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사인물전(38)詩聖 杜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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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5. 9. 3: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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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사인물전-杜甫(두보)
두보는 중국의 현실주의 시인으로 시성이라 부르는데 고난의 일생을 보낸다.
그의 시는 역사적 진실의 화권으로 우국우민 침울진지한 시풍으로 감개하는데 그의 시는 詩史(시사)이다.
그는 20여세부터 전국을 漫遊(만유)하는데 성당시인의 풍기로 저명한 시 望岳風韻(풍운)으로 광방불기의 자태를 보여준다.
望岳
岱宗夫如何?齐鲁青未了
造化钟神秀,阴阳割昏晓
荡胸生曾云,决眦入归鸟
会当凌绝顶,一览众山小

春夜喜雨

赵玄荒院士楷书刻石拓片《春夜喜雨》


好雨知时节,当春乃发生
随风潜入夜,润物细无声
野径云俱黑(hè),江船火独明
晓看红湿处,花重锦官城



30여세에는 개봉일대에서 대시인 이백 고적과 만유하는데 추억을 남기고 만년에 이르러 追懷(추회)라는 시를 짓고 회억한다.
두보는 평생을 사실적 현실적시풍으로 민간의 질고를 표현하여 관료들의 부패와 전횡을 고발한다.
저명한 시인 兵車行(병거행)麗人行시는 운남지역의 대리국과의 전쟁으로 인한 참상을 그려 정의롭지 못한 전쟁을 비난한다.
두보는 예리한 눈으로 전쟁의 성질을 看破(간파)하여 백성들이 남아를 낳지 않을 결심을 할 정도의 桎梏(질곡)을 가슴아파한다.
그는 당시 운귀지역 출병의 부정당성을 고발하고 조정의 난맥과 부패를 고발한 시로 백성들의 편에서 정확한 판단을 하고 있다.
그는 시를 통해 사회의 흑암과 부정과 부조리 모순을 고발한 것인데 고통속의 발산이다.
石壕吏
暮投石壕村,有吏夜捉人。老翁逾墙走,老妇出门看。
吏呼一何怒!妇啼一何苦。听妇前致词,三男邺城戍。
一男附书至,二男新战死。存者且偷生,死者长已矣!
室中更无人,惟有乳下孙。有孙母未去,出入无完裙。
老妪力虽衰,请从吏夜归。急应河阳役,犹得备晨炊。
夜久语声绝,如闻泣幽咽。天明登前途,独与老翁别

두보는 당말로 접어드는 시기의 난맥으로 장안에서 고통의 간난생활을 하는데 관직을 얻어 모순을 해결하려 한다.
두보는 8품관으로 장안의 물가가 날로 올라 장안성에서 240리의 포성으로 이주하는데 명절에만 가족들과 만난다.
천보1411월 가족들을 만나려고 화청지를 지나며 가무소리를 듣고 자경부봉선현영회오백자라는 시를 남기는데 천고명편으로 평가한다.
朱門酒肉臭 略有凍死骨은 천고명구로 인구에 회자하는데 두구는 두보의 장안에서 10년 생활의 개괄로 사회계층간 대립이 상당히 첨예해진 것을 관찰한 것이다.
그는 이제 사회의 붕괴를 예감하는데 이시를 쓴 다음해 안사지란의 폭발로 백성들은 이중의 질곡에 들고만다.
두보는 난국을 예감하고 민감한 예측으로 시대를 앞서가는데 가족들과 유랑을 시작하나 반군에 체포되어 일년이상 장안에 유폐된후 이기간에 春望시를 써서 국파산하재라는 명구를 남긴다.
그는 이시를 통해 파괴된 가정과 국가에 대한 침통한 반성으로 당은 안사지란을 전후로 거대한 사회변동을 경험하는데 인구가 60%이상 사라질 정도의 대란을 겪는다.
이는 난민들이 많아져 정부의 통제를 벗어난 것으로 당숙종 건원2759년 곽자의가 9로절도사를 이끌고 양주에서 안경서 사사명의 반군과 결전으로 상호간에 대손실을 가져오는데 천재까지 겹친 것이다.
이때의 경험으로 두보의 石壕里라는 시가 창작되는데 천재로 당군과 반군의 약탈로 백성들의 해골이 산천을 뒤덮는다.
야반에 징병하는 소리가 들리는듯하는데 그중 三吏 三別望岳으로 대표되는 두보의 청춘시대의 시풍은 끝나고 장안생활후 권귀들의 부패와 백성들의 고통을 고발하는 시풍으로 전환된다.
석호리의 노파는 전쟁중에 세명의 아들중 두명은 전사하고 남은 아들도 징병되는 슬픔을 말하는데 방관자로서의 고통을 표현한 것이다.
전쟁으로 백성들의 유리실소와 생명의 박탈로 이어지는데 정부군과 반군의 대결로 백성들은 계속적인 대가를 치루는 모순으로 노파는 이제 무너진 가정으로 시인을 따라 나서려 한다.
두보의 시는 역사의 변천을 표현하여 시사라 하는데 세밀한 관찰로 시대변환의 풍운을 표현한 것이다.
寂寞天宝后,园庐但蒿藜
  我里百余家,世乱各东西。
  存者无消息,死者为尘泥。
  贱子阵败,归来寻旧蹊。
  久行见空巷,日瘦气惨凄。
  但对狐与狸,竖毛怒我啼。
  四邻何所有, 一二老寡妻
  宿鸟恋本枝,安辞且穷栖。
  方春独荷锄,日暮还灌畦。
  县吏知我至,召令习鼓鞞。
  虽从本州役,内顾无所携。
  近行止一身,远去终转迷。
  家乡既荡尽,远近理亦齐。
  永痛长病母,五年委沟溪。
  生我不得力,终身两酸嘶。
  人生无家别,何以为蒸黎



그의 시는 진정한 대역사를 묘술한 것으로 안사지란후 株連(주련)으로 두보의 가족은 부득이 일년동안 4차의 이주를 하는데 수천리를 걸어 사천의 성도에 도달한다.
이제 50세에 이른 두보는 일생중 가장 안정된 생활을 하는데 이곳에서 다작으로 산천풍경과 전원생활의 佳作(가작)을 남긴다.
그러나 여전히 우국우민 심계창생은 시인의 창작 주선률이 되어 茅屋爲秋風所破歌라는 시는 장안의 생활을 지탱할수 없던 두보가 친구인 고적 잠삼 엄무가 있던 사천으로 가게 되고 지인들의 도움으로 초당을 세우는데 마음은 국가의 안위와 백성들의 疾苦(질고)에 머문다.
茅屋为秋风所破歌
八月秋高风怒号,卷我屋上三重茅。茅飞渡江洒江郊,高者挂罥长林梢,下者飘转沉塘坳
南村群童欺我老无力,忍能对面为盗贼。公然抱茅入竹去,唇焦口燥呼不得,归来倚杖自叹息。
俄顷风定云墨色,秋天漠漠向昏黑。布衾多年冷似铁,娇儿恶卧踏里裂。床头屋漏无干处,雨脚如麻未断绝。自经丧乱少睡眠,长夜沾湿何由彻
安得广厦千万间,大庇天下寒士俱欢颜,风雨不动安如山。呜呼!何时眼前突兀见此屋,吾庐独破受冻死亦足 [2] 

늦은 가을밤에 비는 소소히 내리고 초가지붕은 바람에 날아가고 방안에는 빗물이 스미는데 애탄하고 잠을 못이루고 백성과 국가의 전도를 걱정한 것이다.
두보의 시는 由所見大 由近而遠이 특징으로 작은 소재를 큰 재제로 확대하여 두보의 애국민본사상을 말해준다.
그래서 詩聖(시성)으로 존중되는데 756년 두보를 보살피던 사천관리로 친구인 엄무가 돌연사하여 성도를 떠나게 되는데 배로 동으로 간다.
그의 필봉은 왕조의 운명과 백성들의 생활을 관주하는데 고난의 표박생활을 하던 두보는 만년을 맞아 곤돈애수로 점철된다.
성도에서 4년이상을 살던 두보는 난득의 안일을 맛보고 좋은 경치는 길지 않아 엄무사후 다시 장안과 낙양으로 돌아가려 하는데 의빈 중경 충현 운양을 지나 기주로 간다.
기주에서 한관원이 열정적으로 환대하여 2년간 머물고 다량의 시를 남기는데 400여수에 달한다.
秋興팔수와 登高(등고)는 이시기의 창작시로 당왕조는 由盛而衰의 역사로 저물어 가는데 쓴 슬픈 시들이다.
登高
风急天高猿啸哀, 渚清沙白鸟飞回
无边落木萧萧下, 不尽长江滚滚来。
万里悲秋常作客,百年多病独登台
艰难苦恨繁霜鬓, 潦倒新停浊酒杯

그가 기주초당에 머무는 동안 대추나무를 심어 전쟁으로 가족을 잃은 과부가 생활할수 있게 해주고 떠나는데 집을 이어받은 친지가 吝嗇(인색)하여 대추를 따가지 못하게 하여 又呈五郞이란 시인데 민중과 국가의 현실과 인간의 무정에 대한 표현이다.
두보는 양년을 기주에 머문후 떠나는데 수년간의 유랑생활로 병이 깊어진 것으로 반신불수가 된 것이다.
이즈음 무한의 악양루를 돌아보고 登岳陽樓시를 남기는데 자신의 처지를 시에 담아 애수를 자아낸다.
그는 장사와 악양의 중간에서 생명을 마치는데 영구를 고향으로 옮기지 못할 정도로 빈궁하여 호남의 평강에 묻는다.
서기77059세에 배를 타고 가던중 홍수로 물이 불어 악양강위에 정박중 5일을 굶는데 그를 존경한 현령 섭씨가 보내준 고기를 먹고 체해 죽은 것이다.
40년이 흘러 손자인 두사업이 영구를 고향으로 옮기는데 대시인인 선비족 원진이 묘지명을 쓴다.
登岳阳楼
昔闻洞庭水,今上岳阳楼
吴楚东南坼,乾坤日夜浮
亲朋无一字,老病有孤舟
戎马关山北,凭轩涕泗流

원진은 두보의 일생과 시작에 대한 고도의 평가를 하는데 젊어서는 낭만시인으로 중년시는 시대와 분투시를 노년에는 국가와 민중에 대한 사고의 시를 남긴다.
두보는 당시에는 큰 명성을 얻지 못하는데 왕유 이백 백거이에 비해 두보는 이류나 삼류시인으로 분류되었다.
두보시의 풍격으로 인한 것인데 침울한 애수시이자 민중시로 분류된 것으로 당시 사람들은 淸水出芙蓉류의 시를 선호한 것이다.
당시는 천재성과 개성의 중시로 두보시는 語不勍人死不休雕章琢句로 이상보다 사실시로 중시받지 못한 것이다.
그러나 중당이후 한유 원진 백거이 번황등이 두보의 시를 추숭하여 송대이후 황정견 왕우칭 구양수 왕안석 소동파등이 극히 중시한다.
오대시기의 피일휴 조업 섭이중 두순등의 민중시에 큰 영향을 주었고 송대의 강서시파인 진사도 황정견의 시에 영향이 지대히다.
당대부터 사람들은 두보의 시를 詩史(시사)라 하였고 송대이후 詩聖(시성)으로 불리우는데 명대이후 최고의 시인으로 인정받는다.
명말 비평가인 김성탄은 굴원 장자 사마천 시내암 왕실보와 두보를 6대재자라 극찬한다.
1481년 조선의 관부에서 두시언해를 편찬발행하고 17세기에는 일본에서 최고의 시인으로 松尾芭蕉의 시에 큰 영향을 주었다.
두보의 매력은 시대가 흐름에 따라 더욱 빛을 발하는데 가치가 더욱커진다.
학자들은 千家注杜라 하는데 수천명이 두보의 시를 註釋(주석)한 것인데 시의 推崇(추숭)과 인격의 존중으로 이어진 것이다.
그의 시는 빈궁 좌절 기아 질고 도망으로 상상을 초월하는 고난의 산물로 悲天憫人의 인자정회를 보여준다.
두보의 시는 시공을 초월한 사람을 감동시키는 시편으로 素心(소심)시라 하고 자유분방함으로 지고의 평가를 받는다.
중국고대의 봉건사회에서 시인의 衡量(형량)은 지식인의 많은 표준으로 충군애국 시사통찰 애민사상 심우천하로 각시기의 시마다 아이들과 부인을 염려하는 시를 남긴다.
두보시중 안사의 난이 수습되어 낙양을 수복하자 聞官軍河南北에서 환락과 비애를 표현한다.
闻官军收河南河北1
剑外忽传收蓟北2,初闻涕泪满衣裳3
却看妻子愁何在4,漫卷诗书喜欲狂5
白日放歌须纵酒6,青春作伴好还乡7
即从巴峡穿巫峡8,便下襄阳向洛阳

두보를 시성으로 부르는 이유는 예술상의 집대성자로서 오언과 칠언율시는 당대에 定型(정형)과 성숙기로 두보의 율시는 성숙을 추동하는 관건이 된다.
오율은 각종제재로 표현하였고 칠율은 두보를 통해 성숙한 것으로 두보로 인해 당대의 율시가 발전과 성숙을 이룬 것이다.
두보의 시는 1400여수가 현존하는데 900여수가 율시이며 고전시가중 율시에 대한 공헌은 최고이며 등고는 고금의 칠율시중 최고로 친다.
등고시는 字字押韻(압운) 句句合綴(합철) 對句公正하여 格律(격율)로 자와 자사이에 平仄(평측)이 상대하고 구와 구사이에 拈對(념대;손가락으로 집다는 뜻)로 문자내재의 격률로 정감있는 운율을 만든다.
후인들은 시가의 내재격율을 감정의 격율로 합치시켜 無邊落木蕭蕭下 不盡長江滾滾來는 사려만천 경계활대로 장강변의 蒼茫(창망)한 가울풍경을 보여주고 萬里悲秋常作客 百年多病獨登台는 두보가 불원천리 기주에 와서 비추지객으로 인생의 말년을 예감한다.
그는 전패유리의 동탕시절에 문인내심의 감각을 모두 吐露(토로)한 것으로 정결을 보여주고 격률이 공정한 구성으로 7언의 격률이 정감의 격률로 융입된 경지를 보여준다.
그래서 시인들은 이시를 고금칠율중 제일로 치는 것이며 현실주의 시인으로 웅장한 역사화권으로 성당에서 만당으로 쇠락해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두보는 역사상의 기록자이자 전파자로 언설자로 도덕과 시편문장이 일치하여 인애지심을 보여준다.

박기수
박기수 교육·학문

1958년 전남 함평출생 중국 연변대학교 민족문화교육원 교수겸 학장 EBS프로그램 자문위원 동학혁명기념재단 초대 사무처장 범과거사위원회 위원역임 3.1운동 유네스코기록유산등재위 공동위원장 노무현대통령후보 특보 역사학자 (중국 고대사 전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