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극로, 한글학자.천도교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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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1. 14. 2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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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극로는 의령출신의 천도교인.

'말모이'라는 영화의 실제 주인공이라고 한다.

http://1926nh.blog.me/221525380062

먼저 사진 몇장.

좌로부터 신성모, 이극로, 안호상. 세 사람 모두 경남 의령 출신.1927년 이극로 졸업식 때 베를린. 이극로는 독일베를린대학 철학부를 졸업했고 1942년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6년형을 선고받고 함흥감옥에서 해방을 맞고 풀려나 이후 북한에서 ‘문화어운동 사업’을 주관했다. 안호상은 1929년 독일예나대학에서 철학박사학위를 받고 해방 후 정부수립 때 초대 문교부장관을 역임했다. 신성모는 런던에서 해양대학졸업, 해방후 국방장관, 국무총리 등 역임.

1935년 조선어학회 표준어사정위원들의 현충사 방문 기념 사진. 앞 줄 맨 왼쪽에 정세권, 둘째 줄 왼쪽에서 두 번째에 이극로, 같은 줄 네 번째에 안재홍. ⓒ한글학회 --- 조선의 건축왕 정세권이란 주제의 글에 실린 사진

이극로 가족사진

이극로는 고향 친구인 신성모, 고향후배 안호상과 유럽에서 유학했다. 인터넷사전에서는 이렇게 기록한다.

이극로(1893∼1978) 국어학자·정치인.

경상남도 의령 출신. 호는 고루. 1920년 중국 상해 동제대학(同濟大學) 예과를 마치고 1927년 독일 베를린대학 철학부를 졸업하였다. 1929년 『조선어사전』(뒷날 조선어학회의 조선말큰사전)편찬 집행위원, 1930년 한글맞춤법 제정위원, 1935년 조선어 표준어 사정위원, 1936년 조선어사전 편찬 전임위원 및 조선어학회 간사장을 지냈다.

1942년 10월 1일 ‘조선어학회사건’으로 검거되어 징역 6년을 선고받고 함흥형무소에서 복역하다가, 1945년 광복을 맞아 풀려났다. 1946년 건민회(建民會) 위원장을 지냈고, 1948년 4월 ‘남북 제정당·사회단체 연석회의’ 참석차 평양에 갔다가 잔류하여 북한에서 활동하였다.

1948년 9월 북한 제1차내각의 무임소상, 1949년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조국전선) 중앙위원회 의장 및 과학원 후보원사, 1953년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위원장, 1962년 과학원 조선어 및 조선문학 연구소장, 1966년 조국전선 중앙위 의장, 1970년 조국평화통일위원회 위원장 및 박사, 1972년 양강도 인민위원회 부위원장 등을 지냈다.

한편, 1966년 이후 본격화한 북한의 언어규범화운동인 ‘문화어운동 사업’을 주관하였으며, 논문으로 「조선어조 연구」 등을 남겼다.

그리고 신성모를 기록하며 나는 다음과 같이 적었다.

신성모의 경력에서 주목할 할 것은 백산상회와 관련한 독립운동이다. 신성모가 관련된 독립운동단체는 대동청년단으로, 이 단체는 1910년대와 1920년대에 걸쳐 만주의 독립운동단체 뿐만 아니라 상해 대한민국임시정부와 연결되어 국외의 독립운동세력을 지원했던 비밀결사였다. 대동청년단은 신민회·교남교육회·달성친목회·조선국권회복단에 참여하고 있던 경상도 출신의 활동가를 중심으로 조직되었으며, 독립운동의 방략은 군자금 조달과 인재육성, 그리고 국내외 연락을 목적으로 활동하였다.

이 조직과 관련하여 활동한 천도교인은 홍주일(대구대교구장), 신상태(김천 신간회조직), 신성모, 이극로, 김기수(평남순천 은산천도교구장) 등이다.

1909년 10월 결성된 대동청년단은 1913년 이후 본격적인 국내활동을 전개하게 된다. 1914년 안희제는 이미 활동기반을 구축하고 있던 동래에 백산상회를 설립하였고, 대구의 서상일은 1913년 달성친목회를 재흥한 뒤 태궁상회를 설립하여 이를 거점으로 삼아 1915년 음력 1월 15일 조선국권회복단을 결성하였다.

안희제를 중심으로 한 백산상회의 조직과 서상일을 중심으로 한 조선국권회복단의 비밀결사조직이 대동청년단의 중추적인 기관이었다.

백산상회가 독립운동 군자금 모집과 인재육성을 위한 단체라 한다면, 조선국권회복단은 국내·외를 연결하는 연락기관으로서의 기능을 수행하였다.

그리고 1919년 11월 안희제를 비롯한 백산상회의 관계자, 그리고 영남의 부호·거상들이 유망한 청소년을 선발하여 해외유학을 시켜 장차 국권회복의 동량을 양성할 목적으로 기미육영회를 조직하였다.

기미육영회는 제1차 유학생으로 김정설·이병호·이제만·전진한·문시환 등 5명을 일본에 파견하였다.

그 뒤에도 안호상(독일)·이극로(독일)·신성모(영국) 등을 파견하였다.

즉 신성모는 고향 친구인 이극로와 함께 대동청년단원으로 영국과 독일에서 유학하게 된 것이다. 이극로가 독일로 간 것은 1922년 경이었고, 신성모가 영국으로 건너간 것은 1925년이었다.

1927년 신성모는 이극로의 독일 베를린 대학(현 훔볼트 대학) 박사학위 수여를 축하하기 위해 찾아갔다가 6월 6일에 이극로와 함께 독일 루트비히스하펜(Ludwigshafen)-프랑스 메쓰(Metz)-베르댕(Verdun)-파리를 여행하고 6월 15일 영국 항해대학 기숙사로 돌아왔다. 두 사람은 1년간 런던항해대학 기숙사에서 같이 기거하게 된다. 이극로는 당시를 이렇게 회고했다.

"1927년 여름에 내가 런던에서 처음 머물던 집은 항해대학 안에 있는 기숙사인데 이 학교는 런던 동부에 있어 그 이웃은 템스강을 사이에 두고 저편에는 그리니치 천문대가 있고 이편에는 인도를 삼키어 먹은 동인도회사가 있다." / 『고투 40년』 (이극로 회고집,1948)

한글학자 이극로 역시 천도교인으로 그는 결혼식을 경운동 천도교대교당에서 올렸다. 1928년 이극로는 프랑스 파리의 소로본 대학으로 건너가 구술 아카이브 스튜디오에서 2종의 녹음을 남겼는데, 그중 하나는 천도교의 교리를 낭독한 것으로 인터넷에서 그의 육성을 확인할 수 있다.

이극로의 생애는 조금 더 탐구할 필요가 있다. 위 글은 메모 글로 임시로 적은 것, 더 보완해야 한다.

건민회

https://m.blog.naver.com/arg3906/140170029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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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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