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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 10. 30. 1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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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0.10.28 16:33

[중국 속의 한국사 기행] 신 실크로드 중심지로 도약하는 '섬서성 서안' 중국

서안=지해범 중국전문기자 hbjee@chosun.com 기자의 다른 기사보기

고유민 중국여행전문가

 

우리 선조들의 1000년 발자취가 숨쉬는 '西安'
중국여행은 '붕어빵 관광'?

중국을 여행하는 한국인들은 거의 '똑같은 것'만 보고 온다. 만리장성, 자금성, 병마용, 황산, 장가계, 구채구… 등. 앞사람이 본 것을 똑같이 보고, 똑같은 사진을 찍고, 똑같은 음식을 먹는다. 이런 '붕어빵 관광'은 깊이있고 전문적인 여행으로 바뀔 때가 되지 않았을까?

중국 내 한민족사의 흔적은 후손들의 무관심 속에 거의 잊혀져가고 있다. 중국땅에서 고뇌하며 살다 간 선조들의 '성공'과 '실패' '지혜'와 '경험'은 우리 민족의 귀중한 자산이다. 역사에 대한 관심은 자기 뿌리에 대한 관심이며, 또한 미래에 대한 관심이다. 역사인식이 뒷받침되지 않는 미래전략이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한국이 앞으로 국가의 자존을 지키고 중국과 평화롭게 살아가려면 중국을 정확히 알아야 한다. 양국 교류사에 대한 관심은 그 출발점이다. 이제 '중국 속의 한국사 기행'을 떠나보자.

 

   
혜초가 수행하던 천복사내의 소안탑.
서안시 북쪽에 조성 중인 대명궁 공원의 정문 건물 / 서안= 지해범 중국전문기자

◆1000년 전 신라 바둑고수 '박구'를 만나다

한국의 바둑천재 이창호 9단보다 1000년 이상 앞서 중국에서 이름을 떨친 신라인 바둑 고수가 있었다. 그의 이름은 박구(朴球). 신라 말기에 당으로 유학 간 그는 바둑 실력이 뛰어나 당 희종(僖宗·재위 862~888)의 '기대조(棋待詔)', 요즘 말로 '바둑비서'가 되었다. 황제가 원할 때 바둑 상대가 되어주는 '국수'였다. 그의 명성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그가 신라로 돌아갈 때 장교(張喬)라는 문인이 지은 송별시가 '전당시(全唐詩)'에 전한다.

'신라에선 누가 적수가 되리오(海東誰敵手), 돌아가는 길도 외로울 테지(歸去道應孤)/ 장안의 궁궐에선 기예를 전수하고(闕下傳新勢), 귀국선에선 옛 기보를 복기하겠지(船中覆舊圖)/…고국과 이별한 지 몇 해이런가(故國多年別), 상전이 벽해될 만큼 달라졌으리(桑田復在無)'('고대한중교유시', 이충양, 참조)

박구가 활약했던 당의 수도 장안(長安)은 지금의 섬서성(陝西省) 서안(西安)이다. 당시 장안에는 신라의 왕자 출신으로 외교사절의 역할을 한 숙위(宿衛)를 비롯해, 유학생, 유학승, 상인 등이 거주하고 있었다. 이들의 발자취는 한국인의 무관심과 1300여년의 세월의 무게로 지워지고 있다.

◆황궁 친위대 사령관 된 신라인 '김인문'


서안시 제2순환도로 북쪽 구간(北2環) 태화로(太華路) 입체교차로에서 남쪽으로 방향을 틀면, 엄청난 규모의 대명궁(大明宮) 공원을 발견하게 된다. 낡은 주택을 헐고 중국돈 120억위안(한화 약 2조원)을 쏟아부어 조성하는 이 공원의 규모는 길이 약 4㎞에 폭 1㎞로, 뉴욕 센트럴파크를 흉내냈다. 대명궁은 당 고종이 이전에 거주하던 태극궁이 지대가 낮고 습하여 건강에 좋지 않다는 이유로 장안성 북쪽에 새로 조성한 궁전이다. 그 옛날 대명궁 성벽 바깥에는 '금원(禁苑)'이라 불리는 황제 친위부대 주둔지가 있었다. 당 태종 이세민이 626년 형과 동생을 죽이고 황권을 빼앗는 '현무문의 변'을 일으킬 때 이 부대의 도움을 받았다. 651년 '숙위'의 자격으로 장안에 머물게 된 김인문(태종무열왕의 둘째 아들)은 '좌령군위장군'에 임명된 뒤 '우무위위대장군'(679년)으로 승진했다. 이 명칭에 등장하는 '~위장군' '~위대장군'은 도성 방어부대 사령관을 뜻한다. 김인문이 당 황제의 친위부대를 직접 지휘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고선지' 집터, 공원으로 변해

당대 장안성은 황제가 머물던 태극궁을 중심으로 바둑판처럼 가로세로 도로가 나 있었다. 이렇게 나뉘어진 구역을 방(坊)이라고 불렀는데, 이런 방이 110여개나 되었다고 한다. 고구려 출신으로 중앙아시아를 호령하던 고선지(高仙芝·?~755)는 장안성의 영안방(永安坊)과 선양방(宣陽坊)에 두 채의 집을 가지고 있었다. 아버지 고사계에 이어 20살 때 군인이 된 그는 지금의 신강위구르지역인 안서도호부에 종군하면서 혁혁한 공을 세워 총사령관에까지 올랐다. 그는 천산산맥과 파미르 고원을 넘어 중앙아시아로 가는 동서교통로(비단길)를 평정함으로써 당의 경제에 크게 기여했다. 그의 파미르 원정로를 답사한 영국인 스타인(Stein)은 "고선지는 알프스를 넘어 이탈리아로 진격한 나폴레옹보다 뛰어나며, 유럽의 어떤 지휘관보다도 낫다"고 극찬했다. 당의 시성 두보(杜甫)는 고선지의 애마에 대해 '장안의 키 크고 힘센 젊은이들도 감히 올라탈 엄두를 내지 못하며/ 번개가 내리치듯 달리는 기세는 온 장안이 알고 있다'고 읊었다. 탈라스 전투(751년)에서 패배한 그는 하서절도사로 있다가 안록산의 난 때 모함을 받아 장안 동쪽의 동관(潼關)에서 죽음을 맞고 말았다.

천복사의 전통음악연주.
서안 외곽 홍교사에 있는 원측 사리탑.

◆원측·혜초 등 신라승들의 대활약

군인과 정치인의 발자취가 역사서에만 남아있는 것과 달리, 신라 출신 승려들의 활약상은 여러 사찰에 유적으로 남아있다. 서안시 중심지에서 남쪽 종남산 방향으로 30여분을 달리면, 인진(引鎭)이란 지역에서 흥교사(興敎寺)를 만난다. 이 사찰에는 유식(唯識)불교로 유명한 신라 출신 원측(圓測·613~696)의 탑이 남아있다. 경주 모량리에서 태어난 원측은 15세 때 당으로 유학을 가서 원법사에서 유식학을 배웠다. 그는 외국에 유학하지 않았는데도 중국어, 산스크리트어, 티베트어 등 6개 국어에 능통하여 '반야심경찬' '인왕경소' '해심밀경소' 등 수많은 저서를 번역·집필했다.

그러나 외국인으로서 실력이 뛰어나면 현지인의 시기를 받기 마련이다. 원측이 '서유기'에까지 등장하는 당대 최고승 현장법사가 번역한 '반야심경'에 오류가 있음을 지적하자, 현장의 제자인 규기(窺基) 일파가 강하게 반발했다. 생명의 위협을 느낀 원측은 종남산에 암자를 짓고 8년 동안 칩거했다. 그가 입적한 후에도 제자들은 규기 일파가 해코지할 것을 우려해 종남산 풍덕사에 사리탑을 세워 분골과 사리를 안치했다. 이것이 다시 지금의 흥교사로 옮겨진 것은 송(宋)대의 일이다. 지난 19일 이곳을 찾았을 때 현장-원측-규기 등 3인의 사리탑은 2008년 사천성 대지진으로 입은 피해를 보수 중이었다. 탑 맨 아래에는 송대에 만들어졌다는 원측의 석상이 모셔져 있다. 흥교사의 승려는 "보수공사는 내년에나 끝날 것"이라고 말했다.

서안시 남2환 부근의 천복사(薦福寺)와 대흥선사(大興善寺)는 '왕오천축국전'을 남긴 혜초(慧超·704~787)가 활동했던 곳이다. 16세 때 당으로 건너간 혜초는 그곳에서 인도의 고승 금강지(金剛智)를 만나 인도유학을 권유받고, 723년 바닷길로 인도에 도착해 중앙아시아를 두루 여행했다. 중국으로 돌아온 혜초는 천복사에서 불경을 번역하며 초기 인도밀교(密敎)를 공부하고 포교하는 데 힘썼다. 천복사 내에는 684년에 세워진 14층 소안탑(小雁塔)이 있는데, 좁은 계단을 밟아 꼭대기까지 오르다 보면, 그 옛날 구도의 일념으로 이곳을 올랐을 혜초의 숨결이 느껴지는 듯하다. 774년 당 황제 대종(代宗)은 가뭄이 이어지자 고승들 가운데 혜초에게 기우제를 지내는 데 필요한 글을 쓰게 했는데, 혜초가 선유사 옥녀담에서 '하옥녀담기우표(賀玉女潭祈雨表)'를 올리자 하늘에서 비단 같은 보슬비가 흡족히 내렸다고 한다.

◆고구려 유민촌, 고력거촌

서안 초당진(草堂鎭)에는 고구려 유민 집단 거주지로 추정되는 '고력거촌(高力渠村)'이 있다. 당대 고구려유민의 집단거주지를 '고려곡'이라고 불렀는데, 일부 학자들은 '고력거'를 그것으로 추정한다.

옛 실크로드의 출발점이었던 서안은 현재 인구 800만명(유동인구 포함 1000만)에 서북부의 중심지로 도약하고 있다. 전태동 서안총영사는 "중국 중서부개발의 거점도시인 서안은 관광산업 외에도 항공우주·IT산업을 적극 육성하고 있다"며 한국기업들이 '신(新)실크로드'의 중심도시에 관심을 가질 것을 당부했다.

 

 

[중국 속의 한국사 기행] 밭이 된 의자왕의 묘… 한민족 비운의 古代史 묻힌 땅, 낙양(洛陽)

 

의자왕의恨이 서린하남성 낙양
◆9개 왕조의 수도·황하의 중심, 낙양

지난 19일 오후 4시 20분 중국 섬서성(陝西省) 서안(西安)을 출발한 고속열차 화해호(和諧號)는 1시간 40분 만에 370㎞ 떨어진 하남성(河南省) 낙양(洛陽)에 도착했다. 순간 최고속도 350㎞. 하남성은 황하(黃河) 남쪽에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황하 유역은 예부터 중국인들의 정신적인 고향이자 정치·군사·문화의 중심지였다. 지금은 연해지역에 뒤졌지만, 인구 1억 명의 시장을 바탕으로 개발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황하 중심에 있는 낙양은 동주(東周), 후한(後漢), 서진(西晉), 후당(後唐) 등 9개 왕조의 수도가 되었다. 낙양은 낙수(洛水·지금의 洛河)에서 유래했다. '낙양'의 발음이 '떨어지는 태양'을 뜻하는 '낙양(落陽)과 같다고 해서, 은근히 미신을 좇는 모택동(毛澤東)은 한 번도 낙양을 방문한 적이 없다고 한다. 백성들로부터 '태양'으로 추앙받고 있었던 탓이다. 우리말에 책이 잘 팔리는 것을 뜻하는 '낙양의 지가를 올렸다'는 표현이 이 낙양에서 유래했다.

중국 하남성 낙양에 있는 용문석굴 / 지해범 중국전문기자

◆의자왕, 낙양에서 비운의 생을 마감하다

낙양과 가장 인연이 깊은 한국인은 의자왕(義慈王)이다. 한때 '해동증자'로 칭송받던 의자왕은 재위 16년째부터 사치와 방종에 빠져 충신을 박해하고 국정을 게을리하다 660년 나당연합군에 패해 당으로 끌려가는 신세가 되었다. '삼국사기' 등에 따르면, 그는 태자 효, 왕자 융, 그리고 백성 1만2000여명과 함께 당으로 압송된 뒤 곧 병사했다.

그가 묻힌 곳은 낙양 북쪽 망산(邙山)에 있다는 손호(孫皓)와 진숙보(陳叔寶) 무덤 옆으로 알려져왔다. 손호는 손권(孫權)의 손자로서 오(吳)의 마지막 왕이고, 진숙보는 남조 진(陳)의 마지막 왕으로, 둘 다 주색과 폭정으로 나라를 잃었다. 당(唐)이 의자왕을 이들 옆에 묻은 것은 백제왕을 격하하면서 동시에 후세에 경계를 삼으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망산, 즉 북망산은 '낙양성 십리허에 높고 낮은 저 무덤은'으로 시작하는 '성주풀이'의 노랫가사가 가리키는 곳이다.

행정구역으로는 망산진(邙山鎭)이며, 시 중심에서 4㎞쯤 떨어져 있고 그 범위도 매우 넓다. '산'이라고 하지만 실제 가보면 얕은 구릉에 채소밭이나 과수원이 대부분이다. 이곳에 한(漢)대 이후 여러 왕조의 무수한 제후와 귀족들이 묻혔다. 그래서 '북망산천 간다'는 말은 곧 죽음을 뜻한다.

낙양 북쪽 망산에 있는 효문소황후의 묘 / 지해범 중국전문기자
그러나 정작 의자왕이 묻힌 곳은 이곳이 아니다. 중국측에 의해 진숙보 등이 묻힌 곳은 망산에서 동북쪽으로 15㎞쯤 떨어진 맹진현(孟津縣) 송장진(送莊鎭) 봉황대촌(鳳凰臺村)으로 확인되었다. 이를 근거로 90년대 중반 이후 한중 조사팀은 봉황대촌에서 여러 차례 조사작업을 벌였다. 중국측은 항공촬영을 통해 무덤으로 추정되는 지역을 조사했으나, 왕자 부여융의 묘지석만 발견했을 뿐 의자왕의 무덤은 끝내 찾지 못했다. 결국 부여시는 지난 2000년 현지에서 채취한 정갈한 토양을 한국으로 가져와 능산리 고분군에 의자왕과 부여융의 묘지를 조성할 때 넣고 제사를 올렸다. 수천년간 이국땅을 떠돌던 백제의 마지막 국왕 부자의 원혼을 달랜 것이다.

지난 20일 오전 시골길을 물어 물어 봉황대촌에 도착했을 때, 현지 주민들은 마을 뒤쪽의 넓은 밭〈사진〉을 가리키며 "이 부근이 한국의 국왕이 묻혔던 곳"이라고 말했다. 그곳은 평평한 토지로 파란 보리싹만이 고개를 내밀었고 밭 한가운데로 시멘트 도로가 나 있었다. 한 주민은 "50년대 어느 해 비가 많이 내린 날, 멀쩡하던 밭이 둥근 모양으로 4~5m 밑으로 꺼졌는데, 꺼진 땅의 지름은 10m 정도였다. 그때 정부에서 와서 발굴을 했는데, 높이 1m 정도의 석관이 나왔고 한국 왕의 묘라는 얘기가 있었다. 그 뒤로 묘지는 덮였고 밭으로 변했다"고 했다. 그의 진술을 들어보니, 우리 정부가 중국의 협조를 받아 석관의 존재를 확인하고 정밀 발굴작업을 벌인다면, 의자왕 묘를 찾을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곳에서 1㎞쯤 떨어진 곳에는 진숙보의 묘로 알려진 분묘가 있었다. 높이와 지름이 20m 정도여서 의자왕 묘의 형태를 짐작게 했다. 그러나 묘지 꼭대기는 고구마밭으로 변해 있었고, 밭 한가운데는 깊이 5~10m의 도굴구멍이 2개 나 있었다. 소중한 유적을 왜 방치하느냐고 묻자, 주민은 "묘지가 워낙 많아 일일이 관리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대답했다. 의자왕의 묘도 1300여년의 긴 세월 동안 이렇게 방치되고 훼손되다가 끝내 멸실되었을 것을 생각하면, 중국을 탓하기 전에 우리 자신의 무관심과 나약함을 먼저 탓해야 할 것 같다.

북위의 선무제가 어머니 효문소황후를 기려 조성한 용문석굴내 빈양남동의 아미타불. 어머니의 얼굴을 본 떠 만들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 지해범 중국전문기자

◆북위 7대 황제 선무제의 어머니, 고구려인 고조용

낙양에는 고구려인의 후예로 황후에까지 오른 '고조용(高照容)'의 사연도 숨어있다. 고조용은 선비족이 세운 나라인 북위(北魏·386~534년)의 6대 황제 효문제(孝文帝)의 후궁이었다가 사후에 황후로 추존된 인물이다. 그녀는 효문제와의 사이에 맏아들 원각(元恪)과 원회(元懷), 장락공주(長樂公主) 등 2남 1녀를 낳았는데, 그중 맏아들이 7대 황제 선무제(宣武帝)가 된다. 그녀는 효문제가 평성(지금의 산서성 대동)에서 낙양으로 수도를 옮기는 도중 갑자기 죽었다. 위서(魏書)는 나중에 황후가 되는 풍소의(馮昭儀)가 그녀를 암살했다는 풍문을 기록했다. 맏아들 원각은 황제가 되자 어머니를 황후[孝文昭皇后]로 추존했다. 낙양 외곽 망산진에는 효문제의 능인 장릉(長陵) 부근에 고조용의 무덤〈사진〉이 있다.

그녀의 얘기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낙양이 자랑하는 불교문화유적인 용문(龍門)석굴에도 효문소황후에 얽힌 얘기가 있다. 용문석굴은 대동(大同)의 운강석굴, 돈황의 막고굴과 함께 중국의 3대 석굴로 꼽힌다. '위서(魏書)'에 따르면, 선무제는 서기 500년 아버지 효문제와 어머니 효문소황후를 위해 2개의 석굴을 조성하는데, 그것이 '빈양동(賓陽洞)'이다. 총 24년에 걸쳐 만들어진 이 석굴은 남동·중동·북동 등 3개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중 중동이 아버지, 남동이 어머니를 기려 조성한 것이다.

남동은 높이 9m, 너비 8m이며, 가운데 아미타불〈작은 사진〉이 앉아있고, 양쪽에 2명의 제자와 2명의 보살이 서 있다. 전하는 바로는 선무제가 어머니의 얼굴을 본떠 아미타불을 조성했다는 얘기가 있다. 이에 대해 낙양박물관 용문석굴 분소장은 "어머니를 기려서 만든 것은 맞지만, 그의 형상을 본떴다는 것은 기록에 없다"고 대답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구려인의 피가 2분의 1 섞인 선무제가 어머니를 기려 만든 빈양남동의 아미타불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인자한 한국 어머니의 모습이 떠오르는 것은 어쩔 수 없다.

백제 의자왕의 묘터였다는 밭.

◆백제의 배신자 흑치상지와 고구려인 천남생

망산에는 백제 유민 흑치상지(黑齒常之) 부자와 고구려의 권력자 연개소문의 아들인 천남생(泉男生) 일족의 무덤도 있다. 흑치상지는 백제가 망하자 부흥운동에 참여했으나, 후에 배신하여 당나라 장군이 되었다. 그는 돌궐·토번과 여러 차례 싸워 이긴 명장이었다. 그러나 '무측천의 개'였던 혹리 주흥(周興)의 모함을 받고 투옥되어 결국 감옥에서 자살했다. 천남생은 원래 연(淵)씨였으나, 당 고조(高祖) 이연(李淵)의 이름과 같다고 하여 천(泉)으로 바꾸었다.

연남생은 아버지의 뒤를 이어 대막리지가 되었으나 동생인 남건 등과의 권력투쟁에서 패해 당나라에 투항했고, 당나라의 향도가 되어 조국을 멸망시키는데 앞장섰다. 천남생은 매국의 대가로 대장군(大將軍)에 올랐고, 아들 천헌성(泉獻誠)은 최고 부자 반열에 올랐다. 그러나 천헌성은 혹리 내준신(來俊臣)의 모함으로 투옥되었다가 감옥에서 목졸려 살해당했다. 하늘은 매국노 가문이 영원히 부귀영화를 누리도록 놔두지 않았던 것이다.

 

'낙양표' 짜장면·칼국수 꼭 먹어보세요

 

중국인들이 자기 나라에서 평생 다 해보지 못하는 3가지가 있다고 한다. 음식을 다 먹어보지 못하고, 전국을 다 구경하지 못하며, 글자를 다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 얘기처럼 중국에는 정말 음식 종류도 많다. 하남성 낙양을 가면 꼭 '짜장면'을 먹어볼 일이다. 현지인들이 잘 간다는 길가의 평범한 식당에 들어가서 '짜쟝미엔(炸醬面)'과 '후투미엔(糊塗面)'을 시켰다. 짜장면은 약간 넓은 면 위에 짙은 갈색의 소스가 얹혀져 나왔다. 젓가락으로 비벼서 먹으니 영락없는 한국식 짜장면이다. 차이점이라면 소스가 한국 것보다 덜 짙고 덜 묽으며 기름기도 적다는 점이다. 그래서 오히려 더 깔끔한 느낌을 주었다.

짜쟝미엔 / 후투미엔

'후투미엔(糊塗面)'은 한국식 칼국수와 비슷한 모양이다. 그러나 야채를 많이 넣고 국물이 걸쭉한 것이 차이점이다. 국물맛도 칼국수와는 전혀 다르다. 고춧가루를 넣자 우리 입맛에 좀 가까워졌다. 여기에 돼지고기 볶음이나 야채볶음을 곁들이면 좋다. 날씨가 쌀쌀해지거나 술먹은 다음날 속풀이용으로 괜찮다. 짜장면과 후투미엔의 가격은 똑같이 6위안(元·약1000원).

 

 

 

[중국 속의 한국사 기행] '표해록' 통해 본 중국 강남과 한반도의 교류

조영헌 홍익대 역사교육과 교수

 

조선 선비 최부가 탔던 경항대운하 뱃길, 최치원·의천도 다녔던 물길

◆최부, 1400년 역사의 경항대운하에 이르다

"강남 사람들은 글 읽기를 즐겨하여 비록 마을의 어린아이나 나루터에서 일하는 삯군이라 하더라도 모두 문자를 알고 있었습니다. 강북은 배우지 못한 사람이 많았기 때문에 신이 물으려고 하면 모두 '나는 글자를 모른다'고 하였으니 곧 무식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강남은 시중에서 금은(金銀)을 사용하고 강북은 동전을 사용합니다. 동일한 점은 귀신을 숭상하고 도교와 불교를 존숭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모두 상업을 직업으로 삼아 비록 고관이나 거가대족(巨家大族)의 사람일지라도 몸소 저울을 소매 속에 넣고 다니면서 사소한 이익을 따집니다."

15세기 후반 항주(杭州)에서 북경(北京)까지 선박을 타고 대운하를 이용했던 조선의 문신 최부(崔溥·1454∼1504)는 '표해록(漂海錄)'에서 장강(長江·양자강) 이남과 이북의 차이점과 공통점을 이렇게 묘사했다. 중국인 학자 갈진가(葛振家)는 최부의 '표해록'을 일본 승려 원인(圓仁·794∼894)의 '입당구법순례행기', 마르코 폴로(Marco Polo·1254∼1324)의 '동방견문록'과 더불어 세계 3대 중국 기행기로 꼽았다. 세 저자들은 각기 당(唐), 원(元), 명(明)대의 대운하를 이용하여 남북을 왕래했다. 그 가운데 대운하의 풍경과 운영에 대한 예리한 관찰과 묘사는 최부의 표해록이 단연 압권이다.

대운하를 이용하는 한국인의 왕래는 중국의 수도가 북경으로 정해지기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 쿠빌라이가 1272년 수도를 대도(大都·북경)로 정한 이후, 북경은 원, 명, 청의 수도로 600년 이상 군림했다. 그 결과 고려·조선의 사행단은 늘 북방으로만 왕래했고, 조선 시대에 들어와서는 숭유억불(崇儒抑佛) 정책으로 불교가 중국과 교섭을 가질 형편이 못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최부에게 '위험한 행운'이 찾아왔다. 1488년 제주도 경차관(敬差官)으로 재임하던 최부는 부친상의 소식을 듣고 제주도를 출발해서 전라도로 가는 도중 강력한 폭풍을 만났다. 생사의 갈림길에서 표류하던 일행은 절강성 영파(寧波)에 표착했다. 육지에 올라온 이들을 기다리던 사람은 체포하러 나온 무관이었다. "왜인은 도둑질하는 데에는 신출귀몰이오. 옷을 바꿔 입고 조선 사람처럼 위장하고 있다면, 어떻게 당신이 왜인이 아님을 알 수 있겠소?" 최부를 왜구로 오인한 것이다. 하지만 최부는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우리의 행동거지를 보거나 우리의 인신(人身)과 마패, 관대, 문서 등으로 충분히 진위를 판단할 수 있을 것이오." 공술 과정에서 최부가 중국의 고전과 한국의 역사, 그리고 양국 교류의 역사를 줄줄이 외자, 신문하던 관리들은 경외심을 가지고 최부를 바라보았다.

최부는 관리들의 호송을 받으며 북상하는 과정에서 강남의 대표 도시인 항주와 소주(蘇州), 강북의 양주(揚州)와 회안(淮安) 등 여러 지역을 세밀히 관찰했다. 그에게는 중국인들에게는 없는 '타자(他者)의 관점'이 살아있었던 것이다. 최부가 항주를 출발해 북경에 닿는 데 50여일이 걸렸다. 당시에는 풍랑이나 날씨의 영향으로 며칠씩 선박이 정박되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또 대운하는 마주 오는 평저선(平底船·밑이 평평한 선박)이 겨우 지나칠 정도로 협소했고, 일정한 수심을 유지하기 위해 끊임없이 준설작업을 해야 했다. 하지만 대운하에 대한 중국인의 자부심은 대단하다. 2005년 개관한 항주의 중국경항대운하박물관(中國京杭大運河博物館) 입구에는 '세계의 유명 운하' 표가 걸려 있다. 거기에서 첫 번째 자리는 중국의 '경항(京杭)대운하'가 차지하고 있다. 길이는 1794㎞. 경항대운하의 기초는 600년대 초 수양제(隋煬帝)가 닦았으므로 대운하의 역사는 1400년에 달한다. 중국 정부는 이를 세계문화유산에 등재시킬 준비를 하고 있다.

경항대운하를 지나는 소형배들의 행렬.
대운하와 성곽의 모습을 보여주는 옛그림.

◆唐代 이름 떨친 신라 유학생 최치원

최부가 중국인들과 대화하는 과정에서 당대(唐代)에 중국에서 이름을 떨친 최치원(崔致遠·857∼미상)을 기억해냈음은 물론이다. 신라는 7세기 말 해양 문제를 전담하는 선부(船府)라는 관서를 독립시켜 해양 시대를 열어갔다. 학생과 승려들의 유학도 늘어났다. 최치원은 12살에 유학생으로 선발되어 당의 국자감(國子監)에 파견되었고, 6년 동안 공부하여 외국인을 대상으로 한 빈공(賓貢)의 진사과(進士科) 시험에 합격했다. 합격생과 시험관, 그리고 합격 동기생 사이에는 끈끈한 동류(同流)의식이 있어 '성공의 사다리'가 형성되었다. 최치원 역시 시험 감독관이었던 예부시랑 배찬(裴瓚) 및 과거 동기였던 고운(顧雲) 등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최치원이 관직을 떠나 궁핍한 생활을 할 때, 그를 이끌어 준 이가 고운이었다. 고운은 회남(淮南) 절도사였던 고변(高騈·821~887)의 막료로 활동하며 최치원을 추천했고, 그의 재능을 알아본 고변 역시 최치원을 회남관역순관(淮南館驛巡官)에 발탁했다. 880년 소금 밀매로 돈을 모았던 황소(黃巢)가 반란을 일으켜 낙양과 장안을 공략하자, 사천(四川)으로 피란을 떠난 황제가 고변에서 황소를 토벌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최치원의 '격황소문(檄黃巢文)'은 이때 나온 것이다.

"춘추전에 이르기를 '하늘이 착하지 못한 자를 돕는 것은 좋은 조짐이 아니라 그 흉악함을 기르게 하여 더 큰 벌을 내리려고 하는 것'이라 하였다. 만일 네가 헛된 욕망에 이끌려 함부로 날뛴다면 사마귀가 수레바퀴에 저항하는 우를 범하는 것이다. 우리 군대가 몰아치면 너의 오합지졸들은 사방으로 흩어질 것이며, 너의 몸은 도끼에 묻는 기름이 될 것이고, 뼈는 전차에 부서져 가루가 될 것이다."

이 격문을 읽은 황소가 너무나 놀라 침대에서 떨어졌다는 얘기가 전해 내려온다. 최치원은 대운하를 이용해 초주(楚州)를 왕래하며 많은 시를 남겼다. 오늘날 양주에 가면 최치원 기념관을 만날 수 있다.

◆깨달음 얻기 위해 대운하 뱃길 오른 김교각·의천

당시 경주와 당의 장안을 연결하는 바닷길은 크게 두 가지가 있었다. 하나는 초주를 경유해서 산동성의 등주(登州)에서 신라로 출항하는 방법이다. 이른바 북방 항로다. 요동반도의 대련(大蓮)을 거쳐 압록강 하구, 다시 서해안을 따라 남하한다. 시간은 오래 걸려도 비교적 안전하다. 최치원이 귀국길에 이용했다. 다른 하나는 영파나 천주(泉州) 등지에서 출항하는 남방 항로다. 나말여초 선종(禪宗) 계열의 불법을 익히기 위해 중국을 왕래했던 승려들은 주로 남방 항로를 이용했다. 계절풍을 이용하면 주산열도에서 흑산도까지 4~5일 만에 도달할 수 있었다. 이 항로를 이용해 한국의 구산선문(九山禪門)이 중국의 남방 지역과 인연을 맺게 되었다. 대표적인 인물이 구화산을 불교의 성지로 가꾼 김교각(金喬覺·696~794)과 항주에 머물며 불법을 익혔던 대각국사 의천(義天·1055∼1101)이다.

신라 왕실 가문으로 알려진 김교각은 24세 경에 바닷길을 통해 절강성에 도착했다. 그리고 구화산에서 99세에 열반할 때까지 수행을 계속했다. 높은 정신적 경지와 도력(道力)으로 그는 앉은 채 열반했고 이로 인해 지장보살(地藏菩薩)의 현현(顯現)으로 받들어졌다. 그 후 구화산은 사천(四川)의 아미산(峨眉山), 산서(山西)의 오대산(五臺山), 절강의 보타산(普陀山)과 더불어 중국 불교의 4대 명산으로 발전했다. 고려 문종의 넷째아들인 대각국사 의천은 화엄종과 천태종의 교리상 차이점을 알아보고자 1084년 송나라로 유학길에 올랐다. 중국에 머문 시간은 13개월뿐이지만, 그 중 7개월을 항주에 머물렀다. 당시 항주에는 화엄종의 최고봉이었던 정원법사(淨源法師·1011~1088)가 있었다. 의천이 머문 혜인사(惠因寺)는 혜인고려화엄교사(慧因高麗華嚴敎寺)로 개명되었고, 이후 고려사로 약칭되었다.

 

 

[중국 속의 한국사 기행] 걸어서 찾아가는 북경 속의 한국사

북경=고유민·중국여행전문가

 

입력 : 2010.10.28 16:15

북경 유리창거리.
이덕형 일행 恨 서린 午門"작은 나라는 못 들어온다"中 관리들에게 끌려나가…
책·신문물의 창구 유리창박지원·홍대용 등이 찾아지금은 고서화·골동품 거리로…◆조선 사신일행이 묵던 숙소, 회동관

북경지하철 전문역(前門站) A출구로 나와 북쪽으로 걸어가면 오른쪽에 동교민항(東交民巷)이란 조그만 길이 나온다. 이 길로 들어가면 북쪽에 19세기 유럽풍의 건물들이 있고, 프랑스와 일본 등 외국의 대사관 자리였음을 알리는 표지가 있다. 이 동교민항에 조선의 사신 일행이 묵던 숙소가 있다. 회동관 혹은 옥하관이라 불렸던 숙소의 정확한 위치는 의견이 분분하다. 이덕일의 '조선 최대 갑부 역관'(김영사, 2006)에서는 회동관이 동교민항 남쪽의 수도대주점(首都大酒店)이라고 보았다. 현재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된 '연경성시도'를 보면 내성의 남쪽 중앙에 있는 정양문(正陽門) 안쪽에 사신들의 숙소인 회동관이 있었다는 것이 증거이다. 그러나 김성남의 '이야기로 읽는 한중문화교류사'(프로젝트 409, 2004)에서는 동교민항 북쪽 거리에 위치한 인민최고법원이 원래의 옥하관이라고 주장한다. 이어 러시아 사람들 때문에 남쪽의 공안국 건물로 옮겼다고 한다. 필자가 왕부정(王府井)에 있는 서점에 가서 북경역사지도를 찾아 회동관 혹은 옥하관의 위치를 찾아보았으나 발견하지 못했다.

판첸라마를 위해 지은 승덕의 수미복수지묘.
회동관에 관심이 가는 것은 사신 일행을 따라온 역관과 상인들이 중국인들과 무역을 하는 장소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회동관 무역이라고 한다. 이 무역의 주도권은 중국 상인들이 쥐었다. 조선 역관과 상인들은 사신단이 돌아갈 때까지 물건을 팔아야 했기 때문에 가격 결정권을 가지지 못하고 시간 끌기 작전과 담합으로 나오는 중국 상인들에게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한 방송사가 방영한 '상도(商道)'라는 드라마의 주인공이었던 의주 만상(灣商) 임상옥(林尙沃·1779~1855)은 중국 상인들의 담합 구조를 깬 인물이었다. 그는 다른 역관과 상인들처럼 손해 보는 장사를 할 수는 없다는 생각에, 자신이 가져간 인삼을 쌓아놓고 불을 질러버렸다. 놀라서 달려온 중국 상인들에게 임상옥은 평소보다 10배나 높은 가격에 판매했다고 한다. 이후 임상옥은 중국 상인들과 앞으로는 적정한 가격에 거래하기로 합의했고, 인삼 무역으로 조선 최고의 거부가 되었다. 회동관 부근의 왕부정은 지금 북경에서도 가장 번화한 상업거리가 되어 있다. 회동관 무역이 지금까지 이어지는 셈이다.

◆약소국의 치욕과 비애가 서린 午門

전문에서 북쪽으로 계속 걸으면 현대 중국을 상징하는 천안문을 지나 고궁박물원(자금성)의 남쪽 입구인 오문(午門)에 도착한다. 필자가 지나온 길이 예전에 조선 사신들이 자금성에 들어가기 위해 왔던 바로 그 길이다. 지금은 이곳에 매표소가 있어 입장권만 구입하면 누구나 고궁박물관에 들어갈 수 있다. 그러나 조선 사신들은 그렇지 못했다. 1624년 10월 13일부터 1625년 2월 27일까지 북경에 머물렀던 조선 사신들의 이야기를 담은 국문 사행록인 '죽천행록'을 보면 원래 조선의 사신들은 다른 나라의 사신들처럼 오문 밖에서 조회하였다고 한다. 이때 정사(正使) 죽천(竹泉) 이덕형(李德泂, 1566~1645)이 "소신의 나라가 본디 예의지방으로 천하에 유명하오니 오랑캐와 한 반열에 서기는 부끄럽사오니 청컨대 오문 안에서 조회하여지이다"라고 주청하여 겨우 황제의 허락을 받았다고 한다. 반정(反正)으로 권좌에 오른 인조의 즉위를 승인받기 위해 간 이덕형 일행은 중국 관리들의 횡포에 온갖 수모를 다 겪는다. 이덕형이 차가운 길바닥에 엎드려 중국 고관들에게 만나기를 청하는 장면은 이렇게 묘사돼 있다.

"공이 또 길가에 엎드려 손을 묶어 부비니 모두 불쌍히 여겨 칭찬하기를 '조선에 충신이 있도다' 하고 '내일 도찰원으로 오라' 하거늘, 공이 무수히 사례하고 관에 돌아와 앉아 파루를 기다려 마을 밖에 가 대령하니 춥기가 우리나라에 비하면 더한지라. 사람이 다 떨고 섰더니…."

우여곡절 끝에 고관들을 만나게 되었으나 다시 쫓겨날 위기에 처하자 죽천은 섬돌을 붙들고 내쫓기지 않으려 애원하는 장면을 이렇게 기록한다.

"한 대신이 갑자기 소리질러 꾸짖되 '변방 적은 나라 신하가 우리 존위를 범하랴. 들어내치고 문 닫으라.' 공이 울며 빌어가로되 '대저 모든 대인들께선 적선하소서.' 섬돌 붙들고 나오지 않으니…." 오문에서 이 장면을 떠올리자 약소국의 비애가 밀려온다.

또 지하철을 타고 전문역(前門站)에서 서쪽으로 두 정거장을 가면 선무문역(宣武門站)이 있다. 이 역 북쪽의 선무문내대가(宣武門內大街) 동쪽에 남당(南堂)이 있다. 또 북경의 최고 번화가인 왕부정대가(王府井大街)를 따라 북쪽으로 가면 롯데백화점 옆에 동당(東堂)이 보인다. 천주교 성당인 남당과 동당은 1644년 아담 샬과 만난 소현세자를 비롯하여 정두원(1631) 등 천주교와 관련된 인물들이 자주 찾아갔던 곳이다. 또 이들뿐만 아니라 김창업·이기지(李器之)·홍대용·박지원 등 조선 사신단 일행도 숙소와 가까워 자주 찾아갔다. 공원처럼 바뀌어 관광지 분위기가 나는 동당에 비해 남당은 주차장까지 완비되어 많은 서양인들이 미사를 보는 종교적인 냄새가 난다.

홍대용이 먼 길을 찾아가 연구했던 북경 관상대.
◆홍대용, 유럽신부 찾아가 천문학 배워

전문역에서 지하철 순환선인 2호선을 타고 동쪽으로 두 정거장을 가면 건국문역(建國門站)이 있다. 이 역의 서남쪽에는 명청시대의 관상대(흠천감·欽天監·이라고 불렸음)가 있다. 명나라와 청나라 황제들은 중국에 천주교를 포교하려고 온 신부들의 과학 지식을 이용하기 위해 이 관상대에서 천문 현상을 관찰하고 역법을 만드는 일에 종사하게 하였다. 과학에 관심 있던 홍대용은 이곳을 찾아 유럽 신부들에게 끈질기게 질문하고 직접 관찰하면서 천문학 지식을 배웠다. 현재는 빌딩과 도로 사이에 끼여 일부 연인들의 데이트 장소로 전락한 관상대의 위치를 지도에서 찾아보며, 홍대용이 숙소인 정양문(현재의 전문)에서 북경성의 동남쪽 구석까지 찾아온 정성과 학구열이 느껴져 마음이 숙연해진다.

◆가장 오래된 고서화·골동품 거리 유리창

전문에서 서쪽으로 한 정거장을 가면 화평문역(和平門站)이 있다. 여기서 남쪽으로 남신화가(南新華街)를 따라 걸으면 횡단보도의 동쪽과 서쪽으로 뻗은 거리가 유명한 유리창(琉璃廠)이 있던 곳이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이곳은 원래 유리기와를 만들던 공장이 있던 곳이었으나, 나중에는 책과 문방구를 파는 곳으로 바뀌었다. 조선시대 사신 일행과 수행원들은 이곳에서 새 책을 구입하고 서방에서 들어온 신문물을 접했다. 유리창은 조선 사신과 일행들뿐만 아니라 과거 시험을 준비하는 중국의 문인과 학자들이 자주 드나드는 곳이었다. 홍대용 등 여러 학자와 관리들이 유리창에서 만난 중국인들과 필담을 나누고 자신들의 시나 문집을 전달해 주는 등 문화교류의 현장이기도 했다. 지금 유리창 거리는 골동품과 고서 거리로 바뀌었다. 북경 시내에서 골동품을 취급하는 곳은 이곳 말고도 몇 군데 더 있지만, 역사가 가장 오래된 유리창 물건이 가장 비싸다. 그래서 중국의 고서화나 골동품에 관심 있는 한국 관광객들은 요즘도 이곳을 찾는다. 하지만 골동을 감별할 능력이 없으면 '짝퉁 대국'인 중국에서 사기당하기 십상이다.

북경의 서북쪽에 위치한 원명원(圓明園)도 조선 사신들이 자주 찾아가야 했던 장소의 하나였다. 원명원은 원래 북경의 서북쪽에 위치한 별궁으로, 화려하고 웅장한 건축물과 보물, 유럽 여러 나라의 왕궁을 본떠 만든 서양식 건물, 강남의 정원을 본뜬 정원 등으로 유명하여 유럽 여러 나라의 왕들도 부러워했을 정도였다. 그러나 지금은 중국인들에게 제국주의 서양이 남긴 침략과 파괴를 상징한다. 1860년 영국과 프랑스가 북경을 점령한 후 이곳을 파괴하고 약탈했기 때문이다. 몇 개의 돌조각만 남은 서양루(西洋樓)는 야만적인 영국과 프랑스 군인들의 분탕질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다. 조선 사신들은 1782년에 처음으로 원명원에서 거행하는 각종 의식과 연회에 참여한 후 매년 중국에 왔던 동지사들은 정월 대보름에 원명원에서 벌어지는 각종 행사에 참석했다. 원명원을 처음으로 언급한 홍대용 이외에도 많은 사신들과 수행원들이 원명원의 모습이나 여기에서 벌어진 각종 축제와 의식을 기록하였다. 이들의 기록이 폐허가 된 원명원의 옛 모습을 복원하는 데 도움이 되는 귀중한 자료라고 하니, 우리 조상들의 투철한 기록 정신이 자랑스럽다.

◆고려영은 고구려 군영인가 역참인가

북경 동북쪽 순의구(順義區)에 고려영(高麗營)이란 곳이 있다. 고려영은 구체적인 유적지는 남아있지 않지만 그 이름만으로도 우리의 호기심을 자극한다. '고려영'은 '고려의 군영'이란 뜻이다. 하지만 '고려영'의 정체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고려영에 대해 처음으로 주목한 이는 단재 신채호였다. 신채호는 '조선상고사'에서, 당태종이 안시성(安市城)에서 막혀 쩔쩔매고 있는 동안 연개소문(淵蓋蘇文)이 내몽고를 우회하여 지금의 북경지역을 공격했다고 주장했다. 고려영은 이때 세운 군영이라는 것이다. 이는 정사에서는 기록을 찾아볼 수 없는 주장이지만, 재야사학자들 사이에 호소력을 갖고 있다. 이와 관련하여 박지원이 '열하일기'에서 적은 내용이 주목을 끈다. 박지원은 당태종이 고구려를 정벌할 때 일찍이 북경의 동악묘(東岳廟)에서 5리 정도에 위치한 황량대(��糧臺)에 군사를 주둔시키고 거짓으로 곡식 창고를 만들어서 적을 속이려고 했다고 기록하였다. 청나라 때 고조우(顧祖禹)의 '독사방여기요(讀史方輿紀要)'라는 지리서에도 비슷한 기록이 있다.

문제는 왜 당태종이 북경 일대에 고구려를 속이기 위한 군사시설을 만들었느냐는 점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당나라와 고구려의 국경선은 요하(遼河) 부근이다. 북경에서 심양까지 700㎞가 넘는 점을 생각하면, 당태종이 왜 고구려를 속이기 위한 위장 시설을 국경에서 한참 먼 곳에 만들었는지가 의문이다. 그래서 고구려의 군대가 북경 부근까지 쳐들어왔기 때문이라는 추정이 가능하다. 국내의 한 방송사도 이런 추론을 근거로 프로그램을 만든 적이 있다. 이와 달리 중국인들은 당나라 때 고구려 사신들이 거쳐 가던 역참에 사신들의 시중을 들기 위해 일부 고구려 사람들이 거주하여 고려영이 만들어졌다고 주장한다. 역참이란 말을 갈아타거나 잠자리를 제공하기 위해 국가에서 만든 교통망이다. 그런데 외국 사람들을 불러다 역참을 관리하도록 했다는 것은 좀 이상하다. 게다가 고려영의 위치는 고구려 사신들이 당나라로 가는 교통로라고 보기 어려운 곳에 있다. 중국 쪽의 주장도 신빙성은 떨어진다.

연암은 '열하일기'에서 북경의 동북쪽 군현에 고려장(高麗莊)이란 지명이 많다고 기록했다. 또 '독사방여기요'에도 현재의 북경시 동쪽에 위치한 통현(通縣) 서쪽 12리에 고려장이란 지명이 있었다는 기록이 나온다. 북경 동쪽의 영평부(永平府)의 풍윤현(豊潤縣)에서 서쪽으로 10리 떨어진 곳에 고려보(高麗堡)가 있다는 기록도 있다. 이곳에는 병자호란 다음 해인 1637년 포로로 잡혀 온 사람들이 논농사를 지으며 우리의 풍습을 유지한 채 살고 있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고려영'은 혹시 몽고인들이 세운 원나라에 끌려갔거나 자발적으로 건너갔던 고려인들이 거주했던 곳이거나, 조선시대에 끌려갔던 사람들이 살았던 곳은 아니었을까? 지난 10월 중순 고려영을 방문하여 현지인들에게 지역 명칭의 유래를 물어보았지만,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었다. 심지어는 짜증을 내는 사람도 있었다. 고려영을 의문부호로 남긴 채 발길을 돌려야 했다.

◆청 황제 의도 꿰뚫은 연암

열하의 피서산장은 조선 사신들이 청나라 황제를 만나기 위해 가야 했던 곳이다. 연암을 포함한 사신 일행은 건륭제의 생일잔치를 승덕에서 연다는 이유로 밤낮을 달려 승덕으로 향하였다. 이곳은 열하라고 불리며, 승덕은 행정상의 지명이다. 연암은 열하일기에서 "실제로는 여기가 지형적으로 험하고 중요한 곳을 차지하여 몽골의 숨통을 죌 수 있는 변방 북쪽의 깊숙한 곳이므로 이름은 비록 피서를 한다고 하지만, 사실은 천자 자신이 나서서 오랑캐를 막으려는 속셈이다"라고 하여, 청나라 황제들의 열하 행차가 몽골 지배와 관련 있음을 지적하였다. 이는 현재 청대사 연구자들의 견해와 일치하며, 심지어 우리나라에 번역된 '대청제국 1616~1799: 100만의 만주족은 어떻게 1억의 한족을 지배하였을까?'(이시바시 다카오)란 책에도 인용이 될 정도였다. 연암의 탁월한 정치외교적 감각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현재 승덕의 볼거리는 피서산장과 외팔묘(外八廟)이다. 피서산장의 건물들은 북경의 자금성과 비교하면 수수하고 소박하여 황제가 사는 곳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였다. 이 가운데 사지서옥(四知書屋)은 건륭제 이후 청나라 황제들이 외국의 사신이나 친분 있는 신하들과 만나던 장소였다. 조선 사신들도 이곳에서 청나라 황제들을 만났다고 한다. 외팔묘는 티베트의 수도였던 라싸에 있는 포탈라궁을 모방해 만든 보타종승지묘(普陀宗承之廟), 판첸라마를 위해 지은 수미복수지묘(須彌福壽之廟), 세계 최대의 목조관음상으로 유명한 보령사(普寧寺), 몽고 사신들을 접견하기 위한 보락사(普樂寺) 등 티베트불교의 영향을 받은 8개 불교사원을 지칭한다. 연암과 사신 일행은 건륭제의 명령으로 이 외팔묘 가운데 찰십륜포(札什倫布), 즉 현재의 수미복수지묘에 있던 판첸 라마를 방문하였다.

피서산장의 입구인 여정문(麗正門)의 현판은 한자·만주문자·몽고문자·티베트문자·위구르문자 등 5개 언어로 기록되었다. 이는 청나라가 5개의 주요 민족들을 통치했던 다민족 국가였음을 상징한다. 그러나 청나라가 만주인들이 세운 '오랑캐 왕조'라는 생각이 강했던 고루한 조선 사신들은 다문화와 다민족으로 구성된 청나라를 이해조차 하려 하지 않았다. 건륭제는 조선의 사신들에게 활불(活佛), 즉 환생한 부처라는 판첸 라마를 만나라고 권하였지만, 낡은 사상에 사로잡힌 조선 사신들은 판첸 라마가 중국인이 아니라며 거절했다. 그 결과는 냉대로 돌아왔다. 연암은 "지금 북경으로 돌아가는 마당에는 측근의 신하가 나와서 전송하지도 않고, 황제 역시 한마디 위로의 말조차 없다. 아마도 우리 사신이 활불을 기꺼이 보려고 하지 않은 탓에, 처음에 받았던 대우와는 다르다는 탄식이 있게 된 것이다"라고 적었다. 여기서 '사신'은 연암의 종형인 박명원을 지칭한다. 반면 연암은 열하일기에 판첸 라마와 티베트불교에 대해 자세히 기록하여 지적인 호기심과 기록정신을 보여주었다.

◆고려보 사람들과 조선 사신단의 반목

연암은 열하일기에서 고려보 사람들과 조선 사신 일행의 반목에 대해 기록했다. "같은 나라의 옛 정리를 생각해서 주인이 지키는 것을 그다지 심하게 하지 않으면, 그 틈을 노려 물건을 훔치기까지 하였으니, 이 때문에 우리나라 사람들을 점점 싫어하게 되었다. 매번 사행이 도착하면 술과 음식을 감추고 팔지 않으려 하고, 간절하게 요구해야 마지못해 팔긴 하지만 바가지를 씌우고 혹 값을 먼저 치르라고 한다. 이렇게 되자 말몰이꾼들도 반드시 온갖 꾀를 동원하여 사기를 쳐서 분풀이를 하니, 서로간에 상극이 되어 원한이 깊은 원수를 보듯 한다."

지금 중국 내 한국인과 조선족 사이에 200여년 전 연암이 걱정했던 그 반목과 질시가 잔존한다는 점에서 자괴감이 든다. 우리 민족은 언제쯤 국내에서나 해외에서나 서로 다투지 않고 화합하고 단결할 수 있을까. 그리하여 중국이라는 큰 무대에서 조연이 아니라 주연으로 활약할 수 있을까. 그런 날이 꼭 오기를 기대한다.



중국 여행 팁

 

기름기 많은 중국 음식엔 뜨거운 차가 좋아

 

모처럼 나선 외국 여행길에서 소지품을 분실하거나 몸에 탈이 난다면 여간 낭패가 아니다. 중국 여행시 주의해야 할 점을 짚어본다.

◆소지품 관리

외국에서 여권을 잃어버리면 자신뿐만 아니라 동행자들의 여행 분위기까지 망칠 수 있다. 단체 여행일 경우 여권은 가이드가 주로 관리하지만, 개인에게 나눠줄 경우 반드시 몸에 지니는 것이 안전하다. 현금과 신용카드를 몽땅 넣은 지갑을 뒷주머니에 넣고 다니는 것은 위험하다. 소액의 돈만 지갑이나 겉주머니에 넣어 사용하고, 큰돈과 신용카드는 상의 안주머니 같은데 보관해야 한다. 중국에서 사용할 수 있는 카드〈사진·비씨중국통카드〉도 나왔으므로 굳이 많은 현금을 가져갈 필요는 없다.

◆음식과 물

중국에 가서 현지 음식을 기피하고 한국 음식만 찾는 것은 여행의 즐거움을 50% 잃는 것과 같다. 중국 문화를 느끼기 위해서는 현지 음식을 적극적으로 먹어보는 자세도 필요하다. 한국인 입맛에 다소 거슬리는 향채(香菜)나 각종 향료도 몇 번 먹다보면 그 나름의 맛을 느낄수 있다. 가령 이슬람식 향료가 듬뿍 들어가는 양고기 꼬치구이는 한국인 중에 마니아가 생길 정도로 독특한 맛이 있다. 또 중국의 건조한 기후나 중국 술에는 중국 음식이 어울린다. 기름기 많은 중국 음식을 먹을 때는 생수보다 뜨거운 차를 함께 마시는 것이 좋다. 생수는 여행사 등에서 대량으로 구입한 것을 마시고, 길거리 좌판대에서 파는 것은 마시지 않는 것이 좋다.

◆기념품

한국인들이 중국여행에서 돌아올 때 가장 많이 사는 상품은 술과 차(茶)다. 술 중에서도 한국인이 선호하는 것은 '오량액(五糧液)' '귀주모태주(貴州茅台酒)' '수정방(水井坊)' 등 백주(白酒)이다. 백주는 증류주여서 술마신 다음날 머리가 아프지 않은 장점이 있다. 다만 중국 환율이 오르면서 술값이 양주 못지않게 비싸졌다. 고급주의 가격이 부담이 된다면 각 여행지에서 가장 많이 팔리는 중저가주를 사는 것도 괜찮다. 중국차는 막상 구입해서 한국에 가져오면 뚜껑조차 열지않고 방치하다가 나중에 버리는 경우가 많다. 이는 중국의 반(半)발효차나 완전 발효차가 한국인 입맛에 맞지않기 때문이다. 한국인 입맛에는 녹차 종류가 비교적 맞다. 또 보이차는 신뢰성 높은 유통상을 통해 구입하는 것이 좋다. 중국의 양모나 비단 제품은 가격에 비해 품질이 좋은 편이다.



중국 속의 코리아타운

 

'왕징'에 10만명 거주… 21C 최치원·혜초 기대

어느 도시나 외국인들이 모여사는 곳은 있기 마련이다. 서울에는 서양인들이 살던 용산 유엔빌리지와 조선족들이 모여사는 가리봉동의 연변거리가 대표적이다. 1992년 한중 수교 이래 중국의 여러 도시에도 한국인이 모여사는 '한인촌'이 생겨났다. 대표적인 곳은 한국인 20만이 사는 북경의 망경(望京·중국발음 왕징)과 오도구(五道口·중국발음 우다오코우)이다.

이 중 망경은 한 지역에 거의 10만명의 한국인이 거주해 가히 '한국도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난 2008년 금융위기 때 다소 줄긴 했지만, 최근 그 숫자가 회복되었다. 공항과 가까운 이곳에는 한국회사 주재원들이 주로 살며, 식당 노래방 미장원 등 각종 상점의 간판이 대부분 한글로 되어 있어 중국어를 몰라도 생활에 불편이 없다. 심지어 한국입시학원까지 성업중이다. 이와 달리 북경대·청화대·인민대 등 10여개 대학들이 몰려 있는 오도구에는 수만명의 한국 유학생이 거주하지만, 망경만큼 한국적인 색채가 나지는 않는다. 북경을 동서로 갈라, 오른쪽에는 기성세대, 왼쪽에는 청년세대가 사는 것이 흥미롭다.

이 밖에 심양(瀋陽)의 서탑(西塔) 거리, 청도(靑島)의 이촌(李村), 상해(上海)의 고북(古北), 천진(天津)의 매강(梅江), 광주(廣州)의 원경(遠景) 등도 유명한 코리아타운이다. 이들 한인촌은 현지에 한국의 문화와 음식을 전파하는 첨병 역할도 한다. 이 지역에는 많은 조선족 동포들이 한국인과 어울려 산다. 또 동북지역으로 갈수록 북한주민(탈북자 포함)의 숫자도 늘어난다. 똑같은 중국 땅에 대한민국, 중화인민공화국(중국), 조선인민민주주의공화국(북한) 등 3개 국적을 가진 동포가 뒤섞여 살고 있다.

중국 속의 코리아타운은 신라시대 '신라방'과는 차이가 있다. 신라방은 장보고의 영향력 아래 자치권과 치외법권을 누리고 불교사원까지 세웠지만, 지금 코리아타운은 중국 정부의 엄격한 외국인 거주규정을 준수해야 하며, 종교활동에도 제약을 받는다. 이런 점에서 보면, 신라-당의 관계가 지금의 한국-중국보다 훨씬 가까웠다고 볼 수 있다.

중국의 시대인 21세기에 '차이나 드림'을 꿈꾸며 중국으로 건너오는 한국인이 해마다 10만명이나 된다는 보도가 있다. 재중 한국인의 수도 최근 100만명을 돌파했다. 이들 가운데 고선지나 혜초, 최치원처럼 중국 역사에 이름을 남길 만큼 훌륭한 업적을 이루는 인물들이 나오기를 기대한다. 또 이들이 한중 교류의 첨병 역할을 할 것이다.



[중국 속의 한국사 기행] 삼학사와 60만 조선 인질의 억울한 혼백은 어디에…

조선 백성의 깊은 상처 숨겨진 요령성 심양

중국 요령성(遼寧省) 심양시(沈陽市) 중심가에서 20여㎞ 떨어진 화평구(和平區) 경새로(競賽路)에는 3년제 직업대학인 '요령발해전수학원(遼寧渤海專修學院)'이 있다. 지난 1992년 설립된 이 대학 교정에는 다른 대학에서 보기 힘든 '삼학사 유적비'가 서 있다. 삼학사(三學士)란 병자호란 때 청(淸)과의 화의에 반대하고 항전을 주장하다 청에 끌려가 목숨을 잃은 홍익한(洪翼漢) 윤집(尹集) 오달제(吳達濟) 세 분을 말한다.

'삼학사 유적비'의 비문은 이렇게 시작한다.

'우리 조선은 단군이 처음 나라의 기틀을 세웠고 기자가 강역을 열었다. 풍속이 충효를 숭상하고 선비들은 인의에 도타우니 예로부터 예의의 나라로 일컬어져 왔다. 인조 14년 병자년 겨울 청 태종이 조선을 침략했다. 남한산성의 형세가 위태롭자 조정에서는 강화를 청하자는 의논이 있었다. 이때 대간 홍익한, 교리 윤집, 수찬 오달제는 대의를 부르짖으며 화의를 배척했다.'

유적비는 높이 1.5m, 폭 60㎝ 크기로 전면에는 삼학사의 행적을 기리는 1000여자의 한자가 음각으로 새겨져 있고, 뒷면에는 이를 한글로 풀이한 글자가 새겨져 있다. 비문에는 병자호란이 끝난 뒤 '척화의 수괴'로 지목된 삼학사가 심양에 끌려와 청조의 온갖 회유와 형벌에도 굴하지 않다가 이듬해(1637년) 3월 소현세자가 보는 앞에서 매를 맞아 죽은 사실이 적혀 있다. 당시 청 태종은 비록 삼학사를 죽였지만 그들의 높은 절개를 기리고 백성들이 본받게 하기 위해 '삼한산두(三韓山斗)'라는 휘호를 내리고 심양성 서문 밖에 사당을 짓고 비석을 세우게 했다. '삼한'은 조선을, '산두'는 태산북두를 뜻하는 것으로 조선에서 절개가 뛰어난 인물, 즉 삼학사를 칭송한 말이다.

①심양 발해학원 교내에 건립된 삼학사비. ②심양관으로 추정되는 건물. 지금은 아동도서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③지난 2005년 심양 발해학원에 건립된 학사정 앞에서 이인구 계룡건설 회장(앞줄 오른쪽에서 5번째) 등이 낙성식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_계룡건설 제공 ④인조가 굴욕적인 삼배구고두를 행하는 장면을 담은 삼전도비 동판.

◆후손들이 살려낸 삼학사의 정신

발해학원 교정에 세워진 유적비는 사실은 진본이 아니다. 진본은 대학 구내에 마련된 삼학사비 자료실에 두 동강이 난 채로 보관돼 있다. 유적비가 조성된 것은 1935년으로 되어 있다. 그렇다면 지금으로부터 70년이나 더 된 비문이 어떻게 18년 역사의 발해학원에 보관돼 있는 것이며, 또 두 동강이 나게 된 것일까. 먼저 병자호란이 발발한 400년 전으로 돌아가 보자.

1616년 중국 동북지방에는 만주족이 중심이 된 후금(後金·청)이 들어선다. 후금과 조선은 광해군이 유연한 외교정책을 편 덕분에 한동안 평화롭게 지냈다. 그러나 후임인 인조는 '향명배금(向明排金·명과 친하고 금을 배척함)'을 표방하여 후금에 적대적인 태도를 취했고, 이에 금은 1627년 1차 조선 원정[정묘호란]을 개시해 개성을 점령하고 조선으로부터 '형제지국'의 맹약을 받아낸다.

그후 후금이 명의 수도인 북경을 공격하면서 조선에 전비와 병력을 요구하고 형제의 관계를 군신의 관계로 격하할 것을 강요하자, 인조는 이를 거부하고 항전 의지를 굳힌다. 홍타이지(태종)는 1636년 국호를 청으로 바꾸고 그해 말 10만 병력을 이끌고 조선 원정길[병자호란]에 오른다. 청군이 압록강을 넘은 사실을 4일 뒤에야 안 인조는 화급히 수비부대를 편성해 보지만 파죽지세로 밀고 오는 청군을 막지 못해 남한산성으로 피란하게 된다. 청군이 남한산성을 포위한 가운데 1만3000명의 병력으로 저항하던 인조는 추위와 굶주림으로 병사와 백성들이 죽어나가는 것을 보고 화친파의 주장에 따라 이듬해 1월 30일 삼전도에 나가 청 태종에게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이마를 땅에 찧는(三拜九叩頭)' 굴욕적인 항복의 예를 하게 된다.

전승을 기리는 '대청황제공덕비'를 삼전도에 남긴 청군은 삼학사를 인질로 잡아가 끝내 죽였으나, 청 태종은 이들의 절개를 높이 사 사당과 비석을 세운 사실이 청대의 야사인 '질사(��史)'란 책에 실려 있다. 그러나 오랜 세월이 흐르면서 유적은 모두 사라지고 말았다. 삼학사비를 찾아나선 것은 그로부터 300년이 흐른 뒤 만주에 살던 조선족 동포와 삼학사 후손들이었다. '삼학사 유적비'는 이 과정을 이렇게 적고 있다.

"교외에서 옛일을 조사하는데, 감개한 탄식을 이길 수 없었다. 마을의 고로에게 물어보니 심양성 서문 밖 세 분이 순절한 곳 곁에 작은 절이 있었는데, 조선의 세 분 절사를 모신 사당으로 전해진다고 하였다. 지금의 북시장(北市場) 보령사(保靈寺) 근처이다. 얼마 안 있어 절문 앞 눈구덩이 속에서 비액(碑額) 하나를 찾았는데 글자를 새긴 흔적이 있었다. 흙을 씻어내고 보니 '삼한삼두' 넉 자가 찬연하니 질사의 내용과 서로 딱 맞았다."

후손들은 비신(碑身)을 찾지는 못했지만 비액을 기초로 하여 비석을 복원한 뒤 심양 춘일(春日)공원 양지바른 곳에 세웠다. 중수비 맨 아래에는 '이조 병자년으로부터 300년이 지난 을해년(1935년) 봄 3월에 창원 황윤덕이 삼가 짓고 경주 김구경이 삼가 쓰다'라고 내역을 적고 있다. 영원히 땅에 묻힐 뻔한 삼학사의 정신을 후손들이 살려낸 것이다. 그런데 천신만고 끝에 복원한 이 비석마저 1960년대 중국의 문화혁명 때 홍위병들에 의해 수난을 당했다. 비석은 두 조각이 나 혼하((渾河)에 버려져 소실되고 만 것이다. 훗날 이를 알고 비석을 찾아나선 요령대학의 천문갑 교수[훗날 발해학원을 세웠으나 2009년 위암으로 별세]는 중국인의 집 주춧돌로 쓰이고 있는 비석을 발견하고 당시로서는 거액인 5000위안을 주고 구입하였다가, 지난 2005년 한국의 이인구 계룡건설 회장 등의 도움으로 지금의 대학 구내에 원비문은 보관하고, 이를 모조한 비석을 세운 것이다. 똑같은 비석이 지난 2005년 독립기념관에도 세워져 만주를 떠돌던 삼학사의 혼백은 370여년 만에 고국으로 돌아와 안식하게 됐다.

◆백성들에게 더 가혹했던 병자호란

당시 삼학사와 함께 청나라로 끌려온 봉림대군(효종)과 소현세자가 머물렀던 심양관(沈陽館)의 흔적도 지금까지 남아있다. 심양시 심하구(沈河區) 조양가(朝陽街) 131호에 있는 심양시소년아동도서관이 그것이다. 기와 지붕의 모양이 중국의 전통 건축과 다른 모양을 보여주고 있다. 일본 강점기 이곳은 일본 만철(滿鐵)출장소와 봉천영사관 등으로 쓰이다가 2차대전 종전 이후 시립아동도서관으로 활용되고 있다.

병자호란의 상처는 조정보다 백성들이 더 컸다. 청군은 항복의 조건 중 하나로 군이 잡은 포로를 돈을 내고 데려갈 것을 강요했다. 청이 제시한 항복문 8항은 이렇게 되어 있다. '군에 포로가 된 자는 합법적으로 돌아오는 자를 제외하고는 조선이 모두 잡아서 청으로 보낸다. 조선에 와서 또는 귀화해서 사는 한인(漢人)이나 여진인은 모두 잡아서 청나라로 보낸다. 27일 이전에 잡힌 자는 심양으로 보내고 그 이후에 잡힌 자는 석방한다.'

이에 따라 포로를 잡으면 돈이 된다는 것을 안 청군은 철수하는 동안 포로 사냥에 혈안이 되어 닥치는 대로 사람을 잡아갔다. 김영삼 정부 시절 문화체육부 장관을 지낸 주돈식씨는 지난 2007년 펴낸 '조선인 60만 노예가 되다'에서 당시 심양으로 끌려간 포로가 60만명에 달한다고 밝혔다. 그 근거로 주화파였던 최명길이 '지천집(遲川集)'에서 '청군이 조선 왕의 항복을 받고 정축년 2월15일 한강을 건널 때 포로로 잡힌 인구가 무려 50여만명이었다'라고 한 것을 들고 있다. 또 왕의 부식을 조달한 나만갑이 기록한 '남한일기(南韓日記)'에도 '뒷날 심양에서 속환한 사람이 60만명이나 되는데 몽고 군대에서 포로가 된 자는 포함되지 않았다니 그 수가 얼마나 많았는지를 알 수 있다'고 했다는 것이다. 청은 당시 압도적으로 인구가 많은 명(明)을 치기 위해서는 단기간에 많은 병력과 노동력이 필요해 이토록 많은 인질을 잡아간 것으로 보인다.

추운 겨울에 맨발로 끌려간 조선인은 양반·평민 할 것 없이 만주족의 노예로 전락하여 심양의 상설 노예시장에서 매매되었다. 이중 돈 많은 양반집 가족은 거액의 속환금을 내고 풀려났으나, 이들이 빨리 빼내려는 욕심에 속환금을 한꺼번에 올리는 바람에 돈 없는 백성들은 더욱 큰 고통을 겪어야 했다. 몰래 탈출하다가 붙잡혀 매 맞거나 불구가 되는 사람도 부지기수였다. 천신만고 끝에 탈출하여 고향 땅에 돌아온 조선의 여성들은 '오랑캐에게 몸을 더럽혔다'며 '환향녀(還鄕女)'라는 딱지를 붙여 내쫓는 조선의 남성 중심 문화 앞에 또 한 번 좌절해야 했다.

심양시 9·18사변기념관 부근에 가면 '류조호(柳條湖)'라는 지명이 있다. 이름은 '호수'인데 주변 어디를 봐도 호수가 없다. 요령성 민족사를 연구해온 요령조선문보 오지훈 기자는 "병자호란 당시 이 지역에 제법 큰 호수가 있었는데, 노예로 잡혀온 조선인들이 고통을 견디지 못해 수없이 빠져 죽었다는 얘기가 전해온다"고 말했다. 한 70대 주민은 "60년대까지도 이 주변은 움푹 파인 땅이었으나 개혁·개방 이후 도로가 생겨 그 흔적이 사라졌다"고 말했다. 한 나라 지도부의 무능으로 졸지에 노예로 전락한 조선의 백성들은 억울한 삶을 이국땅에서 마감했으나, 지금 이들을 기억하는 한국인은 많지 않다. 심양 서탑거리는 오늘도 한국인으로 붐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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