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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미처 보지 못한 반쪽을 느끼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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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3호 17면

탁효연의 2007년 작품.
선우영의 ‘금강산 구룡폭포(2006)’ 앞에 선 프란스 브루젠 스프링타임 대표.

북한 화가 70명이 그린 작품 150점이 한국을 찾았다. 경기 일산 킨텍스 제 2전시장 6홀을 빼곡하게 채운 ‘유럽에서 들려주는 북한 미술전’(1월 29일~3월 6일)이다. 정치색을 뺀 순수 북한 미술 작품이 국내에서 관람객을 맞이하는 건 이번이 처음이다.

북한 현대 미술 작품 2500점 사모은 프란스 브루젠

이 색다른 전시를 향한 시선은 기대 반 의심 반이다. 과연 북한 미술에서는 어떤 매력이 뿜어져 나올 것인가에 대한 호기심이 일다가도, 과연 그들이 주체 사상에서 독립된 예술을 하는 것이 가능한가 하는 의구심을 떨칠 수 없기 때문이다. 그 때문일까. 전시장에 흐르는 분위기 또한 기묘했다. 화폭에 그려진 얼굴 생김새는 나와 닮았지만 우리라 부르기엔 뭔가 이질감이 든다. 장엄하게 펼쳐진 금강산 역시 익숙한 듯 어색하다. 낯익음과 낯섦이 미묘한 긴장감을 형성한다.

이번 전시를 주최한 네덜란드 예술재단 ‘스프링타임’의 프란스 브루젠(63) 대표를 2일 전시장에서 만났다.

젊은 감각이 돋보이는 공정권(2006ㆍ위)과 김영철(2007ㆍ아래)의 작품.

당초 전시는 ‘개성 콜렉션’이란 이름의 국제 순회 미술전 형식으로 기획됐다. 2008년 시작돼 리투아니아와 라트비아 국립미술관에서 총 5만여 명의 유럽 관객을 만났다. 이번 한국전은 세 번째다. 그동안은 정부의 허가를 받지 못했다. 개성에서 가장 가까운 전시장에 둥지를 틀기까지 7년이란 시간이 흐른 것이다. “반쪽의 예술이 마침내 다른 반쪽을 찾아 온 것입니다. 한국은 이 전시를 열기에 가장 적합한 장소이지요.”

브루젠은 2005년부터 2010년까지 7차례 북한을 방문했다. 처음엔 호기심 때문에 북한을 찾았다고 했다. “북한에 가기 전까지는 한 번도 북한 미술을 본 적이 없었어요. 2400만 명이 살고 있는 곳이라면 반드시 예술이 존재할 텐데 말이죠. 매우 비밀스럽고 폐쇄적인 곳이지만 그래서 더 큰 매력을 느꼈습니다.”

인민예술가 정창모가 그린 겨울 강의 모습(2002).

“북한 예술의 수준은 기대 이상”
그는 기대 이상의 수준에 깜짝 놀랐다고 했다. 이후 스튜디오와 아틀리에를 돌며 지금까지 2500여 점을 사모았다. 부인 위르기타 브루젠(48)은 “처음에는 작품을 구매해도 되는지, 과연 해외 배송이 가능한지조차 몰랐지만 다행히 검열이나 제한 같은 건 없었다”고 회고했다.

가장 먼저 산 그림은 선우영(1946~2009)의 작품이었다. 금강산 구룡폭포 등 빼어난 절경을 담아내는 독창성에 마음을 빼앗겼다. 선우영의 ‘산수병풍’은 2013년 중국에서 22만위안(약 4000만원)에 팔려 경매 최고가를 기록하는 등 세계 시장에서도 사랑받고 있다. 브루젠은 “나만 그의 작품을 좋아한 게 아니란 증거”라며 “큐레이터와 아트 딜러로 오랫동안 일해 왔기 때문에 훌륭한 작품을 보는 눈이 있다고 자부한다”고 말했다.

정창모(1931~2010)와 김성희(76)의 작품 역시 빼어나다. 정 작가는 북한 미술의 특징인 밑그림이 없는 몰골법을 현대적으로 발전시켰다. 수묵으로 수놓은 화폭은 담담하면서도 먹먹한 감성을 뿜어낸다. 김 작가는 ‘봉산탈춤’ 등 민족 고유의 혼을 담아낸 작품으로 2006년 베이징 국제미술전에서 대상을 수상했다. 이들은 모두 인민예술가로 북한 내에서도 국보급 대우를 받고 있다. 북한에서는 인민예술가ㆍ공훈예술가ㆍ1급ㆍ2급ㆍ3급 등 화가에도 등급을 매겨 관리하고 있다.

브루젠은 “이미 유명세를 얻은 화가 외에 공정권ㆍ김영철ㆍ탁효연 등 비교적 젊은 작가들도 주목할 만하다”고 치켜세웠다. 실제로 이들은 과거 선배들과 달리 자연이 아닌 실제 삶이 진행되고 있는 공간에 집중한다. 안개가 낀 듯 뿌연 모습이지만 평양 모처의 지하철역을 엿볼 수 있고, 한복과 서양 정장을 입은 여성들이 한데 어우러져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담아낸다.

프란스-위르기타 브루젠 부부.

“외부와 차단된 세계의 예술은 매력적”
브루젠의 이런 행보를 곱지 않게 바라보는 시선도 있다. 90년대 소련 붕괴 직전 러시아를 방문해 미술 작품을 사들인 이력과 서양 콜렉터의 취향을 저격한 작품만 돈주머니를 풀어 골라온다는 비난이다. 일부 외신은 재산을 손가방에 넣고 미발달 지역을 떠도는 ‘카펫배거(carpetbagger)’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미국 남북 전쟁 직후 출세를 꿈꾸며 남부로 간 북부 사람들처럼 이익을 챙길 목적으로 없는 시장을 만들어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그는 “외부와 차단된 세계의 예술은 매력적일 수 밖에 없다”며 “당시 미국ㆍ일본 등 전세계의 딜러들이 꽃을 찾는 벌처럼 날아들었다”며 반박했다. 또 사업가인 동업자의 존재는 인정했지만 상업적이라는 지적에는 선을 그었다. “모든 아티스트는 원하는 걸 그릴 권리가 있고, 작품을 판매할 자유가 있다. 나는 그에 따른 적절한 대가를 지불했을 뿐이다. 아무도 좋아하지 않는 그림을 그리고 싶은 이가 어딨겠느냐”는 것이 그의 항변이다.

그는 이번 전시를 와인 테이스팅에 비유했다. 테이블에 10병의 와인이 놓여있다면, 그 중에는 최상급도 존재하지만 다소 못 미치는 와인 역시 섞여있을 거란 얘기다. 모든 종류의 작품을 조금씩 맛봤으면 하는 바람으로 꾸민 탓에 전시는 다소 산만하다. 특정 테마나 부가 설명 없이 오로지 감에만 기대야 하는 것도 애로사항이다. 하지만 시도할 가치는 충분하다. 어디서도 본 적 없는 맛을 기대하고 있다면 말이다.

글 민경원 기자 storymin@joongang.co.kr, 사진 전호성 객원기자ㆍ스프링타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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