탱자나무

2014.08.18 20:44 입력 2014.08.18 20:54 수정
이갑수 | 궁리출판 대표

[이갑수의 꽃산 꽃글]탱자나무

광화문광장은 거대한 용광로 같았다. 인왕산을 바라보면서 깊게 끓는 그 속을 가로질러 걸었다. 횡단보도 중간에 서명대가 있고 그 뒤로 곡기를 끊은 채 특별법 제정을 촉구하는 분들, 그들을 응원하는 분들이 함께 있었다. 유례를 찾기 힘든 엄청난 참사에도 책임 있는 자들은 아무런 응답이 없었다. 무참하게 바다에 침몰한 세월호를 따라 가랑잎 같은 돛단배들이 지금 광화문 바닥에서 가라앉는 중. 그 와중에 멀리 십자가가 보였다. 낮은 곳으로 임하시는 프란치스코 교황이 직접 주재하는 시복식의 제단에 우뚝 솟은 큰 십자가.

‘차라리 한 채의 소슬한 종교’(서정주)라고도 하였지만 광화문은 말 그대로 하나의 문(門)이다. 출퇴근길에 혹은 저마다의 약속에 바쁜 걸음으로 빠져나가기도 하지만 이 문으로 수많은 사연들이 흘러오고 흘러간다. 200여년 전 신앙을 지키다가 순교한 분들은 이 문을 통해 복자(福者)로 거듭났다.

광화문 한쪽 교보생명 빌딩은 계절마다 폐부를 찌르는 글판을 눈썹처럼 단다. 작년 여름에는 베르고글리오가 교황이 되기 전 사목했던 아르헨티나와 이웃한 칠레의 시인, 파블로 네루다의 작품에서 고른 한 구절이었다. “나였던 그 아이는 어디 있을까, 아직 내 속에 있을까 아니면 사라졌을까?”

그때 광화문에서 그 글귀를 보는데 하필이면 탱자나무가 떠올랐었다. 어린아이 시절, 학교로 가는 길가에는 코스모스가 피었고 집으로 가는 골목에는 탱자나무가 울타리처럼 있었다. 탱자나무의 가시는 줄기가 변한 것이라서 어미에 해당하는 몸통의 껍질과 함께 찢어질지언정 따로 떨어지지 않는다. 노란 열매에는 세상의 쓴맛보다도 더 시큼한 탱자 맛이 탱탱했다.

땡볕이 제 아무리 기승을 부려도 경건한 침묵과 서늘한 고요가 지배하는 광화문광장. 일 년 전에 만났던 시구와 탱자나무의 가시가 나타나 아프게 사방을 찔렀다. 운향과의 낙엽 관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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