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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중앙 관리의 경주 관아 방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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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6. 19. 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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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중앙 관리의 경주 관아 방문기!


경주는 신라의 오랜 수도였던지라 현재에도 여전히 신라의 이미지가 강합니다. 고려 시대의 흔적은 찾기가 힘들고 조선시대 또는 근대의 흔적도 서서히 사라지고 있던 차에, 반갑게도 요즘은 경주읍성을 비롯하여 여러 조선시대 및 근대의 흔적들이 복원 정비 또는 계획되고 있습니다. 사실 경주에서의 생활 중 상당기간 신라시대의 흔적을 찾아 돌아다녔지만, 의외로 그때마다 마주치는 것이 조선시대의 흔적이었고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조선시대의 경주'에 대해서도 상당한 호기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조선시대를 현재의 모습에서 그 규모를 찾다 보면, 별것 없다 할지 몰라도 경주는 경주부윤 즉 종2품이 다스리는 1,000여호가 넘는 큰 도시였습니다. 전국에 부윤은 경주부와 전라도의 전주부, 함경도의 영흥부(또는 함흥부), 평안도의 평양부, 의주부 정도만 있을정도로, 현재의 광역시장급 정도가 아닐까 생각됩니다. 또한 도지사급의 관찰사와 같은 종2품으로 높은 품계이기도 합니다. 현재까지도 한성판윤(정2품)격인 서울특별시장(장관급)을 제외한 도지사(관찰사:종2품) 및 광역시장(부윤:종2품)들은 차관급에 해당되고 있습니다.


이렇듯 경주에서 조선시대의 흔적을 찾다 보니 한성에서 내려오는 중앙관료 즉, 경주부윤 보다 품계가 높은(정2품 이상) 관리가 경주를 찾았을 때 어디를 통해서 오고, 어디를 다녔으며, 어떻게 생활했는지도 상당히 궁금했었습니다. 조선시대의 높은 중앙관리도 그냥 절차 없이 아무렇게나 방문했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다 그 절차와 법도가 있었고, 제법 철저히 지켰던 것으로도 보입니다. 



조선시대 중앙관료가 왕명을 기록한 교지를 들고 경주 관아를 찾아가는 과정.... 그 경주 입성기(入城記)를 함께 하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한성에서 경주로 내려오는 길은 '한성-용인-안성-이천-문경-상주-선산-인동-칠곡-대구-영천-건천-경주' 로, 영남대로를 이용하여 내려왔습니다. 통상 한성에서  부산까지는 보름 즉, 15일 걸린다고 합니다. 유추해보면 한성에서 경주까지는 대략 12~13일 정도 걸리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또한 경주를 중심으로 다른 지역으로 이어지는 길은 크게 6가지로 볼 수가 있습니다. 


1. 경주-건천-영천과 청도로 갈라지는 내륙으로 이어지는 길
2. 경주-현곡-영천의 신령가는 길과 대구로 가는길이 갈라짐
3. 경주-봉계-언양과 울산방향으로 갈라짐. 이길은 부산으로 향하고자 할때 이용됨
4. 경주-보문단지-불국사-외동-울산
5. 경주-보문단지-어일
6. 경주-안강-포항.흥해


<참조: 신라에서 경주까지 2013  이근직>


물론 한성에서 관료가 내려오는 경우는 1번에 해당합니다.  건천을 통해 경주의 초입에 다다르면, 대천변을 따라 효현동, 서악동에 이르러 형산강변(서천)을 따라 북쪽으로 진입하여 긴 나무다리를 이용하여 형산강(서천)을 넘어 경주 읍내로 진입합니다.

(상단 경주 읍내전도 동선 참조)



1920년대 경주 서천의 모습(경주풍물지리지)! 현재의 서천교가 있는 곳에 다리가 보이고 멀리 보이는 산은 경주 남산! 저 형산강(서천)을 건너야 경주 읍내로 들어갈 수가 있습니다. 따라서 이 강변을 따라 다시 북쪽으로 이동하여 다리가 있는 곳까지 가야 했습니다. 


형산강(서천) 건너 경주 읍내의 모습입니다. 사진 오른쪽에 고분군이 보입니다. 오른쪽 강변에 초가집이 모여있는 곳이 아마도 다리가 있었던 곳으로 추정되며 현재 '황실 예식장' 인근으로 보입니다. (위 사진과는 좌우로 연결된 사진)


좀더 확대된 다른 사진 모습! 이 지점(초가집 있는 곳)이 '황실예식장 부근'으로 다리가 있었던 곳으로 추정됩니다. 옛 어르신들에게 여쭈어보면 '장승배기'라는 지명을 알고 있는 분이 많습니다. 아시는 분들은 거의 이구동성으로 이곳을 이야기합니다. 장승이 서있던 곳은 원래 마을 입구로 사악한 기를 가지고 들어오지 말라는 마을 수호신 역할을 하기도 합니다. 또한 여러 기행문이나 소설에 보면 '마을 어귀'라는 표현을 자주 봤을 것입니다. 이는 마을의 입구라는 의미로 경주에서의 마을 어귀는 바로 이곳에 해당됩니다. (현재의 서천교는 이곳에서 강따라 약 450미터 남쪽에 세워졌습니다.)


강을 건너 초가집이 있는 곳에 오면 주막 또는 여각이 있었을 것이고 많은 장사치들이 자리를 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중앙에서 경주로 내려온 '하급 관리' 라면 이곳에서 의관을 갖춰 입고 준비한 기점이었을 것입니다.


형산강(서천)을 건너 읍내로 진입합니다. 물론 관아가 있는 경주읍성의 남문인 징례문(徵禮門)을 향하는 길입니다. 가는 길에 뜻밖의 풍경을 마주하게 됩니다. 처음 본 생뚱맞은 거대한 봉우리들! 혹자는 풍수지리에 의한 조산(造山,인공산)으로 알고 있었던 사람도 있었고, 어렴풋이 신라시대의 옛 무덤이라는 것을 알았던 사람도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처음 보는 광경이라면 어리둥절했을 것이라것은 쉽게 상상해 볼 수가 있습니다. 사진은 근대 봉황대 모습.


우선 동쪽에서 오는 걸음을 멈춰 징례문이 있는 북쪽으로 향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곳에는 거대한 봉황대와 봉덕사종(성덕대왕신종)이 있어 걸음을 멈추게 합니다. 아까운 구경거리를 그냥 놓칠 수가 없었겠지요! (빨간 원)


상급 관료라면 마중 나온 경주부윤의 친절한 설명을 듣겠지만, 하급 관료라면 그냥 대충 훑어보고는 곧장 읍성으로 향했을 것입니다. 물론 자세히 보지 못하고 임무에 충실해야 한다는 생각에 돌아서면서 상당히 아쉬워 했을 것입니다. (사진은 옛 봉황대 모습과 봉덕사종이 걸려있었던 종각)  


지금은 봉덕사종과 종각은 봉황대에 있지 않고 봉덕사종(성덕대왕신종)은 '박물관'으로, 종각은 현 '경주 문화원'으로 이전했습니다.


고분군 사이의 봉황로를 기준으로 한 노동동 노서동 고분군...  '봉황대'는 '노동동 고분군'에 속합니다. 지금은 '노동동 노서동 고분군'이란 명칭이 '대릉원 일원'으로 통합되었습니다.


봉황대의 현재 모습입니다.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이 자리에 처음 서 본다면 그 호기심은 지금이나 과거나 다를 것 없다고 생각됩니다.


- 성덕대왕 신종...1,200년간의 험난했던 그 여정   (클릭)

- 과거와 현재가 어울려 사는 곳! 노동(路東), 노서(路西) 고분군(古墳群)   (클릭)

- 성덕 대왕신종(聖德大王神鍾)을 1245년만에 재현한 신라대종(新羅大鐘)   (클릭)

- '봉황대(鳳凰臺)' 글씨는 누구의 솜씨인가?   (클릭)


일제강점기라면 봉황대 맞은편에 이런 모습도 보였을 것입니다. 일제에 의해 최초로 금관이 발굴된 금관총의 모습입니다. 전형적인 일본식 안내판 모습을 볼 수가 있습니다.


호기심 가득 안고 봉황대와 봉덕사종을 뒤로하고 읍성을 향해 갑니다. 그곳은 '노서 노동고분군'의 신비한 모습과 달리 수많은 장사치들의 가게들이 좌우로 장사진을 치고 있었을 것입니다. 또한 고위 관료의 방문이라면 풍악을 울리며 요란한(?) 행차가 있었겠지요! 그때마다 수많은 사람들이 구경하느라 길 좌우로 몰려들었을 것입니다.


홍살문과 옛 남문인 징례문의 모습! 그 사이로 수많은 집들이 보입니다. 일종의 시내권이라고나 할까.....위쪽 읍내전도에서 파란색 원이 홍살문이 있던 장소입니다. 봉황대와는 지척입니다. 아마 이 옛 사진도 서봉황대로 불렸던 130호 고분 위에서 촬영된 것으로 보입니다.


그 홍살문은 지금도 볼 수 있습니다. 비록 복원된 것이지만..... 아마도 중앙의 고위 관료의 방문이라면 경주 부윤은 최소 이 정도까지는 마중을 나왔을 법 합니다. 그리고 이 홍살문은 그냥 세워둔 것이 아닙니다. 무엇인가 경건하고 중요한 성역이 그 뒤 어딘가에 있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그리고 그 성역의 경계와 입구를 상징하기도 합니다. 


경주부윤이 조선왕조 내내 종2품 가정대부(嘉靖大夫, 이후 가의대부(嘉義大夫)로 바뀜), 또는 가선대부(嘉善大夫)라는 고위직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충효를 중요시하는 유교적인 사회에서 이를 해하는 자와 그 지역 수령은 엄격하게 처벌받았습니다. 경주 또한 예외는 아닙니다.


1650년 9월 경주 부윤 나위소가 도임했으나, 1652년 4월 경주 속현 기계에, 예천에서 도망해온 대립이란 종이 있었는데, 예천에서 상전이 쫓아와 잡으려 하자 도리어 그 상전을 죽이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이 일로 인하여 나위소는 목사(정3품)로 강등되고 또한 파직되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이후 목사 서상리, 정양필, 이천기를 거쳐 엄정구가 도임하면서 부윤으로 복권되었습니다.


또한, 1665년 10월 부윤 권령이 도임한 후 1666년 10월 서면에 사는 곽영이라는 여인이 남편을 살해한 사건으로 인하여 1666년 6월 부사(대도호부사(정3품) 또는 도호부사(종3품)인데 둘 중 확인 안됨, 추정으로는 대도호부는 조선시대 몇 안되므로 아마도 도호부사로 생각됨.)로 강등됩니다. 이후 부사 홍처대, 민주면, 이지익, 이세익, 임유후, 권상구, 임규, 김빈을 거쳐 이혜가 도임하면서 부터 부윤으로 복권 되었습니다. (※ 재밌는 사실은 경주에서 예로부터 내려오던 지리지를 증보하여 '동경잡기'를 편찬한 민주면이 부윤이 아니라 부사였다는 것!)

조선시대 부윤들!  목사(빨간색) 및 부사(파란색) 강등 시기와 그 해당자들......        ※ 이미지를 클릭하면 크게 볼수가 있습니다.


 조선시대의 지방 행정은 부, 목, 군, 현의 체제였다. 부(府)는 그중에서도 지방 행정의 중심지 중 하나로 1000호 이상의 큰 고을이었다. 고려시대에도 안동, (安東 경주, 후에 안동으로 옮김.)-안서(安西 해주)-안남(安南 전주)-안북(安北 안주)-안변(安邊) 등에 5도호부가 설치되었고, 이때 도호부사는 3품 이상의 고위 관료였다. 조선시대 들어서는 태종이 지방관제를 정비할 때 대도호부와 도호부를 만들고 안동, 강릉, 안변, 영변에는 대도호부를 설치했고 나머지는 도호부였다. 대도호부의 경우에는 정3품 관료를 파견하여 관찰사와 유수(개성과 전주의 지방관으로 정2품), 부윤(광주, 경주, 의주의 수령, 종2품)를 제외하고는 지방 행정관료 중 최상위였다(정 3품 당하관). 같은 정3품 당하관이었지만 목의 수령인 목사는 한단계 아래로 취급되었으며 도호부의 부사는 그 아래로 종3품이었고, 그 아래로 군수(郡守, 종4품), 현령(縣令, 종5품), 현감((縣監, 종6품) 등의 차례였다. <구글용어사전 中>


홍살문 너머 멀리에는 징례문이 모습이 보였을 것입니다. 하지만 현재는 흔적도 없고, 동문, 북문과 달리 복원 계획도 없습니다. 이 길은 현재 '봉황로'로 불리고 있습니다. 


홍살문을 지나 남문(징례문)까지 거리의 옛 모습이라고 합니다. 아마도 왼쪽은 장날, 오른쪽은 평상시의 모습으로 보입니다.


조선시대 경주의 최고 번화가의 모습은 이렇게 변했습니다.  멀리 복원이라도 된 징례문이 보였더라면 아주 멋진 명소가 됐을 것입니다. 지금도 관광객들이 이렇게 정비 후에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고 있습니다.


경주읍성의 남문인 징례문(徵禮門)의 모습입니다. 경주읍성의 대표적 성문치고는 규모도 그렇고 좀 초라한 모습입니다. 사진 속의 사람의 키와 비교해도 그리 큰 규모의 성문은 아닙니다.  누각에는 고도남루(故都南樓)라는 현판이 걸려있습니다. 


남문의 대략적인 위치는 가로의 주황색 간판이 있는 지점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반대쪽에서 본다면 주황색 간판과 약국 간판 사이에 위치했을 것이라는 뜻입니다. 앞의 큰길은 현재 '화랑로'이며 왼쪽으로는 경주역이 마주 보이는 길입니다.


남문 위치에 앞서 길이 'ㅅ'로 양쪽으로 갈림길이 보입니다. 길 좌우로 꺾어지는 이 길에는 또 다른 사연이 있습니다.


그 길들은 좌우로 각각 이렇게 휘어지는 모습으로 되어 있는데 그 이유는 옛날 이 길이 바로 해자였기 때문입니다. 해자(垓子 또는垓字)는 군사시설로 적의 침입 및 접근을 막기 위해 성 밖을 둘러 파서 못으로 만든 곳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사라지고 그 형태만 간직한 길로 변했습니다.


2009년 '경주읍성 정비복원 기본계획'에 그 모습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과연 수많은 사람들이 다니지만 그곳이 옛 읍성의 해자였다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드디어 읍성에 진입하여 관아로 향하는 길입니다. 남쪽 성벽을 따라 동쪽으로 가다가 북쪽 월성아문이 보이는 쪽으로 향합니다. 걸어가는 길에는 수많은 선정비들이 세워져있는 비각을 보게 됩니다. 영광스럽게도 도열해 있는 비들은 경주에서 선정을 베풀었던 관찰사, 부윤, 영장들의 선정비였을 것입니다. 


경주문화원에 전시된 경주읍성 모형에서 관아 지역 모습!  중앙관리는 읍성의 남문(모형 왼쪽 하단)을 통해 관아로 향했을 것입니다.

(화살표 점선 참조) 


관아의 입구는 이렇듯! 길게 늘어선 작은 비각들을 볼 수가 있습니다. 수많은 옛 경주 수령들의 선정비가 줄지어 서 있습니다. 가장 왼쪽의 사진은 현재 법원과 검찰청이 있는 곳에서 촬영한 것으로 보입니다. 줄지어 서있는 선정비들을 보면서 중앙 관료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이 비각이 있는 중심로 건너편 좌우로는 수많은 장사치들이 장사하고 있는 모습이 보입니다. 가장 우측의 사진은 일제 강점기 경주 고적유람 자동차부의 모습입니다. 누각에는 '月城衙門(월성아문)'현판이 보입니다.


경주관아로 향하는 가장 중심적인 길은 이렇게 보잘것없는 골목길로 변했습니다. 왼쪽은 법원과 검찰청이 위치하고 있고 오른쪽은 119와 경주 경찰서가 위치하고 있습니다. 행정구역 상으로는 '화랑로'로 되어 있습니다.


멀리 경주 경찰서 민원실 입구 즈음에 월성아문 또는 진남루가 위치하고 있었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동경통지에는 진남루라고 하였으나, 일제강점기의 사진에서는 월성아문으로 현판이 걸려있었습니다. 중층문루인 관아문은 일반적으로 가운데 문으로는 수령과 사신빈객이.. 좌측문으로는 지압의 양반이나 아전들이.. 우측문으로는 군관이나 장교가 드나들었다고 합니다. 동경통지에서는 진남루는 일승정(동헌)의 문루로서 그 위에 북을 달고 문열 열고 닫을 때 북을 치고 호각을 불었으므로 고각루(鼓角樓)라고도 불리웠다 합니다.




나주 여행 중에 찾아본 나주 관아의 정수루(正綏樓), 순전히 경주의 월성아문에 대한 궁금증 때문에 찾아간 곳입니다. 아마도 월성아문은 이와 별반 다름없는 모습을 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정수루는 조선시대 나주목 관아(官衙) 동헌(東軒)의 정문이기도 합니다. 월성아문이 복원된다면 필시 이런 모습이 분명합니다.


나주목 관아의 모형! 정수루의 모습이 보입니다. 경주의 월성아문과 완전히 같은 개념으로 쓰인 것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중앙 관료는 드디어 경주관아에 도착합니다. 경주관아는 경주부에 있어서 완전히 사법, 행정, 국방의 중심지였습니다. 이곳에서 비로소 경주 부윤에게 정식적인 환영을 받게 됩니다.


경주의 동헌은 월성아문과 일직선으로 배치되고 삼문을 지나 동헌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이때 육방관속들이 도열하여 대대적인 환영을 받게 됩니다.


현재 동헌의 자리는 KT&G가 위치하고 있습니다. 이곳에 있었던 동헌 건물들은 1914년 부군폐합령이 내려지면서 이곳의 동헌과 부속 건물들은 공공기관으로 새롭게 쓰이거나 민간인에게 불하되었는데, 경주 동헌의 일승각 건물과 삼문도 사찰에 불하되어 동헌에서 옮겨져 현재 법장사(法藏寺) 대웅전과 대문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대릉원 후문(북문) 맞은편에 현재까지도 볼 수 있는 동헌의 삼문과 일승각 건물, 지금은 법장사의 대웅전과 일주문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법장사는 대한불교 조계종 제11교구 불국사의 말사로, 경주 시내에 위치한 포교당이며, 경주의 도심 속 사찰 명소로 알려져 있습니다.


 

법장사 대웅전의 초건 시기는 미상이다. 경주 최초의 경주부 관아 건물군의 일부로 원래는 ‘제승정’이라 했다. 조선 영조 30년(1754) 경주부윤 홍익삼이 중수해 일승정이라 하고 건물의 동쪽 부분을 풍월루, 서쪽 부분을 망경루라 칭했다.<동경통지>


이후 고종 20년(1883년)부터 21년에 경주부윤 김원성이 중건해 일승각으로 개명<경주읍지>하고 경주 동헌의 가장 주된 집채인 정당正堂으로 이용 하였다.


<경주신문>



-도심 속 명품 사찰 '법장사(法藏寺)'  2013년 2월 4일 경주신문    (클릭) 

동헌 건물은 한때 경주군청으로 사용되기도 했습니다. 삼문 지붕 아래 희미하게 '경주군청'현판이 걸려있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옛 사진 삼문에 걸려있었던 경주군청 현판은 경주 문화원 향토사료관에 전시되어 있습니다. 


경주 동헌 서편에 위치한 내아(內衙)! 내아는 경주 부윤이 생활하는 공간입니다. 양반가의 집들은 대부분 안채를 가지고 있습니다. 가족 이외에는 유교적 법도에 따라 외간 남자는 절대 발 들일 수 없는 공간입니다. 따라서 이곳 또한 아무나 들어올 수가 없는 곳입니다. 


한때 엄격했던 이곳 내아는 현재 경주 문화원으로 사용되고 있고 지금은 아무나 들어갈 수가 있습니다.


일제강점기 때에는 내아가 조선총독부 박물관 경주 분관으로 사용되기도 했습니다. 지금은 철거되어 사라진 멀리 맞배지붕에 벽돌을 두른 건물이 금관총에서 발굴된 금관이 보관된 곳입니다. '금관고'라 불리며 보존을 위해 경주 사람들이 기부금을 모아 1923년에 건립한 건물이었습니다. 초대 경주박물관 관장으로 취임하여 10년간 박물관을 지켰던 수묵 진홍섭(1918 ~ 2010) 선생과 평생 경주를 지켰던 진정한 신라인으로 조경받았던 고청 윤경렬(1916 ~ 1999) 선생이 1954년부터 열었던 경주 어린이 박물관 학교의 교실로 사용되기도 하였습니다.



1929년 덕혜옹주의 총독부 박물관 경주분관 방문 당시의 모습입니다.

내아의 가장 중심된 건물로 현재 향토 사료관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일제강점기때는 총독부 박물관 경주 분관의 전시실로 이용되기도 하였습니다. 당시 초대 조선총독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内 正毅,てらうち まさたけ )는 논어의 온고지신(溫故知新: 옛것을 익히고 그로 인해  새로운 것을 안다)에서 따와 1915년 9월 중순 당호를 온고각(溫古閣)으로 정하고 글씨를 쓰고 그것으로 현판을 달았습니다.


지금도 경주 문화원 향토사료관에는 데라우치의 온고각 현판이 남아 있습니다.


하지만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당장 '시급'히 해야 할 공식행사가 있습니다. 이미 의관을 갖춰 입은 하급 관료라면 이곳 관아로 향하기보다는 바로 집경전(集慶殿)으로 바로 가야 했습니다. 하지만 고위 관료의 경우 관아에 들려 의관을 갖춰 입고 가야 했을 것입니다. 차이는 있겠지만 '집경전'을 가장 먼저 가야 한다는 것은 틀림없는 출장 관료의 공식행사 행사였을 것입니다. 유심히 보면 집경전으로 가는 길 초입에 또 다른 홍살문이 보입니다. 남문 밖 홍살문에 이어 두번째 홍살문을 지나게 됩니다. 


집경전은 경주읍내 전도를 보더라도 경주읍성 內 그 무엇보다도 압도적으로 크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그만큼 중요한 곳이라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경주읍성 모형에서도 집경전의 모습이 보입니다. 여기도 홍살문의 모습이 뚜렷이 보입니다. 세번째 홍살문으로, 모든 홍살문은 집경전을 향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고려가 망하고, 천명(天命)으로 이룩된 새 이씨왕가(王家)의 역성혁명 정통성을 주장하지만 쿠데타로 왕권을 잡은 것이 여전히 큰 약점이 되었고, 그 정통성 결여가 태조 이성계에게는 크나큰 근심거리였습니다. 누구도 왕이 될 수 있다는 근거를 제시한 것이 바로 태조 자신이기 때문입니다. 이에, 이러한 위태로운 시국을 해결하고자 실시한 방법 중 하나가 왕의 어진을 그려 각각 큰 고을을 중심으로 봉안케하고 그곳으로부터 새 왕조에 대한 민심을 집결하려고 했습니다. 그렇게 하여 세워진 것이 바로 그 어진을 모신 곳... 즉, 어용전(御容殿)으로.. 경주의 어용전인 집경전은 태조7년(1398) 판삼사사(判三司事) 설장수(偰長壽)에게 명하여 자신의 어진을 계림부(경주부)에 어용전(御容殿)을 짓고 봉안하니 그것이 최초 집경전 탄생의 배경이 되었습니다. 조선 초 경주라는 큰 도시에 어용전을 짓게 한 것을 보면 경주의 민심이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았던 것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후! 조선이 성장하면서 이 집경전은 경주의 가장 큰 성역이 되었습니다.  


때문에 경주를 방문하는 관료 누구라도 (또는 충효를 높은 덕목으로 보는 유학의 기본 이념을 충실히 지키는 선비 또한 포함)이 집경전에 서 예를 갖추는 것이 가장 우선시 되었던 필수 공식 행사였습니다. 



하지만 세월이 흘러 집경전은 임진왜란에 불타고 다행히 어진은 강릉 임영관으로 옮겨져 그곳에서 또 다른 집경전이 생겼지만, 화재로 경주 집경전에서 옮겨 온 어진은 완전히 소실되고 맙니다. 이후 옛 집경전의 터(집경전구기,集慶殿舊基)라는 정조의 글을 새긴 비와 그 터만 남았다가 그 또한 화재로 사진처럼 폐허로 남았습니다.


성역인 집경전으로 가는 초입이라 경주읍내전도의 표식처럼 '홍살문'이 세워져 있었던 곳입니다. 가까운 곳에 119와 경주 경찰서, 경주상공회의소가 멀리 보입니다.



가장 성스러운 성역으로 가는 길은 이렇게 보잘것없는 좁은 골목길로 남았습니다. 


'경주읍내전도' 또는 '집경전구기도'에도 표현되어 있는 석실은 현재까지도 남아 있습니다. 하지만 골목 가장자리에 위치하고 있으며, 옛날의 성스러운 성역 이미지는 완전히 사라진 모습입니다. 


정조가 내린 글을 새겨 만든 집경전구기(集慶殿舊基)비는 당시 석실이 있던 자리 앞에서 조금 옮겨져 현재는 그 일대의 석조 유물과 하마석이 '한국원자력환경공단(구 경주여중)'앞마당으로 옮겨져 있습니다. 주변 요건이 좋지 못해 복원하기는 어려울 듯 보이지만, 가장 먼저 복원을 검토해야 할곳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경주 옛 집경전의 미스터리 석실과 집경전구기비(集慶展舊基碑)  (클릭)


집경전에서 예를 갖췄다면 또 다른 중요한 임무를 다해야겠지요! 집경전으로 안내했던 부윤과 그 일행 그리고 중앙 관료는 이제 왕명을 전해야 할 시간이 되었습니다. 즉! 교지를 부윤에게 전달해야겠지요! 그 왕명을 하달하는 곳은 큰 고을이면 어느 곳에 나 있었던 객사에서 이루어지는 일입니다. 사극을 보면 황당하게도 왕명을 담은 교지를 대략 관아 또는 심하게는 내아에서 전달하는 웃기는 장면을 종종 연출하기도 합니다. 


모형으로 보는 경주 객사, 흔히들 객사는 지방으로 출장 간 관료들의 숙소로만 알려져 있는데 그것은 크나큰 잘못입니다.  여러 기록을 보면 객사는 궁실 즉, '지방에 위치한 궁궐의 한 부분'으로 소속되어 모든 지방 도시의 관아 건물 중 가장 격이 높은 건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특이하게도 경주는 '집경전'이라는 태조의 어용전이라는 존재로 인하여 두 번째로 격이 높은 건물이 되었겠지요! 통상 조선시대 도시들의 가장 격이 높은 건물은 어용전이 없는 한~ 객사가 가장 격이 높은 건물로 인식된다는 것입니다.


동경구도(東京舊都)라고 쓰인것 같습니다. 확실히는.....ㅠㅠ!  하지만, 아래 사진의 경주 부윤 정현석이 쓴 동경관 현판 뒷면에 ‘동경신라구도야東京新羅舊都也(동경은 신라의 옛도읍이라...)’로 시작되는 정현석의 글이 있다고 합니다. 이와 연관이 있어 보입니다. 당시 경주를 그렇게 자주 표현했었나 봅니다.


경주 객사 동경관(東京館)의 입구 입니다. 지금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없고 사진으로만 확인이 됩니다. 


경주객사 동경관의 모습입니다. 대부분 객사의 모습은 비슷합니다. 중앙에 정청이 있고 좌우로 좌익헌과 우익헌이 배치됩니다. 정청은 죽은 조상의 위폐처럼 현재 살아있는 임금의 전패(殿牌)를 모신 성스러운 곳입니다. 또한 통상 좌익헌은 문관이 우익헌은 무관이 묵게 되는데 이는 정청을 중심으로 문무백관의 모습으로 배치된 형태입니다. 따라서 문무관이 여전히 좌우로 임금을 보필한다는 상징적인 의미 또한 내포되고 있습니다.  <경주객사 동경관의 모습과 지금은 사라진 객사 입구 및 정자    -사진출처: 경주신문>


객사의 기능 중에 지방 출장 중인 관료들의 숙소 역할도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전패(殿牌 : 임금을 상징하는 나무패로, ‘전(殿)’자를 새김)를 안치하고 초하루와 보름에 경주 부윤 및 관리들이 향망궐배(向望闕拜 : 달을 보면서 임금이 계신 대궐을 향해 절을 올림.) 하는 것으로 한양에 있는 임금을 대신하는 기능이었습니다.  


아직도 남아 있는 경주 객사 동경관의 현판!  '임오계추(壬午季秋)'와,'신정현석(臣鄭顯奭)'의 낙관이 확인됩니다. 정현석은 1882년 임오년 6월에 경주부윤으로 부임하여 그해 11월에 다른 곳으로 떠난 인물입니다. 그러므로 1882년 정현석이 경주를 떠나기 직전에 썼던 글씨임을 알 수 있습니다. 앞서 옛 동경관의 흑백사진의 정청 지붕아래를 살펴보면 이 현판이 달려있는 모습을 확인할 수가 있습니다.


동경관(東京館)의 동경(東京)은 고려시대 경주의 옛 이름이었습니다. 세월이 지났어도 경주를 동경이란 별칭으로 사용했던 예는 수없이 많습니다. 


낙랑부 현판! 시대별로 경주부를 계림부(鷄林府) 또는 낙랑부(樂浪府)로 불렀던 시대도 있었습니다. 낙랑부로 불렀던 정확인 사유는 알수없으나, 경순왕이 고려 5대왕 경종(975~981)때 낙랑왕으로 책봉된 이유와 무관하지 않아 보입니다. 또한 태조왕건의 첫째딸을 경순왕과 결혼시키고 낙랑공주라 불렀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이 현판은 어디에 걸려 있었는지는 알수 없다고 합니다. 다만 관청 어딘가에 걸렸던 것이라는 건 쉽게 짐작 할수 있습니다.



아무튼 경주부윤과 수행원들은 중앙관료와 함께 집경전을 나와 객사 즉, 동경관으로 향합니다. 동경관은 그리 멀지 않은 남쪽 관아의 동쪽에 위치하고 있고, 유심히 보면 집경전과 동경관은 남북 일직선상에 배치되어 있습니다. 현재 동경관으로 가는 이 길은 상공회의소 및 경주 경찰서와 119가 있는 '중앙로'입니다.


현재 객사 동경관은 경주 교육 삼락회 건물에 가려 잘 보이지 않습니다. 안으로 들어가 건물 왼쪽으로 돌아가면 동경관의 모습을 볼수 있습니다. 아직도 이곳에서 헤매는 답사객들이 많이 보입니다.

현재 동경관은 정청과 우익헌은 사라지고 좌익헌만 남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제 생각에는 이 건물은 우익헌으로 보입니다. 통상 보는 사람의 입장으로 보면 그사람을 중심으로 좌측이 좌익헌이겠지만 옛사람들은 중요한 정청의 입장에서 건물의 위치를 봐왔고 또한 그들의 눈으로 봐야합니다. 따라서 정청을 바라본 방향이 아닌, 정청에서 본 방향으로 따진다면 이 건물은 우익헌이 됩니다. 사극에서 용좌에 앉은 임금을 기준으로 보면 임금의 좌측과 우측이 분명하게 구분될 것입니다. (참고로 동경관 정면은 담으로 막혀 좁은 공간만 있습니다. 현재 동경관의 넓은 공간은 동경관의 뒷마당인 셈입니다.) 


또 다른 기준으로 궁실제도를 보면 '좌묘우사(左廟右社)라는것이 있습니다. 좌측에 종묘, 우측에 사직단을 둔다는 것입니다. 현재 우리나라 사직단과 종묘의 위치를 보면 경복궁에서 바라본 방향을 기준으로 좌측과 우측이 구분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바라본 것과는 반대 개념인 것이지요! 이러한 이유로 봤을 때 저 건물은 객사의 우익헌이 틀림없어 보입니다.


여전히 명칭이 모호하다는 생각이라면, 통상 '서익헌', ' 동익헌'이라 하여 배치 방향으로 구분하면 될 것입니다. 그렇게 따진다면 현재 이 건물은 물론 서익헌이 되겠지요!


동경관의 앞마당인 곳은 이렇게 대형 마트 주차장으로 변했습니다.


서익헌도 예전 옮겨졌다고 하더군요! 서쪽에서 동쪽으로 이동되었다고 합니다. 추후 삼락회 건물을 헐고 이 서익헌을 원 자리로 옮기고 정청과 동익헌을 복원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동경관의 앞마당은 현재 마트의 대형 주차장으로 향후 어떻게 협의될지 궁금합니다.


중앙의 관료는 바로 이 자리에서 정청의 문을 열어 전폐를 향해 예를 갖추고, 다시 전폐를 등지고 부윤을 마주보게 돌아서서 왕명을 적은 교지를 읽습니다. 또한 명을 받는 경주부윤은 중앙관료를 마주하고 문무관리들은 좌우로 도열하여 예를 갖추게 됩니다. 이어 왕명(교지)을 전달한 중앙 관료의 큰 임무는 다하였고, 이후 왕명을 이행할 경주부윤의 처리만 남은 상태가 됩니다. 하지만 병력을 움직이게 되는 무관직의 임무를 하달할때는 약간의 절차가 더 있습니다.


무관직의 임무 중 군사를 동원할 때는 교지뿐만 아니라 임금이 보낸 병부패를 전달합니다. 당시 경주부윤은 병마절제사를 겸하고 있기 때문에 군사권이 있었습니다. 만일 경주부윤이 군권이 없는 경우 군권에 대한 권한이 있는 병마절도사 또는 병마절제사, 수군통제사등이 참석하여 명을 받아야 합니다. 우선 왕명(교지)을 받고 임금이 내린 반달 모양의 병부패를 건네받고 자신이 항상 패용하고 있는 병부주머니에서 또 다른 병부패를 꺼내어 두 조각을 맞추어 봅니다. 이는 임금의 명이 없이 함부로 군사를 움직이지 말라는....즉, 군사 반란을 방지하는 일종의 보안장치인 신표(信標) 였습니다. 


병부패는 동글납작한 나무패로 한 면에 ‘發兵(발병)’이란 글자를 쓰고 또 다른 한 면에 ‘觀察使(관찰사)’, ‘節度使(절도사)’ 라는 관직이 새겨져 있습니다. 가운데를 쪼개서 오른쪽은 그 책임자에게 주고 왼쪽은 임금이 가지고 있다가, 군사를 동원할 때 교지(敎旨)와 함께 그 한쪽을 내리면 지방관이 두 쪽을 맞추어 보고 틀림없다고 인정하면 군대를 동원했습니다.


이순신 장군이 항상 패용한 발병부(發兵符) 또는 병부(兵符)!   병부주머니와 병부갑 그리고 병부패의 실제 모습!


사극을 보면 장군의 허리끈 끝에 주머니가 한 개 또는 두 개 이상이 매달려있는 것을 종종 볼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게 무엇인지 궁금해하시는 분들이 많았을 듯! 그것은 군권을 가진 자가 임금의 명 없이 함부로 군사를 움직이지 말라는 일종의 보안 장치인 (발) 병부였다는 것!


비록 동경관 앞마당은 저렇게 대형마트의 주차장으로 변했지만 다행히 동경관 건물은 전체를 다 살릴 수 있는 공간이 있고, 현재 나주의 좌우 대칭이 아닌 서익헌이 쪼그라든 금성관 꼴은 안 날것 같아 보입니다. 사진은 현재 나주 금성관의 모습으로 좌우대칭이 아닌 모습이.... 영~ 불편하게 보여집니다.

 

경주 옛 독시장!  멀리 동경관의 모습이 보입니다. 이곳은 현재 어디쯤의 모습일까요?


앞서 이야기 했듯! 중앙 관리의 임무가 병권과 관련되거나 무관일 경우 당연히 군관련 집무소를 찾아가게 됩니다. 그곳은 북문 근처의 주진당(主鎭堂) 또는 양무당(養武堂)으로 이동하여 군사작전 및 병권에 관련된 사항을 경주에 부임한 영장(營將)의 보고를 받게 됩니다. 주진당은 주진청으로 불리기도 하며 경주진 '병마절제사'의 집무소입니다. 주진(主鎭)이란 조선시대 각 도의 병마절도사와 수군절도사가 주재하는 병영 또는 수영을 말합니다. 동경통지와 경주읍지에 진청은 양무당 동측에 있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통상 경주부윤이 병마절제사를 '겸직'하고 있었습니다.


조선 시대 '영장'은 지방의 각 군사 진영에 있었던 최고 관직으로 지역 규모별로 품계가 다를 수도 있지만 정3품 당상관 또는 종3품 당하관 정도의 지휘관으로 볼 수가 있습니다. 지금으로 따지자면 사단장'★★' 소장 또는 군단장'★★★'중장 정도의 계급이 아닐까 합니다. 


경주부윤의 화려한 갑옷(두석린갑,豆錫鱗甲), 투구의 이마 가리개에는 으뜸 장수라는 의미인 원수(元帥)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습니다.


읍성 모형에서도 양무당의 모습이 보입니다. 북문인 공진문 직전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빨간 원안의 건물은 아직까지도 현존하는 건물로 지금은 경주 문화원 경내로 옮겨져 있습니다.


북문인 공진문이 도로 끝에 위치하고, 이 길 왼쪽에 양무당이, 오른쪽에는 주진청이 있었을 것입니다. 아마도 현재의 군사령부의 역할을 한 것으로 생각됩니다. 현재 이 길은 봉황로로 되어 있습니다. 공진문은 복원될 것으로 보이며, 하지만 동문인 향일문과 달리 이른 시간에 복원은 힘들어 보입니다.


옮겨진 양무당(養武堂)의 부속건물, 당시에는 무관들이 집무하던 곳이라고 합니다. 'ㄷ'자형의 건물로 경주 문화원 경내로 옮겨졌습니다. 


만일 병사들의 상태나 훈련 정도 등등 을 사열하거나 점검한다고 하면 양무당에서 보고받고 읍성 서쪽 외곽의 군영으로 향했을듯 합니다. 그곳은 군사시설들이 있던 곳으로 장교 및 사병들의 숙소 집무실이 있고 넓은 연병장이 있는 곳이었습니다. 이곳은 과거 서천 섬 형태(여의도 같은..)로 있었으나 그 지형이 완전히 없어지고 서천(형산강)으로 완전히 수몰되어 사라졌습니다.


<사친출처:토함산솔이파리님>


경주부의 군영이 있었던 장소! 1920년대만 하더라도 서천(형상강)변에는 이렇게 큰 섬이 있었고 조선시대 말까지 이곳에는 군영이 있었습니다. 이 사진에서도 서천의 큰 섬은 확인이 되나 군영의 흔적은 보이지 않습니다.


보행자 및 자전거 전용 다리인 '장군교'에서 바라본 서천(형산강)!   원래 이곳은 서천(형산강)에 큰 섬이 있었고 군영이 있었지만 지금은 이렇게 흔적도 없이 사라졌습니다. 


지역의 역모사건이나 반란 사건이 벌어지면 왕명을 받은 중앙 관료는 의금부(義禁府, 수사기관으로 현재의 국가정보원)에서 급파되며 동헌에서 직접 추국(推鞫)을 받게 됩니다. 임금이 직접 하는 친국(親鞫)의 형태로 하려면 한성의 의금부로 압송해야 하나, 경미하거나 사건 파악이 미미할 경우 옥에 가두고 파견 관료에 의해 추국을 하겠지요!  하지만 임금의 친한 종친이거나 임금과 깊은 친분이 있는 관련자의 경우 급파된 관료에 의해 사적으로 확인할 필요가 있었을 것입니다. 따라서 직접 객사에서 나와 옥사로 조용히 다녀오는 일도 있었을 것입니다.


읍성 모형에 표현된 옥사, 옥사는 읍성 내 서북쪽에 위치하며 주변에는 대부분 전답으로 되어 있습니다. 옥사를 전답지 중간에 위치한 것은 탈출 및 도망자를 쉽게 찾을 수 있도록 환경의 여건을 고려한듯합니다. 


옥사는 2동으로, 비록 죄인이라도 남녀 구분을 엄격하게 대했던 조선시대의 유교 의식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옥사 발굴 모습과 옥사의 모형, 이곳에는 1945년부터 문화 중고등학교가 있었으나, 1996년 학교가 이전하고 주거용 신축건물이 추진된다는 계획으로 인하여 1997년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가 발굴조사를 실시하면서 조선시대의 옥사 모습이 확인된 것입니다.


현재는 우방명사마을 내에 그 옥사터를 다시 매립하고 그 특유의 원형 구조를 따라 정원을 꾸며놓았습니다. 옥사터가 있는 우방 명사마을은 원자력 환경공단 입구에서 서쪽 길 따라 약 300m 지점에 위치(명사마을 입구)하고 있습니다.

 


모든 일정을 마친 중앙 관료는 객사에서 잠시 휴식을 취한 뒤, 경주 부윤이 마련한 연회에 초대됩니다.


육방(六房) 아전들의 집무소인 길청에서는 중앙관료 접대에 관련하여 부족함이 없도록 준비합니다. 경주시에서 발간한 <경주읍성 정비복원 기본계획, 2009>에는 육방의 수성인 호장들의 집무소가 부사(府司)라고 되어 있으나, 확실하진 않습니다. 길청 외에도 연청, 작청, 질청, 인리청등 여러 별칭이 있습니다. (동경통지에 부사는 객사 북쪽에 있으니 바로 영선이다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영선은 아마도 관아 시설물을 건립 또는 고치는 일을 담당했던 곳이 아닌가 추정)


지공청(支供廳)은 관아에 필요한 음식물 제공하는 곳으로 중앙 관료의 접대를 위해 분주한 하루를 보내게 됩니다. 또한 객사에 숙박하게 되는 관료의 식사 또한 담당해야 하므로 지공청은 통상 객사 가까운 곳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경주의 지공청은 객사 남쪽에 위치합니다.


동문 근처의 교방(敎坊)에서는 연회의 흥을 돋아줄 관비와 악공 준비로 분주하게 됩니다.

중앙관료는 경주 부윤이 정한 누정을 정해 연회를 열고 회포를 불어줍니다. 장소는 객사의 부속건물인 객사 내 정자도 있을 것이고 지역 유명 정자 또한 그 대상이 됩니다. 옛 신라의 수도라 그런지 포석정에서의 연회도 있었다고 합니다. 또한 중앙 관료가 요구한 장소에서도 연회를 하기도 했었습니다.

동경잡기의 기록에서 보면 객사 동쪽의 빈현루(賓賢樓,이후 터에 군기청 세워짐), 서쪽의 의풍루(倚風樓)가 될수도 있고, 읍성 동쪽의 광풍루(光風樓), 성밖 오릉 인근의 남정(南亭), 부의 동남쪽 5리밖에 있었다는 동정(東亭), 성밖 백률사의 봉서루((鳳棲樓, 경주의 풍경을 가장 잘 조망할수 있는 곳) 더해서 동해안 가의 이견대(利見臺) 또한 그 대상이 될 수도 있었습니다.

모든 일정을 마친 관료는 객사인 동경관의 좌익헌(무관인 경우 우익헌)에서 하루를 지내게 됩니다. 다음날 경주의 이름난 곳을 둘러 보기도하고 경주의 선비들과의 만남도 있었습니다.


 


물론 당연하게도 조선의 근간인 성리학을 공부한 유학자 출신 관료라면 능히 성밖  남쪽에 위치한 '경주향교'의 대성전을 찾았을 것입니다. 경주의 향교 자리는 신라의 국학(國學) 고려의 향학(鄕學)으로 이어지는 유서 깊은 장소입니다. 또한 대성전에 배향된 중국의 5성(聖), 송조(宋朝) 6현(賢), 동국 18현을  제향하고 있어, 경주 지역의 유림들과 함께 관료 자신이 학문적 계파에 포함된 경우에는 더더욱 같이 찾을 수밖에 없었을것 입니다. <사진출처 경주향교>


 

동국 18현: 홍유휴 설 총, 문창후 최치원, 문성공 안 향, 문충공 정몽주, 문경공 김굉필, 문헌공 정여창, 문정공 조광조, 문원공 이언적, 문순공 이 황, 문정공 김인후 , 문성공 이 이, 문간공 성 혼, 문원공 김장생, 문열공 조 헌, 문경공 김 집, 문정공 송시열, 문정공 송준길, 문순공 박세채



향교의 대성전에서 예를 다한 관료는 경주의 민심을 알아보고자 동행한 지역 유림들과 함께 가까운 사마소를 방문합니다. 사마소(司馬所)는 생원진사시(生員進士試)인 사마시(司馬試) 출신의 젊은 유림(儒林)들로 구성되며 그 당시 지방자치 기관으로서 수령의 자문기관으로 존속했습니다. 이곳에서 관료 자신의 당색 또는 계파에 따라 깊은 토론이 이어지기도 합니다. 이렇듯 사마소는 지역에서 교화 및 민생을 고민하는 행정자문을 하다가 훗날에는 상당한 압력단체로 변모합니다. 따라서 경주부윤과 함께 이곳을 들릴 수밖에 없었을 듯합니다. 또한 중앙 관료에게는 지역 민심을 알아보기에는 최적의 장소였을 것입니다.  


나라를 세운 태조에 대한 예(禮,집경전), 현재 모시고 있는 임금에 대한 예(禮,객사 정전), 학문적 스승들에게 대한 예(禮,향교의 대성전)는, 아마도 조선의 절대다수를 이루는 유림들로 본다면 필수 코스가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경주 박씨 시조의 숭덕전(崇德殿), 경주 석씨 시조의 숭신전(崇信殿), 경주 김씨 시조의 숭혜전(崇惠殿), 경주 이씨 시조의 악강묘(嶽降廟)


여러 공식 또는 비공식 행사를 마치고 중앙 관료는 개인적인 방문을 하게 됩니다. 경주라는 역사적 특성이 있다 보니, 자신의 시조가 모셔진 사당이 있을 수 있습니다. 유교는 충과 효를 중시하는 성격이 강하기 때문에 이 또한 반드시 찾았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또한 영조 때에는 경주에서 조상묘를 찾는 기류가 상당했습니다. 또한 이미 알려진 일부를 제외한 왕릉은 당시에 지정된 왕릉이 많았습니다. 따라서 조상의 사당과 묘를 참배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겠다 보입니다.


사당 방문과 동시에 당시 국립이었던 향교와 달리 개인적 성향(가문 및 학풍)이 강한 사립 개념의 서원내 사당(書院)에서의 예를 올리는 경우 또한 있을 수 있는 일입니다. 경주에도 서악서원(西岳書院), 옥산서원(玉山書院), 동강서원(東岡書院), 용산서원(龍山書院)등 여러 규모가 크고 유명한 서원들이 있습니다. 


경주부 내의 서원!  서악서원(西嶽書院), 옥산서원(玉山書院), 동강서원(東江書院), 용산서원(龍山書院)


또 빠질 수 없는 곳이 한 곳 있으니.... 바로 그 유명한 경주 최부자집입니다. 물론 높은 관료 출신 집안은 아니지만 경주 최부자에 관한 이야기는 전국에서도 명성이 자자한 곳이니 필히 방문했을 것이라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또한 최부자집에서 과객을 후하게 대접했던 이유는 각지에서 몰려든 수많은 사람들에게서 고급 정보들을 수집하는 목적도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한 가운데 중앙 관료의 경주 입성은 대단히 중요한 정보를 입수하는데 있어서 절호의 기회였지요! 따라서 중앙 관료가 직접 찾아가든, 아니면 직접 초청하여 접대를 하든 최부자집에서는 융숭한 대접을 하고 또한 조정에서 돌아가는 큰 정보를 습득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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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하여 대략 임무를 마친 중앙관료는 경주부를 떠나 한성으로 돌아갈 준비를 합니다. 화급한 사안이 있어 급히 보고하려 한다면 관료는 보고서 격인 장계를 작성하고 경주부윤에 일러 파발(擺撥)을 먼저 보내야 했을 것입니다. 피각대(皮角帶)에 장계를 넣어 밀봉하고 위급한 상황에 따라 방울을 달아셋을 달면 3급(急: 초비상), 둘은 2급(特急), 하나는 1급(普急) ) 현재 상황을 표시하여 보냈을 것입니다.


중앙관료는 모든 임무를 완수하고 한성으로 발길을 돌립니다. 하지만 한성까지는 또다시 12~13일간의 긴 일정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중앙 관료들의 지방 출장은 고단하기 짝이 없는 일정이었습니다. 경주부윤의 성대한 연회는 아마도 이러한 고단한 여정에 대한 배려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일제강점기의 경주 관아는 앞서 이야기한 바대로 군청으로, 내아는 총독부 박물관 경주 분관으로도 사용되었습니다. 급기야 관청의 건물들은 분해되고 법장사로 매각되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일제강점기 경주 정치의 중심지는 서서히 몰락하는 과정이 되었습니다. 아울러 일제에 의해 각종 신식 건물들이 그 관청 일대를 매우기도 했습니다. 


경주관아와 객사(동경관)사이에는 야마구치(山口) 병원이라는 신식병원이 세워졌습니다. 현재는 화랑수련원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1934년, 이곳에서 근무하던 일본인 의사였던 다나카 도시노부(田中敏信)는 흥륜사터에서 농부가 발견하여 한 고물상에 팔았던 얼굴모양의 수막새를 발견하고 그 모습에 매료되어 쌀 10가마 혹은 40가마 정도의 거금을 들여 사들입니다. 또한 경주 고적 보존회 소속의 '오사카 긴타로(大坂金太郞)'라는 다른 일본인에 의해 1934년 조선총독부의 기관지 <조선>6 월호에 '신라의 가면와'라는 제목의 글과 함께 사진이 소개되면서 널리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1944년, 다나카 도시노부가 일본으로 돌아갈 때 가지고 갔고, 국내에서는 알려졌지만 그 후 흔적이 오리무중인 상태가 되었습니다.

시장의 음식점들.... 그 뒤로 야마구치 병원이 보이는 것을 보면 이곳은 이곳의 위치는 경주 경찰서 또는 법원 정도 될 것 같습니다.


하지만 경주 박물관 박일훈 관장에 의해 일본 출장 중, 그 수막새를 기관지에 소개했던 오사카 긴타로에게 그 소재를 듣게 되었고 그의 중재로 각고의 노력 끝에 1972년 10월! 다나카 도시노부씨가 직접 박물관에 찾아와 기증해 다시 고국에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2012년 10월에는 얼굴무늬 수막새 기증 40주기를 맞아 경주 박물관에서 특집 전시를 하기도 했습니다.

<1972년 10월 14일 동아일보 기사>


채를 파는 가게, 여기서도 멀리 야마구치 병원이 보입니다. 경주 경찰서 맞은편 경주 탑마트 정도의 위치로 보입니다.



일제강점기 경주 금융조합! 지방의 금융조합 개설은 1907년 5월 30일 칙령 제23호로 제정 공포된 지방금융조합규칙에 의거해 조직되었고, 각 지역에서 수탈정책을 담당하였던 악질 금융기관이었습니다. 


멀리 깃발뒤로 경주 금융조합의 모습이 보입니다. 이곳은 경주 소방서 앞길 정도로 보입니다. 


이곳에 근무한 경주 금융조합 이사 '오히라(小平)'는 조선 총독 데라우치가 경주를 순시하던 중, 오히라의 집 정원에서 완전한 석불좌상을 보고 깊은 관심을 보이자 서울의 총독 관저로 이 석불을 뇌물 격으로 진상하게 됩니다. 그 이후 그 불상은 원래 자리로 돌아오지 못하고 왜성대(倭城臺) 총독관저에서 '청와대 불상' 또는 '미남불'이라는 별칭을 가지고 아직까지도 청와대 경내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서울시유형문화재 제24호 석조여래 좌상! '미남불'로 불리며 청와대 불상이라는 별칭이 있습니다. 1912년에 옮겨졌다가 1927년 총독부 관저가 신축되면서 당시 경무대(현 청와대)터로 옮겨졌습니다. 이후 1989년 대통령 관저 신축 때 지금의 자리로 옮겨졌습니다. 


일제강점기 금융조합 이사 '오히라(小平)'가 근무했던 악질 경주 금융조합 자리에는 현재 경주상공회의소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건물 서쪽에는 KT&G건물이 있으며 이 자리는 앞서 살펴 본 바 경주 관아의 자리였습니다. 즉! 일제강점기 악질 금융조합 건물은 조선시대 경주 최고의 권위 옆에 떡하니 자리했었던 셈입니다. 


1932년 일본으로부터 자재를 들여와 건립한 일제강점기 일본 조동종의 포교당 건물, 한눈에 봐도 전형적인 일본 사찰의 모습입니다.


한일 우호공원 조성의 일환으로 현재 수리되어 아직까지 잘 남아 있습니다. 정식 명칭은 구 서경사(舊 西慶寺)로 2006년 12월 문화재 등록 290호로 지정되어 있는 등록 문화재입니다.


구 서경사는 현재 판소리 전수관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일제강점기 일본 조동종의 포교당 즉 일본 사찰의 이미지라 좋지 않게 볼 수도 있지만, 조동종은 현재 조선을 포함한 아시아 침략에 대한 통렬한 참회를 하고 있는 일본 최대의 불교 종파입니다.


이곳과 마찬가지로 군산의 동국사는 현재 남아 있는 일본식 사찰 건물입니다. 이곳에는 조선침략을 참회하고자 세운 최초의 '참사문비'가 세워져 있습니다. 일본 조동종 소속 승려들이 2012년 과거 식민지 정책과 전쟁에 가담했던 만행을 참회하고자 동국사 앞마당에 기증한 것입니다.


- "조선침략 동조한 일본 불교 고발합니다."  한겨레   (클릭)

- "아시아 침략에 협력한 조동종의 참회문을 보면서..." 불교 포커스  (클릭)

- "아베는 뻔뻔한 인물" 일본 조동종 이치노헤스님 日 각료 신사참배 신랄하게 비판   불교신문   (클릭)

- "참회합니다” 日 불교 참사문비 제막"     현대불교  (클릭) 


읍성 동쪽에서 계림초등학교, 집경전지를 지나 한국원자력환경공단 정문쪽으로 나오다 보면 꽤 오래되어 보이는 건물이 항상 궁금 했었습니다. 이후 옛 화교학교였다는 것을 알게 된 것도 얼마 전의 일이었습니다. 이에 더해 이곳이 조선총독부 경주 분관장의 관사 자리였다는 것도 '경주포커스'신문의 기고를 보고 최근 알게 되었습니다.


모로가 히데오(諸鹿央雄, 좌)! 1929~1933년까지 조선총독부박물관 경주분관 초대 관장을 지낸 모로가는 금관총 출토 금제 유물을 오쿠라 다케노스케에게 팔아넘긴 희대의 도둑놈이라 불릴만한 인물이었습니다.  그곳도 박물관장의 직분으로... 


오쿠라 다케노스케(小倉武之助,1896~1964, 우)는 일제 강점기 남선합동전기회사의 사장이던 그가 1922년에서 1952년까지 한반도 유물을 싹쓸이하다시피 한 희대의 도굴왕 또는 장물아비로, 한일 유물 반환 관련 문제가 있을 때마다 빠짐없이 거론되던 자입니다. 여전히 불법 반출 혐의가 있는 유물들은 돌아오지 못하고 있습니다.


- 경주 시내에 있는 화교학교와 협회 터 <한양대 동아시아 건축역사 연구실>   (클릭)

- 서라벌 별곡4 경주화교소학교  경주포커스   (클릭) 

- 서라벌 별곡5 동부동 77-7번지  경주포커스   (클릭) 


네이버 지도 항공뷰로 찾아본 경주읍성내 유적지들.... 머리속에 스스로 관료가 되어 경주 읍성내를 돌아보는것도 좋은 추억이 될것이라 생각됩니다.


 

 

장장 2개월에 걸친 포스팅입니다. 


집중하며 써야 하는데 중간에 일이 생겨 지속적으로 쓰지 못한 것이 원인입니다. 


그러다 보니 그만큼의 시간이 흐르고, 자주 끊어지게 되니 엄청 지겨운 포스팅이 되어 있었습니다.


포스팅을 완료하고,  글쓰기 예약 등록을 하니


앓던 이가 빠진 기분입니다.


스크롤 압박이 상당한 내용의 글이라..... 


이글 또한 끝까지 읽어 보신 분들은 참으로 대단한 분들이실 듯!


읽어보시고 여러분들도 중앙 관리가 되어 열답(열심히 답사!)하시길 추천합니다.



하지(夏至)를 앞둔  33 의 무더 날에....




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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