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 외치다 '조국에 갇혀 떠난' 류샤오보

2017.07.13 22:43 입력 2017.07.14 09:58 수정

홍콩의 관공서 앞에 시민들이 13일 세상을 떠난 중국 반체제 인권운동가 류샤오보를 추모하는 현수막을 걸고 있다. 홍콩 | AP 연합뉴스

홍콩의 관공서 앞에 시민들이 13일 세상을 떠난 중국 반체제 인권운동가 류샤오보를 추모하는 현수막을 걸고 있다. 홍콩 | AP 연합뉴스

세계의 패권을 노리는 경제대국, 하지만 여전히 민주주의를 이야기하는 것만으로도 감옥에 갇히고 목숨을 잃을 수 있는 나라. 2010년 중국인 최초로 노벨 평화상을 받았지만 ‘조국’은 그에게 가혹했다. 공산당 일당체제를 끝내자고 외쳐온 반체제 운동가 류샤오보(劉曉波)는 8년간의 투옥과 암 투병 끝에 13일 61세로 고단한 삶을 마쳤다. 역설적이지만 그를 중국 인권운동의 상징으로 만든 것은 체제 변화와 민주주의를 이야기한 지식인을 가두고 탄압한 중국 당국이었다.

중국의 인권운동가이자 노벨 평화상 수상자인 류샤오보가 61세를 일기로 13일 숨을 거뒀다. 랴오닝(遼寧)성 선양(瀋陽)시 사법국은 선양의 중국의대 부속 제1병원에서 간암 치료를 받아온 류샤오보가 13일 사망했다고 발표했다. 류샤오보는 전날 병세가 악화돼 호흡 곤란이 시작됐으나 가족들이 인공호흡기 삽관을 거부했다.

민주주의 외치다 '조국에 갇혀 떠난' 류샤오보

그는 지난 5월 수감 중이던 랴오닝성 진저우(錦州) 교도소에서 간암 말기 진단을 받았고 지난달 23일 8년 만에 가석방돼 병원으로 옮겨졌다. 미국, 독일 의료진까지 투입돼 치료에 나섰으나 최근 신장과 간 기능이 급격히 떨어져 패혈성 쇼크와 복부 감염, 다발성 장기 부전으로 고통을 겪었다. 류샤오보는 서방에서 마지막을 보내고 싶다는 의사를 밝혔고 독일 정부 등도 인도주의적 조치를 요구했으나 중국 정부는 허락하지 않았고, 가혹한 탄압 속에 살았던 지식인은 끝내 병상에서 숨을 거뒀다.

2005년 일본 교도통신과 인터뷰하는 류샤오보. 교도·AP연합뉴스

2005년 일본 교도통신과 인터뷰하는 류샤오보. 교도·AP연합뉴스

류샤오보는 빼어난 문학비평으로 이름을 날리던 문학도였다. 1955년 12월 지린(吉林)성 창춘(長春)에서 태어나 지린대에서 중문학을 전공하고 1982년 베이징사범대에서 문학 석사를 받은 후 강단에 섰다. 그러나 1989년 6월4일 일어난 톈안먼 사태는 그의 삶을 완전히 바꿔놓았다. 당시 방문 학자로 미국에 머물던 류샤오보는 소식을 듣고 귀국해 민주화운동에 동참했다. 미국 명문대에서 일할 기회까지 포기했다. 그는 시위대 유혈진압을 공개적으로 비판하면서도 평화적 해결을 위해 앞장섰다.

사태 후 시위 지도부는 대부분 미국 등 외국으로 건너갔지만 그는 중국에 남았다. 고초가 시작됐다. 반체제 활동을 이어가는 사이 네 차례 체포·구금됐다. 당국에 억류돼 감시를 당하고, 노동교화형으로 탄압받으면서도 ‘심미와 인간의 자유’ ‘알몸으로 하느님에게’와 같은 비판적인 글들을 발표했다. 그에게 결정적 시련을 안겨준 것은 공산당 일당체제 종식을 요구한 ‘08헌장’ 서명운동이었다. 류샤오보는 이듬해 국가전복선동 혐의로 체포돼 징역 11년을 선고받았다.

2010년 10월 노르웨이 노벨위원회는 “중국의 인권을 위한 오랜 비폭력 투쟁을 높이 평가한다”며 그를 노벨 평화상 수상자로 선정했다. 그러나 시상식은 ‘빈 의자’로 치러졌다. 중국은 수감 중인 류샤오보의 참석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의 노벨상 수상은 중국 인권에 대한 국제사회의 관심이 커지는 계기가 됐다. 미국, 캐나다, 독일, 스위스 등이 중국 정부에 류샤오보의 석방을 요구했고 학자, 변호사, 인권운동가들의 서명운동도 이어졌다. 하지만 중국은 노벨상 선정에 격분해 노르웨이와 관계를 단절했다.

2010년 12월 10일 노르웨이 오슬로 시청에서 열린 노벨 평화상 시상식에 류샤오보는 참석하지 못했다. 그가 있어야 할 곳에는 빈 의자만 놓였다. |노르웨이 노벨위원회

2010년 12월 10일 노르웨이 오슬로 시청에서 열린 노벨 평화상 시상식에 류샤오보는 참석하지 못했다. 그가 있어야 할 곳에는 빈 의자만 놓였다. |노르웨이 노벨위원회

류샤오보가 감옥에 드나들기를 반복하는 동안 첫번째 아내는 어린 아들을 데리고 떠나버렸다. 류사오보는 ‘사회질서교란죄’로 노동교화소에 갇혀 있던 1996년 류샤(劉霞)와 옥중 결혼했다. 남편은 1993년부터 1996년까지 수감 중 300여통의 편지를 아내에게 보냈다. 그는 “세상의 모든 아름다움을 한 여인에게서 본다”며 류샤에 대한 깊은 애정을 표현했다. 하지만 류샤오보가 노벨 평화상 수상자로 선정된 뒤 류샤에 대한 감시도 심해졌다. 2011년부터 남편의 메신저 역할을 해오던 류샤는 가택연금을 당하면서 건강이 악화되고 우울증을 겪었다. 류샤오보가 “죽더라도 외국에서 죽고 싶다”며 출국을 원했던 것은 뒤에 남겨질 아내에게 자유를 주기 위해서였던 것으로 알려졌다.

류사오보의 사망을 계기로 중국의 인권 문제를 둘러싼 서방의 압력은 더 거세지고, 이를 내정간섭이라며 비난하는 중국과 서방의 신경전도 격화될 것으로 보인다. 국제인권단체 휴먼라이츠워치에 따르면 중국 당국은 2015년 7월부터 인권운동가들을 더욱 강경하게 탄압하기 시작했고, 현재 최소 16명의 인권변호사와 활동가가 투옥돼 있다. 국가권력을 전복하려 선동했다거나 사회 불안을 야기했다는 혐의다. 이들도 대부분 류샤오보처럼 외부와 단절된 채 갇혀 있다. 또 올해부터 외국 비정부기구(NGO)의 활동을 더 강도높게 통제하는 ‘NGO관리법’이 시행돼 지난달까지 7000여개 단체 중 1%인 82곳만 등록이 허가됐다.

노벨상을 주관하는 노르웨이 노벨위원회는 13일 성명에서 “류샤오보가 말기 병에 이르기 전에 적절한 치료를 받을 수 있는 시설로 옮겨지지 않았다는 것은 매우 가슴 아픈 일”이라며 “중국 정부는 그의 조기 사망에 대해 무거운 책임이 있다”고 지적했다.

영국 가디언은 “더 심각해지는 중국의 통제 속에서 류샤오보를 대체할 인물이 나오기는 힘들 것”이라며 “그의 사망과 함께 중국 개혁에 대한 희망도 죽어갈 것”이라고 보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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