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4년 11월 12일

“8대 죄악 저지른 이완용 응징해야” 뒤늦게 전한 이유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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융희(隆熙) 3년 12월 22일 한국인들은 물론 많은 일본인들까지 깜짝 놀라게 만든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융희는 대한제국의 마지막 연호로 융희 3년이면 1909년이죠. 대한제국 총리대신 이완용이 목숨을 잃기 직전까지 갔던 일이었습니다. 이날 한성부 종현천주교성당에서 벨기에 황제 레오폴드 2세의 추도식이 열렸습니다. 종현천주교성당은 지금의 명동성당입니다. 행사가 끝난 뒤 이완용이 인력거에 올라타려던 순간 23세 청년 이재명이 달려들어 날카로운 흉기로 찔렀습니다. 왼쪽 어깨와 오른쪽 등 아래 두 곳을 크게 다친 이완용은 의식을 잃고 피투성이가 된 채 실려 갔죠.

이완용 피습사건이 만 15년 가까이 지난 1924년 10월에 다시 거론된 이유는 자객 중 마지막 한 명이 이때 붙잡혔기 때문입니다. 41세의 중년이 된 이동수였죠. 이완용 습격으로 13명이 재판에 넘겨졌을 때 이동수 등 3명은 몸을 피했습니다. 이동수는 궐석재판에서 징역형 15년을 선고받았지만 용케 계속 숨어 있다가 시효 1년을 남기고 붙잡히고 말았죠. 이완용을 습격했던 이재명은 법정에서 “이완용은 8대 죄악을 저질렀다”며 을사늑약 등을 꼽았습니다. 결국 1910년 9월 교수형이 집행됐죠. 2년 전 결혼한 꽃다운 아내를 홀로 둔 채 떠났죠.

평양 출신 이재명은 1904년 노동이민으로 미국에 갔습니다. 1905년 을사늑약과 1907년 정미7조약이 체결되자 서둘러 귀국했죠. 일제는 을사늑약으로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빼앗았고 정미7조약으로는 군대를 해산했습니다. 청년 이재명은 이제 남은 일은 합병이라고 생각했죠. 이때 이완용은 일제에 대놓고 합병을 요청하던 친일단체 일진회를 대국민연설회 등으로 맞불을 지르면서 누르고 있었습니다. 이완용이 합병에 반대해서가 아니라 아직은 때가 아니라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던 데다 합병의 공로도 빼앗기지 않으려던 노림수였죠.

이재명은 이완용의 속셈을 꿰뚫어보고 이동수 등 동지를 모아 이완용과 일진회 회장 이용구를 처단하기로 했습니다. 이것이 합병을 막는 길이라고 판단했고 안중근의 이토 히로부미 사살에도 용기를 얻었다고 하죠. 이재명과 이동수를 비롯한 3명이 이완용을 맡고 다른 2명이 이용구를 처치하는 식으로 일을 나눴습니다. 나머지 동지들은 자금조달, 무기구입, 정보수집 등을 담당했죠. 하지만 저승 문턱까지 갔던 이완용은 대한의원의 일본인 의사들로부터 당시로서는 최고 수준의 치료와 며느리의 극진한 간호를 받아 입원한 지 53일 만에 퇴원했습니다. 다만 왼쪽 어깨를 찔렸을 때 폐까지 다쳐 죽을 때까지 천식을 앓았다고 합니다.


지금 볼 때 한 가지 이상한 점은 동아일보가 이완용 피습소식을 상세하게 보도한 일이었습니다. 이동수가 붙잡혔다는 1924년 10월 20일자 1단 기사를 시작으로 ‘연명한 이완용과 미결수 이동수’ 소제목으로 4회, ‘구생(苟生)한 이완용과 교살(絞殺)된 이재명’ 소제목으로 6회 기사를 연재했죠. 총 10회로 이완용 피습의 전후 과정을 소개했습니다. 그뿐이 아니었죠. 15년 전 대한협회 기관지였던 대한민보의 당시 기사를 그대로 지면에 옮겨 싣기까지 했습니다. ‘그때의 여론을 대표하는 신문이 그 사건을 어떻게 취급했는지’ 보여준다는 취지였죠. 이동수의 재판을 앞둔 1925년 2월에는 대한민보의 이재명 재판기사를 5회로 묶어 게재했습니다.

특히 10회 기사를 연재할 때는 15년 전 사건을 마치 어제 일어난 일처럼 현장감 넘치게 전했습니다. 이완용 피습장소 주변의 목격자와 대한의원에서 일했던 의사까지 수소문해 증언을 실었죠. 동아일보는 때 지난 기사를 연재하기 시작하면서 ‘일반의 기억을 새롭게 하기 위해’라고 이유를 설명했습니다. 이 짧은 구절에는 ‘나라를 빼앗긴 잘못을 되풀이하자 말자’ 또는 ‘나라를 팔아먹은 역적을 반드시 응징하자’는 의지를 새롭게 다지자는 숨은 뜻이 담겨 있지는 않았을까요? 참, 이동수는 2심에서 징역형 2년의 집행유예 3년을 받았습니다.

이진 기자 leej@donga.com
기사입력일 : 2021년 04월 27일
大韓隆熙(대한융희)
···三年(3년)、十二月(12월) 二十二日(22일) 午前(오전) 十一時半(11시반)!
匕首(비수) 一過(일과)! 雪上(설상)의 鮮血(선혈) (一‧1)
◇명동 불국교회에서 열린 백의의 황뎨 추도식을 맛친 뒤에
◇차부와 함께 리총리를 찌르고 도망한 열두 명 중의 한 사람
◇延命(연명)한 李完用(리완용)과 未決囚(미결수) 李東秀(리동수)

녯날 대한총리대신(大韓總理大臣)으로 지금의 조선귀족(朝鮮貴族)인 리완용후작(李完用侯)을 찔러 죽이려고 하든 녯날의 불평객 중에서 경찰의 그물을 버서나 열여섯 해 동안이나 세상과 등지고 살아오든 리동수(李東秀)의 공판은 불원간에 경성디방법원에서 개뎡하게 되얏는데 원래 사건이 사건이라 리동수가 평양서 잡히엿다는 소문이 나든 때로부터 일반은 녯날의 모양을 회고하는 동시에 지금 서대문 텰창 안에 들어 잇는 리동수의 긔구한 운명을 감개무량하게 기다리는 중이라. 당시의 전후 사실은 공판을 딸아 세상에 알려지려니와 본사는 일반의 긔억을 새롭게 하기 위하야 공판날을 압헤 두고 대략을 적어 보도하노라.

◇···지금으로부터 십륙 년 전 녯날 즉 대한륭희(大韓隆熙) 삼년 십이월 이십이일 오전 열한시 삼십분! 땅 우에 두텁게 싸인 눈은 아참 햇발을 바다 한층 더 맑고 한층 더 쌀쌀스럽게 반사하며 매운 바람은 살을 어일 듯이 왼몸을 휩싸고 기여들며 얼어빠진 아참 공긔를 헤치고 간간히 울니는 교당의 종소래는 장차 일어날 참극을 점처주는 것가치도 들리든 바루 그때엿다. 백이의(白耳義) 황뎨의 추도식(追悼會)을 맛치고 하나식 둘식 명동(明洞) 불란서교회당 문을 나오는 대관의 무리-당시 總理大臣(총리대신)으로 위정자의 두령이 되야 가지고 정권을 좌우하던 리완용후(李完用候)도 역시 그 뒤를 이여 한 가지로 문압까지 거러 나왓섯다. 그리하야 바야흐로 한 발을 인력거 우에 올려노흐랴 말냐는 순간에 돌연히 길 북쪽에 잇는 뎐신대 뒤로부터 세 사람의 자객이 번개 가치 달녀들어 바로 리 총리에 등을 칼노 찌르고 이여서 그를 막으려 덤비는 차부 박원문(朴元文)을 한칼에 뭇지른 후 또다시 칼을 맛고 눈에 정신 업시 꺽구러저 잇는 리 총리에게로 달려드러 허리를 거듭 두 번이나 깁히 찔너 희고 흰 눈벌판에 불근 고랑을 이루어 놋튼 그들은 과연 누구이엿든가?

방금 西門鐵窓(서문철창)의 컴컴한 구석에서 미결수라는 간판을 내여 달고 장차 자긔의 압헤 벌어질 운명의 여하를 꿈꾸고 잇는 리동수(李東秀)의 일파엿다. 그는 쓸쓸한 감방 안에서 고독에 몰니는 가삼을 끄러안고 하로에도 몃 번이나 묵은 녯긔억을 추상하고 잇슬 것이다. 서리ㅅ발 가치 매서운 비수(匕首) 끗헤 댓줄가치 품기여 나오난 선지피의 모양! 몰녀드는 경관에게 검거를 당하는 동지들의 얼골! 그 틈을 빠저나와 산이나 물이나 안 갈 곳 업시 별별고초를 맛보아가며 법망을 버서나 보랴고 애써 헤매이든 자긔의 과거! 모다 『타노라마』와도 가치 눈압헤 어른어른할 것이라. 그러면 그 동지 열두 사람 중 첫재로 리재명(李在明)을 絞首臺上(교수대상)에 영원히 리별하고 김병록(金丙錄) 외 열 사람을 차례로 생지옥에 작별하고 나서 십오년 징역의 결설판결(명치 사십삼년 오월 십팔일 당시 이십륙세)을 바든 채로 십륙년이나 지난 오날날 와서 마주막으로 쓰린 고통을 늣기게 된 그의 과정 력사는 과연 엇더하얏던가?

審理無據(심리무거)
◇증인을 어데가 차저?
◇심문은 새로 할밧게!
쩔쩔매는 법뎡
◇이번 리동수(李東秀)가 톄포되자 경성디방법원에서는 뜻도 하자 안턴 십륙년 전 옛 긔록을 다시 뒤집게 되매 적지 안케 곤란을 늣기는 것은 첫재 증인 소집인대 당시 공모자로 복역을 맛치고 나온 사람도 잇기는 잇스나 방금 어대가 잇는지 종적이 묘연하고 설사 긔록 중에 씨여잇는 주소도 잇다 하나 벌서 녯일이라 동명도 전부 변경되다십히 되고 통호가 번디로 변하얏슬 뿐만 아니라 그후 몃번이나 이사를 가고 이사를 가서 방금 어느 곳에 가 사는지 좀톄 알지 못하게 된 것이오. 둘재로는 그(리동수)가 당장에서 도주하야 바렷슴으로 그의 심문조서라고는 긔록 중에서 전연 빠저바린 까닭게 지금 와서는 전부를 새로 발생한 사실이나 맛창가지로 취급하는 수박게 업다더라.
대한제국 융희 3년 12월 22일 오전 11시반!
비수가 한 번 지나가자 눈 위에 붉은 피 (1)
◇명동성당에서 열린 벨기에 황제 추도식을 마친 뒤에
◇인력거꾼과 함께 이 총리를 찌르고 도주한 12명 중의 한 사람
◇목숨을 건진 이완용과 미결수 이동수

과거 대한제국 총리대신으로 현재 조선귀족인 이완용 후작을 찔러 죽이려고 하던 옛날 불평객 중에서 경찰의 체포망을 벗어나 16년 동안이나 세상과 등지고 살아오던 이동수의 재판은 머지 않아 경성지방법원에서 열리게 되었다. 원래 사건이 사건이기 때문에 이동수가 평양에서 붙잡혔다는 소문이 나던 때로부터 일반인들은 옛날의 사건을 회고하는 동시에 지금 서대문형무소 철창 안에 갇혀 있는 이동수의 기구한 운명을 감회 깊게 기다리고 있다. 당시의 전후 사실은 재판이 진행됨에 따라 세상에 알려지겠지만 본사는 일반인의 기억을 새롭게 하기 위하여 재판일을 앞두고 대략을 기록해 보도한다.

◇···지금으로부터 16년 전 옛날 즉 대한제국 융희 3년 12월 22일 오전 11시 30분! 땅 위에 두텁게 쌓인 눈은 아침 햇발을 받아 한층 더 맑고 한층 더 쌀쌀스럽게 반사하고 매운바람은 살을 엘 듯이 온몸을 휩싸고 기어들었다. 얼어붙은 아침 공기를 헤치고 간간히 울리는 교당의 종소리는 장차 일어날 참극을 예고하는 것같이도 들리던 바로 그때였다. 벨기에 황제의 추도식을 마치고 하나씩 둘씩 명동성당 문을 나서는 고관의 무리 – 당시총리대신으로 위정자의 우두머리가 되어서 정권을 좌우하던 이완용 후작도 역시 그 뒤를 이어 마찬가지로 문 앞까지 걸어 나왔다.

그리하여 바야흐로 한 발을 인력거 위에 올려놓으랴 말랴 하는 순간에 갑자기 길 북쪽에 있는 전신주 뒤편에서 세 사람의 자객이 번개같이 달려들어 바로 이 총리 등을 칼로 찌르고 이어서 그를 막으려 덤비는 인력거꾼 박원문을 한칼에 쓰러뜨린 뒤 또다시 칼을 맞아 눈밭에 정신없이 거꾸러져 있는 이 총리에게 달려들어 허리를 거듭 두 차례나 깊이 찔러 희고 흰 눈밭에 붉은 고랑을 이루어 놓은 그들은 과연 누구였던가?

방금 서대문형무소 철창의 컴컴한 구석에서 미결수라는 표식을 붙이고 장차 자신의 앞에 벌어질 운명이 어떻게 될지를 꿈꾸고 있는 이동수의 일행이었다. 그는 쓸쓸한 감방 안에서 고독에 몰리는 가슴을 끌어안고 하루에도 몇 번이나 옛 기억을 떠올리고 있을 것이다. 서릿발같이 매서운 비수 끝에 대나무 줄기같이 뿜어 나오던 선지피의 모양! 몰려드는 경찰에게 검거되던 동지들의 얼굴! 그 틈을 빠져나와 산이나 물이나 안 갈 곳 없이 별별 고초를 맛보아가며 법망을 벗어나 보려고 애써 헤매던 자신의 과거! 모두 파노라마와도 같이 눈 앞에 어른어른 할 것이다.

그러면 그 동지 12명 중 첫째로 이재명을 교수대 위에서 영원히 이별하고 김병록 외 10명을 차례로 생지옥에 작별하고 나서 15년 징역의 궐석판결을 받은 때가 1910년 5월 18일 당시 26세. 판결을 받은 채로 16년이나 지난 오늘에 와서 마지막으로 쓰라린 고통을 느끼게 된 그의 지난 역사는 과연 어떠하였던가?

근거 없는 심리
◇증인을 어디서 찾나?
◇심문은 새로 할 수밖에!
쩔쩔매는 법정

◇이번에 이동수가 체포되자 경성지방법원에서는 뜻하지 않던 16년 전 옛 기록을 다시 뒤지게 되면서 적지 않게 곤란을 느끼는 점은 첫째 증인 소집이다. 당시 공모자로 복역을 마치고 나온 사람도 있기는 있지만 지금 어디에 있는지 종적이 묘연하고 설사 기록 중에 적혀 있는 주소가 있다고 해도 벌써 예전 일이어서 동네 이름도 모두 바뀌다시피 했고 통호 수가 번지로 변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후 몇 번이나 이사를 가고 이사를 가서 현재 어디에 가서 사는지 좀처럼 알지 못하게 된 것이다. 둘째로는 그(이동수)가 현장에서 도주하여 버렸으므로 그의 심문조서는 기록 중에서 모두 빠져버렸기 때문에 지금 와서는 전부를 새로 발생한 사실이나 마찬가지로 취급하는 수밖에 없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