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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경 연구실

대청국(大淸國)의 역사

작성자광화세계|작성시간18.07.09|조회수162 목록 댓글 0



대청국(大淸國)의 역사



대청국(大淸國, 만주어: ᡩᠠᡳᠴᡳᠩ
ᡤᡠᡵᡠᠨ
Daicing Gurun)은 누르하치가 1618년에 대금(大金)을 건국하였는데, 그의 아들 숭덕제가 1636년에 대청(大淸)으로 국호를 바꾼 나라이다.

1635년 10월 13일, 탄생한 만주족의 청 제국은 광대하였으며 융성했었다. 또 인구도 증가하였다.

숭덕제는 1636년에 성경(심양시)에서 국호를 대청(大淸, 만주어: ᡩᠠᡳᠴᡳᠩ Daicing)으로 고치고 주변 각국을 침공하여 영토를 확장함과 동시에 군사·행정 제도인 팔기(八旗) 체제를 확립하였다.

숭덕제 다음에 즉위한 순치제 때 청의 팔기군은 1644년에 산해관을 넘어서 명나라의 수도였던 베이징을 점령하고 수도로 삼았다.


[그림 1] 청 제국의 산해관 통과 전 세력도와 강희제 시기의 형세도.


청 군대가 만리장성을 넘어서 중국에 들어올 때 양주십일(揚州十日), 가정삼도(嘉定三屠)머리카락을 기르면 목을 자른다(留髮不留頭)는 등의 사건을 일으켰다.

당시 중원을 정복한 만주족은, 피지배층 한족들로부터 오랑캐라고 극심한 저항과 멸시를 받았는데, 이들을 진압하기 위해 많은 학살을 자행하였다.

몇몇 기록에 의하면 양저우 한 곳에서만 약 80만명이 학살 되었으며, 물론 정사도 아니고 근거도 빈약하지만 약 5,000만 명에서 최대 1억명의 중국인이 만주족에게 학살되었다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청 제국은 전체적으로는 타 민족에 대해 정책을 훌륭히 펼친 제국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한족이 세운 중국 명나라뿐 아니라 주변의 몽골, 위구르, 티베트를 모두 정복하여, 유라시아 육상 제국을 이룩하였다. 심지어 원나라보다 큰 영토를 이루게 되었으며, 1689년에는 네르친스크 조약으로 루스 차르국의 침입을 저지하였다.

1683년부터 1830년까지는 그야말로 청 제국의 평화시대(팍스 시니카)였다. 이민족으로서는 가장 오랫동안 중국을 지배하였다.

청 초기에는 훌륭한 황제들(강희제, 옹정제)이 통치했다. 강희제(1661~1722년) 이후 옹정제(1722~1735년), 건륭제(1735~1796년)까지 3대에 걸쳐 주변 각국을 침공·정복하여 직접 지배하고 조공국(朝貢國)으로 삼아 일대 전성기를 이루었다. 삼대에 이은 청의 전성기를 강건성세(康乾盛世)라고 한다.

그러나 건륭 말기부터 백령, 천리의 난을 계기로 청 제국은 점차 쇠퇴하였다.

한편, 건륭제 즉위 시기에 그레이트 브리튼 연합왕국은 1792년 매카트니 사절단을 시작으로 이후 몇 차례에 걸쳐 중국에 사절단을 보내 문호 개방을 권유하였으나, 오직 광저우만 개항되었을 뿐 거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청 초중기에는 공행무역만이 실시되었다.

19세기 무렵에 이러한 편무역으로 인해 중국으로의 은 유출 정도가 심각하다고 판단한 영국계 동인도회사가 삼각 무역을 실시했으나, 피해를 입은 청 제국에서 엄금론을 펼치며 임칙서를 무역항에 파견하고 아편을 소각하는 등의 조치를 취했다. 그러자 영국은  아편전쟁을 일으켜 승리했다.

1842년 난징조약으로 홍콩은 99년간 영국에 할양되었고 상하이 등 5개  항구가 강제 개항되었다. 이후, 청에서의 이권 확보를 위해 서구 열강들이 쇄도해오면서 청 제국은 역사상 유례없는 난국을 맞는다.

1851년 홍수전이 기독교 성격의 사회운동인 태평천국 운동을 일으켰다. 태평천국은 외형상 홍수전이 야훼의 자식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아우라 자칭하면서 기독교를 표방했으나, 사실상 만주족 지배로부터의 한족의 독립, 토지의 균등한 분배, 만민 평등을 주장한 사회혁명이었다.

또한, 당시 청 제국은 영국·프랑스와의 제2차 아편전쟁을 겪고 있었다. 이후, 청 제국은 휴전 중재 역할을 맡은 러시아 제국에 1860년 베이징 조약을 통해 연해주를 할양하고 베이징에 외국 공사관의 주재를 허용하였다. 서구열강세력들의 이권 침탈이 심화되었다.

그러나 태평천국 운동의 위세는 흥수전에 대한 우상화를 경계한 서구 열강과 이홍장 등 같은 한족계 신사층을 파견한 청나라 조정의 협공으로 태평천국은 1864년 수도 천경이 함락되고 홍수전도 자살함으로써 그 막을 내렸다.

1860년대 이후에 전개된  양무운동은 증국번, 이홍장 등 기술적 개혁의 필요성을 깨달은 한인 신사층의 주도로 시작되었으며, 군함과 서양식 대포 등 신식 무기를 제조하고 관련 공업을 진흥시킴으로써 중국 산업화의 기원이 되었다. 이홍장은 영국을 방문하여 빅토리아 훈장도 받았다.

사실 양무 운동은 관독상판제와 표면적인 개혁이라는 점 등 뚜렷한 한계 요인을 안고 있었다. 그 와중의

1898년 캉유웨이, 량치차오 등은 일본의  메이지 유신을 모델로 한 변법자강 운동을 통해 입헌군주제를 확립하고자 했으나 서태후, 위안스카이, 이홍장 등 보수세력의 반격(무술정변)으로 수포로 돌아갔다.

이후, 1899년에 대규모로 일어난 의화단 운동으로 일본 등 열강 8국의 연합군이 1900년 베이징에서 격돌한 북청사변을 겪고 베이징 의정서를 체결하며 청 제국은 위기에 내몰렸다.

한편 일본이 러일전쟁에서 승리하고 남만주에 대한 지배권을 획득하여 위협요소가 되었다. 러일전쟁에서 러시아의 패배로 사건의 심각성을 자각한 보수파와 서태후조차 외국으로 유학생을 파견하여 선진국의 헌법과 의회 제도 등을 시찰하였으며, 국내적으로 과거제도를 폐지하고 각지에 대학을 세워 신학문의 연구 기반을 조성하는 한편 신식 군대도 신설했다. 그러나 이미 각지에서 만주족을 비난하고 한족의 공화국을 지향하는 혁명세력이 움트고 있었다. 이들 모두는 일본의 일부 지식인이 주장한 중일 연대론(中日聯帶論)과도 상호연계되기도 했다. 

결국 청 제국은 1911년 10월 10일에 발발한 신해혁명으로 인해 1911년에 와해되고, 혁명의 중심인물 쑨원은 아시아 최초의 공화국인 중화민국을 수립하였다.

1912년에 선통제가 퇴위하였고, 청 황실은 자금성 내에서 청나라 소조정을 이루어 사실상 고립된 상태로 사직을 이어가고 있었으나, 1924년에 펑위샹의 정변으로 인해 공식적으로 황실이 해체되어 육상 제국의 종말과 동시에 중국 역사에서 2천여 년 넘게 이어졌던 봉건 왕조가 끝나게 된다.


[그림 2] 1765년 청나라 최대 강역



[그림 3] 1820년 청나라 최대강역



[그림 4] 1908년 청나라 최대강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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