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대미술관 현대예술문화 강좌

2017년 1학기 현대예술문화강좌 2강- 동경으로 유학가다.. 고희동 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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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4. 27. 2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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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둘째 주 목련은 완전히 지고 벚꽃이 절정이 되어 눈이 부시게 피어난다. 

서울대 미술관으로 현대예술문화 강좌 <한국 근현대미술사 바로가기> 두번째 강의를 들으러 가는 길이다.




자,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20세기 초 근대에 활동했던 우리나라의 예술가들을 만나봐야겠다.
 


일본이 1870년대 메이지유신을 단행하면서 일찌감치 서양의 문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면서 이전까지 일본 문화보다 우위라고

자부했던 조선의 문화가 상대적으로 일본에게 밀리면서 일본과 우리 조선의 처지가 돌연 바뀌어버렸다.

서구 문물을 일본을 통해서 접하고 서양 선교사들이 속속 들어오면서 1910년대 우리나라에도 변화의 바람이 불어왔다.

서양의 문물이 물밀듯이 밀려오고 이제까지와는 다른 방식으로 살아가는 혁명과도 같은 세상이 찾아왔다.


물론 우리가 객관적으로 처음 개혁의 물꼬를 틀게 된 것은 일본으로 떠난 우리 유학생들을 통해서일 게다.

어느 시대나 이른바 금수저들에게 한층 많은 기회가 주어지기 마련, 일제 강점기 치하 가난하고 기회 불균등의 열악한 환경이었지만

우리나라에서 제법 넉넉한 집안의 자제들은 새로운 문물과 학문을 배우러 일본 유학을 쉽게 떠날 수 있었다.


제2강 <동경으로 떠난 미술가 고희동, 김관호, 김찬영>..

-덕성여대 권행가 교수


​두 번째 강의는 2016년에 이쾌대, 정현웅 작가에 대해 소개해주신 권행가 교수님께서 강의를 해주셨다.

강의 내용을 정리하면서 참고로 여러 자료들을 좀더 찾아 추가하여 기록해본다.


1. 1910년대 시대 상황..

​1910년대는 이른바 일본의 무단통치기로서 무력에 의한 식민 통치를 하며 조선인의 결사와 집회 금지와 사상 탄압을 하던 시기다.

일본은 경제적 수탈을 심화시켰고 무단 통치를 합법적이라고 정당화 시키기 위해 문화정책을 벌인다.


일본은 경복궁 내에 미술관을 두었고 1912년 <조선총독부 시정기념 엽서> 시리즈들을 만들어내 구 체제 조선의 풍속은 원시적이며

일본 통치 신 체제는 문명임을 강조하였다.

오늘날 전해오는 엽서 속의 조선 풍속사진들은 연출사진이라는 말도 있는데 우리를 서구문명 앞에서 무척 원시적으로 느껴지게 하였다.







2. 1910년 이전 조선 내 서양미술


우리나라 작가들 보다 앞서 조선 땅에서 서양화가 그려지긴 하였다.

네덜란드 출신의 미국 초상화가 휴버트 보스(Hubert Vos)가 한국에 최초로 유화기법을 소개했다.

휴버트 보스는 1899년 <고종>의 어진과 <민상호 초상> 을 그렸다.


고종 어진, 휴버트 보스,1899, 캔버스에 유채, 91.8 x 198.8 cm


민상호 초상,휴버트 보스, 1899, 캔버스에 유채, 76.2 x 61 cm



이후 일본인 화가들에 의해 서양미술이 알려지기 시작하였다.

1902년 동경미술학교 출신의 화가 아마쿠사 신라이(天草神來)가 남산 기슭에 개인화실을 열고, 1906년 도쿄미술학교 도화사범과

출신의 고지마 겐사부로(兒島 元三郞)가 관립 한성사범학교 도화교사로 활동을 하였고, 1908년 시미즈 도운(淸水東雲)은 정동

부근 사진 미술소를 열어 사진 화법을 통해 사진영상식 초상화를 가르쳤다고 한다.


입춘대길,시미즈 도운



3. 한국 서양 화가의 탄생

1910년대 우리나라에 본격적으로 이해되기 시작한 <미술>을 현장에서 최초로 접했던 작가들을 알아보려 한다.

일본 동경으로 유학을 간 서양화가 고희동. 김관호, 김찬영, 나혜석, 이종우 등등..


★최초의 서양화가의 탄생

1909-1915(고희동-동경미술학교)

1911-1916(김관호-동경미술학교)

1912-1917(김찬영-동경미술학교)

1913-1915(나혜석-동경여자미술학교)

이 가운데 고희동, 김관우, 김찬영 작가에 대해 강의를 들었다.


고희동(1886-1965)


호는 춘곡. 서울 출신 대한제국 말기 군수를 지낸 고영철의 셋째아들로 역관 집안 개화기 신흥세력 집안으로 부유했다.




1903년 한성법어학교(프랑스학교)를 다녔는데 1900년 대한제국 정부가 서양식 공예학교를 설립하기 위해 레미옹이라는 프랑스의 

도자기 전문가이자 화가가 학교 교사 마르텔의 초상을 스케치하는 장면을 가까이 보며 처음으로 서양화를 직접 접하게 되었다.


1903년 학교를 졸업하고 이듬해 궁내부 주사로 들어가 예식관(禮式官) 등을 담당하며 프랑스어 통역과 문서 번역을 하였다.​

1909년 24살 때 궁내부 일본인 차관의 권유로 일본으로 유학하여 동경미술학교 양화과에 입학한다.
1915년에 그린 <정자관을 쓴 자화상>에서 정자관을 쓰는 것은 신분질서의 변동을 보여주며 사실적 묘사법이 보인다.


<정자관을 쓴 자화상>,고희동,1915,동경예대 소장


1915년 빛을 관찰한 흔적이 보이는 고희동의 자화상.


<부채를 든 자화상>,고희동,1915,61 x 45cm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1915년 1월 26일자 <매일신보>에서 고희동을 조선에서 처음 나는 서양화가의 효시로 소개하였다.

​<자매>를 소개하며 조선 최초 서양화가의 그림이라며 동경미술학교에 대한 기사가 실렸다.

고희동은 1915년 귀국 후에 중동, 보성, 휘문 등 사립학교 도화교사로 근무한다.


자매, 고희동,1915,동경미술학교 졸업작품(원본은 전하지 않는다)


일제가 1915년 9월부터 10월까지 조선총독부 주최로 시정(施政) 5주년 기념 <조선물산공진회>를 경복궁 미술관에서 열면서 

여기에 <미술> 전시를 포함시켰는데 여기에서 최초의 서양화가 고희동이 자신의 작품 전시를 하였다.

조선물산공진회는 우리 나라 최초의 박람회이면서 최초의 근대 미술전시회였다고 한다.


이때 고희동은 신창조합의 기생 채경을 모델로 <가야금을 타는 여인>을 그려 1915년 <조선물산공진회>에 출품했다고 한다.

전국 미인들이 부러워하는 표적이 되기 위해 채경이 모델을 자청하여 이루어진 것이라 하였다.

서양의 유화작품을 그리는데 생각대로 그리는 것이 아니라 모델이라는 것이 있어 그리는 것이며 미인을 그리려 한다고 하였다.


한편으로는 1914년 이광수가 펴낸 <청춘> 창간호 장정을 맡아 표지에 그림을 그렸다.


잡지 <청춘>창간호 ,고희동 장정, 1914.

청계표백(맑은 시냇가 빨래),고희동,1915,간송미술관 소장


1918년 민족미술단체인 <서화협회>결성 (초대회장 안중식, 총무 고희동)하여 열심히 활동을 하였으며

1921년부터 전시회를 열기 시작하여 ​1936년까지 이어졌다.


두루마기를 입은 자화상,고희동,1918년. 캔버스에 유채.국립현대미술관 소장



고희동의 네번째 유화작품으로 새로 발굴된 시인 '이상화 초상화'..




어느 뜰에서, 고희동,1922, 제1회 선전 입선작


안타깝게도 1925년 무렵부터 고희동은 서양화를 버리고 동양화로 넘어가게 되었다.

이 땅에서 최초의 서양화가로서 활동을 하고 싶었지만 서양화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이 별로인데다 사회적 풍토도 마련되지 않아

비난 속에 예술가로서 상처를 입고 실컷 마음 고생을 하다가 결국 동양화로 넘어가게 되었단다.

먼 훗날 고희동 자신이 번민 끝에 서양화를 버려야 했던 이유를 피력한 회고의 글을 올려본다

 

“6년 만에 졸업인지 무어인지 종이 한 장을 들고 본국으로 돌아왔다. 전 사회가 그림을 모르는 세상인데 양화(洋畵)를, 더군다나 알 까닭도 없고 유채(油彩)를 보면 닭의 똥이라는 둥 냄새가 고약하다는 둥 나체화를 보면 창피하다는 둥 춘화도를 연구하고 왔느냐는 둥 가지각색의 말을 들어가며 세월을 보내던 생각을 하면, 나 한 사람만이 외로운 고생을 하였다는 것보다 그 당시에 그렇게들 신시대의 신지식과 신사조에 캄캄들 하였던가 하는 생각이 나고, 근일에 이르러서는 어찌 이다지도 새것에 기울어지는 풍조가 엄청나게 지나치는가 하는 감이 든다.”(<동아일보> 1959년 1월5일 고희동)



양류관음도(楊柳觀音圖),고희동, 1929. 종이에 수묵담채. 170x280cm. 홍익대학교 소장


하지만 그림 속에는 여전히 서양 기법 명암이 남아있는 인봉선사 진영..

인봉선사 진영,​고희동,1938, 비단에 채색, ,88×58, 고려대학교 박물관



수묵화..


노저횡행(蘆渚橫行 갈대밭에서 옆으로 가다),고희동, 간송미술관 소장

설리강매(눈 속에 핀 강변의 매화),고희동,1940, 간송미술관 소장


금강산 진주담도(眞珠潭圖),고희동,1940. 지본채색. 140.3×42.5cm. 선문대학교박물관 소장




이후 고희동은 새로운 조형방법을 후진에게 가르친 미술교육자로서 화단을 이끌어간 미술행정가로서 살면서

미술계에서 막강파워를 자랑하는 미술계의 대부가 되어 활동을 하였다.


1945년 해방 이후 우익단체 <조선미술협회>를 조직하였다.

1948년 제 1회 서울시문화상을 수상하고 1949년 <대한민국미술전람회.(국전) 운영에 중추적 역할을 하게 된다.

1953년 대한미술협회 회장으로 뽑혀 사실상 국전을 주도하게 되었고 무려 8회전까지 동양화 심사부 위원장을 계속 역임한다.

1960년 4.19 혁명을 장면 정권이 들어서자 신민당에 입당하여 참의원에 당선되고 5.16까지 정치활동을 하게 된다.

예술원 종신회원과 초대회장을 역임한다.




고희동은 1918년 32세 때 종로구 원서동에 직접 설계한 한옥을 짓고 이후 41년 동안 살았다.

그 집이 근대 초기 일제 강점기 한옥 살림집의 변화 양상을 보여준다 하여 2004년 등록문화제 제84호로 지정되어 보호를 받고 있다.

원서동 고희동 가옥..






이렇게 하여 근대 초기 우리나라 서양화가들 가운데 춘곡 고희동 작가의 삶과 작품세계를 알아보았다.


강의 시간 내에 세명의 작가를 함께 알아보기 때문에 한 작가를 집중적으로 세세하게 알아보지는 못하였다. 

더 많은 작품들을 소개하고 싶어 한국화로 바꾼 뒤의 작품들도 더 찾아 올려두었지만, 강의시간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화가로서의 삶을 더 주목하여 살펴보았기에 단 네 점만의 유화작품이 전해온다는 사실이 안타까웠다..


아무도 내딛지 않은 길을 맨 처음 가는 것처럼 외롭고 쓸쓸하고 고달픈 일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이 땅의 최초의 한국인 서양화가라는 큰 명예를 안았지만 당대 사회의 서양화에 대한 무지와 몰이해와 비난을 견디지 못해

서양화를 그리지 못하고 결국 전통적이고 무난한 동양화 세계로 가버린 고희동의 예술가로서의 깊은 고뇌를 느꼈다.


다음은 또 다른 서양화의 선구자로 혜성처럼 나타났다가 사라져간 '김관호'에 대해 알아보기로 한다.


(느꽃지기 2017.4.13.목.강의~4.27.목.기록) 



①2017년 1학기 현대예술문화강좌 2강- 동경으로 유학가다.. 고희동 편

http://blog.naver.com/kwwoolim/220993760003

②2017년 1학기 현대예술문화강좌 2강- 동경으로 유학가다.. 김관호 편

③2017년 1학기 현대예술문화강좌 2강- 동경으로 유학가다.. 김찬영 편

http://blog.naver.com/kwwoolim/220995413386 



느꽃지기
느꽃지기

은근하고 야무지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