④ 제5도살장 | 커트 보네거트

2017.06.14 22:35 입력 2017.06.14 22:40 수정
이채현 소설가

전쟁에 도사린 아이러니

[이채현의 내 인생의 책] ④ 제5도살장 | 커트 보네거트

커트 보네거트의 소설에는 흔히 전쟁소설을 떠올렸을 때 상상할 수 있는 전쟁영웅이 등장하지 않는다. 가장 주인공답지 않아 보이는 인물을 주인공으로 내세운다. <제5도살장>의 주인공이 빌리 필그림인 것처럼.

빌리는 외계인과 만나고 왔다고, 자신은 시간여행을 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이다. 전쟁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 이런 사람을 주인공으로 내세움으로써 전쟁소설의 틀을 깨버린다. 마찬가지로 중요하게 취급되어야 할 장면을 가볍게 처리하고 중요하지 않아 보이는 장면을 상세하게 묘사한다.

보네거트는 어려운 시련을 꿋꿋이 헤쳐온 전쟁영웅 에드가 더비가 찻주전자를 훔쳤다는 이유로 처형당하는 장면을 이 소설의 클라이맥스로 꼽았다.

개인적으로 내가 생각하는 이 소설의 클라이맥스는 의사 부부가 빌리 필그림에게 말을 함부로 다룬 것을 책망하는 장면이다. 전쟁 상황에서 미군은 마차를 끄는 말들을 자동차처럼 물건으로 취급했다. 너무 오랜 시간 쉬지도 못하고 달려온 말들의 입에서는 피가 흘렀고, 말굽은 다 깨져 있었다. 산과 의사 부부는 말들의 상태를 두고 빌리를 꾸짖는다. 그들은 빌리에게 마차에서 내려 말들을 살펴보게 했다.

그 교통수단의 상태를 본 빌리는 울음을 터뜨린다. 그는 그 전쟁에서 다른 일로는 한 번도 운 적이 없었다.

아이러니한 지점이다. 빌리는 이미 드레스덴 폭격을 경험하고 지나온 상황이다. 그 참혹한 광경 앞에서도 눈물을 흘린 적 없는 빌리가 엉망진창이 된 말들의 상태를 보고 울음을 터뜨린다. 일반적으로 생각했을 때 더 크게 부풀리고 상세하게 묘사했어야 할 부분은 가볍게 넘어가고 이처럼 중요해 보이지 않는 장면을 지나치지 않고 묘사함으로써 발생하는 아이러니. 이 아이러니에서 오는 슬픔을 뭐라고 불러야 할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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