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의 호국인물 <나석주 의사>
Name. 관리자    Date. [21.12.01] 1136    Hit. 973
÷ : Na1.jpg


나석주 의사는 1891년 황해도 재령군 북율면 진초리(現 황해도 재령군 남지리)에서 태어났다. 보명학교, 양산학교에서 수학한 그는 일본의 수탈이 심화되자 1915년 가족을 이끌고 중북 북간도 모아산으로 이주

하여 무관학교에 입학, 독립운동에 뜻을 두었으나 모친의 병환으로 2년 만에 귀향하였다.

1919년 전국적인 만세운동이 일어나자 김덕영, 최호준 등과 함께 황해도를 중심으로 친일 인사, 밀정 암살 및 군자금 모금활동을 벌였다. 이에 일본 경찰이 추적하자 1921년 10월 중국으로 망명하였다. 망명 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외곽단체인 '한국노병회'에 가입하고, 중국 한단의 '육군군관단강습소'에 입학하여 1년 간의 군사교육을 받고, 1924년 6월말 임시정부 경무국 경호원으로 임명되어 활동하였다. 이후 독립은 

격렬한 의열투쟁을 통해 쟁취해야 한다는 신념에 따라 의열단으로 활동단체를 옮겼다. 나석주 의사는 활동이 많이 위축되고 침체된 의열단의 분위기 쇄신을 위해 동양척식주식회사, 조선식산은행, 조선은행 등 

조선 경제 침탈의 주요 기관을 파괴하는 계획을 세웠다. 1926년 김창숙이 '제2차 유림단 의거'를 통해 모은 자금과 무기를 지원받은 그는 같은 해 12월 25일 배를 타고 인천에 도착, 중국인 노동자로 위장하여 

경성(서울)로 잠입했다.

12월 28일 오후 2시 5분, 나석주 의사는 조선식산은행에 폭탄을 던지고 뒤이어 동양척식주식회사에서 폭탄을 투척한 후 사격을 시작했다. 그러나 아쉽게도 폭탄은 불발되었다. 이후 일본 경찰과 대치하던 중 

가지고 있던 총으로 자결을 시도하였고, 병원으로 후송되어 심문받던 중 순국했다.

정부는 나석주 의사의 공훈을 기려 1962년 건국공로훈장 복장(現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 1976년에는 국립묘지(現 국립서울현충원) 무후선열제단에 위패를 봉안하였다. 옛 동양척식주식회사가 있던 

자리(現 하나금융그룹 명동사옥)에는 '나석주 의사 의거 기념터 표석과 나석주 열사의 상'이 세워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