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예문인화 연재 비첩금낭

제 18회 서예문인화 12월호 "비첩금낭을 토대로 새로쓰는 서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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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12. 3. 2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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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예문인화 12월호 "비첩금낭"을 토대로 새로쓰는 서예사 18회

서예문인화 12월호 연재 “비첩금낭을 토대로 새로 쓰는 서예사”18회 윤주비/백석신군비


 동한(東漢) 후기의 서체 양상은 서사자의 개성 시대로 들어서게 되니 그 서체의 미적 효과는 비단 서법가 뿐 아니라 많은 사람들의 심미안을 사로잡아가게 되어 오히려 원탁에 천착한 고루한 서사행위를 벋어나 안목적인 평가로 더 이름 난 전문가들도 나타나게 된다.

희평석경
 희평석경이 채옹의 글씨로 정의를 정착한다면 그의 서법은 그의 가족인 딸 채문희로 이어지면서 사도(師徒)세습으로 전수되고 그의 시댁인 하동 위씨(衛氏)가문, 즉 위기(衛覬), 위관(衛瓘), 위항(衛恒), 위부인(衛夫人) 등의 서예가를 배출하게 된다.


 또한 이들 채옹의 서통은 종요와 왕희지로 이어지는 정통서법가문을 여는 중요한 밑거름이 되게 하였으며 채문희의 여제 시댁인 태산(泰山) 양(羊)씨의 가문에 영향을 주어 남조시대의 강남서법대가 양흔(羊欣)을 탄생하기에 이른다.


희평석경 잔석
 이제 시기적으로 후한 희평(喜平-영제 때의 연호. 172년~177년에 해당됨)연간에 이르면 희평석경(喜平石經)을 논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BC 175년이면 희평연간 4년, 그 후 광화(光和) 6년인 183년 까지 8년에 걸쳐 각석된 대 공사로 당시 경문에 이문(異文)이 많고 이질적 서체가 횡행하였으므로 이를 표준화 하여 정정(正定)하여 비(碑)로 새겨 수도 낙양시의 태학(大學)의 문 앞에 세워 보는 이로 하여금 베끼거나 교정할 수 있게 하였다.


 역경, 서경, 시경, 예기, 춘추공양전,  논어 등에 이르는 6경이다.
 비의 크기는 높이 3m, 폭이 1.2m, 모두 46석(石)이 있었으며 당시의 표준문자인 예서를 가장 표준적인 자형으로 당대의 명필 채옹의 글씨로 각하였다. 이로써 후기의 여러 제왕들이 제작한 석경들의 효시가 된다.
 삼국시기 위(魏) 때에는 대 소전, 예서 삼체로 기록하여 각한 삼체석경이 출현하고, 당 말에 이르러서는 13경을 각한 해서의 석경이 등장하는데 모두 희평석경에 영향 받은바 있기에 표준 경문의 영구적 보존을 꾀하게 된 것이다.


 또한 부견하여 추측한다면 당시 한 대의 정치적 위상이 매우 위태로운 시기인 점을 감안한다면 이러한 유학 제일주의를 더욱 공고히 하여 유학을 장려하고 존숭하는 풍토를 만듦으로 통치자로서의 사상적 지지기반의 통일을 꾀할 수 있었을 것이다.

 희평석경의 예서가 한예의 표준서로 완성시키는데 중심역할을 하고 후기 석경서체의 형성에 많은 영향을 끼친 점을 고려한다면 그토록 방대한 비군을 형성할 정도의 다수비들이 다 어디로 갔을까 하는데 의문을 두어 볼 때 아이러니 하지 않을 수 없다.


 모두 46괴(塊)에 달하는 규모에 비하면 현재 발견된 쪼가리 파편들은 턱없이 부족한 것이다.
 물론 희평석경이 채옹이 그 비림을 형성할 때의 의도인 서체와 경문의 표준화를 목적한 바는 달성했다지만 엄격히 말해 희평석경은 교정경문(校正經文)과 규범문자(規範文子)의 실용적 목적이 있었던 풍격의 서체였으니 서법 예술상으로는 추구한 발전은 보이지 않은 것은 사실적인 역사다.
 

 이는 소위 서체의 규범적 판박이로 관각체(館閣體)라 불리는 서체에 속하는 대표적 자체(字體)였기 때문에 서예에서 심미적 예의 추구가 발현되기 시작할 무렵인 서예의 예술화시기인 당기(當期)에 이르러 응당 보여야 자연적 변화의 응용과 인성(人性)이 움직이는 성정(性情)의 변화를 꽉 막은 형상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희평석경의 서예미적 판단을 내림이 비록 금세에 그러하다지만 당시로는 채옹의 엄정한 규규와 방경(方勁)하고 준후(峻厚)한 체형의 서체가 규범문자의 실용적 목적이 충분히 달성한 업적이었으며 이는 실로 양한(兩漢) 예서의 총결(總結)이었다.
 명필 채옹의 석경 비림 효과는 표준경문과 표준문자라는 업적 외에 그 뒤 후한 말 이후로 이어지는 더욱 다양화 되어가는 서법 발전에는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삼체석경
 그러나 아깝게도 명물 희평석경은 그 수명을 오래하지 못하는 비운을 맞게 되니 동한의 멸망을 재촉하는 삼국의 정립시기에 이르러 동탁(董卓)의 난이 그것이다.


 후한의 헌제(獻帝)원년인 초평(初平) 일 년(190년), 동탁은 낙양을 불태우고 태학에 불을 지르면서 석경은 파손된다.
 수서(隋書) 경적지(經籍志)의 기록에 의하면 북제(北齊)의 고징(高澄-57~560) 통치시기에 남은 석경을 업(鄴-지금의 하남 안양)으로 옮기는 일이 있었는데, 그나마 석비의 반수는 도중에 길바닥에 버려지고 물속에 수장되었으니 실제 업(鄴)까지 온전히 옮겨진 비는 절반도 못되었다.

 수대(隋代)의 문제 개황(開皇)연간에 이르러 다시 석경은 업도(鄴都)에서 장안으로 옮겨지게 되는데 오히려 어이없게도 관아의 영조사(營造司-내무소속기구)를 지을 때 주춧돌로 쓰이게 된다.

 이러기를 당(唐)의 정관 연간까지 이르러 위징(魏徵)이 남은 잔편을 수집하였는데 이미 거의 훼괴되고 그나마 사라진 후의 일이었으니 십분의 일도 되지 않는 분량이었다.


 송대에 이르러 우연히 석경의 잔편들이 출토되기 시작하는데, 불과 10여 파편덩어리, 약 970자였다 하였으나 기록으로나마 전하는 말이지 실제 탁본조차 남은 것이 없었다가 하남의 낙양 부근과 섬서성의 서안 등 두 곳에서 형편없이 쪼개진 파편들이 발견되었고 민국(民國)시기에 이르러 다시 낙양의 태학구지에서 잔편 출토가 있었으니 그 때까지 100여 파편이 전하게 되었고 글자 수로는 도합 8275자에 이르게 되었는데 중화민국이 성립된 이후 약간의 발굴이 더 진행되어 600여자를 수집하니 지금은 총 8800자에 이르는 글자 수를 확보하기에 이르렀다.


 청말(请末)에 완원(阮元), 황이(黃易) 등이 소장하였고 1922년 이후로 서삼옥(徐森玉), 마형(馬衡), 나진옥(羅振玉), 우우임(于右任) 등이 수장하게 되는데 현재는 국가급박물관인 고궁박물원, 북경도서관, 상해박물관, 서안비림박물관, 하남박물원, 중국사회과학원 고고연구소 낙양공작참, 낙양박물관, 낙양언사상성박물관, 대북고궁박물원 및 일본등지에 산재하여 보관하므로 그 수량이 대략 300개의 잔삭(殘石)이라 하나 정확한 통계가 어려운 실정이다.


 필자의 견해로는 희평잔석의 서법적 가치에 대하여 현존하는 잔석의 물증이 온전하지 못하므로 자연 그 경개를 알기 어려우므로 속단하기는 이르다고 본다.


 다만 드러난 잔편 몇 개의 전흔(鐫痕)을 보고 규정적이고 획일적인 면모에 미적 가치인 자유자재한 일취를 읽을 수 없어 장식적인 엄중성이라든가, 조합된 규범이 현저하고 각경(刻經)을 할 때의 의도인 취정규범(取正規範)이라는 의식 때문에 서자의 개성과 심취가 발휘되지 못하였다고 폄하(貶下)하기 일쑤이지만 당대(當代)의 진전한 예법을 이해하는데 가장 좋은 척도가 아닌가 여기며, 또한 이만한 잔흔(殘痕)으로는 희평석경의 전모를 파악하기 어려운 실정에서 그 정치(精緻)하고 진부한 예법(隷法)의 맛을 평가하기는 속단이라 여겨진다.


 이후로 위(魏)의 대전, 소전, 예서체로 쓴 삼체석경(三體石經)이라고도 하는 정시석경(正始石經)이 건립되었고 당(唐)의 개성석경(開成石經, 837년), 촉(蜀)의 촉석경(蜀石經, 938년), 송(宋)의 송석경(宋石經, 1061년), 남송석경(南宋石經, 1135년), 청(淸)의 청석경(淸石經, 1791) 등이 만들어졌으며 불교 관계의 석경은 북위(北魏)에서 시작하여 북제(北齊) 때 성행하다가 금(金), 원(元) 이후에는 쇠퇴하였는데 그 중에서도 북제의 산동성 태산 대반야경(大般若經), 하북성의 북향당산(北饗堂山) 석굴석경, 수(隋) 이래의 하북성 방산(房山)석경, 원(元)의 하북성 거용관과가탑(居庸關過街塔) 육체(六體)석경 등이 유명하다.
 
이제 이본호의 본격적인 『비첩금낭』 순에 따라 ‘윤주비(尹宙碑)’와 ‘백석신군비(白石神君碑)’를 이해 할 순서가 되었다.


윤주비(尹宙碑~177년)
윤주비(尹宙碑,177년)는 전칭 ‘한예주종사윤주비(漢豫州從事尹宙碑)라 부른다.
 동한의 희평(熹平) 육년인 177에 세워졌다. 높이 192m, 너비 89,6m, 14행에 행마다 27자가 비교적 크게 새겨져 있다. 액전의 글씨는 “漢豫州從事尹公銘” 여덟 자.


윤주비 전탁
 하남시 언릉현(鄢陵縣) 공묘(孔廟)에 수장되어 있다가 지금은 언릉현 초급중학 운동장에 보관되어있다. 원(元)의 황경(皇慶)원년인 1312년에 공자묘를 중수하기 위해 석재를 구하던 중 이 비가 발견되어 언릉의 공묘 안으로 옮겼는데 어느 때인가 땅속으로 매몰되었다.


 그러다가 명(明)의 가정(嘉靖) 십 칠년인 1538년에 홍수로 물이 범람하여 둑이 무너지면서 이 비는 다시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어 또다시 언릉의 공묘로 옮겨진다.


그림 1

그림2
 서법이 방정하면서도 혼목(渾穆)하기에 만경(萬經)은‘분예우존(分隷偶存)’에서 평하기를 “한비 중에서도 매우 우수하다”고 평했는데 출토시 부터 자형이 완정하여 단 한 자도 결점이 없었다 한다.


 비의 주인인 윤주는 자가 주남(周南), 하남 영천(潁川)사람으로 경전에 박통하여 춘추공양전을 고치는 정도였으나 벼슬은 낮은 종사관에 머무르다 62세인 희평 6년에 졸하였다.


 윤주비는 안으로 긴축하며 밖으로 이완(弛緩)한 점(内紧外拓)이 특징이다. 필획이 가늘고 파리하지만 기필이 원필로 온건함이 여실하다. 원명(元明) 이래 많은 서예가들이 이비를 언급하면서 비교적 높은 평가를 내렸는데, 대체로 “한자도 생동하는 기운이 없는 글자가 없고, 한자도 규구에 어긋난 글자가 없다”고 할 정도이다.


 청(清)의 왕주(王澍)는 평기서(評其書)에서 이르기를 “한나라 사람의 예서는 매 비마다 하나의 격(格)을 이루는데 같은 것이 하나도 없다. 대부분 고경(古勁)하고 방졸(方拙)함을 숭상하는데 홀로 윤주비는 필법이 원건(圓健)하다”고 했는데 이러한

 평가가 극히 지당한 것이 윤주비의 가늘고 섬세하면서도 일필도 원필의 원칙을 벗어나지 않은 필법이면서도 마치 긴밀하게 철선을 구부려 이어 놓은 듯한 자세가 내강외유의 포치를 튼튼히 했기 때문이다.
 후세 사람들은 윤주비와 공주비 두 비를 이주(二宙)비라 칭하기도 한다.


그림 3

그림 5
 청의 옹방강(翁方綱)은 양한금석기(两漢金石記)에서 “윤주비의 자형은 비교적 커서 부드러우며 법도가 있다(冲和有度)”고 평하였고 “정히 공주비와 더불어 완상할 가치가 있다”고 하였으며, 청의 곽상선(郭尚先-1785~1832, 자는 元闻, 蘭石, 청조의 관원이자 서예가)은 “비록 공주비(164)와 윤주비(177)가 심히 멀어 미치지 못 한다 하나 이주비(二宙碑)를 임서해 보면 필하에 진전(秦篆)의 기운을 느끼게 한다.

 그러나 윤주비는 그 신일(神逸)한 기운이 사신비나 예기비에 미치지 못 하나 원만하고 정려(精麗)하여 마치 위대(魏代) 사람들의 글을 보는 것 같다”고 《芳堅館題跋》의 글에서 말하고 있다.

 

추사김정희의 윤주비 임서

윤주비의 체세를 살펴보면 비록 자형이 크나 서법의 풍격이 공교하고 정치하다. 매우 잘 정돈된 듯 하면서도 긴밀한 내부의 속박에서 투출탈쇄(透出灑脱)하려는 약동의 모습니 보이고 통일된 가운데에서도 변화가 풍부하다.


 행필(行筆)에서 일파삼절(一波三折)의 멋을 유감없이 보이고 있음은 바로 금석의 기운이 있음이라. 결체가 고분유신(顧盼有神)하니 마치 군학(群鶴)이 동시에 일어나 춤추는 양상으로 한비 중에 으뜸작이라 하겠다.

 

 그래서 고래로 서법가들의 한결같은 평가에 “无一字不生动,无一字不规矩”이라 하니 즉 한자도 생동치 않음이 없고, 한자도 규구에 맞지 않음이 없다“고 한말이 괜한 표현이 아닌 것 같다.


 본 비는 추사와의 연관이 자명하여 추사의 예서는 일면 윤주비의 기맥을 일관한 양상이 보인다. 이는 그가 알 수 없는 시기에 본 비를 임서한 묵적이 있기 때문이다.
 그의 의임은 윤주비를 배우는 학서자들에게 좋은 컨셉트를 제공한다고 하겠다.


추사의 백석비 필의 ‘茗禪’ 간송미술관 소장


백석신군비(白石神君碑~183년)

  

백석신군비 전탁
 백석신군비의 진정한 내면을 이해한다는 것은 비의 본질을 이해하는 차원에서 결코 쉬운 일은 아니지만 단순 주관에 의한 견해보다는 객
관적 견해를 참고한다면 겉으로 보이는 단순 비쥬얼이 아닌 깊숙이 박혀있는 박옥의 심미(深味)적 가치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본 비의 경개를 살펴 보기 앞서 추사가 초의선사(1786-1866)에게 보낸 서찰을 참고해 본다는 본 비를 이해하는 지름길이 되지 않을까 한다. 초의선사가 직접 만든 차를 보내오자 보답으로 ‘명선(茗禪-차를 마시며 선정에 든다’)’이란 글씨를 써서 보냈는데 “글로 써서 보답하니 ‘백석신군비(白石神君碑)’의 意(의)로 (써서) 보냅니다”(書此爲報 用白石神君碑意)라고 하였다.


여기서 말한 意(의)란 추사가 茗禪이란 글자를 쓸 때 단순히 백석신군비의 탁본 글씨를 모범으로 삼았다는 뜻인가?
 어떤 이는 이 비석에서 茗과 禪 두 글자를 집자하여 쓴 것이 아닌가로 풀이하기도 하는데, 백석신군비의 ‘意’로 썼다는 말은 물론 이 비석의 자형의 필의(筆意)를 참고한 말도 되겠지만 그것 보다는 이 비문체의 맑고 정제된 느낌을 추사는 컨셉으로 삼은 것이다.


 청의 옹방강의 한 평가와 일치하는데 그는 이 비의 특징을 ‘한의 예서 가운데서   가장 맑고 정제된(潔齊)비로 그 맑고도 풍골(風骨)의 굳셈(遵勁)이 우수하다’ 고 평가하였다.


 바로 추사선생은 이 비의 깨끗하고 정제된 미의 장점을 초의선사가 보내온 맑고 담박한 명다의 맛에 비교한 것으로 ‘書此爲報 用白石神君碑意’라 표현한 것이다.

 백석신군비는 현재 중국 하북성(河北省) 원씨현(元氏縣) 봉룡산(封龍山) 소재인 천불동 한비당(漢碑堂)에 사삼공산비(祀三公山碑)와 함께 소장돼 있다.

그림 5

기원 183년에 각석되었으며 높이 2.4m, 너비 0.81㎡, 두께 0.17m. 원래 백석산 백석신군사(白石神君祠) 사당에 안치되어 있던 것인데 명(明)의 만력(萬曆) 연간에 인지현(仁知縣)에서 개화사(開花寺)라는 사찰로 옮겨졌다가 우여곡절 끝에 1989년에 현 위치에 보존되기에 이른 것이다.

 백석신군비에 대하여는 일부 평가가 양극로 엇갈린다. 

그림 6
 양수경(楊守敬)은 평비기(評碑記)에서 “余按此碑在汉隶中诚为最下者,然亦安知非魏晋滥觞”이라 하여 “이 비는 한예 중에서 최하위에 속한다. 그러나 이 비가 위진(魏晉-육조) 서체의 남상(濫觴)이 될 수 있을지를 어찌 알랴”하여 일단 평가를 폄하하였으나 육조의 서법이나 수당으로 이어지는 해서의 비조가 될 여지가 있음을 비친다.

그림 7
 확실한 것은 백석신군비는 삼국시대의 예서로 이행하는 풍기(風氣)를 보이고 있음이다.
 
이점은 일찍이 송대의 홍괄(洪适)이 말한 대로 “혹 졸박하고 혹 괴이하기도 한데 이는 다 고의(古意)가 있기 때문이다. 이 비는 포치가 정돈, 가지런함이 추호의 변화가 없으며 위진(魏晉)간의 비의 양상이 있다”고 한 바와 상통하는 바가 있다. 

  

그림 8

 그러나 청(淸) 옹방강은 양한금석기(兩漢金石記)에서 “이 비의 서법은 오로지 방정(方整)함을 위주로 한다. 한예 가운데서 가장 맑고 정제된(潔齊)비이다. 그러나 맑고도 풍골(風骨)의 굳셈(遵勁)이 흡사 교관비(校官碑)의 서체와 같이 우수하니 예법의 최고 수준이다”<翁方綱 ‘兩漢金石記’: 是碑書法專主方整, 在漢隸中最爲潔齊者, 然風骨遵勁 似優在’校官碑’ 隸法之上>라고 평가하였다.


 한마디로 백서신군비는 모나고 굳세며 예스럽고 졸박(拙朴)함이 특징이다. 전체적인 방경(方勁)하고 고졸한 기풍에 체세의 맑음과 획질의 굳셈이 부각되어 있으며 당대의 예서로 유행인 좌우 팔분의

그림 9
 멋과 안정감을 주는 횡세(橫勢)를 취하지 않고 정제된 파책과 자형의 종세(縱勢)를 취함이 본 비의 특징인데, 같은 시기의 타 예서의 기운과 이질감이 있다 할 찌라도 유유독락(唯有獨樂)한 신선미를 잃지 않으니 어찌 함부로 폄하할 수 있으랴.

이제 윤주비와 백석신군비의 명문 명구를 감상하고 응용해 볼 기회를 갖는다.


그리고 사계의 명가 두 분의 작품을 통하여 이천년의 시공을 초월한 무비(撫碑)를 감상하자.


그림-1 勛功有章<훈공유창>윤주비/공훈이 밝히 드러남.
그림-2 交朋會友<교붕회우>윤주비/벗을 사귀고 벗을 만남.
그림-3 克纘祖業<극찬조업>윤주비/조상의 업을 잘 이어나감.
그림-4 擧衡以處事 淸身以厲時<거형이처사 청신이려시>윤주비/공평무사함으로 일을 처리하고, 청신함으로써 자신을 닦음.

그림-5 年穀歲熟 百姓豊盈 粟升五錢 國界安寧<연곡세숙 백성풍영 속승오전 국계안녕>백석신군비/해마다 곡식이 무르익어 백성들이 풍녕 하니 곡식 한 되에 오전이라. 온 나라가 평안하도다.
그림-6 莫急於禮 莫重於祭<막급어례 막중어제>백석신군비/예(禮)보다 귀한 것이 없고 제사보다 중한 것이 없다.
그림-7 幽讚天地 長育萬物<유찬천지 장육만물>백석신군비/천지가 유찬하니 만물이 장육 하는 도다.
그림-8 膚寸而合 澍雨沾洽<부촌이합 주우점흡>백석신군비/조각구름이 합쳐 비가 내리니 흡족한 단비로다.
그림-9 觸石而出 膚寸而合<촉석이출 부촌이합>백석신군비/구름이 峰頭(봉두)의 암각에 부딧쳐 일어나고 조각구름이 합하여 풍년의 단비를 내도다.


그림 10 동주 이영상 선생의 윤주비 임서작
해설:擧衡以處事 淸身以厲時<거형이처사 청신이려시>윤주비/공평무사함으로 일을 처리하고, 청신함으로써 자신을 닦음.
동주(東洲) 이영상(李英相)선생 약력


그림 11 관호 최원복 선생의 백석신군비 임서작
해설:年穀歲熟 百姓豊盈 粟升五錢 國界安寧<연곡세숙 백성풍영 속승오전 국계안녕>백석신군비/해마다 곡식이 무르익어 백성들이 풍녕 하니 곡식 한 되에 오전이라. 온 나라가 평안하도다.
관호 최원복 선생의 약력/인광역시 미술협회장 역임/대한미국미술대전 초대작가/인천광역시 문화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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