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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마리뷰] "가정은 실패의 형제야" —독서는 그대에게 무엇을 가르쳐주는가? (한국외대 HUFS 강연 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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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3. 25. 16: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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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은 실패의 형제야

독서는 그대에게 무엇을 가르쳐주는가?

 

(2018.3.2. 한국외대 HUFS 강연 원고 최종수정본)

 

홍준성(them1@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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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은 실패의 형제야라는 말은 가이 리치(Guy Ritchie) 감독의 출세작인 <록 스탁 앤 투 스모킹 배럴즈(Lock, Stock And Two Smoking Barrels>(1998)에서 등장하는 대사인데, 각기 다른 인물들이 정신없이 엮이면서 전혀 예상할 수 없는 파국으로 치닫게 된다는 영화 전체의 시나리오를 고려해본다면, 가히 영화 전체를 요약한다고 봐도 무방한 대사이다. 처음엔 단순히 도박빚을 갚기 위해 계획된 범죄가 계기가 되어 나중엔 서로 얼굴도 모르는 이들끼리 총질을 하게 된다는 복잡한 플롯은, 본 영화가 개봉했던 20세기 말을 적절히 요약해준다. 결코 끝나지 않을 것 같던 철의 장막이 허물어졌고(덩달아 베를린 장벽도 같이 쓰러졌고), 보다 영국으로만 좁혀서보자면 검은 일요일라고도 불리는 19871019일의 대규모 주식 폭락사태와 함께 영원할 것 같던 수정-자본주의적 번영에 종언이 고해졌다. 199511일 정식으로 출범한 세계무역기구(WTO)로서 대표되는 불안한 유동성의 시대가 시작된 셈이다. 이로써 모든 것들이 너무도 복합한 거미줄로 엮여있기 때문에 정확히 어떤 요인에 의해 어떤 문제가 촉발될 건지 예측 불가능해진 시대, 즉 복잡계로서의 세계가 선언됐다. 물론, 이건 20세기 초의 경제적 낙관주의를 박살냈던 대공황의 사례를 떠올린다면 새삼스러운 반복이긴 하지만, 어찌됐든 가정과 시뮬레이션을 한낱 종잇조각에 불과한 것으로 만들어버리는 불가해한 세상이 재차 도래했다. 이런 의미에서 <록 스탁 앤 투 스모킹 배럴즈>에서 농담처럼 지나가는 대사는 생각보다 많은 것들을 집약하고 있다. 도둑질을 하러 들어온 곳에서 여유롭게 홍차나 마시고 있는 에디에게 베이컨이 비아냥거린다. “한가하게 차()나 마실 때냐?” “대영제국은 차에서 시작된 거야어처구니없는 대꾸에 베이컨이 이렇게 응수한다. “그래서 이 꼴이냐?”

 

물론, 91년생인 내가 <록 스탁 앤 투 스모킹 배럴즈>를 봤던 2000년대 중후반에도 크게 달라진 건 없었다. 1991IMF 외환위기부터 시작해서 2008년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로 이어지는 유동성의 넘실거림은 계속해서 이어졌고, 인터넷이 대중화되면서 다량으로 쏟아지는 정보량에도 불구하고 위기는 전혀 해결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악화됐다고 보는 게 맞을 것이다. 정보를 접하는 사람들 각각이 너무도 다른 존재들이라는 점부터 시작해서 획득한 정보를 역이용하려는 사례와 거짓 프로파간다의 범람까지……. 유감스럽게도 가장 그럴싸한 예측이란 게 존재할 수 있다면, 미래는 예측불가능하다는 하나마나한 예측뿐이리라.1

 

이런 맥락에서 봤을 때 최첨단의 대중화와 상황의 급변으로서 요약되는 21세기에 독서라는 행위는 유효할까? 한권의 책이라는 것이 저자의 주장과 이를 뒷받침하려는 논리적 근거들로 이루어진(혹은 적어도 논리적이고자 시도라도 한) 정보라면, 이런 것이 만들어지는 순간 가정은 실패의 형제야라는 비웃음을 피할 길 없는 체계적인 골동품이 돼버리는 것은 아닐까? 예컨대 당장 6개월만 지나도 스마트폰 모델이 바뀌는 마당에, 지금으로부터 150년도 더 지난 1851년에 출판된 멜빌(Herman Melville, 1819-1891)모비딕을 읽어야하는 것일까? 정말 본인들이 읽어보기나 했는지도 의문인 문학평론가들의 거품 같은 찬사만 듣고서, 지루하기 짝이 없는 19세기의 고래잡이에 대한 지식들을 견뎌내야만 하는 건가? (포경선의 구조를 안다는 게 정확히 당신의 인생에 어떤 변화는 줄 수 있단 말인가? , ‘킬링타임이란 답변은 제외하고서) 마찬가지 맥락에서 소위 고전(古典)’란 딱지가 붙은 일련의 서적들에 대해서도 얼마든지 같은 잣대를 들이대 볼 수 있다. 솔직히 말해서, 우리는 고전 목록이나 세계문학이란 것들이 입시교육과 공포마케팅(“넌 참 교양이 부족하구나”)으로서 맞물려 돌아가는 문화산업의 일부라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지 않던가?2

 

그래서 몇 년 전부터 잊으려고 할 때마다 신문의 한 토막을 장식해온 대학생 독서량의 위기에 대한 기사들은, 어떤 의미에서는 그다지 이상한 현상이 아닐 수도 있다. 대학생 5명 중 1명은 책을 전혀 읽지 않는다거나, 만화책·월간지·학업 교재를 제외한 1년 동안의 순수 독서량이 20권에도 미치지 못한다거나(즉 한 달에 겨우 1권 남짓 밖에 읽지 않는 뜻으로서) 또는 독서에 사용하는 시간의 3-4배를 인터넷에 사용한다는 기사들은 과연 오늘날 대학생의 무지를 밝혀주는 것일까?3 여기서 사람들이 쉽게 간과하는 것은, 인류사적으로 봤을 때 가장 급진적인 변화가 벌어졌다고 여겨지는 1789, 즉 프랑스 대혁명 시절의 문맹률이 전체인구의 절반도 넘었다는 점이다. 게다가 혁명의 성경이라고 치부되는 루소의 사회계약론은 거의 읽혀지지도 않았다(당대 루소는 계몽사상가로 알려졌던 것이 아니라 ()엘로이즈로 대표되는 연애소설 작가에 더 가까웠다). 18세기말 대다수의 파리시민들의 선택을 받았던 책은 저속한 포르노그래피와 정치적 추문에 대한 원색적인 팸플릿들이었다. 그러나 혁명은 기어코 벌어졌다. 독서에 대해 우리가 진정으로 놓치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

 

자본주의적 공황과 대혁명까지 너무 거시적인 얘기들만 떠들어댄 것 같으니, 폭을 좁혀서 내 얘기를 조금 풀어보자. 사람들은 지금 눈에 보이는 모습으로 그 과거까지 소급적용하려는 경향이 있으니(인간은 뭐든 손쉬운 걸 좋아하니까), 아마도 내가 어렸을 때부터 책벌레였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적어도 국어문제집의 야만적으로 토막 난 지문들을 독서의 범주에서 제외한다면, 애석하게도 나의 학창시설은 독서와 별다른 인연이 없었다. 심지어 공부도 잘 못했다. 동네에서는 잘하는 편에 속했지만, 유감스럽게도 내가 살던 지역은 행정적 용어로는 농어촌으로정치적 용어로는 낙후지역으로분류됐기에 수리영역 4등급만으로도 반에서 상위권 석차를 획득할 수 있는 곳이었다. 게다가 내 전공은 문필이 아닌 그림에 있었다. 사생대회에서 늘 입상했고, 수업 중 교과서 여백에 낙서하는 것이 주된 사업이었다. 그런데 또 진득하게 그림에만 매진할 열정이나 계획 같은 건 없었다. 당연지사 미래에 작가가 되거나 글을 쓰게 될 것이란 상상 따윈 해본 적도 없다.

 

그렇다면 나는 뭐였을까? 여타 다른 대한민국 20대의 전형이었다. 스키너의 상자처럼 강화 요소(보상/처벌)에 따라 버튼을 눌러댈 뿐인 자동인형이었고, 수능이 끝나고 갑작스럽게 주어진 막연한 세상 앞에서 뭘 해야 할지 몰라서또 그렇다고 무작정 방황하기엔 용기가 없어서이곳저곳 기웃거리는 것으로 중요한 결단을 끊임없이 유예하는 나날을 반복했으며, 뒤늦게 세상에 대해 알아보려고 했을 때 지난 12년간 교과서에서 배운 지식들이 별 쓸모가 없다는 허탈한 깨달음을 만끽하게 된 흔하디흔한 청춘이었다. 고등학교 졸업식 이후로 만난 세상이란, 각종 심리학적 마케팅부터 부동산 정책과 팝아트 그리고 헬멧에 액션캠코더를 달고 뛰어다니는 유튜버들로 뒤범벅된 난장판으로서의 세계였다. 언론들은 뭐가 진실인지 가르쳐주지 않았고, 자유주의가 기껏 증명한 것이라곤 보이지 않는 손은 정말로 없어서 보이지 않는다는 것 정도였다. 각종 취미들은 무수히도 많이 펼쳐졌고, 추천하는 여행지는 날마다 새로 생겨났으며, 올바른 삶에 대한 척도는 주장되자마자 반박되곤 했다. 또한 매력적인 남자의 롤모델은 어떠했던가? 처음엔 다정한 남자가 최고인줄 알았지만, 얼마 뒤엔 2PM이 뮤직뱅크에 나오더니 복근을 빨래판으로 만든 짐승남이 최고가 됐고, 이어서 지식으로 무장한 뇌섹남이 대세가 되더니, 지금은 건물주 아들이 최고가 됐다. 참으로 개판이지 아니한가?

 

요약컨대 오스트리아의 기자 겸 작가인 올리버 예게스(Oliver Jeges)가 명명한 결정장애 세대의 전형이었다. “우리는 방향을 잃었다. 결정을 내리고 싶지도 않고 어떻게 내려야 하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병적으로 모든 결정을 미룬다. 심리학에서는 이러한 태도를 지연 행동(procratination)’이라 부른다. 우리 세대 때문에 새로 등장한 개념이다.”4 물론 현기증 날정도로 복잡한 세계 속에서심지어 세계가 복잡하다는 것을 실시간으로 알려주는 통신기기의 대중화가 이뤄진 상황 속에서는이런 식의 행동은 별로 놀랍지 않다. 상황이 흘러가는 추이를 지켜보면서 고려해야할 요소들을 모두 꼼꼼히 따져본 뒤에 결정을 내리는 것은, 합리적 의사결정의 기본적인 노선이지 않던가? 문제는 경우의 수가 무한대가 돼버렸다는 것이다. 수학적인 비유 그대로 라플라스의 악마가 되기 위해서는 신적인 능력을 필요로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인간은 신이 아니다. 따라서 결정장애 세대의 생활을 대표하는 우리는 늘 온라인 상태다5라는 선언 이후에 등장하는 것은, 실시간으로 업로드 되는 정보들을 흡수하기 위해 스마트폰의 스크롤바에서 손가락을 떼지 못하는 모습이다. 뭔가 분주하기는 하지만, 궁극적으로 하는 건 딱히 없다. (멈춰있는 것도 행동의 한 부류라던 친구의 말이 떠오르긴 하지만, 오늘날 진지함은 하나의 형식이 돼버렸다. 친구여, 대학원 생활은 할만 한가요?)

 

이런 맥락에서 보컨대 내가 독서를 시작한 이유 중 하나가, 뒤죽박죽인 세계 속에서 일정한 법칙이나 진리를 찾고 싶은 충동이었음을 부정할 길이 없다. 일반법칙을 추론해내려는 것이 거의 모든 학문의 방향성이라는 걸 고려해보건대 학자적인 의미에서도 나는 그다지 특별할 게 없는 전형적인 인간이었고, 절대적인 진리가 있다고 봤던 플라톤의 전통에 의거하건대 철학적으로도 뻔한 인간이었다(……이런 여정 속에서 진리가 없다는 결론 혹은 바로 그러한 역설적인 진리만이 유효하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됐다는 점에서도 그다지 놀라울 게 없는 궤적을 밟고 있다). , 확실한 인과관계와 방향성을 원하는만일 이런 게 없다면 관습법에라도 기대고픈불안한 인간이었다.

 

그리고 이런 부류의 평범한 인간이 독서에 꽂히는 것은 그다지 놀랍지 않은데, 단순히 고찰해 봐도 책은 확실성의 훌륭한 표본이기 때문이다. 논리의 모음집인 책 자체는 더 이상 팽창하지도 않고 정해진 입장을 바꾸지도 않는다(비교컨대 비트코인과는 반대다). 물론 해석의 다양성은 유효하다. 그러나 해석이란 근본적으로 텍스트에 묶여 있는 것이고, 이는 최소한의 한계를 의미한다. 예컨대 히틀러의 나의 투쟁을 평화적으로 해석하는 것은 매우 쉽지 않은 일이고, 또한 그래야할 하등의 이유도 없다. (하나의 텍스트를 둘러싼 역사적 맥락 전체를 집어던진 채로 이뤄지는 감상은 얼마나 유효한 걸까?) 게다가 독자가 채택된 특정 해석만으로 만족한다면, 그 순간 해석의 다양성이란 간단히 닫혀버린다. 비트겐슈타인은 일반성에 대한 갈망이라고 불렀고 심리학에서는 확증 편향(confirmation bias)’이라 부르는 것, 즉 확실성을 얻고자하는 욕망이 크다면 해석의 문을 닫는 일 따위는 참으로 손쉽다. 우리는 이런 순수한 원형들을 각종 종교적 근본주의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지 않던가?

 

보다 솔직해지자(솔직함으로서 잃을 것은 껍데기뿐이니). 이런 맥락에서 내가 블로그에 읽은 텍스트에 대한 글들을 600여개도 넘게 기록한 이유는, 논리적인 능력 배양이나 비판적인 안목의 획득과 같이 독서교육론에서 심심할 때마다 언급해대는 지적 성숙과는 거리가 멀다. 또한 지적 우월감을 보이려는 과시욕과도 한걸음 떨어지게 된다. 여기서 진정으로 읽어지는 것은 모종의 편집증적인 불안감, 즉 고정된 구획을 가지려는 충동이다. 확신을 얻고 싶어서 읽어낸 텍스트가 마음대로 해석적 세포분열을 일으킬지도 모르는 위험성에그것이 문예비평의 시선이든 철학의 시선이든 혹은 나만의 시선이든, 그 뭐가됐든 간에하나의 시선을 통해 울타리를 치고 싶은 충동이었던 셈이다. 과연 뭔가를 기록하고 수집하고픈 욕망에서 이런 부류의 불안감을 완전히 소거시킬 수 있겠는가? 비판적이고자 노력할수록 자기만의 의견을 갖기 보다는 끊임없이 또 다른 전문가의 의견을 찾아 나서게 된다는 역설, 즉 권위에 종속돼버리기 마련이라는 괴기한 역설의 근본적인 원인이 바로 여기에 있으리라.

 

*

 

이제까지 대략 복잡계로서의 세계 속에서 책은 골동품에 가깝다는 것과 혼란 속의 불안감을 해소하기 위한 부적처럼 돼버린 책, 이렇게 책에 대한 두 가지 얘기를 했다. 그래서 마치 계몽주의부터 마르크스주의까지 종교를 인민의 아편이라고 비판했던 것처럼 21세기판 독서무용론이라도 개진하려는 건가? 물론 그렇지는 않다(꽤나 유약한 나는 독서교육에 관한 강연에서 그런 헛소리를 할 정도의 기인은 못된다). 그보다는 가정은 실패의 형제야라는 경구를 보다 철저하게 밀어붙여서, 확실성이란 액막이를 얻기 위해 시작된 나의 독서와 울타리-치기로서의 글쓰기에서 빚어진 전혀 예상치 못한 결과물들에 대한 얘기를 짧게 하고자 한다.

 

종교를 찾는 이유가 세상이 개판이기 때문이란 진리에는, 절대적인 신이 있었다면 애당초 이런 식의 개판이 펼쳐지지 않았으리란 결코 소거시킬 수 없는 무신론적 대전제가 똬리를 틀고 있지 않던가? 같은 이유에서 독서를 시작한 순간부터 어렴풋이 원하는 확실성 따위를 찾을 수 없으리란 회의감은 존재해왔고, 읽는 책의 권수가 늘어갈수록 이 회의감이 줄어들기는커녕 더욱 커져갔다(……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만약 존재하더라도 알 수가 없다. 알 수가 있어도 전할 수가 없다라는 고르기아스의 결론에 닿을 때까지). 책이란 나침반도 뭣도 아니었다. 오히려 특정 관점과 오류들의 집대성에 가까웠으며, 그리하여 어느 순간부터는 많은 책들이 희극적으로 읽히는 지경에 이르렀다. 공자는 소비주의를 말할 수 있을 만큼의 생산력에 대해서 알지 못했고, 마르크스는 때로는 문화정책과 법체계가 하부구조를 뛰어넘는 위력을 발휘할 수 있음을 몰랐다. 또한 계몽주의는 종교를 비판했지만 정작 본인들 스스로가 하나의 종교일지도 모른다는 위험성에 대해선 전혀 고려하지 않았고, 모든 게 이데올로기적 장치 속에 붙잡혀있다고 봤던 알튀세르는 촛불혁명에 대해서 알려줄 수 있었던 게 쥐뿔도 없었다. 그리하여 책을 통해서 확실성이나 평온을 찾고자 했던 나의 시도 역시도 일련의 지리멸렬한 과정을 통해 좌절돼버렸다. 하지만, 반복컨대, 그다지 놀라울 게 없는 결말이긴 하다.

 

인간은 어떤 상황이든 반복되면 익숙해지기 마련이라서, 나 또한 이런 상황에 익숙해지게 됐다. 독서를 통해서 확실해지는 것은 세계에 대한 확고한 시선을 갖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정반대의 깨달음, 즉 소위 확고부동하다고 부르짖어진 것들에 대해 의심하게 되는 불온한 습관을 갖게 된다는 것이었다. 또한 어떤 텍스트라는 것이 저자가 속한 역사적 맥락과 집필 의도로서 구성된 하나의 관점이라는 것에 익숙해진다는 것은, 세계상(Weltbild)에 대한 하나의 모자이크 조각을 갖게 된다는 이점 외에도, 모종의 숙명을 받아들이게 해준다. 이 말인즉 어떤 선택을 함에 있어서 모든 선택지를 완벽히 분석하는 것은 불가능하며물론, 그렇다고 해서 생각 없이 본능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 파국적인 결과를 낳게 됨은 구태여 지적할 필요도 없겠지만인간의 삶이란 불완전한 상태에서 어떻게든 선택을 내려야만 하는 고뇌의 연대기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물론, 이마저도 새삼스러운 깨달음이긴 하지만……. (오늘 내가 이 강연장에서 한 말들 중에 새삼스럽지 않은 것은 단 하나도 없다. 세계는 벌거벗은 임금님이다.)

 

따라서 일련의 독서가 내게 깨우쳐준 주된 경험은 불안 요소를 해결해준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런 불안감과 함께 있는 상태에 익숙해지도록 한 것이었다. 굉장히 철학적인 탐구 주제로 보이는 세계또는 ‘(세계 속에서의)자아와 같은 문제점들은, 문제의식 자체에 익숙해질 수만 있을 뿐 결코 소거시킬 순 없다는 깨달음이었다. , 진리는 만성질환이었다. (그러나 이에 대해 아직 궁극의 책을 만나보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항변한다면, 나로서는 할 말이 없긴 하다.) 그리고 여기서부터 애초에 던져졌던 세계란 뭔가?”란 물음은 어째서 세계에 대해 관점을 가져야하는가?”라는 보다 주체적인 물음으로 이행할 수밖에 없었다. 어째서 인간은 오류의 위험성을 감수하면서까지 입장과 해석을 가져야만 한단 말인가? 인간은 왜 모험을 해야 하는가? 왜 여정을 떠나야만 하는가? 왜 결단해야만 하는가? 저자들은 그런 시도들을 왜 반복했을까? 무엇이 이들로 하여금 기꺼이 실패하도록 충동했는가? 이런 물음들에 대한 제대로 된 답변은 단 하나이다: 저자란 기꺼이 실패한 자들이다.

 

이를 견뎌내는 것은, 정보를 무작정 받아들이는 것만으로 소진되기 바빴던 결정장애 세대들에겐 쉽지 않다. 확실히 한권의 책이란 혼미한 결정장애 상태로부터 결단의 단계로 도약했음을 보여주는 표식, 또는 그러한 과정의 기록적인 집약이다. 그리고 이는 실패와 피로감을 무릅썼다는 뜻이기도 하다. 게다가 만일 당신이 무한대로 소급되는 변수로서의 세계보다 시적으로 표현하자면 루크레티우스의 빗방울로서의 세계즉 세계의 불가해성을 받아들인다면 여기서 드러나는 진실의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않다. 복잡계의 혼란을 해결해보고자 온갖 정보들을 수용하지만, 이는 결코 소거시킬 수 없는 불안 속에서 결단을 유보하기 위한 비겁의 카프카적 전략에 불과한 것이 돼버리기 때문이다.

 

내가 도달한 곳이 바로 이곳이었다. 사실 결정장애라는 진단명은 꽤나 우스꽝스럽다. 결정장애로 진단받는 이유는 정말로 뭐를 결정해야할지 헷갈려한다는 것 이전에 성립해야만 하는 대전제, 즉 스스로의 욕망에 대해 무지함을 뜻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엄밀히 말해서 결정장애라는 진단명은 욕망에 대한 인식적 장애라는 다소 긴 풀이로 대체되어야만 한다. 나는 어떤 질문으로부터 최대한 눈을 돌리려고 하는가? 어째서 그것과 직면하기를 꺼려하는가? 정말 단순히 무지하기 때문일 수도 있고, 또는 나의 욕망과 사회에서 요구하는 사항이 서로 괴리되기 때문일 수도 있다(사회에서 요구하는 가이드라인을 벗어났을 때 박탈되게 될 여러 가치들에 대한 공포감을 떠올려보자). 후자의 견해를 받아들인다면 결정장애는 다분히 체제에 의해 유도된 질병에 가깝다. 욕망하는 것에 혼선을 주기 위해, 적어도 영리한 권력이라면, 온갖 쓸데없는 정보들과 공포마케팅을 펼침으로써 움직이기도 전에 소진시켜버리는 전략을 택하기 때문이다. 아무도 비판하지 않고 행동하지 않는다면 기존의 체제는 고스란히 유지되지 않던가? 체제는 탈진과 동조를 동의어로 만드는 전략을 택해왔다.

 

그리하여 탐구의 방향은 지식을 주입당하기 이전에 욕망했던 것들로 이행한다. 지식에 의해 유예되기 이전에 갖고 있었던 영역으로 회귀한다. 그래서 문문(MoonMoon)<비행운>은 한번쯤 들어볼 만한 노래이다. “소년이 간직했던 꿈은 무엇일까? 오래된 일기장을 꺼내봤네. 2008720일 우주비행사라 적어놨네그래, 억압된 것은 돌아오고자 만다정신분석의 몇 안 되는 유효타. 자유, 사랑, , 열정 등등의 지극히 추상적이고도 살가운 것들로 향한다. 이로써 그대는 바야흐로 인문(人文)에 닿게 된다. “가정은 실패의 형제야라는 말은 진리에 가깝지만, 뒤에 이런 조항이 보충되어야만 한다. “그럼에도 기꺼이 가정하라. 자신만의 가정을 가져라. 그래야만 행동할 수 있으니…….”

 

 

이만 마친다. 총총.

 

 

 

사족(蛇足). 인간은 모자란 존재로 태어나지 않는다. 도리어 결여된 존재로 길들여진다. 구멍을 채운 충만한 삶을 집어던질 때, 즉 인간이길 포기할 때 비로소 인간이 된다. 욕망하는 바가 명확해지면 습득한 지식들은 비로소 그 욕망에 따라 재평가되고 재배열된다(이로써 고유해진다, 고유함은 붙잡히지 않는 무지개의 또 다른 이름이다). 스스로의 욕망에 대해 알지 못한다면 지식에 휩쓸릴 뿐이고, 현실에서는 아무런 선택도 하지 못하게 된다. 그저 손쉬운 여행이나 취미만 반복할 뿐, 자신의 인생을 끊임없이 유예시키기만 할 따름이다. 욕망을 알게 된다면, 읽은 텍스트에 대한 정리와 메모들은 푸코가 말했던 사유의 연장통이 된다. 그대가 진리다. 지식은 그 진리를 구현해내기 위한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 권위는 그대의 삶에 대해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는다. 그러니 경도되지 말. 오롯이 자신이 되는 과정만이 중요할 뿐이다. 반복컨대, 세계에 대해 묻지 말라. 물어야할 것은 그대뿐이다. 유일하게 유효한 세계란, 자신에 대해 묻는 그런 목소리들로서만 구성되는 역설인 까닭이다.






 


여러 번 찍었는데, 연습으로 찍은 영상이 제일 잘 뽑혔네요. 그래, 늘 이런 식이지…….

여하간, 좋은 강연 만들어주신 외대 학생 여러분들, 정말 고마웠어요:)





 

비하인드 몇몇 구구절절

1. 본 강연에서 처음에 하려고 했던 독서는 가능한가? 유적 존재, 언어, 모순적인 독서, 그리고 쓰기(https://blog.naver.com/them1/221202527420) 원고는 지나치게 어렵다는 이유로 거부당했다. 담당자는 너무 철학적인 주제보다는 스스로의 진솔한 얘기가 깃든 강연을 원한다고 했고, 그래서 다시 집필된 것이 본 원고이다. 이때 홍준성은 본인이 자기 얘기를 직접 하는 걸 싫어한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됐는데, 지적인 외피를 벗고 싶어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진실은 너무 초라했다. 또한 구태여 이렇게 쓸데없이 길게 돌아서 도달할 가치가 있는지 의문이 들 만큼 단순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시 적을수록, 인생 헛산 느낌에 허탈해져버렸다.

 

2. 그래서 다시 적는 동안, 학생들의 독서교육이란 주제와는 아주 동떨어진 심리상태에 빠져버렸다. 죄다 까발려버리고 다시 시작하자는 식의 충동에 사로잡혔으니까(이로써 강연으로 가볍게 용돈이나 벌자는 생각은 아주 안드로메다로 날아가 버렸다. 예기치 않은 고뇌의 시간이 도래해버렸다). 지적으로 비대해지거나 어떤 권위를 갖는 일에 매진하는 것이 거추장스럽고도 이상하게 여겨졌는데, 이는 스스로에게 단순한 질문에 답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대관절 그걸 얻어서 하고픈 게 뭔가? 침묵.

 

3. 이어지는 얘기지만, 덕분에 강연을 의뢰한 HUFS 운영위 측에서는 강연 당일에서야 겨우 최종 원고를 받아보게 됐다. 당연히 검토해볼 시간 따위는 없고, 그저 머릿수에 맞게 인쇄한 다음, 부디 잘 되기를 기도할 수밖에 없게 된 상황. 이렇다 할 검증도 안 된 사람한테 강연 자리를 내준 건데도, 트롤링을 해버린 것이다……. 이 자리를 빌려, 죄송합니다. 인생이 지각인 듯합니다.

 

4. 강연은 한국외대 2-3학년 학생들을 대상으로 이뤄졌는데, 몇몇 학생들은 작가라고 소개된 사람이 너무 젊어서 처음엔 작가인지 몰랐다는 후문. 고백컨대, 홍준성 본인도 작가라는 생각으로 무대에 오르지는 않았다. 그냥 솔직히 말해버리자는 생각(또는 충동)뿐이었다는……. 동시에 너무 오랜만에 강연에 오르는 거라서 반쯤 패닉 상태이기도 했다.

 

5. 덕분에 강연 자체는 주최 측의 의도와는 아주 반대되게 진행돼버렸다. 많은 책을 읽고 작가까지 된 사람이 들려주는 독서의 효용성이나 중요성에 대한 얘기가 나올 줄 알았지만, 반대로 홍준성의 입에서 흘러나온 것은 실은요, 이러려고 읽은 건 아니었어요. 책은 논리적인 골동품에 불과해요. 저는 왜 이렇게 됐을까요? 망할, 지금 제가 있는 곳은, 그냥 길을 잃어버려서 도착하게 된 곳 것 같아요. 돌이켜보면 참 간단한 진리인데, 남들 쉽게 가는 걸, 저는 왜 이렇게 돌고 돌아서 왔을까요? 헛똑똑이에요. 그냥 하고픈 걸 합시다. 뱉어놓고 보니, 이것도 참 새삼스럽고 교과서적인 얘기네요. 죄송합니다……라는 식의 형편없는 고해성사 비스무리했다.

 

6. 무책임한 솔직함 외엔 아무런 알맹이도 없었던 같다. 그런데 반응은 이상하게 좋았다. 이유는 지금도 잘 모르겠다. 너무 단순한 얘기를 괜스레 있어보이게 표현한 게 아닌가, 하는 미묘한 죄책감에 시달리고 있다. 역시나 가정은 실패의 형제인 듯하다.

 

7. 그런데 확실히 강연은 강연자의 역량보다는 청중의 역량으로 완성되는 듯하다. 한국외대 학생들의 질문 수준이 높아서중반부터는 독서교육이란 주제가 아니라, 그냥 자기 궁금한 걸 물어버리긴 했지만여기에 답하는 과정에서 내가 가진 역량 이상의 모습을 보여줄 수 있었다. 혼자 떠들어대는 것보다는 질문을 받을 때가 더 편했다. 아무래도 나는 임기응변에만 능한 듯하다. 정작 준비한 원고의 내용은 절반 밖에 못했는데…….

 

8. 물론, 지금은 (예기치 못하게) 강연이 잘돼서 자아도취에 빠져버렸다. 당장 다음 강연만 잡혀도 리허설 때마다 긴장해서 낑낑 댈 거면서실제로 외대 강연을 마치고 긴장상태에 안 풀려서 저녁을 제대로 못 먹었다왜 이렇게도 한치 앞을 못 보는 건지 모르겠다. 나는 원숭이다. 그런데, 이 말도 왠지 원숭이한테 모욕일 것 같아 조심스럽기도 하다. 아무래도 오늘 저녁은 안심 돈가스를 먹어야겠다.


9. 추신. 좋은 기회를 준 가정준 교수에게 감사, 감사, 감사의 인사를! (HUFS 운영위도!)






1. 유발 하라리가 말한 ‘2단계 카오스’ 개념을 떠올려보자. 유발 하라리·조현욱 역, 『사피엔스』(김영사, 2015), 340쪽. “역사는 이른바 ‘2단계(level two)’ 카오스계다. 카오스계에는 두 종류가 있다. 1단계 카오스는 자신에 대한 예언에 반응을 하지 않는 카오스다. 가령 날씨는 1단계 카오스계다. 날씨는 무수히 많은 요인의 영향을 받지만, 우리는 점점 더 많은 요인을 고려하는 컴퓨터 모델을 만들어 점점 더 정확하게 예보할 수 있다. 2단계 카오스는 스스로에 대한 예측에 반응하는 카오스다. 그러므로 정확한 예측이 불가능하다. 시장이 그런 예다. (……)만일 우리가 내일 석유의 가격을 1백퍼센트 정확하게 예측하는 컴퓨터 프로그램을 개발하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석유가격은 예측에 즉각 반응할 것이고 해당 예측은 실현되지 않을 것이다.”
2. 강창래, 『책의 정신』(알마, 2013), 177쪽. “그런 것들 어떻게 의도적으로 양산하게 만드느냐고 의문을 가질 수도 있다. 그건 어려운 일이 아니다. 일류대학의 입학시험에 필요한 것으로 지정하면 된다(지금 한국에서는 진보적인 신문조차 그 의심스러운 고전 읽기에 힘을 보태고 있다). 물론 그 시험에서 요구하는 답은 주류 이데올로기를 바탕으로 한 고전 해설서에 담겨 있다. 그렇게 해서 다른 데로 눈을 돌리지 못하게 만드는 효과는 대단하다. 시간의 사용은 마치 기회비용과 비슷하기 때문이다. 전체주의자인 소크라테스를 읽게 만들면 민주주의자인 페리클레스나 솔론을 읽을 시간과 여유가 줄어들고, 엘리트주의자인 공자를 읽게 하면 평화주의자이며 하층민의 대변자였던 묵자를 읽을 시간과 여유가 없다.”
3. 김연숙, “대학생 하루 평균 인터넷 133분…독서엔 30분”, 연합뉴스, 2016년, http://www.yonhapnews.co.kr/bulletin/2016/10/06/0200000000AKR20161006077700003.HTML?input=1195m
4. 올리버 예거스·강희진 역, 『결정장애 세대』(미래의창, 2014), 15쪽.
5. 위의 책, 68쪽.
홍 POWER blog
문학·책

홍준성 소설가.『카르마 폴리스』, 『지하 정원』을 적었습니다. *강연 및 기타 문의 them1@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