꿀풀

2015.08.17 21:22 입력 2015.08.17 22:57 수정
이굴기 | 궁리출판 대표

[이굴기의 꽃산 꽃글]꿀풀

다닥다닥 붙은 건물에서 요란한 저녁을 뒹굴고 나자 이윽고 정중한 새벽이 왔다. 다람쥐 쳇바퀴 도는 듯한 세속도시의 일상이다. 그나마 저 신선한 시간이 있기에 번잡한 하루의 나날들을 이렇게나마 수습하고 시작할 수 있다. 아침이다. 출근길에 전개되는 풍경을 보면 울긋불긋한 간판 아래 출입문이 없는 건물은 없다. 그 문을 열고 들어가면 또 그만큼의 시간의 흔적이 고여 있을 것이다. 모든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 그곳의 고유한 세월을 만지고 싶은 궁금증이야 있지만 일일이 그럴 수는 없는 노릇이다. 나중에 나중에 내가 저승으로 갔을 때, 자넨 수박 겉핥기식으로 세상을 살다가 여기로 왔군, 해도 묵묵부답일 도리밖에 없겠다. 그러나 비상구처럼 이런 날이 있기도 하다. 오늘 같은 휴일에는 신새벽에 몸을 빼내어 먼 산으로 간다. 흐르는 것들만 흘겨보았기에 비닐처럼 미끌미끌해진 내 눈알이 모처럼 울퉁불퉁해질 수 있는 기회다. 손가락 끝 지문의 골짜기에도 모처럼 본디 제 감각이 찾아드는 순간이다.

지난 몇 년간의 꽃산행. 굳이 깊이를 잴 것도 없는 일천한 식물학 지식으로 감히 말하자면 산에 들 때마다 참 자주 본다는 느낌이 드는 꽃이 있다. 늦봄부터 초가을에 걸쳐 가장 오랜 기간 개화 상태를 유지한다고 여겨지는 꽃이기도 하다. 내 발등에서 한 뼘가량 더 하늘로 힘껏 뛰어오르는 꽃, 꿀풀이다. 너무 흔해서 눈에 잘 들어오지 않지만 그래서 이렇다 할 꽃이 없는 곳에선 내 허전한 시선을 묵묵히 받아주는 꽃이다.

이번 산행은 강원도 인제의 대암산. 정상 부근에는 천혜의 생태습지인 용늪이 있다. 하늘로 올라가던 용이 쉬었다가 가는 곳이라고 한다. 그 늪으로 가는 호젓한 길가에서 만난 꿀풀. 유난히 색감이 좋았다. 쉬기도 할 겸 엎드렸다. 꿀풀은 줄기 위 층층의 다락방 같은 구조 속에 작은 꽃들이 다닥다닥 밀집되어 있다. 그 방마다 입술 같은 꽃잎이 붙어 있다. 얼마나 많은 꿀을 간직하기에 이름조차 꿀풀일까. 실제로 이 꿀풀을 이용하여 만든 꿀은 특별한 대접을 해준다고 한다. 윙윙거리며 달려드는 여러 마리 벌 사이로 꽃잎 하나 조심스럽게 따서 밑동을 핥았다. 밍밍했다. 아뿔싸, 저 녀석들이 벌써! 꿀풀, 꿀풀과의 여러해살이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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