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무공 실록

충무공 이순신 선조수정실록 1587년&158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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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4. 20. 8: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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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부터는 선조 수정실록을 올리게 됩니다! 뭔가 새로운 기분이면서도 과연 선조실록과 어떤 뉘앙스 차이가 있을지 궁금하네요. 올리는대로 해당 시기를 비교해봐야겠습니다. 기념으로 오랫만에 원문도 같이 올려보구요!

 

 

 

​[1번째 언급]


선수 21권, 20년(1587 정해 / 명 만력 15년) 9월 1일(정해) 1번째 기사-적호가 녹둔도를 함락시켜 둔전이 폐지되다


적호(賊胡)가 녹둔도(鹿屯島)를 함락시켰다. 녹둔도의 둔전(屯田)을 처음 설치할 적에 남도(南道)의 궐액군(闕額軍)을 예속시켜 경부(耕夫)로 삼았는데 마침 흉년이 들어 수확이 없었다.


이 해에 조산 만호(造山萬戶) 이순신(李舜臣)에게 그 일을 오로지 관장하게 하였는데 가을에 풍년이 들었다. 부사 이경록(李慶祿)이 군리(軍吏)를 거느리고 이순신과 추수를 감독하였다. 추도(楸島)의 호추(胡酋) 마니응개(亇尼應介)가 경원(慶源) 지역에 있는 호인의 촌락에 화살을 전달하고서 군사를 숨겨놓고 몰래 엿보다가 농민이 들판에 나가고 책루(柵壘)가 빈 것을 보고 갑자기 들어와 에워싸고 군사를 놓아 크게 노략질하였다.


수호장(守護將) 오형(吳亨)·임경번(林景藩) 등이 포위를 뚫고 책루로 들어가다가 모두 화살을 맞아 죽었다. 마니응개는 참루(塹壘)를 뛰어넘어 들어오다가 수장(戍將) 이몽서(李夢瑞)에게 사살되었다. 적호(賊胡)가 10여 인을 살해하고 1백 60인을 사로잡아 갔다. 이경록·이순신이 군사를 거느리고 추격하여 적 3인의 머리를 베고 포로된 사람 50여 인을 빼앗아 돌아왔다.


병사(兵使) 이일(李鎰)이, 이순신에게 죄를 돌림으로써 자신은 벗어나기 위하여 형구를 설치하고 그를 베려 하자 순신이 스스로 변명하기를,"전에 군사가 적은 것을 보고 신보하여 더 보태주기를 청하였으나 병사가 따르지 않았는데 그에 대한 공첩(公牒)이 있다"하였다. 이일이 수금해 놓고 조정에 아뢰니 '백의종군(白衣從軍)하여 공을 세워 스스로 속죄하도록 하라'고 명하였다.


상이 수병(戍兵)이 죽은 것을 애도하여 호당(湖堂)에 명하여 시를 지어 조문하게 하였다. 이로부터 둔전(屯田)이 폐지되었는데, 논하는 이들은 정언신(鄭彦信)이 실책한 것으로 탓하였다. 이순신이 순변사(巡邊使)의 휘하에 종군하여 반로(反虜) 우을기내(于乙其乃)를 꾀어내어 잡아서 드디어 죄를 사면받았는데 이로부터 유명해졌다.


(첫째 줄 6번째 글자~끝에서 다섯째 줄 8번째 글자까지)

 


 

[2번째 언급]


선수 23권, 22년(1589 기축 / 명 만력 17년) 12월 1일(갑술) 21번째 기사-이순신을 정읍 현감으로 삼다


이순신(李舜臣)을 정읍 현감(井邑縣監)으로 삼았다. 순신이 감사 이광(李洸)의 군관이 되었는데 이광이 그 재주를 기이하게 여겨 주달하여 본도의 조방장(助防將)으로 삼았다. 유성룡이 순신과 이웃에 살면서 그의 행검을 살펴 알고 빈우(賓友)로 대우하니, 이로 말미암아 이름이 알려졌다. 과거에 오른 지 14년 만에 비로소 현감에 제수되었는데 고을을 다스리는 데에 성적(聲績)이 있었다.


(끝에서 4째 줄 11번째 글자~끝에서 2째 줄까지. 끝 두글자 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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