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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5번. 불교 - 선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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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11. 27. 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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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0수미사랑방 325번 선종

불교의 중국 전래는

대 이전에 일어났던 문화교류 가운데

큰 규모와 심원한 영향력을 보여주는 대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중국인들은 자신의 문명과 문화에 대한 자부심이 굉장하다.

실제로 15∼16세기까지만 해도

중국문명의 수준은 세계 어느 문명권에 비해 손색이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아편전쟁 이후 서구열강에 거듭 패배하면서도

그들의 과학기술문명은 인정했지만

서양문화에 대해서는 전혀 수용하려고 하지 않았다.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던 것이다.


청일전쟁에서 일본에게 패하고 난 뒤에야 비로소 자존심을 꺾고

서양 문명과 문화 모두를 배우기 시작했다.

 

인도문명과 중국문명은 다 같이 세계 주요 문명권의 하나이고,

인도와 중국 사이에는  사막과 험준한 산맥이 가로놓여 있어서로  왕래하기가 쉽지 않았다.

이런 악조건에도 불구하고

중국인들은 엄청난 열정으로 불교  학습에 매달렸고,

인도의 문화와 사상이 일방적으로 중국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이런 일방적인 교류가 진행되었던 것은

바로 불교의 종교적 성스러움의 요소 때문이다.

 

그러나,

중국에 전래된 불교는 원형이 크게 바뀌어 원래의 모습을 잃어버렸다.

지금도 남방불교(남아시아 스리랑카, 캄보디아, 미얀마,타이 등)의 중요한 불교경전은

고대 인도어인 팔리어로 되어 있고 대부분의 승려들이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중국인들은 한문으로 번역된 불경을 보지 산스크리트 원전을 보지 않는다.

원전 자체가 사라져버린 것이다.

그 이유는  중국인들의 자기 문화에 대한 자부심 때문이다.

더 나아가

중국인들은 인도에는 없던 새로운 불교를 창조하기도 했다.

그것이 바로 선종(禪宗)이다.

 

불교는 인도의 석가모니가 창시한 종교다.

석가모니라는 말은 샤카족, 한자 음역으로는 석가족의 성자라는 뜻이고,

원래 이름은 고타마 싯다르타(BC 563~483)이고, 

중국의 춘추시대 말기  공자(BC 552~479)보다는 조금 이르고,

노자보다는 조금 늦거나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중국은 기원전 11세기를 전후로

은나라에서 주나라로 넘어가면서

사회시스템  중심이 종교적, 무속적에서   으로 전환했다.

비슷한 시기에  

인도는 신들에 대한 찬미와 제사에 관한 문헌인 『베다』라는 경전을 중심으로

브라만교를 확립했다.

브라만교는 아리안족이 인도를 정복하고,

자신들이 믿던 여러 신들에 대한 신앙과 희생제의를 중시하고

신에 의해 결정된 카스트제도라고 하는 신분제도를 강요하는 정복자의 종교다.

그런데 중국과 마찬가지로

기원전 5∼6세기에 이르러 사회 경제적으로 큰 변화가 일어나고

낡은 종교인 브라만교로는 이런 변화에 대응하지 못하자

새로운 사상운동이 일어났다.


공자를 비롯한 대부분의 중국의 사상가들이 천하를 어떻게 다스릴 것인가에 대해 고민했던 데 비해

석가모니를 비롯한 대부분의 인도의 사상가들은

어떻게 하면 존재의 근원적 고통을 해결하고 해탈에 이를 것인가에 대해 고민했다.

 

이는 사회 문화적 코드의 차이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잘 보여준다.

중국은  이미 시스템이 중요한 사회 문화적 코드가 되어 있었기 때문에,

춘추전국시대의 수많은 사상가들은

범주 안에서 새로운 사회를 통합할 수 있는 사상을 전개했고,


인도는 종교가 사회 문화의 가장 중요한 코드로 되어 있었기 때문에,

어떻게 하면 낡은 종교인 브라만교를 개혁하고,

새로운 사회로 통합할 수 있는 종교를 만들어낼 것인가가 가장 중요한 과제였다.


기존의 브라만교에서 사제직은 대부분 결혼을 통해 세습되었는데,

그 당시 세습사제들에게셔

문명의 발달로 인해 새롭게 나타난 여러 가지 사회 문제와 종교적 의문 등에 대해서

해답을 얻지 못하자,

많은 사람들이 출가운동을 통해 깊은 명상과 고행을 하며 우주와 고통의 근원에 대해서 탐구했다.

석가모니도  그 중에 한 사람이었다. 

석가모니가

왕의 길을 포기하고 출가의 길을 선택한 것은,

그 당시 인도사회에서는 종교가 정치보다 더욱 중요한 과제였기 때문일 것이다.


석가모니는 6년의 출가 기간 동안 여러 형태의 명상과 금욕,

단식이라는 극단적인 고행을 통해서 마침내 붓다,

즉 깨달은 자가 된다.

- 석가가 죽은 곳이라고 알려진. 쿠시나가르 Kushinagar


석가모니의 가르침은 기본적으로 브라만교 사상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모든 행위는 그 결과로 고통과 쾌락을 낳는다는 업보사상과

모든 존재는 그 업보에 따라 끝없이 생사윤회한다는 윤회사상은

『베다』의 일부분인 『우파니샤드』에서 나타나는 사상이다.

그리고 해탈을 위해 명상을 중시하는 것 또한 브라만교와 공유하고 있는 부분이다.

『우파니샤드』에는 명상을 통해 존재의 본질을 탐구하는 내용들이 많이 나온다.

그리고 그 핵심 사상 가운데 하나인 범아일여(梵我一如) 사상은


우주의 근원이자 창조주며 궁극적 실재브라만(梵)과

개체의 내면에 존재하는 궁극적 실재아트만(眞我)이 하나임을 주장하는 사상이다.


그 의의는

외부의 신에 대한 기도와 희생제의가 아니라

고요한 곳에 앉아서 깊은 명상을 통해 내면의 아트만을 알게 되면

궁극적 자유에 이를 수 있음을 강조했다는 데 있다.

 

그러나 석가모니의 가르침은 여러 가지 점에서 브라만교와는 다른 독창적인 면이 있다.

가장 두드러진 것은 초월적인 신의 존재를 부정했고

고통의 원인과 해결을 신에게서 아니라

인간 자신에게서 추구하려고 했다는 것이다.

인도를 비롯한 대부분의 종교에서는 모든 것을 신 중심으로 생각하고

신이 인간을 구원할 수 있다고 여기고 있었다.


브라만교의 가장 심오한 사상인 범아일여 사상 역시

브라만이라는 최고의 신이자 우주의 궁극적 존재를 전제로 하여 나온 것이다.

그러나 석가모니는 아예 신을 거론하지 않고

인간이 스스로 깨달음을 통해 해탈에 이를 수 있음을 강조했다.

종교사의 측면에서 볼 때 실로 혁명적인 전환이 아닐 수 없다.

 

철학적인 면에서 볼 때

우주의 궁극적 실재에 대한 개념을 부정한 것도 중요한 특징 가운데 하나다.

 

석가모니는 연기설(緣起說)을 통해

모든 것은 인연화합으로 형성된 것이지 독립된 실체는 없다는 것을 주장했다.

사회사상적인 측면에서 볼 때 가장 중요한 점은

카스트제도를 부정하고 인간의 평등을 강조했다는 것이다.

브라만교에서 카스트제도는 신이 만든 것이다.

『베다』에 따르면 신은 에서 최고의 계급이자 종교를 담당하는 브라만 계급을,

허리에서 정치와 전쟁을 담당하는 크샤트리아 계급을,

무릎에서 생산을 담당하는 바이샤 계급을,

발바닥에서 노예계층인 수드라를 만들어냈다고 한다.

신의 존재 자체를 부정했기 때문에

카스트제도를 부정한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당시의 사회통념에서는 상당히 파격적이어서 거센 저항도 있었다.

그러나 석가모니는 이를 과감하게 시행했다.

이런 점들은 불교가 인도인들의 민족종교라는 차원을 넘어서 세계종교로 도약할 수 있는 기틀이 되었다.

 

석가모니의 가르침은 크게 사성제(四聖諦)와 삼법인(三法印)으로 요약할 수 있다.

사성체란 고(苦), 집(集), 멸(滅), 도(道)의 네 가지 거룩한 진리를 말한다.

란 이 세상은 여러 가지 괴로움으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이고,

 

이란 괴로움이 어떻게 일어나게 되는가를 밝히는 것으로 고의 원인에 대한 설명이다.

에 대한 체계화된 설은 늙고 병들어 죽는 고통의 근본 원인을

열 두 단계로 파고 들어가 바로 무명(無明)에 있음을 밝히는 십이연기설(十二緣起說)이다.

은 고통의 원인을 소멸시키는 것인데

석가모니는 인간의 고통의 원인이 신에 의해 생긴 것이 아니라

바로 스스로의 무명에 의해서 생긴 것이므로 무

명을 멸함으로써 모든 괴로움이 사라진다고 했다.

마지막으로 는 괴로움을 소멸시키는 방법을 가리키는데,

올바른 견해를 지녀야 한다는 정견(正見)에서 올바른 정신집중

또는 명상을 가리키는 정정(正定)까지

여덟 단계를 제시하고 있어 팔정도(八正道)라고 한다.

 

  三法印 삼법인이란

불교의 핵심적인 세계관을 세 가지로 정리한 것이로

​불교의 세 가지 근본 교의敎義이고,

인()이란 인신()·표장()의 뜻으로 일정불변하는 진리를 가리키는 표지이다.


이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고 모든 것은 생멸변화(化)한다는  제행무상(諸行無常),


모든 것은 인연화합으로 이루어진 것이므로

그 속에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실체는 없다는 제법무아(諸法無我)가 바로 그것이다.



열반적정() - 열반은 ‘불어서 꺼져 있는 상태’라는 뜻으로, 번뇌의 불을 불어서 끄는 것이다.

석가모니는  인생의 고()를 불가피한 것으로, 우선 단정하지만,

그것을 극복하는 종교적 안심()의 세계가 엄연히 존재한다고 설파한다.

三法印 삼법인에 일체개고(一切皆苦)를 더하면 四法印 사법인이 된다.

모든 현상법이 무상하기 때문에 고라고 한 것이다.

현상계는 고뿐만 아니라 낙도 있고 불고불락()도 있기 때문에

현상의 법을 반드시 고라고 할 수는 없지만,

불교적인 사고방식에 의하면 삼계육도()의 윤회()와 미혹의 생활 자체가 고일 수밖에 없다고 보았다.

따라서, 일체개고는 미혹한 범부에게만 해당되며,

미혹이 잔존하는 이상은 일체의 현상이 고라고 보고 있다.

 


 색즉시공(色卽是空) 공즉시색(空卽是色)

‘색즉시공 공즉시색’은 「반야심경」에 나오는 글로 불교의 ‘공(空)’ 사상을 표현한다.

불교에서는 모든 존재가 인연에 의해 생겨난 것이므로

불변하고 고정적인 성질을 가지고 존재하는 것은 없다고 보아 고정적 실체를 부정하였다.

마음이 일어나기 때문에 곧 (色)이요,

마음을 거두어 얻을 수 없으니 곧 (空)이다.

그러므로 색이 곧 공한 것이다.


제법무아에 따르면 우주의 궁극적인 실재인 브라만과

개체 내면의 불변의 실재인 아트만은 부정될 수밖에 없다.

 

석가모니의 가르침은 그가 살아 있을 때 상당히 많은 지지를 얻었지만

인도의 전 지역에 영향을 미치지는 못했다.

그러나 인도 최초의 통일왕국인 마우리아왕조의 제3대 왕인 아소카왕(기원전 3세기)에 이르러

국가의 지배이념으로 채택된다.

아소카왕에 의해 절대적인 지지를 받은 불교는 인도 전역은 물론이고

서쪽의 로마, 중앙아시아, 동남아시아 각국으로 전파되었고

그 뒤에 중국으로도 전래되었으나,


그 시기는 기원전 1세기 중반에서 기원후 1세기 중반 사이에

실크로드를 통해  전래되었다는 것이 정설이다.

불교 전래 초기에는 주로 소승불교의 경전들이 번역되었지만

후대로 갈수록 대승불교의 경전들이 더 환영을 받았다.


석가모니가 입멸한 뒤 5백 년

A.D. 1∼2세기 전후부터 불교 내부에서  일종의 종교개혁운동이 일어났다.

전통을 고수하는 보수적인 장로집단에서는

계율청정수행을 통해 니르바나(열반)의 세계로 들어가는 개인적인 해탈을 중시했지만,

일반인들의 종교적 욕구를 충족시키기가 어려웠고 점차 대중성을 잃어갔다.

그 당시 원시적 브라만교를 대중적 차원에서 새롭게 재구성한

힌두교가 민중들의 지지를 서서히 얻어갈 때다.


이에 혁신적인 승려집단과 재가 신자들이 중심이 되어 대승불교운동이 일어났다.

그들은 기존의 불교는 혼자의 해탈을 추구하는 작은 수레의 불교라고 폄하하고

자신들의 불교를 수많은 중생들과 더불어 해탈의 길로 나아가는 큰 수레의 불교라고 불렀다.

 

보디사트바는 불교 대중화운동의 핵심개념이다.

보디사트바는 깨달음을 구하는 중생 또는 깨달은 중생이란 뜻으로,

이미 깨달음을 얻어 열반에 들 능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세상 속에 머물면서 모든 중생을 피안의 세계로 인도하려는 사람을 가리킨다.

이것은 혼자만의 깨달음을 추구하는

당시 불교의 폐단을 개혁하기 위해서 새롭게 만들어낸 이상적 수행자상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중국에 와서는 보살(菩薩)로 음역되었다.

 

대승불교에서는 보살운동과 아울러 기존의 불교사상을 새롭게 해석하는 사상개혁운동도 펼쳤다.

불교도가 아닌 일반인들에게도 널리 알려진 색즉시공(色卽是空), 공즉시색(空卽是色)의

공사상을 바탕으로 하되,

어디에도 치우치지 않을 것을 강조하는 중관사상(中觀思想)이 초기의 중요한 사상으로 등장했다.


중기에는 삼라만상은 모두 오로지 마음의 투영임을 강조하면서

인간의 심리구조를 치밀하게 탐구하는 유식사상(唯識思想)이 나타났다.

 

유식사상에서는 겉으로 드러나는 마음 아래에 숨어 있는 자기 중심성의 필터인 제7식과

과거의 모든 기억이 저장되는 창고이자 업보의 씨앗이 익어가는 밭인 제8식을 발견했다.

근대 서구심리학의 아버지인 프로이트가 무의식을 발견한 것보다 무려 1천 2백 년 남짓 빠른 것이다.

 

후기에는 모든 중생들에게는 불성이 내재되어 있음을 강조하는 여래장사상(如來藏思想) 등이 전개되었다.

불성이라는 개념은 아트만과 유사한 개념으로,

궁극적인 실재를 부정하는 제법무아의 사상과는 상치되는 부분이 있다.

이것은 발전적인 측면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퇴보한 측면도 있다.


그러나 일반 대중들에게는 모든 존재에 불성이 있다는 말은

실로 희망의 메시지로 작용하여 불교의 확장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대승불교의 또 하나의 특징은 후기로 올수록

붓다와 보살을 초인적인 존재로 규정하고 숭배하는 성향이 점차 강해진다는 것이다.

초기에 붓다는 깨달은 자, 해탈한 자를 의미했지만

대승불교에 와서는 고통에 빠진 중생을 구제하는 구세주의 개념이 더해진다.

그리하여 역사적 실존인물인 석가모니 붓다 외에

아미타불, 약사불, 미륵불 등 수많은 새로운 붓다가 대거 등장한다.


그리고 대승의 이념을 구현하려는 실천적 개념이었던 보살 위에

여러 가지 신화적 색채가 더해지면서

관세음보살, 지장보살, 문수보살 등의 구세주적인 보살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민중들은 이런 붓다와 보살을 숭배의 대상으로 삼고

심지어는 기복의 대상으로 삼기 시작했다.


이것은 제자들에게 스스로 등불을 밝히기를 강조했던 석가모니의 원래의 뜻을 퇴색시키는 것이고,

인도 내에서는 힌두교와의 차별성을 약화시켜

오히려 불교가 힌두교에 흡수되는 데 일조를 했다.

그러나 다른 지역에서는 일반 민중들을 끌 수 있는 종교적 흡인력을 강화시키는 데 큰 공헌을 했다.

 

중국에 수입된 초기에는 그다지 큰 관심은 끌지 못했지만,

한나라가 망하면서 유교의 지위는 흔들리기 시작했고,

전국에는 난리가 끊이지 않았고  진나라가 결국 천하통일을 이루지만

안정기도 잠시뿐, 북방에서 내려온 유목민족에 의해 한족 정권은 남방으로 밀려나게 된다.

한나라 말기부터 위에서 진에 이르는 시기에

수많은 지식인들은 화를 당하고 무수한 백성들이  전란에서 생명을 잃고,

난세의 철학인 도가사상이 흥성하게 되었다.

이런 와중에 외래종교인 불교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불교가 본격적으로 흥성하기 시작한 것은 남북조시대부터다.

위진시대로부터 계속된 혼란은 남북조시대에도 계속되었다.


4세기 초기에 수많은 나라들이 명멸했고

부분적으로 통일이 이루어진 뒤에도 왕조의 교체 시기는 그리 길지 않았다.

또한 북중국의 평원에서 남쪽 강남으로 내려간 이주민들이나

변방에서 중원으로 들어온 이민족들이나 모두

토착민과의 융합에 신경을 쓰지 않으면 안 되는 어려운 처지였다.


이미 기세가 꺾인 유교와 도교가  지친 백성들에게 위안을 주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불교는 지배층이나 민중들에게 모두 크게 환영을 받았으며,

불교에서 기존의 중국사상에는 없는 새로운 것들을 많이 발견하게 되었다.


인간의 삶을 고통의 바다로 간주하고

죽어서 왕생극락하기 위해 간절히 기도하거나

해탈 열반하기 위해 진지하게 구도하는 경건한 종교적 태도는

유교에는 물론이거니와 도교에서도 볼 수 없는 신선한 것이었다.

장자는 일찍이 죽음을 현해(懸解)라고 하여 거꾸로 매달린 상태에서 풀려나는 것으로 보기도 했지만,

그것은 죽음을 자연현상의 일부로 보는 달관된 태도에서 나온 것이지

간절한 종교적 구도심과는 성격이 달랐다.

그런 달관된 태도는 지극히 소수의 사람만 가질 수 있는 것으로

세상의 고통에 허덕이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직접적인 위안은 될 수가 없었고

또한 망자의 남은 가족과 친지들의 슬픔을 달래줄 수가 없었다.


그러나 대승불교의 경전에 나오는 수많은 부처와 보살들은

고통에 허덕이는 많은 사람들에게 마음의 휴식처를 제공하고,


나아가 망자들의 명복을 빌며 남은 자들의 슬픔을 달래는 데도 엄청난 효과가 있었다.

중국인들은 불교를 통해 비로소 본격적인 종교의 맛을 알게 되었던 것이다.

 

중국인들이 불교에 매료되었던 또 하나는,

불교에는 유교와 도교에 비해

마음에 대한 탐구와

마음을 다스리는 구체적인 방법론이 풍부하다는 것이다.


유교와 도교에도 인간의 마음에 대한 탐구가 없다고는 할 수 없지만

불교와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굳이 유식학파가 아니라도 대부분의 불교 종파에는 인간의 마음을 치밀하게 분석하고

어떻게 하면 탐진치(貪瞋痴)로부터 벗어나

무욕과 자비와 지혜를 얻을 수 있는가에 대해 구체적인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이 부분은 특히 지식인들에게 큰 호소력이 있었다.

 

아무튼 남북조시대에(A.D.420~589)  불경의 번역이 본격적으로 가속화되었다.

그리고 황제의 비호 아래 사원의 건축과 불상의 조성이 활발하게 이루어지면서,

남북조에서 북송 중기 신유학이 부흥하기 전까지 약 7백 년 남짓한 기간 동안

수많은 중국인들이 불교를 공부하기 위해 죽음의 사막과 험준한 산맥 등  

최악의 자연조건 속에서도 불굴의 의지로 인도로 유학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인 당 태종 때 현장법사는

남북조시대 서역 번역가인 구마라습(鳩摩羅什)과 함께 최고의 불경 번역가로 칭송받고 있다.

현장법사가 남긴 여행록『대당삼장법사서역기(大唐三藏法師西域記)』또한,

후대  사대기서 중 하나인 『서유기(西遊記)』가 되고, 중국 최고의 신마소설(神魔小說)로,

손오공과 저팔계 등의 독특한 캐릭터로 인해 어린이들에게도 널리 알려진다.


불교가 중국에 전래되는 과정에서

중국 고유의 사상인 유교나 도교와 끊임없이 충돌하면서 교류하는 가운데

중국적인 불교로 변모되어갔다.

 

초기 번역 과정에서

불교의 '계율'은 유교의 아랫사람이 지켜야 할 덕목 가운데 하나인 '효순(孝順)'으로 번역되기도 했고,

또한 오계(五戒)가 유교의 덕목인 오상(五常)으로 번역되기도 했다.

억지로 끼어 맞추면 '살생하지 마라'는 인(仁)에,

'도둑질하지 마라'는 의(義)에,

'삿된 음행을 하지 마라'는 예(禮)에,

 '거짓말을 하지 마라'는 신(信)에,

'술을 마시지 마라'는 지(智)에 해당시킬 수 있겠지만

오계와 오상은 사실 상당한 차이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친숙한 느낌을 주기 위해 이런 식의 번역을 감행했던 것이다.

그밖에 상대적으로 여성의 지위가 높게 나타나는 불경에서

'남편이 아내를 돕는다'는 '남편이 아내를 다스린다'로,

'아내가 남편을 편안하게 했다'는 '아내가 남편을 공경했다' 등으로 번역되었다.

이것 또한 남존여비의 유교적 윤리를 의식한 번역이라고 할 수 있다.

 

불교에 더 큰 영향을 미친 것은

아무래도 불교와 마찬가지로 세속을 초월하는 정신적 자유를 추구했던 도가사상이다.


유교가 주로 윤리적인 부분에서 영향을 미친 반면

도가사상은 핵심적인 개념을 번역하는 데 많이 차용되었다.

모든 번뇌의 불을 끈 상태를 말하는 '니르바나'를 '무위(無爲)'로,

최고의 깨달음의 경지에 이른 사람을 말하는 '아라한'을 '진인(眞人)'으로,

깨달음을 의미하는 '보디'나 가르침을 의미하는 '다르마'를 (道)로 번역한 것 등이 그 대표적인 예다.

 

이런 식으로 본래 중국에 있던 용어에 뜻을 짜 맞추었던 불교를 흔히 격의불교(格義佛敎)라고 한다.

격의불교에는 특히 도가적인 용어와 개념을 차용한 부분이 많은데

이것은 중국의 불교가 처음부터 도가사상의 영향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음을 말해준다.

공사상(空思想)을 위주로 하는 초기 대승불교의 반야사상(般若思想)은

위진시대에 유행하던 허무사상(虛無思想)을 위주로 하는 도가사상과 서로 상통하는 부분이 많다.

위진시대의 도가사상은 흔히 현묘한 학문이라는 뜻의 현학(玄學)으로 불렸는데,

당시의 사상가들 가운데서는 반야학과 현학이 거의 차이가 없다고 여기거나

심지어는 반야학이 현학의 조수가 될 수 있다고 여기기도 했다.

사실 반야학과 현학은 기본적인 개념과 지향점에서 상당한 차이가 있다.

그러나 초기의 불교로서는 중국에 적응해야 하는 입장이기 때문에 그것을 가릴 만한 처지가 되지 못했다.

 

초기 불경번역에서 발생했던 개념의 혼동 문제는

불교가 각광을 받기 시작하면서 본격적인 궤도에 오르는 남북조시대에 이르자 해결될 수 있었다.

이 시기 불경의 번역사업은 아무래도 서역과의 교통이 편리한 북조에서 더욱 활발히 이루어졌는데

대표적인 번역가는 구마라습이다.

구마라습의 역경작업으로 초기의 격의불교는 점차 자취를 감추게 되었으나,

노장사상은 그 뒤로도 불교와의 접촉을 계속 이어나가면서

중국적 색채가 풍부한 선종을 이루게 되었다.

 

선종은 선을 종지(宗旨)로 삼는 종파라는 뜻이다.

'선'은 산스크리트어 '디야나(dhyana)'의 발음을 딴 '선나(禪那)'에서 나온 말이다.

'디야나'가 깊은 명상을 가리키는 말이니 결국 명상을 중시하는 종파라는 뜻이다.

 

선종의 기원은 꽃과 미소에서 출발했다.

그 옛날 석가모니가 영산에서 많은 제자들을 거느리고 설법했을 때

설법 도중 말을 멈추고 가만히 연꽃을 들어 사람들에게 보였지만 아무도 그 뜻을 이해하지 못했다.

다만 마하가섭만이 그 뜻을 이해하고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고 한다. 이른바 염화미소(拈花微笑)다.

 

석가모니의 말로 된 가르침은 기억력이 뛰어난

석가모니의 시자인 아난다가 모두 기록하여 경전으로 남겨졌지만

말로 전할 수 없었던 가르침은 꽃이나 미소를 통해 마하가섭에게 전해졌다고 한다.

이른바 문자를 세우지 않는 불립문자(不立文字)의 가르침이요,

경전 밖에 따로 전한 교외별전(敎外別傳)의 가르침이요,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한 이심전심(以心傳心)의 가르침이다.

 

마하가섭에게 전해진 선의 등불은 계속 이어져

28조인 보리달마(菩提達磨)에 이르러 마침내 중국에 들어오게 되었다고 한다.

보제는 깨달음이라는 뜻이고 달마이라는 뜻이니 깨달음의 법 정도의 의미라고 보면 되겠다.

흔히 줄여서 달마대사라고 한다.

달마대사는 남조시대 때, 양 무제와 만났다고 한다.

 

당시 무제는 달마에게 자신이 불교를 위해 수많은 일을 했는데

어떤 공덕이 있냐고 물었다.

기대와는 달리 달마는 전혀 없다고 답했다.

그러자 무제는 성스러운 가르침의 근본 뜻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달마는 텅 비어 성스러운 것이 없다고 답했다.

기가 찬 무제가 도대체 당신은 누구냐고 묻자

달마는 모른다고 답했다.

멍하니 있는 무제를 뒤로 하고 달마는 갈댓잎 하나에 몸을 싣고 장강을 건너

숭산의 소림사의 한 동굴에서 9년 동안 벽만 바라보고 참선했다고 한다.

이른바 구년면벽(九年面壁)이다.

 

뒤에 구도심에 가득한 혜가(慧可)라는 사람이 찾아왔는데

달마가 벽만 바라보고 응답을 하지 않자

자신의 팔을 잘라가며 가르침을 구했다.

그는 달마에게 자신의 마음이 불안하니 편하게 해달라고 요구했다.

이에 대해 달마는 먼저 그 불안한 마음을 보여달라고 했다.

혜가는 자신의 마음이 어디에 있는지 모르겠다고 답했다.

달마는 이미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었다고 했다.

보통 사람이 듣기에는 뜬구름 잡는 이야기지만,

혜가는 이 말에 크게 깨쳐

마침내 달마의 법을 이어 중국의 2대 조사가 되었다고 한다.

 

사실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염화미소나 달마에 대한 이야기들은

거의 대부분 후대에 꾸며진 것으로 신빙성이 거의 없다.

염화미소의 전설과 서역 28조의 전법설(傳法說)은

인도의 어떤 문헌에도 없고 중국 선종의 초기 문헌에도 보이지 않는다.


달마 또한 마찬가지다.

남북조시대 때 서역에서 온 보리달마라는 이름을 가진 승려에 대한 기록이 있기는 하지만


그는 낙양의 아름다운 불탑을 보고 경탄해마지 않는 매우 경건한 승려이거나,

『능가경(楞伽經)』이라고 하는 불경 가운데서 무척 까다로운 경전에 통달하고

이입사행(二入四行)이라고 하는 논리적이고 체계적인 수련법을 강조한 승려로,

선종의 보리달마와는 그 성격이나 행적이 판이하게 다르다.


보리달마에 대한 이야기들은 대부분 후대 선종이 득세하게 되면서

선종을 상징하는 인물로 추존하기 위해 여러 가지 전설을 꾸며낸 것이라고 보면 된다.

 

선종은 다른 종파와 마찬가지로 분명 석가모니의 가르침에 바탕을 두고 있다.

그리고 아마도 인도에서 건너온 어떤 승려로부터

맹목적인 신앙이나 경전에 대한 지적 이해보다는

실제적인 명상 수련을 통해 마음을 다스리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는 것을 배웠을 것이다.

그러나 선종은 시간이 흘러가면 갈수록

점차 인도적인 색채를 벗어던지고 중국적인 본색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그 출발점은 바로 불립문자에 있다.

 

불립문자는 선종의 종지다. 이것은 간단히 말하면

언어나 문자를 매개로 하는 이론보다

진리의 체험적 직관을 중시한다는 것이다.

선종 이전의 다른 종파들이 주로 경전을 중심으로 발전한 것이라면

선종은 그런 외적 형식보다는 실제적인 참선 수행을 중심으로 발전했다.

경전은 번역 과정에서 어느 정도 중국화의 영향을 면할 수는 없지만

그런 대로 인도적인 취향이 많이 남아 있다고 할 수 있다.

선종은 이런 경전의 권위를 부정함으로써 인도적인 취향으로부터 더욱 멀어져

중국 특유의 개성을 형성할 수 있게 되었다.

 

불립문자는 당연히 노자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도덕경』 첫머리에는 "도를 도라고 하면 항상의 도가 아니다"는 말이 있고,

56장에는 "아는 사람은 말하지 않고 말하는 사람은 알지 못한다"는 지적이 있다.

노자를 계승한 장자도 이와 유사한 말을 많이 했다.

깨달음을 표현할 때 언어와 문자의 한계를 지적하는 것은 노장사상만의 특징은 아니다.

전 세계의 모든 깨달은 이들은 그와 유사한 견해를 밝혔다.

그러나 노자나 장자처럼 그렇게 강력하게 언어와 문자의 한계를 주장하지는 않았다.

선종은 노장의 영향을 많이 받았기 때문에 그렇게 강력하게 불립문자와 이심전심을 강조했던 것이다.

 

불립문자의 일차적인 의의는 석가모니의 참뜻은 경전으로는 전달될 수 없다는 것을 강조한 것이다.

그러나 선종에서 불립문자를 주장한 것은

단순히 궁극적인 진리는 언어로 표현될 수 없다는 것만을 강조한 것은 아니다.

그 속에는 인도의 언어와 논리에 대한 반발이 담겨 있다.

사실 중국어와 인도어만큼 다른 언어도 없다.

중국어는 표의문자고 각 글자가 독립되어 일체 변화가 없는데 비해

인도어는 유럽어와 마찬가지로 표음문자고 문법적인 상황에 따라 단어의 변화가 심하다.


그리고 문체에서도 중국 사람들은 간결하고 함축적인 표현을 좋아하고

자연에서 따온 비유나 구체적인 이미지를 좋아한다.

한마디로 말해 시적, 직관적 언어라고 할 수 있다.


이에 비해 인도 사람들은 비교적 장황한 표현과 과장법을 좋아하고 치밀한 논리성을 강조하는 편이다.

한마디로 말해 산문적, 논리적 언어라고 할 수 있다.

 

중국인들은 처음에는 인도의 종교성에 매료되어 불경에 심취했으나

점차 주체적인 수용을 강조하게 되면서

중국적인 맛이 듬뿍 담겨 있는 시적 언어와 직관적 언어를 추구하게 된 것이다.

그들은 불법의 참뜻을 십이연기, 팔정도, 보살의 열 가지 단계 등으로 장황하게 설명하기보다는

시적 직관과 함축성이 풍부한 선문답(禪問答)을 통해 이해하려고 했다.

예를 들면 어느 선사가 조주선사(趙州禪師)에게

달마가 서쪽에서 온 까닭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그 말은 불법의 참뜻이 무엇이냐는 뜻이다.

그때 조주선사는 "뜰 앞의 잣나무니라"라고 답했다.


참으로 시적이다.

이런 식의 간단하면서도 함축적인 답변은 인도의 경전에서는 전혀 볼 수 없었던 것이다.

 

여기서 잠시 선문답, 공안(公案), 화두(話頭)에 대해서 살펴보자.

선문답이란 선사들의 문답,

즉 선의 정신 아래 이루어지는 문답으로,

대부분 깨달음에 대한 질문과 답이라고 할 수 있다.


선문답은 논리적인 이해가 전혀 닿지 않는 것이 대부분이다.

예를 들면 불도의 참뜻이 무엇이냐는 제자의 질문에

어떤 선승은 "내가 청주에 있을 때 승복을 만들어 입었는데 마가 세 근이었다"고 답했다.

도대체가 동문서답이다.

그래서 우리는 논리가 전혀 닿지 않는 엉뚱한 문답을 흔히 선문답하고 있다고 말한다.

 

공안이란 원래는 관가에서 중요한 공문서를 가리키는 말인데

선종에서는 참선의 주제거리로 삼을 수 있는 선문답 또는 언행을 말한다.

공안은 선종의 역사가 한참 진행되고 난 뒤에 확립되었는데

오늘날 선종에서는 보통 1천 7백 가지의 공안이 있다고 한다.

화두는 공안과 비슷한 뜻으로 쓰이는데

엄밀히 구분하면 전체 공안 가운데서 핵심 관건이 되는 글자 또는 구절을 가리킨다.

 

어떤 선사가 조주선사에게 개에게도 불성이 있냐고 물었다.

그러나 조주선사는 '없다(無)'고 답했다.


선종은 다른 대부분의 대승불교가 그러하듯이

사람은 물론이고 개미나 잡초와 같은 미물에도 불성이 있다고 말한다.


그런데 왜 조주선사는 없다고 답했을까?

이 공안 가운데 핵심은 '無'자에 있다.

그래서 흔히 무자(無字)화두라고 한다.

앞에서 든 선문답 또한 선가의 유명한 공안인데

이것 또한 마삼근(麻三斤)화두, 잣나무화두라고 부른다.

 

선종이 지니고 있는 중국적인 특색을 또 하나 들면 단도직입(單刀直入)을 좋아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수도의 시간과 방법 두 방면에서 이야기할 수 있다.

먼저 시간을 보면 인도인들은 한 중생이 깨달음을 얻어 부처가 되는 데는 엄청나게 긴 시간을 잡고 있다.

유식불교에서는 그 기간을 삼 아승지 겁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아승지란 무한을 말한다.

이란 인도인들이 시간에 대한 상상력을 잘 보여주는 단위로,

비유에 따르면 둘레 사십 리 정도의 바위를 백 년에 한 번씩 천으로 닦아 사라지는 시간을 말한다.

또 둘레 사십 리의 성에 겨자를 가득 채우고

백 년에 겨자 한 알씩 들어내어 다 들어내는 시간을 말한다고 한다.

전자를 반석 겁, 후자를 겨자 겁이라고 한다.

일 겁만 해도 질리는데 그 앞에 무한을 더하고 또 삼자를 붙이고 있으니

실로 천문학적인 숫자다.

그 밖의 대부분의 종파에서도 기나긴 수행의 단계를 강조하는 편이다.

 

그러나 단도직입을 좋아하는 선종에서는 단박에 깨칠 수 있음을 강조한다.

선사들의 일화를 보면 대부분의 선사들이 짧은 기간 안에 깨달음을 얻는다.

이런 경향은 바로 노장사상에서 나온 것이다.

『장자』나 『열자』에 나오는 도인들의 이야기를 보면 대부분 며칠 내로 깨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짧게는 3일, 길게는 9일 정도만 수행해도 대상 세계와 나를 모두 잊고 절대 소요의 경지에서 노닌다.

중국인들의 성향으로서는

라고 하는 것은 우리와 그리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므로

제대로 찾기만 하면 즉각적으로 체득할 수 있다고 여겼던 것 같다.

 

초기에 불교를 수용했던 사람들은 인도불교의 방대한 체계에 감탄했지만

점차 시간이 흘러갈수록 자신의 전통을 찾아가면서 단도직입을 중시하게 된 것 같다.

선종에서 북종과 남종으로 갈라지는 것도 바로 이 문제로 말미암아 생긴 것이다.


북종의 신수(神秀) 계열이 점진적인 수행을 강조하는 데 비해

남종의 혜능(慧能) 계열은 단박에 깨치는 것을 강조했다.


초기에는 북종이 훨씬 우세했고 남종이 열세를 면치 못했다.

그러나 결국에는 남종선이 대세를 장악했고 북종선은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중국인들은 결국 즉각적인 것을 더욱 선호했던 것이다.

선종은 후대로 갈수록 더욱 더 즉시에 깨치는 것을 강조하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수도의 방법을 보면 전통적으로 인도인들은 논리적 체계를 중시하기 때문에

수행 방법 또한 장황하고도 복잡한 단계를 설정하고 있다.

기도와 호흡, 명상, 경전 읽기, 보시행 등 다양한 방법과 과정을 요구한다.


그러나 선종에서는 번잡한 단계나 방편 없이

한 마음 돌이켜서 자신의 본래면목(本來面目)을 바로 깨치면 된다고 말한다.


즉, 자신의 존재의 본질에 대한 전체적이고도 즉각적인 자각을 중시한다.

사실 단번에 깨치는 데 가장 좋은 방법은 바로 한순간에 통찰을 얻는 것이다.

 

이렇게 한순간에 통찰을 얻기 위한 수도 방법으로 선종에는 묵조선(默照禪)과 간화선(看話禪)이 있다.

묵조선이란 이름 그대로 묵묵히 관조하는 것이다.

가만히 자신의 본성이 불성임을 그대로 비추는 것을 말한다.

 

간화선이란 화두를 참구(參究)하는 선으로,

흔히 화두선(話頭禪)이라고도 한다.

 

선종의 중국적인 특징이 가장 잘 나타나는 것은 바로 화두선이다.

앞에서도 보았듯이 화두라고 하는 것이 대개 논리가 전혀 닿지 않는 이야기이기 때문에

논리로 풀어서는 안 된다.


오직 강한 의심으로 화두에 몰두하는 수밖에 없다.

의심이 사무쳐서 자나 깨나 화두에 몰두할 수 있을 때

어느 순간 언어와 논리의 길이 끊어진 언어도단(言語道斷)의 상태에서 근본적인 인식의 전환,

번득이는 통찰의 길이 열리는 것이다.

 

선사들은 제자들의 경지가 어느 정도 무르익었을 때 언어도단의 길을 유도하기 위해

간혹 갑자기 윽박지르거나 고함을 지르거나 몽둥이로 때리는 극단적인 방법도 사용했다.

생각지 못한 기습적인 상황에서 기존의 습관적인 사유방식이나 지각방식이 무너지고

인식의 급작스러운 비약이 일어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선사들의 전기를 보면 깨달음을 간절히 구하기 위해 스승에게 질문을 했다가

뺨을 맞고서는 갑자기 덩실덩실 춤을 추고,

이를 본 스승이 미소를 지으면서 깨달음을 인가하는 황당한 장면들도 종종 볼 수 있는데

그 속에는 바로 이런 선의 메커니즘이 숨겨져 있는 것이다.


선종의 감추어진 특징, 화광동진

 

불립문자와 단도직입이 선종의 외양적인 특징을 형성하는 데 많은 공헌을 했다면

화광동진은 선종의 내적 특징을 이루고 있다.


 

아는 사람은 말하지 않고, 말하는 사람은 알지 못한다.

그 이목구비를 막고 그 문을 닫아서, 날카로운 기운을 꺾고, 혼란함을 풀고,

'지혜의 빛을 늦추고[和其光]', '속세의 티끌과 함께하니[同其塵]', 이것을 현동(玄同)이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친해질 수도 없고, 소원해지지도 않는다. 이롭게 하지도 않으며, 해롭게도 하지 못한다.

귀하게도 할 수 없으며, 천하게 할 수도 없다. 그러므로 천하에 귀한 것이 된다 - 「노자」제56장.

 

화광동진의 사상은 노자 대교약졸 사상과 한 뿌리다.

대교약졸이 기교를 안으로 감추고 다시 졸박함으로 돌아오는 것이라면

화광동진이란 깨달음의 빛을 안으로 감추고 다시 범속함과 하나가 되는 것을 말한다.

그 둘은 같은 논리구조를 지니고 있다.

대교약졸이 주로 미학적인 측면에서

기교미와 졸박미를 어떻게 조화시킬 것인가를 다루는 것임에 비해

화광동진은 종교적인 차원에서

성스러움과 범속함을 어떻게 조화시킬 것인가를 다룬다는 점이 차이일 뿐이다.

여기서는 종교사상을 다루고 있기 때문에 화광동진이라는 용어를 중점적으로 사용하고자 한다.

 

깨달음을 안으로 감추는 화광동진의 사상은

전 세계의 다른 종교나 신비주의적 전통에서는 찾기 어려운 독특한 측면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다른 종교나 신비주의적 전통에서도

부분적으로는 깨달음을 감추고 범속함으로 돌아올 것을 강조하기는 했지만

노자만큼 그렇게 비중 있게 강조하지는 않았다.

그러므로 화광동진 사상이야말로 노자 깨달음의 가장 큰 특징 가운데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이런 화광동진의 사상은 후대에 여러 분야에 영향을 끼친다.

예컨대 무술을 익히는 과정에서 사람은 몸에서 무인의 기운이 뻗치지만

무예가 진짜 무르익게 되면

무인의 기운이 사라지고 겉으로 보아서는 평범한 모습으로 돌아온다는 이야기 등은

바로 화광동진에서 나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노장의 영향을 받아 중국화된 불교라고 할 수 있는

선종의 깨달음에도 화광동진의 영향은 쉽게 찾을 수 있다.


선가의 말 가운데 진광불휘(眞光不輝)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참빛은 빛나지 않는다는 뜻이다.

빛나지 않는다는 말은 진짜 빛이 없다는 것이 아니라

겉으로 번쩍거리지 않는다는 의미다.

이것은 바로 노자의 화광동진을 응용하여 만들어낸 말이다.

이 말 하나만 보아도 선사들이 얼마나 화광동진을 중시했는지를 알 수 있다.

 

다음으로는 화광동진의 논리구조가 그대로 잘 드러나 있는 선문답을 보도록 하자.

임제선사(臨濟禪師)의 후예인 유신선사(惟信禪師)가 하루는 법당에 올라 다음과 같이 설법했다.


 

내가 삼십 년 전 참선하기 전에는

산은 산으로, 물은 물로 보았다.

그러다가 나중에 선지식을 친견(親見)하여 깨침에 들어서서는

산은 산이 아니고 물은 물이 아닌 것으로 보았다.

지금 휴식처를 얻고 나니 옛날과 마찬가지로

산은 다만 산이요, 물은 다만 물로 보인다.

그대들이여, 이 세 가지 견해가 같은 것이냐, 다른 것이냐?

이것을 가려내는 사람이 있으면 나와 같은 경지에 있음을 인정하겠노라.


- 유신선사.

 

이 선문답은 우리나라 조계종의 종정이었던 성철스님이 인용하여 우리에게도 매우 친숙하다.

여기에는 세 가지 단계의 견해가 등장한다.

 

첫 번째 단계는 참선을 시작하기 전의 단계로서 보통 사람들의 견해다.

선의 전문용어로 설명하면

착각과 미망의 세계다. 우리는 산을 산으로 보고 물을 물로 본다.

그리고 우리는 당연히 이 세계가 우리가 보는 그대로 존재한다고 믿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실재한다고 믿는 이 세계는 불교적인 관점에서 보면

인식 주체와 객체의 대립에 의해 형성된 인식의 표상에 지나지 않는다.

 

좀더 현대적인 용어로 쉽게 설명해보자.

우리에게는 산으로도 보이고 물로도 보이는 이 세계는 원래 소립자로 구성되어 있다.

그리고 소립자는 원래 입자와 파동의 성질을 동시에 지니고 있기 때문에

물질로서 존재하기도 하고 그냥 파동으로만 존재하기도 한다.

이런 소립자들이 모여 물질의 기본 단위인 원자를 이룬다.

원자는 가운데 아주 작은 핵이 하나 있고 그것을 중심으로 전자들이 돌아다니는 텅 빈 구조다.

우리에게는 큰 차이가 나는 고체나 액체, 기체는 사실 이런 텅 빈 원자들의 밀도 차이뿐이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감각에 비친 세계를 실재라고 믿는다.



사실 감각이란 집단적인 착각일 수도 있다.

우리 인류와는 의식 수준이 다른 존재는 다른 감각으로 세상을 이해한다.

유식불교에서는 우리 인간에게는 로 비치는 것이 물고기에게는 우리의 공기처럼 보이고,

지옥계의 중생들에게는 고름으로,

천상계의 존재들에게는 수정으로 보인다고 이야기한다.

그것을 일수사견(一水四見)이라고 한다.

한 가지 물을 네 가지로 본다는 뜻이다.

 

지옥이니 천당이니 하는 종교적인 세계관은 논하지 말고 그냥 현실 세계만으로 설명하자.

개나 고양이만 해도 우리와는 다르게 세상을 바라본다.

개미는 어떠할까?

더 하찮은 존재지만 우리의 삶에 큰 영향을 미치는 박테리아나 바이러스는 이 세계를 어떻게 지각할까?

혹은 인간보다 더 진화된 존재의 눈에는 세상이 어떻게 비칠까?

 

우리가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라고 보는 것은 절대 객관의 세계가 아니다.

그것은 인류가 공유하는 집단 주관일 뿐이다.

집단의 규모가 워낙 커서 마치 객관처럼 보이는 것일 뿐이다.

이 정도면 인식의 표상에 불과한 것을 실재라고 믿는 것이 착각이고 미망이라는 주장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두 번째 단계는 한참 참선에 몰두하여 무언가 깨달음을 얻은 단계다.

그것은 착각과 미망이 모두 사라진 적멸(寂滅)의 세계다.

참선을 통해 주체와 객체의 대립의 한계를 넘어설 수 있을 때

주체도 객체도 모두 사라진 세계가 드러난다.

그것을 『반야심경』에서는 공(空)이라고 했다.

그것은 시각, 청각, 촉각, 후각, 미각으로도 감지할 수 없고 관념과 사유로도 알 수 없는 세계다.

모든 감각과 지각 작용이 사라졌을 때 나타나는 세계다.

그것은 모든 착각과 미망이 사라진 절대 적멸의 세계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적멸의 세계에서는 당연히 산은 산이 아니고 물도 물이 아니다.

 

마지막 단계는 휴식처라고 했는데,

이것은 깨달음이 원숙해져 궁극적인 경지에 이른 단계를 말한다.

적조(寂照)의 세계라고 한다.

적멸의 경지가 선의 최종 단계는 아니다.

선에서는 적멸의 경지 다음으로 적조의 경지를 제시한다.

여기서 적조의 세계란 모든 미망이 사라진 적멸의 세계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다시 현상계를 있는 그대로 비추어보는 단계다.


즉, 적멸을 거친 뒤에 다시 원래대로 사물을 비추어보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다시 산은 다만 산으로, 물은 다만 물로 보이게 된다.

 

이 세 단계에 대한 복잡한 이론은 여기서는 생략하도록 한다.

여기서 문제 삼고자 하는 것은

이 세 단계의 과정이 노자의 화광동진과 유사한 논리구조를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처음의 미망의 단계는 수도하기 이전의 평범한 일상의 세계다.

그러나 수도를 통해 도를 깨치면 평범한 일상을 완전히 뛰어넘는 초월의 세계에 들어가게 된다.

그 세계는 일상의 착각이 완전히 사라진 상태다.

그러나 진정한 깨달음을 얻으려면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다시 평범한 세계로 돌아와야 한다.

화광동진을 통해 다시 돌아온 그 세계는 겉으로는 처음의 범속한 단계와 다름이 없다.

그러나 속으로는 처음의 단계와는 전혀 차원이 다르다.

이것은 바로 나선형적인 회귀를 의미한다.

이로 보아 이 공안은 노자의 화광동진의 논리를 그대로 풀어 쓴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선종의 여러 종파 가운데 하나인 운문종(雲門宗)에는

유명한 운문삼구(雲門三句)가 있다.

'함개건곤(涵蓋乾坤)', '절단중류(截斷衆流)', '수파축랑(隨波逐浪)'이 바로 그것이다.

풀이하면

'하늘과 땅을 끌어안고 덮는다',

'뭇 흐름을 끊어버린다',

'물결 따라 쫓아간다'는 뜻이다.

참으로 함축적이면서도 시적인 표현이다.

선종에서는 추상적인 용어로 설명하기보다는 이렇게 구체적인 이미지를 들어서 표현하기를 좋아한다.

 

'하늘과 땅을 끌어안고 덮는다'는 말에서 느껴지는 인상은 어떠한가?

참으로 웅대하면서도 호방하지 않은가?

깨달음을 구하는 대장부의 기개가 느껴진다.

『장자』의 첫머리에 등장하는 대붕(大鵬)이 구만 리 상공을 떠올라 날개를 삼천 척이나 펼치고 하늘을 날아가는 느낌이다.


 '뭇 흐름을 끊어버린다'는

모든 착각과 번뇌 망상을 다 버린 허허적적의 텅 빈 자리를 말하는 것이라고 보면 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가 아니다. 그 다음은 '물결 따라 쫓아간다'이다.

모든 물의 흐름을 다 끊어버린 뒤에 다시 물결 따라 쫓아가는 그 여유로움,


이것이 바로 선의 맛이다.

 

앞의 공안과 표현방식은 조금 다르지만

이 속에도 화광동진의 논리는 그대로 적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불립문자와 단도직입이 선종의 외양적인 특징을 이루고 있다면

화광동진은 바로 선사들의 깨달음의 가장 깊은 곳에 자리 잡고 있다.

이번에는 선사들의 행적을 통해 화광동진의 사상이 어떤 양상으로 수용되고 있는지를 살펴보자.

 

첫째로 들 수 있는 것은 신비한 이적에 대한 부정이다.

선종 초기의 우두선사(牛頭禪師)는 학자 집안에 태어나서 젊었을 때 『반야심경』에 심취했다.

그는 공의 깊은 뜻을 터득하고는 마침내 출가하여 우두산(牛頭山)의 한 토굴에 은거했다.

전설에 따르면 도의 경지가 깊어 사나운 짐승들도 그에게 감화를 받아 온순하게 되었고,

새들도 꽃을 물고와 마치 성자를 대하듯이 그에게 꽃을 바쳤다고 한다.

 

어느 날 4조 도신선사(道信禪師)가 우두산을 지나가다가 소문을 듣고 우두선사를 찾아갔다.

도신선사는 우두선사가 상당한 경지에 있지만

아직은 더 깊은 깨달음을 깨치지 못했음을 알고 그에게 선의 참뜻을 전해주었고

이에 우두선사는 진정한 깨달음을 깨치게 되었다.

그런데 우두선사가 진정한 깨달음을 얻게 된 뒤에는

새들도 더 이상을 꽃을 바치지 않고 사나운 짐승들도 찾아와 고개를 숙이는 신비한 현상이 사라졌다고 한다.

 

우두선사가 진정한 깨달음을 얻은 뒤에 왜 이적이 사라졌을까 하는 것은

선종의 유명한 공안 가운데 하나다.

이에 대해 선사들은 이런저런 논리적 언어로 설명하지 않는다.

대신 시를 쓴다.


어떤 선사는 깨달음을 얻기 이전의 경지를 "절인 생선 단지를 처음 열면 쇠파리들이 윙윙 물려든다"고 했고,

깨달음을 얻은 이후의 경지를 "단지를 텅 비워 깨끗이 씻으니 싸늘한 적막 가운데 홀로 있도다"라고 했다.

어떤 선사는 첫 번째 경지를 "덕이 중후하니 귀신조차 흠모하도다"라고 했고,

두 번째 경지를 "온몸이 성스럽게 되어 그 깊이를 헤아릴 수 없도다"라고 찬탄했다.

 

그 핵심은 바로 화광동진이다.

사나운 산짐승들도 우두선사의 감화를 받아 온순해지고 날짐승들도 그를 공경했던 것은

바로 그에게서 나오는 깨달음의 빛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깨달음의 빛을 밖으로 발산하는 것은 아직은 설익은 경지다.

나중에 깨달음이 무르익어 화광동진이 되자 그런 징조가 사라졌던 것이다.

참빛은 밖으로 번쩍거리지 않기 때문이다.

 

이와 비슷한 일화가 있다. 남전선사(南泉禪師)가 한 고을을 방문했다.

아무런 기별도 하지 않았는데 놀랍게도 그 고을의 촌장은 벌써 그를 맞이할 환영 채비를 해놓고 있었다.

이에 선사가 깜짝 놀라 그 까닭을 물으니

촌장은 간밤에 서낭당의 신이 선사의 방문을 미리 알려주었다고 답했다.

남전선사는 자신의 수행이 아직 설익어서 귀신에게 들킨 것이라고 여기고 크게 반성했다고 한다.

 

종교적 수도나 명상을 하게 되면 간혹 여러 가지 초자연현상이나 초능력이 나오기도 한다.

대부분의 종교나 명상의 세계에서는 이적을 중시한다.

이적을 일으키게 되면 많은 사람들의 추앙을 받는다.

인도는 특히 그런 경향이 심하다.

그래서 인도에서 형성된 불교의 경전 속에는 석가모니를 비롯한 여러 보살들의 이적이 많이 나온다.

물론 불교의 깨달음의 본질은 이적이 아니다.

그러나 은연중에 이적을 추구하는 경향성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고 그런 것이 불경의 곳곳에 나타나고 있다.

 

선사들은 다른 어떤 종파보다 철저하게 신비한 이적을 부정했다.

그들은 이적을 추구하게 되면 진정한 깨달음의 길에서 벗어난다고 생각했다.

선사들이 이런 태도를 지니게 된 것은 바로 노자의 화광동진의 영향이다.

 

다음으로 들 수 있는 것은 성스러움의 초극이다.

화광동진의 의미는 단순히 이적을 부정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화광동진 속에는 종교적인 성스러움을 극복하고 다시 평범함으로 돌아온다는 의미도 있다.

겉으로 성스러움의 흔적이 남아 있는 것은 아직 진정한 성스러움의 경지에 이르지 못했기 때문이다.

진정한 성스러움은 도리어 평범하다. 조금만 유추하면 쉽게 이런 결론에 도달할 수 있다.

 

선종의 유명한 공안집인 『벽암록(碧巖錄)』의 첫머리에는 달마와 양 무제의 성스러움에 관한 대화가 나온다.

물론 달마와 무제의 대화는 꾸며진 것이다.

중요한 것은 선가에서 가장 널리 읽혀지는 유명한 공안집인 『벽암록』의 제1칙에 실렸다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성스러움의 부정이 선의 근본정신이라는 것을 말해준다.

 

성스러움을 부정하는 재미있는 일화가 있다.

단하선사(丹霞禪師)가 겨울철에 낙양의 혜림사(慧林寺)에 머물고 있을 때의 일이다.

날씨는 추운데 땔감이 없자 단하선사는 본당으로 달려가서 목불을 들고 와 쪼개어 장작불을 지폈다.

그 절의 승려가 기겁을 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노발대발하면서 불제자가 어떻게 이런 일을 할 수 있냐고 따지자

단하선사는 태연하게 부지깽이를 들고는 장작 잿더미를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그 승려는 의아해하면서 도대체 뭐 하느냐고 물었다.

단하선사는 부처님의 사리를 찾는 중이라고 답했다.

그 승려는 어이가 없어 목불에 무슨 사리가 있느냐고 대들었다.

그러자 단하선사는 사리도 없는 목불로 불을 땠는데 왜 그렇게 호들갑을 떠느냐고 반박했다.

이에 그 승려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이 공안 속에는 여러 가지 의미가 있다.

예컨대 우상을 타파한다는 의미도 있고 기존의 고정 관념을 타파한다는 의미도 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의미는 역시 성스러움을 부정하는 것이다.

 

운문종의 개창자인 운문선사(雲門禪師)는 상당히 입이 거친 편이었다.

한 번은 그가 법회에서 설법을 하면서

석가모니가 탄생 직후에 일곱 발자국을 걸어가면서 한 손으로 하늘을 가리키고 한 손으로 땅을 가리키면서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이라고 말한 설화를 언급했다.

신도들은 부처님의 신통력과 거룩함에 다시 한 번 감동하고 있었을 것이다.

다음의 말을 기대하고 있던 청중들에게 운문은 그들의 귀를 의심하게 하는 과격한 설법을 했다.

"내가 만약 당시에 그 장면을 목격했더라면 몽둥이로 때려죽여서 개밥으로 주었을 것이다.

그러면 천하가 좀더 태평스러워졌겠지."

 

이 공안 속에도 여러 가지 의미가 담겨 있다.

우선 이적을 부정하는 의미도 담겨 있고 권위를 부정한다는 의미도 있다.

종교에서 권위는 정말 중요한 것이고 석가모니야말로 불교의 종교적 권위의 원천이다.

운문은 그것을 부정하고 있는 것이다.

그 이유는 어떤 외부적 권위보다는 스스로의 주체적 자각을 중시하기 때문이다.

선종에서는 흔히 '살불살조(殺佛殺祖)'라는 말을 쓴다.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이라는 뜻이다.

같은 맥락이다.

 

그러나 근본적인 의의는 성스러움의 부정에 있다.

대부분의 종교에서는 교주는 보통 사람들과 다른 성스러움을 지니고 있음을 강조한다.

불교 또한 마찬가지다.

석가모니는 태어날 때부터 보통 사람과는 완전히 다르다.

어머니의 옆구리에서 태어났다는 것도 그렇고, 세상에 나오자마자 걸었다는 것도 그러하며,

천상천하유아독존이라는 엄청난 선언을 한 것도 그렇다.

성스러움의 극치가 아니고 무엇인가? 운문선사는 그것이 못마땅했던 것이다.

그는 성스러움에 대한 착각과 미망을 깨기 위해 과격한 말을 서슴지 않았던 것이다.

 

성스러움은 종교적 권위의 원천이다.

대부분의 종교에서는 성스러움을 연출하기 위해

장엄한 사원과 종교적 상징물을 짓고 경건한 예배 의식을 거행한다.

불교 또한 마찬가지다.

대부분의 종파에서는 엄청난 규모의 사찰을 짓고 화려한 불상을 만들며 엄숙한 법회를 열었다.

그러나 선종은 불교의 다른 어떤 종파보다 성스러움의 굴레에서 많이 벗어나 있다.

선방에는 번쩍거리는 금불상을 두지 않았다.

아울러 그들은 복잡하고 장엄한 예배 의식을 중시하지 않았다.

단지 참선을 통해 스스로 불성을 깨치는 것을 중시했을 따름이다.

선종의 이런 특징은 바로 화광동진의 사상을 수용한 데서 나온 것이다.

 

화광동진 속에 담겨 있는 또 하나의 중대한 의의는 일상성을 중시하는 것에 있다.

일반적으로 깨달음의 세계는 모든 것을 초월하는 세계로 인식되고 있다.

삶과 죽음을 넘어선 곳, 일체의 번뇌 망상이 끊어진 곳이 바로 깨달음의 세계인 것이다.

이 속에는 일견 일상성이 들어설 여지가 없다.

그러나 화광동진의 의미를 제대로 알게 된다면

거기에 머물지 않고 다시 평범한 일상의 세계로 돌아올 수 있다.

 

선사들의 깨달음에서 일상성의 강조란 매우 중요한 특징 가운데 하나다.

선사들은 불교의 다른 어떤 종파보다도, 다른 어떤 종교보다도 일상성을 많이 강조하고 있다.

일상성에 대한 강조를 잘 드러낸 말 가운데 "평상심이 도다"는 말이 있다.

평상심의 의미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해석이 가능하겠지만

말 그대로 평상의 마음, 일상의 마음이라고 보아도 무난할 것이다.

 

선사들은 평상심을 강조했기 때문에 깨달은 이후에도 평범하고도 일상적인 삶을 영위했다.

그들은 깨달음을 얻으면 무언가 특별한 징후가 보일 것이라고 여기는 일반인들의 짐작을 여지없이 무너트린다.

 

진적선사(眞寂禪師)가 처음으로 방장이 되었을 때 한 스님이 물었다.

"제가 듣건데 석가모니께서 설법을 시작하셨을 때는 황금빛 연꽃이 땅에서 솟아나왔다고 합니다.

오늘 스님께서 취임하시는 마당에 무슨 상서로운 조짐을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자 진적선사가 말했다.

"문 앞에 눈을 쓸었네."

눈이 올 때 문 앞에 눈을 쓰는 것은 지극히 일상적인 일이다.

깨달은 사람에게서 신비한 이적이나 조짐을 기대하는 물음에 대해

진적선사는 지극히 일상적인 일로써 답변했다.

 

선사들이 일상성을 중시한 것은 곳곳에서 드러난다.

어느 선사가 조주선사에게 가르침을 청했다. 조주는 그에게 아침은 먹었느냐고 물었다.

그렇다고 답하자 조주는 그러면 가서 밥그릇이나 씻으라고 말했다.

선가에서 흔히 쓰이는 말에 '끽다거(喫茶去)'가 있다.

차 마시고 가라는 이야기다.

이것 또한 깨달음이 무엇이냐는 진지한 질문에 답할 때 자주 사용하는 구절이다.

밥과 차를 마시는 일은 일상생활에서 늘 접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다반사(茶飯事)를 평범하고 흔하다는 뜻으로 사용한다.

그러나 그것은 사람이 살아가는 데 없어서는 안 되는 중요한 일이다.

선종에서의 깨달음은 바로 다반사와 같은 것이었다.

지극히 평범하면서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밥 먹는 일과 마찬가지로 과거에는 농사를 짓는 것 또한 일상생활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었다.

위앙종(潙仰宗)의 창시자인 위산선사(潙山禪師)와 앙산선사(仰山禪師)의 대화가 이를 잘 말해준다.

앙산은 어느 해 여름 안거가 끝난 뒤에 그의 스승 위산을 방문했다.

위산이 여름 내내 무엇을 했냐고 묻자 앙산은 땅을 갈아서 수수를 뿌렸다고 답했다.

그러자 위산은 "여름을 헛되이 보내지는 않았군" 하고 답했다.

앙산이 위산에게 여름 동안 무엇을 했냐고 묻자 위산은 아침에는 죽 먹고 낮에는 밥을 먹었다고 답했다.

그러자 앙산 또한 "스님께서도 이번 여름을 헛되이 보내시지 않으셨군요"라고 답했다.

 

여기서 말하는 여름 안거란 하안거(夏安居) 기간을 말하는데,

안거란 한 곳에서 집중적으로 수련하는 것을 뜻한다.

석가모니 당시 비가 오지 않는 건기에는 주로 유랑 전도 생활을 하고

비가 많이 내리는 우기에는 한 곳에서 집중적인 수도생활을 하던 전통을 중국의 환경에 맞추어 변형시킨 것인데,

여름에 행하는 집중수련을 하안거, 겨울에 행하는 집중수련을 동안거(冬安居)라고 한다.

 

선가의 전통에는 대개 안거가 끝난 뒤에는

그 사이 얼마나 정진했는지 서로 점검하기도 한다.

그런데 이들은 참선에 대한 이야기는 하지 않고 농사지은 이야기와 밥 먹은 이야기를 나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서로가 열심히 수도했다고 칭찬한다.

이것은 선에서 노동이나 식사 등의 일상의 삶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보여주는 좋은 예라고 할 수 있다.

이런 것들은 모두 바로 화광동진을 새로운 차원에서 재해석한 데서 나온 것이다.

이상으로 보아 노자의 화광동진 사상은 선사들의 논리와 언어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삶의 태도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음을 알 수 있다.

 

화광동진은 노자의 깨달음의 정수라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크게 주목받지 못한 부분 가운데 하나다.

화광동진이 크게 주목받지 못한 이유는 일단은 그 논리구조가 어렵기 때문이다.

회귀를 하면서도 발전을 하는 나선형적 논리구조는 평면적 사유체계에서는 쉽게 이해되지 않는다.

그보다 더 중요한 이유는 화광동진의 참뜻을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실제로 그와 같은 깊은 깨달음의 세계를 체험해야 하기 때문이다.

노장사상의 적자라고 할 수 있는 위진 현학의 사상가들이 그것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던 것도

그만한 깊은 깨달음이 없었기 때문이고,

노장의 서자인 도교의 도사들이 그것을 제대로 실천하지 못했던 것도

그만한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지 못했기 때문이다.

 

화광동진의 사상은 오히려 인도에서 건너온 불교의 한 종파인 선종에서 꽃피웠다.

그것은 아마도 선사들이 그만큼 치열하게 구도했고 그 결과 깊은 깨달음을 체험할 수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선사들은 화광동진을 여러 가지 각도에서 새롭게 재해석하여 수용했다.

신비한 이적의 부정, 성스러움의 초극, 일상성의 중시 등은

모두 화광동진에 대한 새로운 차원의 해석에서 나온 것이다.

이것들은 선사들의 깨달음의 깊이를 대변해주는 동시에

교종에 대한 선종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것이다.

나아가 중국불교가 지니고 있는 특징을 잘 드러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중국불교의 발전은 당대에 활짝 피어난 선종에 이르러 정점에 이르렀고 그 뒤로는 점차 쇠퇴했다.

송대에 이르면 불교 안에서 선종의 위상은 크게 높아져 다른 종파에 비해 압도적 우위를 점하게 된다.

그리고 선의 사상은 물론 심미의식이나 생활양식도 일반 사대부에게 크게 영향을 미쳤다.

송대의 유명한 화가들 가운데서도 선에 심취한 이들이 많이 있었으며

송대를 대표하는 문인인 소동파나 황정견(黃庭堅) 등은 실제로 선사들과 교류하면서 참선을 배워 깨달음을 얻기도 했다.

 

그러나 사상계 전체를 보았을 때

송대는 오랫동안 불교에 눌려온 유학이 다시 흥성하는 시기고

불교로서는 마지막 불꽃을 태우는 시기였다.

북송대까지 극성했던 선종은 남송대에 들어서는 매너리즘에 빠지면서 점차 쇠퇴하기 시작했다.

이후 종교로서의 불교의 지위와 영향력은 어느 정도는 계속 유지될 수 있었지만

이전처럼 지식인들을 매혹시키는 사상적 추구의 대상은 되지 못했다.

 

몽골이 지배했던 원대에 이르러서는 라마교가 흥성하고 전국에 라마교 사원이 건립되었다.

라마교는 종교적 성스러움을 강하게 발산하는 종파이고 주술적이고 비의적 요소가 많다.

라마교 사원의 만다라나 탱화들은 매우 화려하면서도 비의적 분위기를 지니고 있다.


단순하고 평범하며 깨달음의 일상성을 강조하는 선종과는 상당히 대조적이라고 할 수 있다.

발산하는 성스러움을 추구하는 라마교가 유행하면서

그렇지 않아도 신유학에 의해 밀려난 선종은 더욱 쇠퇴했다.

 

명대에 들어서는 라마교의 영향력은 사라졌지만

이번에는 유불도가 통합되는 추세 아래 불교의 고유성은 점차 흐려졌다.

중국적 불교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선종의 명맥 또한 갈수록 희미해졌다.

청말 이후 밀려오는 서구화의 물결 속에 선종뿐만 아니라 불교 전체가 쇠퇴했고

특히 공산화와 문화혁명을 거치면서 타파 대상으로 몰려 더욱 급속도로 몰락하게 되었다.


 대승 불교

대승 불교에서는 ‘나’라는 의식을 벗어 버리고 궁극적으로 불성을 깨닫기 위해서는

나보다는 남을 위해서 사는 수행 방법을 강조한다.

이는 ‘나’가 없음을 철저히 인식하여 나의 이기심을 버리고 중생과 함께 하며,

보살의 바라밀을 실천하는 것이다. 바라밀이란 “저 언덕으로 간다.”는 뜻으로서,

욕망과 고통으로 얼룩진 이쪽 언덕으로부터

해탈의 경지를 상징하는 저쪽 언덕으로 가는 방법을 말하는 것이다.

즉, 보시(普施), 지계(持戒), 인욕(忍辱), 정진(精進), 선정(禪定), 지혜(智慧) 등

여섯 가지 바라밀 을 실천한다는 것이다.

바라밀 : 산스크리트 어 파라미타(Paramita)를 음역하여 ‘바라밀’ 또는 ‘바라밀다’라고도 한다.

최고를 뜻하는 ‘파라마’에서 파생한 말이다.

이에 근거해서 바라밀을 완성 또는 완전으로 번역하고,

바라밀을 한역한 것이 바로 도피안이다.

고통이 있는 현실 세계로부터 고통이 없는 이상 세계 즉, 해탈의 경지를 추구하는 것을 말한다.

 불교의 삼독 - 탐(貪), 진(嗔), 치(痴) : 불성의 마음을 어둡게 하는 것으로,

탐욕을 부리고(貪), 성내고(嗔), 어리석은(痴)것을 의미한다.

삼독 중 가장 근본이 되는 것으로 ‘나’ 라는 의식 때문에 생긴 욕심이다.


‘나’ 라는 의식을 중심으로 생기는 탐욕의 근본적 제거 → 마음의 눈을 뜨게 됨 → 불성을 깨달음

대승불교의 공(空)사상은 이러한 나로부터의 집착을 벗어 날 것을 말한다.

 

 육바라밀

대승 불교에서는 ‘나’라는 의식을 벗어 버리고 궁극적으로 불성을 깨닫기 위해서는

나보다는 남을 위해서 사는 수행 방법을 강조한다.


이는 ‘나’가 없음을 철저히 인식하여 나의 이기심을 버리고 중생과 함께 하며,

보살의 바라밀을 실천하는 것이다.


바라밀이란 “저 언덕으로 간다.”는 뜻으로서, 욕망과 고통으로 얼룩진 이 쪽 언덕으로부터 해탈의 경지를 상징하는 저 쪽 언덕으로 가는 방법을 말하는 것이다.

즉, 보시(普施), 지계(持戒), 인욕(忍辱), 정진(精進), 선정(禪定), 지혜(智慧) 등

여섯 가지 바라밀을 실천한다는 것이다.


• 보시 바라밀 : 자기 소유물을 필요한 사람에게 베풀어 주는 자비를 뜻한다.

• 지계 바라밀 : 계율을 잘 지키는 것을 뜻한다.

• 인욕 바라밀 : 괴로움을 받아들여 참는 것이다.

• 정진 바라밀 : 부지런히 노력하여 방일(放逸)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 선정 바라밀 : 선은 산란한 마음을 가라앉히고 고요히 사색하는 것을 말한다.

• 반야 바라밀 : 여섯 바라밀 중 반야 바라밀은 보시에서 선정에 이르는 다섯 바라밀의 주도자로, 그들의 성립 기반이다.


 불교의 무주상보시(無主相布施)

상에 머무르지 않는 보시(無主相布施)라는 말이 있다.

’ 보시란 ‘남에게 내 것을 베풀어 준다.’는 뜻이며,

“상(모양)에 머무르지 않는다.”라는 것은

내가 내 것을 누구에게 주었다는 생각조차도 버리는 것을 의미한다.

내가 착한 일을 행하였다고 스스로 생각하는 순간에

나에게는 자만심과 자긍심이 생겨나서 진정한 선행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대승(大乘)적 보시는 보살을 통해 잘 나타나는데

보살은 위로는 진리를 구하고 아래로는 중생을 구제하는 사람이다.


 불교의 오온(五蘊)

불교에서는 인간을 구성하는 요소를

색·수·상·행·식 (色受相行識)의 다섯 가지로 분류하였는데,

이를 ‘오온’이라고 한다.

불교 사상에서는 현실적인 인간을 육체가 있어(),

눈·귀·코·입·몸 등의 감각 기관으로 느끼는() 존재일 뿐만 아니라,

정신적으로 표상하고(),

의지하며(行),

인식하는() 등 다섯 가지의 요소로 이루어진 존재로 본다.

이것은 인간이 육체적인 존재인 동시에 생각하는 능력을 가진 존재임을 의미한다.


 한국의 불교

최남선은 저서 「조선 불교 통사」에서

인도의 불교는 서론의 불교,

중국의 불교는 본론의 불교,

한국 불교는 결론의 불교라고 했다.


이는 불교가 인도에서 소승불교로 시작되어 중국에서 대승불교화되어 발전되었으나,

한국 불교가 조화의 관점에서 다양한 입장을 잘 수용하고 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이러한 선·교의 일치를 의천과 지눌의 사상에서 잘 나타난다.


 원효의 대승기신론소(大乘起信論蔬)

인도의 마명(馬鳴)이 지은 것으로 알려진 「대승기신론」에 원효가 주석을 붙인 것이다.

원효(元曉, 617~686)는 대승기신론소에서

“이른바 심성은 불생불멸(不生不滅)인데,

 일체의 모든 법이 오로지 망령된 생각(妄念)에 의지하여 차별이 있게 된다.

 만일, 망령된 생각을 없애면 곧 모든 경계의 모습들이 없어진다.”라고 말하였다.

따라서 불교 사상에서 인간의 개인적 욕망과 의식에 관련하여 우리에게 주는 가르침은

‘스스로 깨달아서 열린 삶을 이루려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불교에서의 중도(中道)

중도는 지나친 쾌락에 빠져서도 안되고,

지나친 계율이나 고행에 빠져서도 안 된다는 것이다.

불교의 진리가 계율속에만 있지 아니하고 삶속에서 나타나는 데,

불교에서는 중도로서 팔정도를 제시하였다.

팔정도란 정견, 정사유, 정어, 정업, 정명, 정정진, 정념, 정정 여덟 가지 바른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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