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재기 와중에 음식 버리는 미국 농부들 | 인터비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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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4. 24. 1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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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12일 목요일이었다. 내가 사는 이 곳 워싱턴 주지사가 나와서 코로나바이러스로 인해 다음주부터는 모든 학교가 휴교에 들어간다고 발표했다. 1주일 정도 후에는 웬만하면 집에서 나오지 말라는 ‘자택 대기 명령’까지 떨어졌다. 애들은 학교를 안가고 집에서 나오지도 말라고 하니 먹을 거리를 좀 사야 할 것 같아서 마트에 갔다가 깜짝 놀랐다. 전쟁터를 방불케 하는 사재기가 벌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마른 파스타 국수나 통조림이 없는 건 이해가 됐다. 우유와 계란도 어느 정도는 납득이 갔다. 하지만 양파와 각종 냉장육까지 싹쓸이 해간 걸 보고 나니 사람들이 느끼는 공포의 수준이 그려지기 시작했다. 아니면 이 기회에 고기나 실컷 먹자는 심리가 작용한 건지도 모르겠다 싶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이해가 되지 않은 사재기는 화장실 휴지였다. (중국의 화장실 휴지 공장이 문을 닫았다는 가짜 뉴스 때문이었다는 사실은 나중에 알았다.)

어쨌건 그렇게 남아있는 식료품을 포함 겨우 살 수 있는 몇 가지를 골라 가지고 집으로 왔다. 물론 텅 빈 진열장을 보고는 약간의 공포심과 경쟁심(?)이 생겼는지 조금 많은 양을 사가지고 오기는 했다. 그리고 그 이후로는 집 밖에 안 나가고 매일 삼시세끼를 집에서 해결하고 있다.

미국 전역에서 농부들이 어마어마한 양의 음식물을 마구 버리고 있다는 소식에 놀란 건 그 때문이었다. 미국 최대의 낙농협동조합인 데어리 파머스 오브 아메리카(Dairy Farmers of America)는 매일 370만 갤런(약 1400만 리터)의 우유를 쏟아 버리고 있다. 한 대형 양계장은 매주 75만 개의 계란을 깨서 버린다고 했다. 닭이 부화를 해도 당장 팔 곳이 없기 때문이다.

왜 팔 곳이 없는 걸까. 수많은 미국인들이 아무 데도 안가고 집에 들어앉아 마트에서 사온 음식을 해먹고 있는데 말이다. 답은 호텔과 레스토랑, 학교에 있다. 아무리 많은 개인들이 집에서 끼니를 해결한다 하더라도 호텔과 레스토랑이 문을 다고 학교 급식이 없으면 엄청나게 많은 양의 음식이 갈 곳을 잃기 때문이다.

코로나바이러스 이전에 클리블랜드에 있는 데어리맨스(Dairymens) 우유 가공 공장은 매일 1만3500갤런(약 51만 리터)을 스타벅스에 납품해왔다. 하지만 요즘엔 납품량이 3분의 1 수준으로 줄었다. 코로나바이러스 사태 이후 미국 전역에서 스타벅스는 드라이브 스루로만 이용이 가능하다.

미국 낙농업계는 4월 초 현재 미국 전체 우유 생산량의 약 5%가 버려지고 있는 것으로 추산하고 있다. 하지만 지금과 같은 봉쇄령이 길어지면 버려지는 양은 2배로 늘어날 전망이다. 공산품처럼 생산을 멈출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소들에게 우유를 그만 만들라고 할 수는 없는 일이다. 젖소들은 하루에도 여러 차례 우유를 짜주지 않으면 안된다.

안그래도 식물성 우유 업계와의 경쟁으로 가뜩이나 어려운 미국 낙농업계는 타격이 정말 크다. 레스토랑이나 커피숍에 납품하는 우유를 식료품점 쪽으로 돌릴 수 있으면 좋겠지만 포장이 문제다. 음식점에 납품하는 유제품 포장은 일반 식료품점에 들어가는 유제품에 비해 엄청 크다. 반대로 학교 급식에 들어가는 개별 포장 제품은 용량이 너무 작다. 지금이라도 포장을 바꿀 수는 있지만 그러기에는 돈이 너무 많이 든다. 또 이 코로나바이러스 사태가 얼마나 오래 갈지도 모르는 일이다. 판로를 새로 개척하는 데도 시간이 든다. 정말이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는 상황인 셈이다. 그래서 낙농업계는 조금이라도 우유 소비량을 늘려보려 피자 업체들에게 피자에 얹는 치즈를 늘려달라고 읍소를 하고 있다.

낙농업계만 어려운 건 아니다. 플로리다 주의 채소 농장들은 판로가 막혀 최근 수확이 임박한 채소들을 모두 갈아 엎었다. 하지만 문제는 이제부터다. 또 다시 갈아 엎을 각오를 하고 다음 사이클 재배를 위한 씨를 뿌리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수확 시기에 맞춰 미국의 레스토랑들이 문을 다시 열면 다행이지만 그렇지 않으면 또 갈아 엎어야 한다.

오리건 주와 아이다호 주 경계에서 양파 농사를 짓는 한 농부는 많은 양의 양파를 패스트 푸드 전문점에 납품해 왔다. 주로 양파링의 재료였다. 하지만 많은 패스트푸드점들이 문을 닫거나 투고 영업만 하면서 양파를 팔 곳이 없어졌다. 자루에 담아서 50파운드(약 23kg) 씩 식료품점에 팔기도 했고 많은 양을 저장도 했지만 더 이상 양파를 처리할 수 없는 수준에 이르렀다. 미국인들은 집에서는 양파링을 해먹지 않으니까. 그래서 하는 수 없이 500톤에 이르는 양파를 묻어버렸다.

많은 농부들이 생산한 식재료를 기부하기도 했고 양계장들은 팔 수 없는 닭을 병원으로 가져가 고생하고 있는 의료진을 위해 요리를 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러는 데도 한계가 있다. 워낙 대규모의 생산을 해오던 농장들이기 때문이다.

한 쪽에서는 사재기를 하는데 한 쪽에서는 엄청난 양의 음식을 버리고 있는 이 사태를 도대체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단순한 공급망의 문제로 치부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코로나바이러스는 너무도 심오하고 다양하게 우리가 당연하게 여겨온 많은 것들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만드는 기회를 주고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

※ 참고 글

- 뉴욕타임즈: Dumped Milk, Smashed Eggs, Plowed Vegetables: Food Waste of the Pandemic

필자 김선우

약력

- 브리티시 컬럼비아대 인문지리학과 졸업

- 워싱턴대(시애틀) 경영학 석사

- 동아일보 기자

- 새로운 삶을 발견하기 위해 현재 미국 시애틀 근처 시골에서 작은 농장 운영 중

- <40세에 은퇴하다> 작가

인터비즈 박소영 김재형 정리

inter-biz@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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