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길의 다석 늙은이(老子) 읽기(14) 있없 하나

2021.11.16 07:30 입력 2021.11.16 09:39 수정
김종길 다석철학 연구자

늙은이(老子) 11월이다. 열하나는 열에 하나다. 열은 다 열고 열어서 없는 것이다. 열어 열고 열면 텅텅 빔이다. 여니 없어 없는 열이니 ‘엶’과 ‘없’이 하나다. 그 하나는 끝없는 하늘로 텅 빈 ‘없’의 하실 님이다. 늘 하시는 님은 밝돌(衆妙之門)로 열린 까마득으로 시원하게 돌고 돌면서 이제 예 여기 오늘로 없이 들고 난다.

밝돌 열린 우주 우물 감안(玄)이요, 우주 우물 깊고 깊어 감아득(玆)이요, 우주 우물 뻥 뚫려 비고 빈 까마득(太虛)이다.

열하나의 하나는 있는 것이다. 있는 하나가 없는 열에 솟아서 열하나가 된다. 열은 없(無)이요, 하나는 있(有)이니, 열하나는 ‘없있’으로 빙빙 돌아가는 ‘있없’이다. ‘없’이 ‘있’으로 돌고, ‘있’이 다시 ‘없’으로 돌아가는 수가 열하나다. ‘있없’이 번갈아 가는 열하나니, 그 뜻은 ‘없긋’에 ‘큰긋’이 일어 솟구치는 없긋이큰긋(無極而太極)이요, 오롯한 하나의 숨이다. 열에 하나는, 없에 있이 솟은 꼴이다!

하나는 하늘 한울이라 했다. 한울은 늘 하시는 우주 큰 숨의 ‘한늘’이다. 그 크고 큰 늘이 하실 님이다. 그로 하나는 하늘 한울 한늘의 하실이니, 열에 하나가 솟고, 없에 있이 솟아도 오롯한 하나의 숨이다. 으뜸 하나의 김이다. 숨/김(氣)은 쉬지 않고 늘 하시는 끄트머리다. 끝과 머리가 붙어 하나로 돌아가는 끄트머리!

쪼개진 바 없고 쪼개질 수도 없는 끄트머리가 없꼭대기(無極)에 ‘있’을 세우고 큰꼭대기(太極)로 돌린다. 하나로 안아 돌리니 떨어지지 않는다. 까마득한 속알이 맑고 밝아서 시원하다. 맑아 꽃내음이요, 시원해 꽃내음이다.

참올(眞理)은 알참이다. 참을 알아야 알찬 사람이 된다. 속알이 텅 비어 맑고 시원한 알찬 이가 참사람이다. 다석은 1958년 11월 5일 일지에서 ‘알참’을 이렇게 밝혔다. 큰 글씨 작은 글씨, 띄어쓰기를 잘 살펴서 보아야 한다.

김종길의 다석 늙은이(老子) 읽기(14) 있없 하나

말숨을 쉰다. 우리 있다 함은 여기일까? 여기가 거길까? ‘없’일까? ‘없’의 거길까? 여기 있고 없는 거기란, ‘늘있’이 여기 없는 것, 여긴 있다 없는 끄트머리, 그러니 ‘없있’을 하나로 알아야 하리. ‘없있’이 참이다. ‘없있’을 알아야 한다. ‘없있’이 참올이요, 알참이요, 늘이다. ‘있있’으로 많고 많아도 ‘없있’이 하나니 결국 열하나 다하나로 하나다. 하나다(一卽多), 다하나(多卽一).

다석은 1918년 6월 16일에 나온 ‘청춘(14호)’에 ‘오늘’을 썼다. “거기라 저기라 하지만 거기란 거기, 사람의 여기요. 저기란 저기, 사람의 여기가 될 뿐이다. 산 사람은 다 나를 가졌고 사는 곳은 여기가 되고 살 때는 오늘이다. 오늘 오늘 산 오늘 오늘 어제의 나, 거기의 나는 죽은 나가 아니면 남 된 나라, 나 여기 사는 나를 낳아 놓은 부모라고는 하겠으리. 현실아(現實我)는 아니니라”라 했다.

늘은 없이 있는 것이다. ‘늘있’도 어느 새 여기 없다. 여기도 어느 새 거기가 되고 오늘도 어느 새 어제가 되니, 늘 여기 오늘로 살지 않으면 안 된다. 오늘의 여기 예 이제는 늘 ‘없있’이 하나로 돌아가는 지금이다. ‘없있’은 ‘있없’이 맞아 어울려 번갈아 가는 한 꼴 차림의 구석구석이다. ‘있’은 ‘없’의 구석으로 맞아 돌아야 한다. 그래야 떨어지지 않는다.

‘없’을 쓰고 써야 ‘있’이 ‘있있’으로 낳고 낳고 되고 되고 이루고 이룬다. ‘없’은 쓰고 쓰고 또 쓰고 써도 비워지지 않는다. 밑도 없고 끝도 없고 꼭대기도 없으니 채워지지도 않는다. ‘있’이 ‘있있’으로 좋고 좋은 것은 ‘없’을 쓰고 또 쓰기 때문이다. ‘있’이 쓸모가 있는 것은 바로 그 ‘없’의 구석이 맞아서다. ‘있’과 ‘없’이 하나로 맞아 돌아가니 집집 우주 하늘 하나가 늘 하실로 가득 가득 꽃내음이다.

1. 다석 류영모는 1957년 11월 30일 일지에 없있이 하나로 도는 태극 그림을 그려 놓았다.

1. 다석 류영모는 1957년 11월 30일 일지에 없있이 하나로 도는 태극 그림을 그려 놓았다.

다석은 1957년 11월 30일 일지에 그림 하나를 그려 놓았다. 태극의 두 숨(氣)이 맞아 돌아가는 그림이다. 위 숨에 “없 가장아바계ᄒᆞ나”라 썼고, 아래 숨에 “있 가장아달에하나”라 썼다. ‘없있’이 하나로 돈다. ‘있없’이 돌고 돈다. ‘있없’은 어느 것보다도 높고 세니 ‘가장’이요, 밝고 밝게 돌아가는 용오름의 회오리니 아바아달의 밝돌이다. 없이 계시니 ‘계’요, 있이 예 있으니 ‘에’다.

계 하셔 된 대로 예 서 가오리.

없이 늘 낳고 되고 이루니,

여기 있 서서 올로 가오리.

하루하루 너나 없는 나날로 스스로 저절로 나고 나서 나 되는 참나의 삶을 사는 오늘이 되자. 사르고 사르는 바탈 불꽃으로 밝히고 밝혀 하늘 하나 하실 님 모시는 비움이 되자. 비운 오늘로 하루하루 되고 되는 열하나다. 자, 그러면 늙은이 11월을 뚫는다.

김종길의 다석 늙은이(老子) 읽기(14) 있없 하나

어린님과 떠돌이가 달구지를 타고 가는 중이다. 드넓게 펼쳐진 들에 오고가는 한 길이 끝없다. 소가 끄는 달구지는 덜커덩 굴러간다. 이따금 소가 풀을 뜯느라 달구지가 멈추지만 둘은 느긋하다. 갈 곳 없고 올 곳도 없어 그저 길 굴러 가는 데로다. 수레바퀴는 가고 오는 자리를 굴러 구르며 돌아간다. 목에 걸린 워낭이 시끄럽다. 어린님이 달구지에서 내려 워낭을 푼다. 어디선가 잠잠한 바람이 일어 조용히 낮게 흐른다. 소의 얼굴을 두 손으로 안는다. 떠돌이가 워낭을 받아 들어 한 번 흔든다. 맑은 소리가 하늘땅 사이로 번진다.

김종길의 다석 늙은이(老子) 읽기(14) 있없 하나

어린님 : (소를 뒤로 하고 수레바퀴를 살핀다. 바퀴통에 풀이 낀 것을 털어낸다. 그러더니 살대를 세고 묻는다.) 살대가 서른 개? 서른 개 살대가 바퀴통에 몰렸네? 왜 살대가 서른 개야?

어린님이 소의 얼굴을 두 손으로 안는다. 떠돌이가 워낭을 받아 들어 한 번 흔든다. 맑은 소리가 하늘땅 사이로 번진다. 닝겔, 너의 의미, 2006, 드라이포인트

어린님이 소의 얼굴을 두 손으로 안는다. 떠돌이가 워낭을 받아 들어 한 번 흔든다. 맑은 소리가 하늘땅 사이로 번진다. 닝겔, 너의 의미, 2006, 드라이포인트

떠돌이 : (워낭을 한 번 더 흔들고) 서른 살대는 돌고 도는 오늘살이 하루하루하루 한 달이야. 한 달을 다달이 열두 번 굴리고 돌리면 한 해야. 오고 가는 오늘살이 한 달살이 한 해살이지. 바퀴통은 굴통이라 불러. 굴통은 바퀴살을 한데로 몰아 돌리고, 굴대도 끼워 돌리지. 굴통에 끼운 굴대에 비녀못을 박아 돌려야 수레가 잘 굴러. 이 쪽 저 쪽, 두 수레바퀴가 돌고 굴러야 오고 가. 굴통 구멍 그 없는 구석에 살대를 끼우니 참 제격이지. 또 거기에 쇠로 휘갑쳐 줏대 잡으면 말끔해. 오래 오래 굴러도 상하지 않아. 굴통을 휘갑치고 바퀴를 휘갑쳐야 짱짱해. 줏대 없으면 뒤틀려 바로 부서져 버려. 길 가려면 줏대를 똑바로 올바로 감아야 해.

어린님 : 아하, 오늘살이 한 달살이 사는 삶이 없는 구석에 몰린 꼴이네. 늘 여기 예 오늘로 살아도 굴통의 빈 서른 날 구멍처럼 비어 있으니, 비어 도는 나날이겠네. 돌고 또 굴러도 굴대 낀 구멍으로 돌아가는 것이니, 그 또한 비어 도는 삶이네. 수레바퀴 돌고 돌아 달구지 구르는 하루도 그 없는 구석 없이는 도무지 쓸 수가 없겠네.

떠돌이 : (어린님이 참 기특하다는 듯이 보면서) 옳지! 그렇지! 서른 날이 하루하루 굴러서 한 통에 몰린 꼴이 한 달살이 나날이야. 그 하루하루 나날의 수레바퀴 굴려 굴통으로 살 수 있는 건 늘 오늘로 이제 예 여기로만 살기 때문이야. 이제 예 여기는 ‘없’ 구멍에 ‘있’ 살대가 끼워졌으니 ‘없있’이 한데로 돌고 돌아가는 삶이 아니겠어? (워낭을 한 번 흔든다. 하늘땅 사이로 울린다.) 없는 구석에 방울 하나가 울리는 꼴이지!

김종길의 다석 늙은이(老子) 읽기(14) 있없 하나

어린님 : 자, 그럼, 그 다음을 볼까요? (하늘땅에 워낭이 울리는 듯한 소리로 다음 시행을 낭독한다.) 진흙을 빚어서 그릇을 만든데, 그릇을 쓸 수 있음은 그 없이 맞아서라. 창을 내고 문을 뚫어서 집을 짓는데, 집의 쓸 수 있음은 그 없이 맞아서라. 작은 글씨로 쓴 ‘구석’을 빼고 그냥 “그 없이 맞아서라”로 보아야 잘 보여. “쓸 수 있음”의 ‘쓸 있’과 “그 없이 맞아”의 ‘없 맞’은 마치 서로 맞아 어울리는 한 꼴이야. ‘있’과 ‘없’이 한 꼴로 어울리니 ‘쓸(수)’와 ‘맞(아)’도 딱딱 떨어져.

그릇의 쓸 수 있음은 비어 없이 다다른데가 맞아서야. 비어 없이 다다른 데는 가온찍기지. 닝겔, 너를 기다려, 2021, 연필 수채

그릇의 쓸 수 있음은 비어 없이 다다른데가 맞아서야. 비어 없이 다다른 데는 가온찍기지. 닝겔, 너를 기다려, 2021, 연필 수채

떠돌이 : (워낭을 흔든다. 맑고 맑은 소리울림이 하늘땅 사이를 요동친다.) 다석은 한글을 쓸 때 뜻을 더 얹어서 쓰곤 했지. ‘빚어서’를 ‘비져서’로 썼고, ‘만든데’를 ‘맨든데’로 썼어. ‘뚫어서’는 ‘뚜러서’로 썼지. ‘서른 낱’도 ‘설흔 낯’으로 썼고 말이야. 어떤 것들은 그저 별 뜻 없이 맞춤법이 어긋난 경우도 있으나, 말숨으로 쉴 때는 한 번 더 살펴야 제 뜻을 찾을 수 있어.

‘빚어서’를 소리 내 읽으면 ‘비져서’야. 읽는 데 어떤 문제가 있지는 않아. 다만 ‘빚’과 ‘비’는 전혀 달라. ‘빚’은 꾸어 썼으니 갚아야 할 무엇이지만, ‘비’는 비어 빔이야. ‘맨’은 처음이요 없음이요 다다름이요, 더할 수 없는 그 무엇이지. 그러니 “비져서 그릇을 맨든데”라는 말은 “빚어 빈 그릇 없이 다다른 데”라고 풀어도 어색하지 않아. 그릇의 쓸 수 있음은 그래서 그 비어 없이 다다른 데가 맞아서야. 비어 없이 다다른 데는 ‘가온찍기’지.

‘뚫어서’를 소리 내 읽으면 ‘뚜러서’야. 여기도 읽는 데 문제는 없어. ‘뚫’과 ‘뚜’의 차이는 크지 않아. 뚫어 구멍 내 문을 만드는 일이니까. 그런데 왜 ‘뚜’라고 했을까? ‘ㄸ’와 ‘ㅡ’와 ‘·’로 나누어 볼까? 땅을 뜻하는 ‘ㅡ’의 위에 뚫림이 있고, 아래에도 하늘 우주 ‘·’가 있어. 땅의 위아래가 다 집집 우주 하늘이야. 여기서 창 내고 문 뚫린 집은 집집 우주 하늘이란 뜻이야. 집 우(宇), 집 주(宙), 집집 우주. 다석이 쓴 일지에 ‘뚜러서’의 ‘뚜’는 ‘ㅜ’가 아니라 ‘■’로 썼어. 집집 우주 하늘이 돌고 도는 것도 다 우주 하늘이 텅텅 비어서야.

어린님 : 아하, 그런 속뜻이 담겼구나. 속뜻을 보니 그 말뜻이 크고 크네. 그릇하나, 집하나 쓰는 따위의 ‘없’이 아니구나. 그릇에 빗대어서 ‘가온찍기’를 풀고, 집에 빗대어서 집집 우주 하늘을 풀었네.

김종길의 다석 늙은이(老子) 읽기(14) 있없 하나

떠돌이 : (길의 먼 까마득을 살핀다.) 옳지! 그렇지! 세상의 온갖 ‘있’이 좋은 쓸모가 되는 것은 ‘없’을 쓰고 또 쓰기 때문이야. ‘없’이 막히면 쓸모가 없어. 숨 막히고 기막혀 까딱 잘못하면 숨넘어가. 기 뚫고 숨 돌려야 한 숨 놓지. 몸성히 맘놓이로 바탈 사르는 얼숨은 없이 돌아가는 산알이야. 신령한 하늘일름(天命) 알알이 맺혀 얼숨으로 휘돌아 돌고 도는 것이 산알이지. 산알이 싱싱 돌아가니 이 몸이 새 힘 돋아 성한거야. ‘없’이 ‘있’을 살려 ‘있없’으로 하나 되니 참올(眞理)이 가득 그득 알참이야.

길이 어둠에 묻혀 잘 보이지 않았다. 둘은 말없이 한 참을 오갔다. 소는 조금씩 밝아져 흰 소가 되었다. 닝겔, 너를 기다려, 2009, 드라이포인트

길이 어둠에 묻혀 잘 보이지 않았다. 둘은 말없이 한 참을 오갔다. 소는 조금씩 밝아져 흰 소가 되었다. 닝겔, 너를 기다려, 2009, 드라이포인트

어스름하다. 어둑어둑 하다. 길이 어둠에 묻혀 잘 보이지 않았다. 달구지는 덜커덩 구른다. 둘은 말없이 한 참을 오갔다. 가고 오는 길은 뚫려서 한이 없다. 어둠이 짙게 내리는 동안 소는 조금씩 밝아져 흰 소가 되었다. 희고 흰 소는 어둠을 밝히며 걸었다. 가끔씩 워낭소리가 울렸다. 멀리 울려 사라지고 낮게 흘러 다가왔다. ‘있없’의 한 울림이 둘의 마음에 솟았다.

어린님 : (소리울림으로 들린다.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말의 어귀를 당겨서 짧게 줄여 볼까? 속뜻의 뜻 얹는 건 뒤로 하고 제 말 제소리 잡아볼까? 제 땅의 제소리로 제 말 잡아야 알맞이(哲學) 깊지!

김종길의 다석 늙은이(老子) 읽기(14) 있없 하나

김종길은

다석철학 연구자다. 1995년 봄, 박영호 선생의 신문 연재 글에서 다석 류영모를 처음 만났는데, 그 날 그 자리에서 ‘몸맘얼’의 참 스승으로 모셨다. 다석을 만나기 전까지는 민중신학과 우리 옛 사상, 근대 민족 종교사상, 인도철학, 서구철학을 좇았다. 지금은 그것들이 모두 뜨거운 한 솥 잡곡밥이다. 함석헌, 김흥호, 박영호, 정양모, 김흡영, 박재순, 이정재, 심중식, 이기상, 김원호 님의 글과 말로 ‘정신줄’ 잡았고, 지금은 다석 스승이 쓰신 <다석일지>의 ‘늙은이’로 사상의 얼개를 그리는 중이다.

닝겔은

그림책 작가다. 본명은 김종민이다. 대학에서 철학을, 대학원에서 일러스트레이션을 공부했다.<큰 기와집의 오래된 소원>, <소 찾는 아이>, <섬집 아기>, <워낭소리>, <출동 119! 우리가 간다>, <사탕이 녹을 때까지> 등을 작업했다. 시의 문장처럼 사유하고 마음을 움직이는 그림으로 독자들과 만나는 작가다.

추천기사

바로가기 링크 설명

화제의 추천 정보

    오늘의 인기 정보

      추천 이슈

      이 시각 포토 정보

      내 뉴스플리에 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