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문진보

[고문진보]今夕行(금석행:오늘 저녁을 읊은 노래) -두보(杜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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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12. 16. 1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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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진보 전집 제11권 행류

227.今夕行(금석행) -두보(杜甫)

<오늘 저녁을 읊은 노래>




今夕行(금석행)

<오늘 저녁을 읊은 노래>


두보(杜甫)

 


오늘 저녁은 어떤 저녁인가 한 해가 가는 날이네

밤은 길고 촛불은 밝으니 혼자 지낼 수야 없다네


함양 객사에는 할 일도 하나 없고

서로 모여 투전하며 즐겁게 논다네

 

남을 이기려 크게 소리질러 오백(五白)을 부르며

웃통 벗고 맨발로 뛰지만 효로(梟盧)는 이루어지지 않네


영웅도 이와 같이 할 때 있으니

우연히 만나 즐김 어째 좋은 방법이 아닐런가


그대는 벼슬하지 못한 때의 유의(劉毅)의 소원을 비웃지 말라

집에는 몇 섬의 곡식도 없었지만 도박에 백만전 걸었다네

今夕何夕歲云徂(금석하석세운조)

更長燭明不可孤(경장촉명불가고)

咸陽客舍一事無(함양객사일사무)

相與博塞爲歡娛(상여박새위환오)

憑陵大叫呼五白(빙릉대규호오백)

袒跣不肯成梟盧(단선불긍성효로)

英雄有時亦如此(영웅유시역여차)

邂逅豈卽非良圖(해후기즉비량도)

君莫笑劉毅從來布衣願(군막소류의종래포의원)

家無儋石輸百萬(가무담석수백만)

 

 

이 시는杜少陵集(두소릉집)1권에 실려 있는 바, 천보(天寶) 5(746) 장안(長安)으로 돌아온 뒤에 지은 것으로, 섣달 그믐날밤 함양(咸陽)의 어느 객사(客舍)에서 친구들과 함께 노름을 하며 즐기는 호방한 모습을 그렸다.

 

역주

역주1> 更長(경장) : 1()은 보통 2시간으로 옛날 밤을 다섯으로 나누어 5경까지 있었다.

 

역주2> 博塞(박새) : 놀음의 한 가지로 雙六(쌍육)과 비슷한 놀이이다.

 

역주3> 憑陵大叫呼五白(빙릉대규호오백) 袒跣不肯成梟盧(단선불긍성효로) : 憑陵(빙릉)은 의기양양(意氣揚揚)한 모습이며, 오백(五白)은 도박(賭博) 놀음패의 하나로 五木의 제도인데, 위는 검고 아래는 희게 만든 주사위를 던져서 다섯 개가 모두 검은 쪽이 나오는 것을 로()라 하여 가장 좋은 패로 보고, 그 다음은 모두 흰 쪽이 나오는 패인데 이를 五白이라고 한다. 五白을 외친다는 것은 주사위를 던지면서 좋은 패가 나오라고 외치는 것이다. 효로(梟盧)는 옛날 저포(樗蒲)놀이에서 제일 높은 점수를 효()라 하고, 그 다음을 로()라 하였다. 李德弘艮齋集續集 4권에 골패 다섯 개가 모두 흰 색이면 이기므로 던지는 자들이 오백(五白)을 외치면서 이 패가 나오기를 기원하는 것이다. ()와 로()는 반드시 오백(五白)의 하나일 터인데 효()가 더 우세한 패이다.” 하였다. 金隆(김륭)勿巖集(물암집)에도 같은 내용이 보인다.

 

역주4> 劉毅(유의) : 동진(東晉)의 패()땅 사람으로 저포(樗蒲) 놀이를 좋아하여 한 판에 백만 금을 걸기도 하였다. 젊어서부터 큰 뜻을 품었는데 환현(桓玄)이 찬위(簒位)하자 劉裕(유유)와 함께 군사를 일으켜 토평(討平)하고 그 공로로 남평군개국공(南平郡開國公)에 봉해졌으나 劉裕(유유)와 불화(不和)하여 목을 매어 자살하였다.

南史(남사)劉毅(유의)는 집에 몇 석의 저축이 없었으나 저포 노름 한 판에 백만 전을 걸었다.” 하였다.



  본 자료의 원문 및 번역은 전통문화연구회의 동양고전종합DB(http://db.juntong.or.kr)에서
인용된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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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포놀이:짧은 나무토막으로 만든 주사위를 던져서 그 엎어지고 젖혀진 사위로 승부를 겨루는 내기놀이.

[유래]

(: 가죽나무)와 포(: 부들)의 열매가 모양은 같으나 색이 달라서 이 열매로 주사위를 만들었다는 데에서 이름이 유래하였다. 저포희(樗蒲戱)는 원래 중국의 놀이이다. 오잡조(五雜俎)6에 저포(樗蒲)는 삼대[(), (), ()]에 이미 있었다 하고, 태평어람(太平御覽)726에 저포는 노자(老子)가 서융(西戎)에 가서 만든 것이라 한 것을 보면 아주 오래된 놀이임을 알 수 있다.

우리나라에 언제 들어왔는지는 분명치 않으나, 북사(北史)동이전(東夷傳) 백제국지부(百濟國之部)에 백제에 저포희가 있다고 하였으니, 백제시대에 이미 저포를 놀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같은 시대에 일본에서도 널리 저포희가 성행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이 도박이 사회에 물의를 일으켜 금령을 내리기도 했다. 속일본기(續日本記)에 의하면 서기 699년 왕명으로 저포놀이 금지령이 발표되고, 이를 어겼을 때에는 태형(笞刑)으로 다스린다는 기록이 있다. 1712년에 발간한 화한삼재도회(和漢三才圖會)에는 저포를 발음대로 쪼보라 하기도 하고, 일반적으로는 가리우찌(加利宇智)라 부른다고 하였다. 7세기에 유입하여 널리 놀았던 저포희가 18세기 무렵까지 전승되었으므로 그 사이 놀이방법이나 도구 등이 상당히 변화하였으리라 짐작된다.<한국민속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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