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샤오보의 동지’ 후자 인터뷰 “그가 남긴 민주화 열망, 중국인 일깨워 세계와 함께할 것”

2017.07.16 22:34 입력 2017.07.16 22:38 수정

<b>행복했던 한때</b> 생전의 류샤오보(오른쪽)와 부인 류샤. 류샤오보는 아내를 외국으로 보내고 싶어 했지만 결국 뜻을 이루지 못했다. 후자를 비롯한 류샤오보의 동료 인권운동가들은 이제라도 류샤가 자유를 찾을 수 있게 해줘야 한다고 말한다.   후자 트위터

행복했던 한때 생전의 류샤오보(오른쪽)와 부인 류샤. 류샤오보는 아내를 외국으로 보내고 싶어 했지만 결국 뜻을 이루지 못했다. 후자를 비롯한 류샤오보의 동료 인권운동가들은 이제라도 류샤가 자유를 찾을 수 있게 해줘야 한다고 말한다. 후자 트위터

중국 선양의 병원에서 간암 치료를 받다가 숨을 거둔 류샤오보(劉曉波)의 주검은 화장됐고, 유골을 담은 단지는 15일 다롄 앞바다에 가라앉았다. 배 위에서 이를 지켜보던 부인 류샤(劉霞·55)는 말이 없었다. 중국 당국은 “인도주의적 고려”를 해서 화장을 했다고 밝혔지만 류샤는 화장에 반대한 것으로 알려졌으며 이날 당국의 화장 발표 기자회견에도 나오지 않았다. 장례식에 참석한 류샤오보 가족도 류샤를 비롯해 6명뿐이었다.

인권단체들은 당국이 소셜미디어에서 류샤오보와 관련된 내용들을 검열하는 것은 물론이고 옥중 유품 일부도 류샤에게 넘기지 않으려 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그러나 당국의 통제도 추모 열기를 잠재울 수는 없었다. 15일 밤 홍콩 시민 수천명은 류샤오보를 추도하며 도심 촛불행진을 했고, 임시추모소에는 흰 국화를 든 시민들이 줄을 이었다.

류샤오보와 부인 류샤의 절친한 친구로 반체제 활동을 함께한 인권운동가 후자(胡佳·43)는 15일 경향신문과의 인터뷰에서 “당국은 류샤오보를 기념할 공간마저 없애버렸다”면서 “하지만 그와 함께 활동해온 이들이 있으며 인권운동은 사그라들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후자는 류샤오보가 제대로 된 치료를 받지 못하고 삶을 몇 주밖에 남겨두지 않은 간암 말기 상태가 돼서야 가석방된 점을 안타까워했다. 당국이 류샤오보를 화장한 것에 대해 “매우 참담하다”면서 “중국 어디에도 그의 묘지는 존재하지 않게 됐고 그를 기념할 공간도 사라져버렸다”고 말했다. 그는 “전 세계 노벨 평화상 수상자 중 화장한 사람이 몇 명이나 있겠느냐”며 “공산당은 중요한 정신적 지도자의 흔적을 완전히 지워버리고 있다”고 했다. 또 “2000년 김대중 전 대통령이 노벨 평화상을 받기도 했는데, 한국 정부가 어떤 논평도 발표하지 않은 점은 상당히 유감”이라고 말했다.

<b>24시간 감시당하는 후자</b> 사하로프상 수상자인 중국의 인권운동가 후자가 류샤오보 생전에 그의 석방을 요구하는 팻말을 들고 있다.    후자 트위터

24시간 감시당하는 후자 사하로프상 수상자인 중국의 인권운동가 후자가 류샤오보 생전에 그의 석방을 요구하는 팻말을 들고 있다. 후자 트위터

그는 현재 베이징에 살고 있지만 공안(경찰)이 자택 주변을 24시간 감시하고 있어 사실상 가택연금 상태다. 이 때문에 15일 미국에 서버를 둔 모바일 메신저를 통해 인터뷰를 했다. 9시간 동안 주고받은 수십 차례의 음성·문자 메시지를 질의응답 형식으로 재구성했다.

- 류샤오보의 치료는 적절했나.

“그는 공산당의 심한 박해를 받았다. 민주화 인사들이 굉장히 고통을 받아야 했던 한국의 군사정권 시대를 생각하면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류샤오보에 대한 대우는 다른 양심수에 비해 나은 편이었지만 결국 간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이상 증세는 이미 2002년에 발견됐다. 2005년에는 간경화 증세가 나타났지만 적절한 치료를 받지 못했고 병세는 점점 악화됐다. 5월3일부터 심한 복통과 발열을 겪었는데 6월27일에서야 가석방돼 선양 중국의대 제1부속병원에 입원했다. 그때는 이미 죽음이 얼마 남지 않은 상황이었다.”

- 아내인 류샤의 건강 상태는 어떤가.

“류샤오보가 노벨 평화상을 받은 이후 류샤는 계속 가택연금을 당해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모두 좋지 않은 상태다. 류샤의 남동생인 류후이도 누나 부부를 돌보다가 1년 넘게 징역형을 받기도 했다. 류샤의 부모님도 지난해 모두 돌아가셨다. 류샤오보는 아내와 처남에게 해외로 갈 수 있게 해주겠다고 약속했지만 이미 그에게 남은 시간은 얼마 없었다.”

- 류샤오보는 타계하기 전 지인들과 접촉할 수 있었나.

“가석방되고 병원에서 치료를 받는 동안 어떤 친구들의 문병도 허락되지 않았다. 숨지기 전까지 독일과 미국의 간암 전문의 정도만 그를 직접 볼 수 있었다. 그가 세상을 떠난 후 가족들은 더 엄격한 통제를 받고 있다. 외부의 누구와도 연락이 차단됐다.”

<b>타계 이틀 만에 화장…참담한 이별</b> 중국의 인권운동가로 노벨 평화상을 받은 류샤오보의 유골을 담은 단지(왼쪽 사진)가 지난 15일 랴오닝성 다롄 앞바다의 바닷속에 내려지는 모습을 아내 류샤(오른쪽)가 지켜보고 있다. 당국은 류샤오보가 타계한 지 이틀 만인 이날 시신을 서둘러 화장했다.   다롄 | AP연합뉴스

타계 이틀 만에 화장…참담한 이별 중국의 인권운동가로 노벨 평화상을 받은 류샤오보의 유골을 담은 단지(왼쪽 사진)가 지난 15일 랴오닝성 다롄 앞바다의 바닷속에 내려지는 모습을 아내 류샤(오른쪽)가 지켜보고 있다. 당국은 류샤오보가 타계한 지 이틀 만인 이날 시신을 서둘러 화장했다. 다롄 | AP연합뉴스

- 류샤오보의 삶에 대해 평가한다면.

“그의 인생에는 세 가지 중요한 사건이 있었다. 첫 번째는 1989년 미국에서 귀국해 민주화 운동인 톈안먼 사건에 투신한 것이다. 그의 단단한 사상은 빠르게 민주화 운동에 영향력을 발휘했다. 류샤오보는 당국이 무력으로 시위대를 진압하기 전날인 6월3일 저녁부터 4일 새벽까지 물리적 충돌이 아닌 평화적으로 투쟁해야 한다고 시위대를 설득했다. 이들이 죽음을 당할까봐 걱정해 300여명의 학생들을 설득, 톈안먼 광장에서 물러나도록 했다. 한 사람의 힘으로 이렇게 많은 사람의 생명을 구해낸 것은 위대한 일이다. 그가 없었다면 그 학생들은 모두 차가운 시신으로 변해 영원히 가족, 조국과 이별하게 됐을 것이다.

두 번째는 그가 독립적인 의견과 사상을 개진하면서도 다른 이들과 교류하고 사람들을 단결시켰다는 점이다. 그와 같은 사상가들은 사회에서 배척당하고 작품 발표도 금지당하며 고독한 생활을 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그는 투쟁 와중에도 국제펜클럽 중국본부장을 맡아 국내외 인사들과 활발히 교류했고 단결력을 발휘했다.

세 번째는 그가 발표한 ‘08헌장’이다. 1977년 체코슬로바키아의 ‘77헌장’을 모델로 삼아, 중국인들이 민주주의를 위해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지 구체적으로 제시했다. 현실과 동떨어진 문서가 아니라 실생활에 접목해 실천할 수 있는 헌장이다. 303명이 이에 동의해 서명을 했지만 그는 자신이 혼자서 한 일이라며 모든 책임을 짊어졌다. 지금까지 이 헌장에 1만3000명이 넘는 인사들이 지지 서명을 했다. 08헌장은 현대 중국 역사상 가장 많은 사람들의 지지를 받은 민간 문건이자 위대한 정치 변혁의 문장이다.”

- 타계한 지 이틀 만에 류샤오보의 장례가 치러졌다.

“오늘(15일) 아침에 그는 이미 화장돼 바다에 뿌려졌다. 그의 묘지가 중국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게 됐고, 그를 기념할 공간은 없어졌다. 너무나 참담한 일이다. 중요한 정신적 지도자의 흔적을 공산당이 지워버린 것이다. 한국 정부에도 실망했다. 미국, 독일뿐 아니라 일본도 류샤오보가 간암 말기로 가석방된 후 그의 해외 출국 치료에 대해 큰 관심을 보냈고 류샤오보가 떠난 후에는 논평을 발표했다. 한국에는 김대중 전 대통령이라는 노벨 평화상 수상자가 있다. 그런데 한국 정부가 어떤 의견도 표시하지 않은 점은 상당히 유감스럽다. 한국과 중국은 인권 문제에서 매우 밀접하다. 탈북자 문제에 관심이 많은데, 중국 정부가 탈북자들을 북송하면 이들은 대부분 목숨을 잃게 된다. 탈북 여성들이 중국 동북지역 남성들에게 거의 강제로 시집가 참담한 생활을 하는 사례가 많다. 굉장히 마음이 아프다. 한국과 협력할 수 있는 부분이 많다고 생각한다.”

- 류샤오보 타계 이후 중국 민주화 운동의 미래는.

“우리는 중국의 민주화에 대해 비관하지 않는다. 민주화 과정에서는 희생을 치를 수밖에 없다는 점을 알고 있고, 준비를 해왔기 때문이다. 한국도 민주화 과정에서 많은 이들이 희생됐고 혹독한 형벌을 감내하지 않았는가. 동아시아의 발전 과정은 비슷하다. 한국은 민주화 과정을 이미 완성했고, 우리는 지금 진행 중이라는 것이 다를 뿐이다. 류샤오보는 세상을 떠났지만 많은 중국 인민들을 일깨웠으며 중국의 공산당과 시진핑이 흉악한 정치 집단이라는 것을 세계에 보여줬다. 우리는 3권분립, 사법독립, 다당제, 선거제라는 변혁을 이뤄낼 것이다. 공산당 소속인 군대를 국가의 것으로 만드는 것도 포함된다. 세계 여론이 우리와 함께한다고 믿는다. 류샤와 류후이가 자유를 찾도록 하겠다. 이는 류샤오보의 소원이기도 했다. 반드시 이뤄내겠다.”

■후자는 누구

중국 베이징에서 활동하고 있는 인권운동가다. 중국 민주화와 인권, 환경보호, 에이즈 예방 및 환자 인권 운동 활동을 해왔다. 2006∼2007년 웹사이트에 기고한 5편의 글과 2차례 외국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중국의 열악한 인권 상황을 고발한 혐의로 2008년 체포돼 국가전복죄와 비방죄로 3년6월형을 선고받았다. 복역 중이던 2008년 유럽에서 가장 권위 있는 인권상인 사하로프상을 수상했지만 시상식에는 참석하지 못했다. 여러 차례 노벨평화상 후보로 거론됐다.

중국 당국의 엄혹한 감시 속에서도 2012년 중국의 시각장애 인권변호사 천광청을 베이징 주재 미국대사관에 피신시키는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류샤오보 부부와 긴밀한 관계인 후자는 류샤오보 생전에 미국·독일·일본 등 각국 인사들과 접촉해 그의 해외 출국을 위해 애썼다.


추천기사

바로가기 링크 설명

화제의 추천 정보

    오늘의 인기 정보

      추천 이슈

      이 시각 포토 정보

      내 뉴스플리에 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