중이였는데 셋째를 출산할 달이 되어서 갑작스럽게 병에 걸려 회복하지 못하고 사망하게 된다. 후계자와 사랑하는 후궁을 모두 잃은 정조의 상심이 매우 컸다. 문효세자가 사망하지 않았다면, 정조가 사망하던 1800년 당시 19살로 수렴청정이 필요하지 않은 나이였을 것이므로 정조 이후 겨우 10살의 나이 어린 순조가 등극하므로 생겼던 세도정치는 아마도 좀 미뤄졌거나 생기지 않았을 수 있다. 이렇게 생각하면 여러모로 아까운 경우이다. 

문효세자의 묘를 문희(文禧)로, 묘(墓)를 효창(孝昌)이라고 하였다. 위치는 현재의 용산구에 있는 효창공원에 있었는데, 일제 시대 고양시로 이장되었다. 정조는 아들인 문효세자와 그 어머니 의빈 성씨가 묻혀있는 효창원을 자주 찾았고, 효창동에는 왕이 거둥할 때 고개를 넘었다 라는 의미의 거둥고개가 지명으로 남아있다.

2) 옹주(翁主)  1784년 - 1784년 

의빈성씨와 정조 사이에 태어난 두번째 아이이자 장녀이다. 정조에게도 장녀이다. 의빈이 아들을 낳고 다음에 태어난 딸로 모두 마음 편하게 기뻐했을 딸이다. 1784년 5월 9일(윤 3월 20일) 옹주가 태어나는 날이 되자 해산당일 호산청이 설치가 되었다. 호산청은 후궁이 아이를 낳을 때 설치하는 관청으로 옹주의 오빠인 문효세자가 태어날 때도 설치가 되었었다. 옹주는  몇달 후인 음력 5월에 사망했다. 

3) 아기 

의빈 성씨와 정조사이의 세번째 아이, 1786년 음력 9월쯤 출생할 예정이였으나 문효세자의 죽음으로 상심했던 의빈 성씨가 병을 이기지 못하고 사망하자 어머니의 뱃속에서 함께 사망한다. 당시 정조는 아들인 문효세자가 사망한 다음이라 아들이 태어나기를 희망했었다. 

3. 수빈 박씨 (綏嬪 朴氏) 1770년 - 1822년

드라마 "이산"에서 수빈 박씨 역을 맡은 서윤아

실제 드라마에는 나오지는 않았다.

수빈 혹은 유빈 박씨라 불린다. 우리는 한자 綏를 편안할 "수"로 읽었는데 실제는 "유"빈이라고 한글로 적혀 있다고 하며 실제로는 유빈으로 불렸을 것이라한다.

본관은 반남(潘南)으로 좌찬성 박준원과 부인인 원주 원씨 사이에 태어난 4남 5녀 중 3녀이다. 아버지의 두번째 부인에게서 이복형제가 2명이 더있다. 박씨의 집안은 노론 명문가로, 영조의 서녀인 화평옹주(영빈 이씨의 큰딸로 영조의 비정상적인 편애를 받은 딸)의 남편인 박명원과 한 집안 이며, 열하일기를 쓴 박지원과도 먼친적관계이다. 어머니인 원씨 부인이 임신했을 당시, 꿈에 노인이 큰 구슬을 하나 바쳤는데, 광채가 방안에 가득 했고 이때 수빈이 태어났다고 한다. 또한 어린시절 두 명의 언니들과 함께 마당에 있을때 마당에 호랑이가 뛰어 들었는데 이때 두 언니들은 모두 놀라서 울고 엎드렸는데 박씨는 아무것도 안본것 처럼 방으로 걸어 들어갔다며, 비상하다고 했다...;(내 자식은 담대한 것인가 멍청한 것인가를 생각나게 하는 구절이 아닐 수 없다.)

정조는 동복 남자형제가 없는 상태에서 후손이 귀했는데,  유일하게 본인이 선택한 후궁인 의빈 성씨와 그녀가 낳은 후계자 문효 세자를 모두 1786년에 잃고 만다. 당시 정조의 나이가 35살로 후계자가 급한 상황이였다. 요즘의 35세와 조선시대의 35세는 매우 달랐고 성종과 문종같은 경우엔 38세에 사망을 했다. 정조는 왕비인 효의왕후와는 사이가 좋지 않았고 그녀 역시 임신을 하지 못했으며, 처음으로 간택했던 후궁인 홍국영의 여동생 원빈 홍씨는 임신조차 하지 못한 상태에서 사망했고, 두번째로 간택한 후궁인 화빈 윤씨 역시 자녀를 낳지 못했다. 이런 상황에서 급하게 또 다시 새로운 후궁을 정식으로 간택하게 된다. 당시 정조는 17세에서 20세 사이의 처녀를 단자를 받도로 했으나 인조시절 병자호란을 지나며 더더욱 혼인나이는 앞당겨져서 조혼이 횡횡했으니 17세가 넘는 처녀는 없었을것이고 신하들은 15세부터 들이도록 청한다. 정조는 너무 어린 후궁은 원치 않았는지 16세로 합의 본다. 하지만 3일 동안 단자를 받았는데 겨우 20명으로 너무 단자를 내는 사람이 적어서 문벌 귀족(사족 출신)은 한 살을 앞당긴 15세로 조정하여 다시 들이도록 한다. 당시 대상이 되었던 것은 양반가는 물론 중인인 의관과 역관의 집안까지도 대상이였다. 다음해인 1787년 1월에 재간택과 삼간택을 통하여 18살의 박씨가 간택 되었다.

당시 아버지는 종6품의 승의랑(承議郞) 사복시 주부(主簿)로 아마도 친정 집안이 그다지 풍족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정식으로 간택된 박씨는 빈호를 수빈(綏嬪)으로 받으며 입궁을 하게 되며 가순궁(嘉順宮)이라는 궁호를 받게 된다. 이전에 입궁한 정조의 첫번째 간택 후궁인 원빈 홍씨는 당시 처음부터 무품계의 빈으로 입궁했고 그 이후 원빈에 대한 대우가 너무 과했음이 문제가 되어 이후 입궁한 후궁들은 원빈보다는 과하지 않게 입궁하게 된다. 일단 무품 빈과 1품 빈의 차이는 조정의 문안과 약방의 문안을 받느냐 받지 않느냐의 차이인데 수빈은 출산 후 2회 문안을 받았다. 

다행스럽게도 수빈은 입궁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임신을 하여 1800년 6월에 아들을 낳게 된다. 이때 태몽을 궁녀가 꾸게 되었는데 용이 나르는 꿈이였다고 하니, 왕이 태어날 꿈이였다고 한다. 이 당시, 궁에선 산실청을 세우는데 산실청은 보통 왕비나, 세자빈등이 자녀를 낳을 때 세우는 것으로 이전 후궁인 의빈 성씨가 자녀를 낳을 때 호산청(후궁이 자녀를 낳을 때 세우는 임시 관청)과 비교가 되는 부분이다. 아무리 의빈 성씨가 정조가 사랑하는 후궁이였다 한들 신분과 품계 앞에서는 장사가 없다. 이때 태어난 아들은 이후 순조가 되며 세자가 이미 사망한 이후라 바로 원자의 칭호를 받게 된다. 또한 후궁의 아들로 왕비인 효의왕후의 아들로 입적을 시킨다. 3년후에는 두번째 아이인 숙선옹주를 낳는데 이 아이가 정조의 마지막 자녀이자 그녀의 마지막 자녀이다. 

수빈 박씨는 자신만 자녀를 낳았다고 해서 교만하지 않았고 왕비인 효의왕후와 시어머니 혜경궁 홍씨, 의붓 시할머니가 되는 정순왕후에게 모두 잘했고 예의가 바르면서도 성품이 온화 했다고 한다. 수빈은 어진 후궁이라는 뜻으로 현빈(賢嬪)으로 불리기도 했다. 특별히 정식 간택을 통해서 입궁했기 때문에 정조도 박씨를 두고 다른 후궁과 같이 봐서는 안되고 특별 대우 해야 한다고 했다고 한다. 

수빈 박씨는 자신의 아들이 왕이 된 후궁중에 유일하게 살아서 아들이 왕이 되는 것을 지켜본 후궁이다. 하지만 수빈이 31살이 된 1800년 남편 정조가 사망하고 겨우 11살의 아들 순조가 왕위에 오르게 된다. 수빈은 왕비가 아닌 후궁으로 권력앞으로 나설 수는 없었고, 의붓 시할머니인 정순왕후가 당시 수렴청정을 하게 된다. 친정아버지인 박준원은 그 때 의금부의 최고위직인 종1품 판의금부사가 된다. 아들이 왕위에 오를 후계자 였지만 그녀는 검소했다고 하며 정조가 사망하는 해 11살의 순조가 세자로 봉해지면서 후계자 자리가 더욱 확고해 졌는데 이때 아첨하고 뇌물을 준 사람들을 모두 의금부로 보냈다고 한다. 수빈은 비록 왕의 후궁이였지만 저하라는 경칭을 붙여서 불렸다. 사도세자의 본부인이자 정조의 어머니인 혜경궁 역시 왕비가 되지 못했지만 혜빈 저하등으로 불렸다. 시어머니인 혜경궁 홍씨는 자신의 저서인 한중록을 본 며느리인 효의왕후가 아닌 순조의 친 어머니인 박씨에게 남기고 사망했다. 수빈은 아들이 재위 중이던 1822년 말 창덕궁의 보경당(寶慶堂)에서 사망하였다. 시호는 현목(顯穆)으로 원호는 휘경으로 정했다. 이후 현목수빈으로 불린다. 수빈이 사망하자 보통 자기 목소리를 내지 않던 아들 순조는, 자신의 어머니를 정식 왕후의 장례로 치루고 싶어했고 후궁의 빈소는 왕실내에 둘 수 없는데, 어머니의 빈소를 궁내에 차리고자 했다. 당연히 신하들은 후궁이니 그렇게 할 수 없다고 했고 이에 순조는 반대했던 신하들을 모두 귀양을 보내는 것으로 강하게 응수를 한다. 이것에 대하여 부당함을 지적하는 신하 역시 귀양을 명할정도로 강하게 대처한다. 이것으로 미뤄보아 비록 왕을 낳았지만, 후궁이기 때문에 평생을 몸을 낮추고 지냈던 어머니에 대한 안타까운 마음이 있었던 것 같다. 특히나 정조의 정비인 효의왕후가 수빈보다 겨우 1년 먼저 사망했으니, 평생 후궁으로 기도 못펴고 살았을것으로 생각해 어머니에 대한 안스러운 마음이 있었을 것이다. 

수빈 박씨는 정조의 여인들 중에 가장 행복한 여자로 물론 남편에게 사랑을 받았는지는 알 수 없지만..자신의 자식이 왕이 되기도 했고, 그 자녀들이 먼저 사망하지도 않았고 손자인 후계자가 될 효명세자가 태어나는 것도 보고 효명세자가 먼저 사망하는 것을 보지도 않고 사망을 했으니 그 여인들 중에 가장 행복했던 여인이라고 할 수 있겠다. 정조와의 사이에는 순조와 딸 숙선옹주를 낳아 1남 1녀를 낳았고 이 자녀들만 정조의 자녀들 중 성인으로 성장했다. 수빈 박씨는 이후 대한제국 시절 남편 정조가 황제로 추존이 되면서 빈(嬪)에서 비(妃)로 추숭되었다.

1) 순조 이공(純祖 李玜) 1790년 - 1834년 

드라마 "이산"에서 순조 역을 맡은 이지민

정조와 정조의 3번째 정식 간택 후궁인 수빈 박씨 사이에 태어난 첫번째 아이이자 정조의 서차남이다. 순조가 태어났을 당시, 장남인 문효세자가 이미 사망한 이후라 태어난 그날로 왕비에게 입적이 되며 원자로 불리게 된다. 아버지의 나이 39살때 태어난 아들로 후손이 귀한 조선왕실의 기대였다. 창경궁 집복헌에서 태어났는데, 그곳은 할머니 혜경궁 홍씨가 머물던 곳의 건너 온돌방이였다. 혜경궁 홍씨와 생일 같다며 혜경궁 홍씨는 자신의 손자를 기특해 한다. 11살이 된 1800년 세자로서 정식으로 봉해진다. 아버지가 더 오래 살았다면 좋았겠지만 아버지는 1800년 사망하게 되고 11살의 나이로 왕위에 오르게 된다. 아버지인 정조는 사망하기 전 며느리 감으로 김조순의 딸이 거의 간택이 되었는데 최종적인 삼간택을 남겨놓고 정조가 갑자기 사망하게 된다. 11살의 순조는 왕위에 올랐고 의붓 증조할머니인 정순왕후가 수렴청정을 하게 된다. 그때부터 조선시대 말의 세도정치가 시작이 된다. 정순왕후의 집안인 경주 김씨와 왕비인 순원왕후의 집안인 안동 김씨는 이후, 며느리가 되는 풍양 조씨의 집안까지 쭉 조선을 들었다 놨다 하며 사욕을 채우는 세도정치의 시작이다. 왕비인 순원왕후와의 사이에 1남 4녀의 자녀를 낳았고, 아들인 효명세자가 헌종을 남기고 사망하는 바람에 손자인 헌종이 8살의 나이로 즉위하게 되었다. 이후 손자는 후손이 끊어져 사도세자의 서증손인 철종이 양자로 들어와 왕위에 오르게 된다. 

https://m.blog.naver.com/bara_kim_lv/220861311763

2) 숙선옹주(淑善翁主) 1793년 - 1836년  

정조와 후궁인 수빈 박씨 사이에 태어난 두번째 아이이자 정조의 서차녀이다. 하지만 옹주가 태어났을 당시 이복언니는 이미 어려서 사망한 다음이라 유일한 딸이였다. 옹주이지만 오빠인 순조와 마찬가지고 워낙 손이 귀해서 귀하게 대접을 받았다. 순조의 유일한 혈육으로 순조의 아낌을 받은 것은 당연하다.

1793년 3월 정조의 간택 후궁인 수빈 박씨의 두 번째 아이로 태어났는데, 이때 역시 오빠인 순조때와 마찬가지로 산실청을 설치한다. 보통 후궁은 산실청이 아닌 호산청을 설치하는 것과 비교해 우대했음을 알 수있다. 5살때 천연두를 앓게 되자, 아버지 정조와 오빠 순조가 이문원으로 피신을 가기도 한다.

하나뿐인 딸로 정조가 아꼈을 것이 분명하지만,  옹주가 8살이 되던해 아버지가 갑자기 사망하게 되면서 11살의 오빠가 왕위에 오르게 된다. 아버지가 사망할때까지는 봉작도 되지 않은 어린 나이였던 옹주는 1802년 10살이 되면서 봉작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게 된다. 당시 어린 순조를 대신해서 수렴청정을 하고있던 정순왕후는 숙선옹주는 왕의 동복누이이기도 하고, 그 어머니인 수빈 박씨 역시 일반적인 후궁이 아니라 정식으로 간택을 해서 정식 예를 다 차려서 입궁한 후궁이라 다른 후궁과는 다르니, 공주와 옹주 사이에 어떤 작위를 내려야 한다고 주장을 한다. 하지만 마땅한 작위가 없어 그냥 옹주로 봉작이 되지만 이런 논의가 있었을 정도로 옹주에 대한 대우는 남달랐다. 옹주는 10살이 되던해 숙선 옹주(淑善翁主)로 봉작이 되며 이후 옹주의 거처가 될 옹주방을 설치하기 시작한다. 옹주가 11살이 되자, 부마 간택을 위하여 9세 ~ 13살 사이에 남자아이들의 금혼령을 내리고 단자를 받아 다음해 초 초간택을 시작하였다. 재간택을 거쳐  홍인모(洪仁謨)의 아들 홍현주(洪顯周)가 간택되었다. 홍현주는 영명위(永明尉)로 봉해지며, 옹주는 1804년 13살의 나이로 결혼을 하게 되고 이때 3일동안 나갔다 온 것을 두고 오빠인 순조가 슬퍼했다고 하며, 옹주가 돌아올때는 멀리 떨어져 있던 것처럼 맞이하고 위로했을 정도로 돈독한 사이였다. 옹주는 3년뒤에나 궁밖으로 나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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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인 홍현주의 할아버지는 홍낙성으로 옹주의 할머니가 되는 혜경궁 홍씨의 6촌 오빠가 된다. 조선시대에는 6촌은 매우 가까운 친척이다. 또한 할아버지 홍낙성의 첩은 정조의 후궁인 의빈 성씨의 친언니이기도 하다. 홍낙성은 세손시절 정조에게 어려움이 있을때 마다 정조의 편을 들었고 이런 인연으로 아마도 옹주의 남편감으로 거의 내정되었을 것이다.

옹주의 혼인에 오빠인 순조는 많은 재물을 내리면서, 자신에게 하나밖에 없는 여동생이고, 선왕이 매우 사랑하던 딸 이므로, 이렇게 하는 것이니 나중에 전례로 삼지 말라고 하며...동생에게 물품을 풍족하게 내린다. 조선시대는 보통 재물을 풍족하게 쓰지 못하도록 알뜰함과 검소함을 많이 강조했는데 순조는 보통 자신의 가족들에 대해서는 의견을 많이 피력하는 편이다. 영조때 부터 옹주의 방에 방문하는 일이 많았다고 하면서 자신에게는 누이동생이 단 하나 밖에 없으니 동생의 집에 방문하겠다고 빼도 박도 못하게하며 옹주의 집에 종종 행차한다. 또한 오빠인 순조는 옹주가 말하는 것은 반드시 따라주고 요구사항도 반드시 들어주었다고 한다. 궁밖으로 나간 왕녀는 특별한 일이 없으면 궁에 들어 올 수 가 없었는데, 숙선옹주가 궁에 들어온다고 하면 오빠인 순조는 날짜를 꼽아가며 기다렸고 기쁜표정이 얼굴에 다 들어났을 정도였다고 한다.

옹주는 영명위 와의 사이에서 1명의 아들을 낳았고, 옹주는 오빠가 죽고 2년후 사망하게 된다. 남편인 홍현주는 순조 이후로 5명의 왕을 섬기며 장수한다.

외아들은 홍우철(洪祐喆, 1813-1853)은 이혁로(李赫魯)의 장녀 정부인 전주 이씨(貞夫人 全州 李氏, 1815-1868)와 결혼 했다. 이혁로는 양녕대군의 아들 순성군의 후손이다.

출처 : 위키피디아

조선왕조실록

한중록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http://encykorea.aks.ac.kr/)

한권으로읽는조선왕조실록(저자:박영규)

드라마 "이산"

드라마 "옷소매 붉은 끝동"

출처 : 한국고전종합DB

http://blog.naver.com/pondfire/220482051230 (綏의 발음이 '유'인가 '수'인가? |작성자 법고창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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