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산차 만들라” 유지 지키려 창업…수많은 위기에도 혁신 DNA 꺾이지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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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션 업계에서 루이비통의 ‘모노그램 스피디 백’은 ‘3초 백(bag)’으로 불린다. 길거리에서 3초마다 한 번꼴로 볼 수 있다는 의미다. 자동차 업계에서도 3초마다 한 대씩 팔려나간 ‘3초 카(car)’가 있다. 바로 일본 도요타다. 도요타는 지난해 998만 대를 팔았다. 3초에 한 대꼴로 팔린 것이다. 세계 1위다. 2위 폭스바겐그룹(973만 대)과 3위 제너럴모터스(GM, 971만 대)를 20만 대 이상 차이로 따돌렸다. 치열하게 경합 중인 ‘빅3’ 중에서도 월등히 돋보인다. 도요타는 올해 1000만 대 돌파를 확신하고 있다. 올해 판매 목표를 1034만 대로 잡았다. 이 목표가 실현된다면 자동차 산업 역사상 첫 연간 1000만 대 판매 돌파 기록을 도요타가 세우게 된다.

‘3초 카’가 와 닿지 않는다면 이건 어떨까. 1966년 처음 출시된 준중형 세단 ‘코롤라’는 2013년 7월 4000만 대 판매를 돌파했다. 46년 동안 40초에 한 대씩 팔린 셈이다. 코롤라는 지금까지 ‘세계에서 가장 많이 팔린 차’ 타이틀을 갖고 있으며 기네스북에도 이름을 올렸다.

도요타는 1000만 대에 달하는 생산능력을 갖췄지만 폭스바겐그룹이나 GM과 달리 거느리고 있는 브랜드가 상대적으로 적다. 폭스바겐그룹이나 GM과 달리 인수·합병(M&A)에 적극적인 기업이 아니었다. 도요타와 렉서스를 필두로 다이하쓰(Daihatsu)·히노(Hino)·사이언(Scion)이 틈새를 채우는 형국이다.


방직기 업체에서 자동차 제조사로
도요타는 해외 브랜드를 인수하는 크로스보더 딜(Cross-border deal:국경 간 거래)을 한 적이 없다. 단지 두 개의 일본 업체만 인수했다. 1966년 히노트럭을 자회사로 편입했다. 1998년 9월 다이하쓰는 공개 매수(Tender offer:기업의 지배권을 취득하거나 강화할 목적으로 미리 매수 기간, 매수 가격 등 매수 조건을 공시해 유가증권시장 외에서 주식 등을 매수)를 통해 주식 과반을 취득하면서 도요타의 자회사가 됐다. 1984년에 GM과 미국 누미(NUMMI) 공장을 합작했지만 공동으로 각자의 차량을 생산하는 수준에 그쳤다. 도요타는 M&A를 통해 부족한 상용차와 소형차 라인업을 확장했을 뿐 렉서스와 사이언 등 자체적으로 새로운 브랜드를 창출하며 글로벌 업체에 맞섰다. 그리고 결국 1위(2007년 생산 대수, 2008년 판매 대수)에 올라섰다.

1926년 도요타자동직기제작소로 시작해 1937년 도요타자동차공업주식회사로 간판을 바꿔 단 후 오늘날 세계 최대 자동차 업체로 성장한 도요타의 역사에는 ‘혁신’이라는 단어가 관통한다. ‘가이젠(改善)’과 ‘적기 공급 생산(JIT:Just In Time)’은 세계 자동차 산업에 일대 변혁을 가져온 도요타 특유의 생산 전략, 즉 도요타 생산 방식(TPS)이다. 이는 미국 하버드대 경영대의 교과서에도 수록돼 있다.

‘판매의 도요타’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해외 각지에서 자사의 제품을 파는 능력 또한 벤치마킹 대상이 되고 있다. 가능한 한 실제 생산에 가까운 시점까지 시장의 수요를 반영함으로써 제품을 다양화하고 재고 부담을 줄이는 것이다.

도요타는 대규모 리콜 사태와 동일본 대지진 등으로 심각한 위기를 맞기도 했지만 90년의 시간을 거치며 단단히 다져진 내공은 세계 1위 자리에 굵은 뿌리를 내리고 있다.

“반드시 국산 자동차를 만들어라.” 도요타자동차는 설립자인 도요다 기이치로의 아버지 도요다 사키치의 유언이 큰 영향을 미쳤다. 도요다 가문의 주력 사업이 방직기에서 자동차 제조로 전환되는 결정적 장면이기도 했다. 사키치는 1876년 일본 시즈오카 현의 시골 마을 야마구치에서 가난한 목수의 아들로 태어났다. 4남매 중 장남인 사키치는 가업을 이어야 했지만 그보다 기계 발명에 관심이 많았다. 청년 사키치가 주목한 것은 베틀이었다. 당시 베틀은 두 손을 사용해 다뤄야 했기 때문에 불편했고 생산 효율도 낮았다. 사키치는 쓰기 편한 직기를 만들겠다고 결심하고 연구에 몰두했다. 결과는 성공이었다. 그는 1894년 한 손으로 작동할 수 있는 ‘도요타식 목제 인력 직기’를 내놓았다. 이후 그는 이를 동력직기와 자동직기로 발전시켰다. 기존의 것을 바탕으로 더 나은 결과물을 내놓는 것, 바로 가이젠이다. 도요타 혁신의 뿌리를 발명가 사키치에게서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그는 기술력을 바탕으로 1915년을 전후로 방직 사업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마침 제1차 세계대전으로 영국의 섬유 수출이 위축되자 일본이 호황기를 맞았다. 덩달아 사키치의 사업도 번창했다. 1926년에는 자동직기를 생산하는 ‘도요타자동직기제작소’도 설립했다. 하지만 그로부터 4년 후인 1930년 뇌일혈로 사망했다.

사키치는 1920년대 사업을 위해 미국과 유럽을 오가며 자동차가 새로운 산업으로 부상할 것이라는 점을 알고 있었다. 그는 죽기 전 ‘G형 자동직기’ 특허권을 영국 플랫에 팔아 100만 엔을 손에 넣었고 이를 아들 기이치로에게 주며 자동차 개발에 투자할 것을 당부했다.
[역사를 바꾼 자동차 M&A 명장면] 도로를 장악한 ‘3초 카’ 도요타
기이치로는 선친의 유지를 받들어 포드와 GM의 공장과 부품 라인을 돌아본 뒤 사내에 ‘자동차사업부’를 만든다. 일종의 신사업 추진 태스크포스 팀이었다. 그는 쉐보레 자동차 한 대를 구입해 연구하면서 자동차 개발을 시작했다. 발명가 아버지의 피를 이어받은 기이치로는 도쿄제국대 기계공학과를 졸업한 엔지니어였다. 그는 사키치가 세상을 떠난 지 5년 만인 1935년 5월 첫 승용차 모델 ‘A1’을 내놓고 판매를 시작했다.


6·25전쟁 특수로 부도 위기에서 기사회생
아버지 도요다 사카치가 회사의 미래로 자동차를 지목했다면 아들 기이치로는 이를 충실하게 실행에 옮긴 주역이다. 도요다 기이치로가 도요타자동차의 실질적인 창업자인 셈이다. 기이치로가 자동차 개발에 착수했을 때 회사 안팎에선 이를 반대하는 목소리가 높았다. 자동차 개발 실패로 방직기 제조 사업까지 심각한 타격을 입을 수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기이치로는 이에 굴하지 않고 신사업을 성공적으로 추진했다. 경영자의 빠른 판단과 과감한 추진력의 중요성이 돋보이는 대목이다.

1934년 3월 자동차 시험 제작 공장을 완성한 기이치로는 그해 9월 도요타 최초의 자동차용 엔진인 ‘A형 엔진’ 시제품을 완성했다. 1934년에는 자동차용 특수강을 만들기 위한 제강연구소도 설립했다. 1935년 A형 엔진을 탑재한 A1 승용차의 시제품이 완성됐다. 이어 트럭 제작에도 나섰다. G1형 트럭은 시작차 완성과 동시에 양산 체제에 들어갔다. 회사가 1936년 발표된 자동차공업육성법의 제조 허가 회사로 등록되자 기이치로는 아이치현 고로모 마을에 191만4000㎡(58만 평)의 공장 건설 용지를 매입했다. 그리고 1937년 8월 그곳에서 도요타자동차공업주식회사(도요타)를 정식 설립했다. 이 마을이 오늘날의 도요타시다.
<YONHAP PHOTO-1319> A worker polishes a Toyota Motor Corp. Camry vehicle, displayed at the Beijing Auto Show in Beijing, China, on Saturday, April 24, 2010. The show will be held through April 27. Photographer: Tomohiro Ohsumi/Bloomberg/2010-04-24 23:5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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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worker polishes a Toyota Motor Corp. Camry vehicle, displayed at the Beijing Auto Show in Beijing, China, on Saturday, April 24, 2010. The show will be held through April 27. Photographer: Tomohiro Ohsumi/Bloomberg/2010-04-24 23:57:30/
기이치로의 경영 수완은 탁월했다. 1937년 공장 가동과 함께 자동차 품질과 생산 시스템 개선을 끊임없이 시도했다. 아버지 사카치에게서 보고 배운 것이다. 도요타의 가이젠 문화는 이렇게 형성됐다. 또한 조립 라인에서 부품을 어떻게 이동시킬 것인지, 한 작업에 얼마나 많은 인원이 필요한지 연구했다. 이는 JIT의 시초가 됐다. 부품이 필요한 시기에 수량만큼만 받아 재고가 발생하지 않도록 해주는 시스템이다. 도요타가 전성기를 맞자 JIT는 세계 자동차 회사들의 벤치마킹 대상이 됐다.

1941년 12월 일본군의 진주만 공격으로 승용차 생산은 트럭 등 군수 용품 생산으로 바뀌었다. 이후 1945년 2차 세계대전이 일본의 패배와 함께 끝나자 기이치로는 소형 승용차 연구를 시작했다. 1947년 도요타가 독자적으로 만든 최초의 엔진인 ‘S형 엔진’이 완성됐고 이를 탑재한 도요타 ‘SA형 세단’이 등장했다.

기이치로의 탁월한 경영능력도 전쟁 후 찾아온 위기를 극복하기엔 역부족이었다. 전쟁이 끝난 후 급격한 인플레이션과 노동쟁의가 겹치자 수요와 공급이 동시에 차질을 빚으면서 회사 상황이 악화됐다. 결국 근로자 7000명 중 2000명을 감원했다. 기이치로 역시 사장 자리에서 물러났다. 재무에 소홀했다는 이유다. 1950년의 일이다. 이 때 일본은행은 기업 경영 정상화를 위해 대출해 주는 조건으로 회사를 도요타자동차공업·도요타자동차판매로 분리할 것을 요구했다. 도요타의 자금난이 팔리지 않는 차를 생산해 왔기 때문이라고 판단하고 긴급 융자의 조건으로 내세웠다. 이 체제는 양사가 1982년 도요타로 합병될 때까지 유지됐다.

1952년부터 도요타는 다시 한 번 성장기를 맞았다. 한국의 6·25전쟁으로 군수물자 수요가 급증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기이치로는 다시 사장 자리에 앉지 못했다. 1952년 7월 복귀를 앞두고 갑작스러운 뇌출혈로 58세의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잘 만든 제품 하나가 회사 살린다
도요타는 기이치로가 떠난 후 1982년 그의 장남인 도요다 쇼이치로가 사장 자리에 오를 때까지 32년간 전문 경영인 체제를 유지했다. 그렇다고 도요다 가문이 회사 경영에서 완전히 손을 뗀 것은 아니었다. 1952년 쇼이치로는 나고야대 기계공학과를 졸업한 후 도요타에 이사로 입사했고 경영에 깊숙이 관여했다(쇼이치로는 37년간 재직한 후 1999년 명예회장을 끝으로 은퇴했다).

1955년 플래그십 세단 크라운을 출시했고 1959년에는 도요타 모토마치 공장 완공을 기념해 고로모시가 명칭을 도요타로 바꿨다. 커져 버린 사세를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1966년에는 ‘살아있는 기록 제조기’인 코롤라가 출시됐다. 이어 1980년에는 또 다른 베스트셀링 모델인 캠리가 나왔다. 1950년 1만1700대였던 도요타의 연간 생산량은 1955년 코롤라 출시 후 2배에 가까운 2만2800대까지 급증했다. 1968년(110만 대) 처음으로 100만 대 생산을 넘어섰고 1972년(209만 대) 200만 대를 돌파했다. 1980년(329만 대) 캠리로 또 한 번 규모의 경제를 실현한다. ‘잘 만든 제품 하나가 회사를 살린다’다는 건 애플 아이폰 이전에 이미 코롤라와 캠리가 보여줬다.

도요타는 M&A에는 소극적이었지만 다른 프로젝트로 세계를 깜짝 놀라게 했다. 자신들이 직접 프리미엄 브랜드를 만들어 시장에 내놓은 것이다. 이 프로젝트는 북미 시장에서 기대 이상의 성과를 올리며 메르세데스-벤츠·BMW·아우디의 등골을 오싹하게 만들었다. 바로 1989년 플래그십 세단 LS400을 전면에 내세우면서 등장한 ‘렉서스(Lexus)’다.


최중혁 신한금융투자 수석연구원·최진석 한국경제 산업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