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 시조인 주몽은 그의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누구나가 인정하는 명궁이다. 어렸을 때부터 활을 직접 만들어 탁월한 사예를 보였으며, 천자의 후예임을 증명이라도 하듯 신묘한 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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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9. 17. 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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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주몽 캐릭터 국가공인 (국가지원) 한국 궁술문화원형 디지털콘텐츠 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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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몽 () : 고구려 건국 - 自作射, 命中, 儀禮, 遠射, 百發百中

고구려 시조인 주몽은 그의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누구나가 인정하는 명궁이다. 어렸을 때부터 활을 직접 만들어 탁월한 사예를 보였으며, 천자의 후예임을 증명이라도 하듯 신묘한 활솜씨를 유감없이 발휘하였다. 하지만 주몽은 어린 시절 귀엽고 앳된 모습이었으며, 자라서는 그 외모를 유지하면서 어머니 유화의 가르침 속에서 온유한 성품과 대범함을 길러 늠름한 국왕이 되었다. 언제나 활을 지니고 다니며, 진지함을 잃지 않는 미소년의 선사자이다.

『삼국사기』권제 13, 고구려 본기 제1, 시조 동명성왕

󰁵 始祖(시조) 東明聖王(동명성왕)의 성은 고()씨요 諱()는 朱蒙(주몽)[혹은 鄒牟(추모), 象解(상해)[衆牟(중모) ?]라고도 씀]이다.

󰁵 처음에 扶餘王(부여왕) 解夫婁(해부루)가 늙도록 아들이 없어 山川(산천)에 제사하여 後嗣(후사)를 구하려 했는데, 그가 탄 말이 鯤淵(곤연)이란 곳에 이르러 큰 돌을 보고 마주 대하여 눈물을 흘렸다. [解夫婁(해부루)]이 괴이히 여겨 사람을 시켜 그 돌을 옮겨 놓고 보니, 한 金色(금색) 蛙形(와형)[蛙()는 一本(일본)에 蝸()로 쓰여 있음]의 小兒(소아)가 있었다. 왕이 기뻐하여 말하기를, "이는 하늘이 나에게 賢嗣(현사)를 주심이라" 하고 곧 데려다 길렀다. 이름을 금와(金蛙)라 하고 長成(장성)하자 太子(태자)를 삼았다.

󰁵 그 후에 [扶餘(부여)]國相(국상) 阿蘭弗(아란불)이 말하기를, "日前(일전)에 天神(천신)이 나에게 降臨(강림)하여 이르기를, 장차 나 천신(天神)의 자손으로 이곳에 건국(建國)케 하려하니 너희 나라는 다른 곳으로 피()하라. 東海(동해)가에 迦葉原(가섭원)이란 곳이 있으니 土壤(토양)이 기름지고 五穀(오곡)에 알맞으니 도읍할 만하다 하였다"고 하였다. 阿蘭弗(아란불)이 드디어 왕을 권하여 그 곳으로 도읍을 옮기고 國號(국호)를 東扶餘(동부여)라 하였다.

󰁵 그 舊都(구도)에는 어디서 왔는지 알 수 없었으나 天帝(천제)의 아들 解募漱(해모수)라 하고 와서 도읍하였다.

󰁵 解夫婁(해부루)가 돌아가고, 金蛙(금와)가 그 位()를 이었다. 이 때 [金蛙(금와)] 太白山[태백산:지금의 白頭山(백두산)] 남쪽 優渤水(우발수)에서 한 여자를 얻어(만나) 來歷(내력)을 물으니 대답하기를, "나는 河伯(하백)의 딸로, 이름은 柳花(유화)입니다. 여러 아우들과 함께 나와 놀고 있을 때 한 남자가 나타나, 제 말로 天帝(천제)의 아들 解慕漱(해모수)라 하고 나를 熊心山(웅심산) 아래 鴨淥(압록) [()]의 집 속으로 誘引(유인)하여 사욕을 채운 후 곧 가서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우리) 부모는 내가 중매도 없이 남에게 몸을 허락하였다고 하여 (꾸짖어) 드디어 이 優渤水(우발수)에 귀양살이를 하게 하였습니다"고 했다. 金蛙(금와)는 이상히 여겨 그를 집 속에 가두었는데, 日光(일광)이 비추더니 몸을 피하는 대로 일광이 또 따라 비추었다. 그로 인하여 태기가 있더니 닷되들이만한 큰 알을 낳았다. [金蛙(금와)](상서롭지 못하게 여겨) 그 알을 버려 개와 돼지에게 주었더니 모두 먹지 아니하였고, (이를) 길바닥에 버렸더니 牛馬(우마)(밟지 않고) 피해 갔다. 후에 들에 버렸더니 새가 날개로 품어 주었다.

󰁵 왕이 그 알을 쪼개 보려 하였으나 잘 깨어지지 않으므로, 드디어 그 어미에게 도로 주었다.

󰁵 그 어미는 물건으로 알을 싸서 따뜻한 곳에 두었더니, 한 사내아이가 껍데기를 깨뜨리고 나왔다. 아이의 외모가 영특하여 나이 일곱 살에 유표히 凡兒(범아)와 달리 제 손으로 弓矢(궁시)를 만들어 쏘는데, 百發百中(백발백중)이었다. 扶餘(부여)의 俗語(속어)에 善射者(선사자)를 朱蒙(주몽)이라 하므로, 그와 같이 이름을 지었다 한다.

󰁵 金蛙(금와)에게는 아들 7형제가 있어 朱蒙(주몽)으로 더불어 遊戱(유희)하는데 그 技能(기능)이모두 주몽을 따를 수 없었다.

󰁵 그 長子(장자)인 帶素(대소)가 왕에게 말하기를, "주몽은 사람의 소생이 아니고 그 위인이 용맹스러우니, 만일 일찍이 그를 도모치 않으면 後患(후환)이 있을까 두려우니, 청컨대 그를 없애소서"라 하였다. 왕은 듣지 않고 (도리어) 주몽으로 말을 기르게 하였다.

󰁵 朱蒙(주몽)이 말의 성질을 살피어 駿馬(준마)에게는 먹을 것을 減()하여 여위게 하고 노둔한말은 잘 먹여 살찌게 하였다.

󰁵 왕은 살찐 것을 자기가 타고 여윈 것을 주몽에게 주었다. 그 후 [()] 原野(원야)에서 사냥을 할 때 주몽은 善射(선사)인 까닭으로, 화살을 적게 주었으나 그의 잡은 짐승은 매우 많았다.

󰁵 王子(왕자)와 여러 신하들이 또 그를 謀殺(모살)하려 하므로, 주몽의 어머니가 비밀히 아들에게 말하기를, "나라 사람이 장차 너를 해치려 하니 너의 재주와 智略(지략)을 가지고 어디에 간들 아니되랴. (이 곳에) 지체하다가 욕을 당하느니보다는 (차라리) 멀리 가서 有爲(유위)한 일을 하는 것이 좋겠다"고 하였다.

󰁵 주몽은 이에 鳥()(())摩離(마리陜父(협부) 3명과 벗삼아 (도망하여) 淹㴲水(엄사수)[一名(일명) 蓋斯水(개사수)니 지금의 鴨綠(압록) 東北(동북)에 있다]에 이르러 (물을) 건너려 하였으나 다리가 없었다. 追兵(추병)이 쫓아 올까하여 강물에 告()하기를, "나는 天帝(천제)의 아들이요 河伯(하백)의 外孫(외손)으로 오늘 도망하는 중에 追者(추자)가 쫓으니 어찌하랴"고 하였다. 이 때 (물 속에서) 魚鼈(어별)이 떠올라 다리를 만들어 주었다.

󰁵 朱蒙(주몽)이 무사히 건너자 魚鼈(어별)이 곧 흩어지니 뒤를 쫓는 騎兵(기병)이 건너오지 못하고 말았다.

󰁵 주몽은 毛屯谷(모둔곡)[魏書(위서)에는 音()述水(()술수)에 이르렀다 함]에 이르러 세 사람을 만났는데, 한 사람은 麻衣(마의)를 입고 한 사람은 衲衣(납의:장삼)를 입고 또 한 사람은 水藻(水草)(수조(수초))를 입었다. 주몽이 묻기를, "그대들은 어떠한 사람이며 姓名(성명)이 무엇이냐"고 하니, 麻衣(마의) 입은 사람은 말하기를 이름이 再思(재사)라 하고, 衲衣(납의) 입은 사람은 말하기를 武骨(무골)이라 하고, 水藻衣(수조의) 입은 사람은 말하기를 默居(묵거)라 하고 姓()은 말하지 아니하였다. 주몽은 再思(재사)에게 克氏(극씨)란 姓(), 武骨(무골)에게는 仲室氏(중실씨), 默居(묵거)에게는 少室氏(소실씨)를 賜()하고, 여러 사람에게 이르기를, "내가 지금 大命(대명)을 받아 國家(국가)의 基業(기업)을 開創(개창)하려 하는데 마침 이 세 賢人(현인)을 만났으니 어찌 天賜(천사)가 아니랴" 하고 드디어 그 재능을 헤아려 각각 일을 맡기고 그들과 함께 卒本川(졸본천)에 이르렀다. 그 土壤(토양)이 肥美(비미)하고 山河(산하)가 險固(험고)함을 보고 거기에 都邑(도읍)을 정하려 하였는데, 宮室(궁실)을 지을 겨를이 없어 단지 沸流水邊[비류수변:지금의 桓仁(환인)]에 집을 짓고 거기 居()하여 나라를 高句麗(고구려)라 하고 인하여 高()로써 氏()를 삼았다[혹은 이르되, 朱蒙(주몽)이 卒本扶餘(졸본부여)에 이르니 (마침) ()이 無子(무자)하여 朱蒙(주몽)이 普通人物(보통인물)이 아님을 알고 그의 딸로 아내를 삼게 하였으며 왕이 돌아가니 朱蒙(주몽)이 그 위()를 어었던 것이라 한다. 이 때 주몽의 나이는 22세이니, () 孝元帝(효원제) 建昭(건소) 2년이요, 新羅(신라) 始祖(시조) 赫居世(혁거세) 21년인 甲申(갑신)년이었다.

󰁵 四方(사방)에서 [朱蒙(주몽)의 建國(건국)] 듣고 來附(내부)하는 자가 많았다.

󰁵 그 地境(지경)이 靺鞨部落(말갈부락)과 연접하였으므로 侵寇(침구)의 害()를 입을까 염려하여 드디어 이를 쳐 물리치니, 靺鞨(말갈)이 畏服(외복)하여 감히 (高句麗(고구려)) 침범치 못하였다.

󰁵 왕[朱蒙(주몽)]은 沸流水中(비류수중)에 菜葉(채엽)이 흘러내려 오는 것을 보고 上流(상류)에 사람이 살고 있음을 알았다. 그래서 사냥을 하면서 沸流國(비류국)을 찾아가니, 그 國王(국왕) 松讓(송양)이 나와 보고 "寡人(과인)이 海隅(해우)에 僻在(벽재)하여 일찍이 君子(군자)를 만나 보지 못하다가 오늘 의외에 서로 만나니, 또한 다행한 일이 아니냐. 그런데 그대는 어디서 왔는지 모르겠다" 하였다. 대답하기를, "나는 天帝(천제)의 아들로 某處(모처)에 와서 도읍을 하였다"고 했다. 松讓(송양)이 말하기를, "우리는 여기서 여러 대 동안 王() 노릇을 하였지만, 땅이 작아 두 임금을 용납하기는 어렵다. 그대는 도읍을 정한 지 며칠 안 되니, 우리의 附庸(부용)이 될 수 있겠느냐"고 하니, [朱蒙(주몽)]은 이 말에 분노하여 그와 是非(시비)를 하다가 또한 서로 활쏘기를 하여 재주를 시험해 보니 松讓(송양)이 抗拒(항거)치 못하였다.

󰁵 26월에 [沸流國王(비류국왕)] 松讓(송양)이 나라를 바치고 항복하므로 왕은 그 곳을 多勿都(다물도)라 하고, 송양을 봉하여 그 곳의 主()를 삼았다 高句麗(고구려) 國語(국어)에 舊土(구토)의 回復(회복)을 多勿(다물)이라 하므로 그와 같이 이름한 것이다.

󰁵 33월에 黃龍(황룡)이 鶻嶺[()]에 나타났고, 7월에 慶雲[경운:祥雲(상운)]이 홀령에나타났는데, 빛이 푸르고 붉었다.

󰁵 44월에 雲霧(운무)가 四方(사방)에서 일어나 사람이 7일 동안이나 빛을 분별치 못하였다.

󰁵 7월에 城郭(성곽)과 宮室(궁실)을 지었다.

󰁵 68월에 神雀[신작:()]이 宮庭(궁정)에 모여들었다.

󰁵 10월에 왕이 烏伊(오이)와 扶芬奴(부분노)를 명하여 太白山[태백산:白頭山(백두산)] 동남쪽의 荇人國(행인국)을 쳐서 그 땅을 빼앗아 城邑(성읍)을 삼았다.

󰁵 109월에 鸞[:瑞鳥(서조)]새가 王臺(왕대)에 모여들었다.

󰁵 11월에 왕이 扶尉猒(부위염)을 시켜 北沃沮(북옥저:지금의 咸鏡北道(함경북도) 방면)을 쳐 滅()하고 그 땅에 城邑(성읍)을 두었다.

󰁵 148월에 王母(왕모) 柳花(유화)가 東扶餘(동부여)에서 돌아가니, 其王(기왕) 金蛙(금와)가 太后(태후)의 禮()로써 장사하고 드디어 神廟(신묘)를 세웠다

󰁵 10월에 왕이 사신을 扶餘(부여)에 보내어 方物[방물:貢物(공물)]을 바쳐 그 德()을 갚았다.

󰁵 194월에 王子(왕자) 類利(유리)가 扶餘(부여)에서 그 어머니와 함께 도망하여 오니, 왕은 기뻐하여 太子(태자)를 삼았다.

󰁵 9월에 왕이 돌아가니 나이 40세요, 龍山(용산)에 장사하고 東明聖王(동명성왕)이라 諡號(시호)하였다.

본 강의 내용은 문화체육관광부에 등록(23954호)된 국궁교본 자료입니다.

한국(韓國)궁도(弓道)의 실상

궁도는 일제 조선총독부의 강제적 문화침탈로 인하여 쓰이게 된 용어입니다.

일제 강점기 전에 쓰여 졌던 궁술(弓術) 은 광복 이후에는 활의 역사를 바로 세워야 하였으나 어영 학자들의 관습(慣習)에 의하여 지금까지 관습 용어인 궁도(弓道)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궁도협회는 한술 더 떠서 동이족의 한민족 역사까지 왜곡 , 날조 , 하고 있어 부득이 궁도의 실상을 국민 여러분들께 알려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궁도협회 홈페이지 수록 내용

특히 궁도는 동이족 이라 지칭된 우리민족의 상징적인 무예 였으며 오천년 한국사의 .(궁도 역사 70년)

궁술협회의 역사바로세우기

한국 활쏘기(궁술)의 미래를 위하여 아래와 같이 한국의 활쏘기를 정리 하고자 합니다.

궁도(弓道)

한민족 활쏘기 역사 기록에서 제외할 이유는 일제침탈 문화이고 동이족(東夷族) 역사를 왜곡 날조 하고 있으며, 국가사업으로 궁술문화원형을 디지털콘텐츠로 개발 복원 되었으므로 궁도(弓道)의 정체성 없는 잔재(殘在)는 청산(淸算)되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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