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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최고의 미식축구 선수가 수화를 배우기 시작한 감동실화 : 셀레브레이션① [올어바웃스포츠]

류영욱 기자
입력 : 
2023-12-30 08: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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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 월드컵> 역시 박지성
2010년 일본 사이타마 스타디움에서 열린 한일전에서 일본 응원단을 침묵시킨 ‘캡틴’ 박지성 선수의 ‘산책 셀레브레이션’ <출처=연합뉴스>

2010년 5월 한국 남자축구 국가대표팀은 남아공 월드컵을 앞두고 일본 사이타마 스타디움에서 숙적 일본과의 대결을 갖습니다. 6만명의 홈 팬들이 가득 찬 경기장의 분위기는 경기 시작 전부터 달아올랐고, 일본 응원단은 경기 전 한국팀 주장 박지성 선수의 이름이 호명되자 큰 소리로 야유를 퍼부었습니다.

고조된 사이타마 스타디움의 분위기를 도서관처럼 조용히 만드는데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습니다. 절정의 기량을 뽐내고 있었던 박지성 선수는 전반 5분만에 선제골을 기록하게 됩니다.

일본의 ‘멘붕’은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평소 골 셀레브레이션을 과하게 하지 않는 박지성 선수는 골대 뒤편의 일본 응원석을 노려본 채 산책하듯 여유롭게 달리며 야유에 대해 통쾌하게 화답했습니다.

경기 결과는 한국의 2대1 승리였지만, 승리보다 오래 남은 것은 소위 ‘사이타마 산책’으로 불리는 이 셀레브레이션이었습니다. 씻지 못할 굴욕을 얻게 된 일본은 경기후 10년 넘게 흐른 지난 2021년에도 한 언론을 통해 “상당히 건방진 셀레브레이션이었다”고 회고하기도 했습니다. 이때부터 한국 선수들이 사이타마 스타디움에서 골을 넣으면 ‘산책 셀레브레이션’을 하는 일종의 불문율도 생겼습니다.

득점이나 승리를 자축하는 ‘셀레브레이션’은 스포츠에서 맛볼 수 있는 자잘한 즐거움중 하나입니다. 축구선수 크리스티아누 호날두의 ‘시우(Siu)’ 셀레브레이션 등은 선수를 상징하는 트레이드마크가 되기도 합니다. 그런데 어떤 종목에선 셀레브레이션을 하면 보복을 받는게 100년간 불문율로 남아있었습니다. 또 다른 종목은 리그가 앞장서서 셀레브레이션을 막고 있지요. 얼마나 과도한 자축파티였는지, 조금 알아봤습니다.

100년 넘은 ‘불문율’을 깬 배트플립이 야구를 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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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MLB 플레이오프에서 호세 바티스타(토론토 블루제이스)가 선보인 역대 최고의 ‘배트플립’ <출처=MLB 유튜브>

야구경기에서 야무진 스윙과 파열음에 이어 공이 넓디넓은 외야를 가로질러 관중석으로 꽂힐 때의 쾌감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특히 힘과 기술 모두 세계 최고인 선수들이 모인 메이저리그(MLB) 선수들이 터뜨리는 홈런은 막힌 가슴까지 뚫어주는 호쾌함이 있죠. 그러나 적어도 10여년 전까지만 해도 홈런을 뽑아낸 선수들이 보여주는 셀레브레이션은 극히 제한적이었습니다. 홈런을 친 후 배트를 바닥에 내동댕이치는 ‘배트 플립(Bat flip)’ 또한 밋밋함 그 자체였죠. 100년이 넘는 야구 역사에서 이같은 배트 플립 셀레브레이션은 ‘금기’나 다름없었습니다. 홈런 이후 타자는 묵묵히 베이스를 돌고 홈플레이트에서 가벼운 자축은 허용됐지만, 배트 플립과 같은 과도한 셀레브레이션은 선수들간의 ‘불문율’로 금지됐습니다. 이를 어길시엔 다음 타석에서 어김없이 몸쪽으로 위협구가 오기 마련이었죠. 배트 플립은 길고 긴 MLB 역사동안 투수와 상대팀 그리고 야구 자체에 대한 모욕으로 여겨졌습니다.

스포츠 관람의 묘미는 선수들이 보여주는 에너지와 감정의 분출에서 나옵니다. 그런데 세계 최고의 리그인 MLB가 신사다움과 예의를 지킨다는 명분 아래 이를 막아둔 것이죠. 상황이 이러다보니 2010년대 초반 미국에서 야구의 인기는 점점 식어가고 있었습니다. 2009년 미국 매체 블리처리포트는 ‘메이저리그는 죽었다’는 자극적인 헤드라인을 내걸었고, 워싱턴포스트는 야구에 대해 “블록버스터 비디오처럼 무의미해질 운명에 처해 있다”고 걱정하기도 했습니다. 월드시리즈의 시청률도 예전같지 않았죠.

이가운데 호세 바티스타라는 선수가 야구를 구합니다. 2015년 10월 15일 토론토 블루제이스의 외야수인 바티스타는 텍사스 레인저스와의 플레이오프(ALDS 5차전) 경기 7회말에 3점짜리 초대형 홈런을 때려냅니다. 5전 3선승제 아래 팽팽하던 2:2 경기의 결과를 마무리 짓는 결승타였지요. 승리를 직감한 바티스타는 잠시 불문율을 잊습니다. 그는 비장한 표정으로 배트를 하늘 높이 던져버렸고, 홈팬의 함성은 두 배가 돼 돌아옵니다. MLB 역사상 최고의 배트 플립으로 꼽히는 명장면이 탄생한 순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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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가를 치르고 있는 호세 바티스타(파란옷). 그는 전년도 텍사스 레인저스와 플레이오프에서 시전한 배트플립을 이유로 이듬해 레인저스와 다시 만난 경기 내내 상대선수들과 충돌했습니다. <출처=MLB 유튜브>

불문율을 어긴 대가는 치러야 했습니다. 이듬해 두 팀이 다시 맞붙을 때까지 텍사스 레인저스는 배트플립을 잊지 않고 있었고, 바티스타는 경기 도중 상대팀 내야수와 난투극을 벌이다가 주먹으로 턱을 맞고 잠시 ‘그로기’ 상태에 빠지며 체면을 구기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 배트플립은 MLB가 살아남을 길을 제시했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타임지는 ‘열광적인 기쁨의 작품’이라고 표현했고, 워싱턴포스트는 ‘향후 모든 배트플립이 고개를 숙일 작품’이라고 주장했습니다. 뉴욕타임스는 배트플립 논쟁에 대해 “야구에서 새로운 영역을 개척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정적인 분위기의 야구가 젊은 세대를 끌어들일 수 있는 방편이 여기에 있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준 것이지요.

2015년 MLB 사무국장으로 취임한 롭 맨프레드는 배트플립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기로 합니다. 그는 2018년 ESPN과 인터뷰에서 “선수들이 현장에서 감정을 표현하는 것은 정말 중요하다”며 “나는 배트플립의 팬이며 이것이 야구의 큰 자산중 하나라고 생각한다”고 말했습니다.

실제 바티스타의 ‘일탈’ 이후 점차 홈런의 기쁨을 표현하는 선수들이 많아졌고, 이제 MLB에서 배트 플립은 더이상 위협구를 감수해야 할 위험천만한 셀레브레이션이 아니게 됐습니다.

동방의 조용한 나라에서 흩날리는 ‘빠따’들...전준우가 ‘월드스타’가 된 이유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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롯데 자이언츠 정훈 선수의 ‘빠던’ 캐리커쳐 <출처=ESPN>

야구의 본고장은 미국이지만, 적어도 배트플립 문제에서 만큼은 한국프로야구(KBO)가 최첨단에 있습니다. KBO는 리그 초창기부터 배트플립, 아니 ‘빠던(빠따던지기)’이 적극 장려됐습니다.

방망이를 거꾸로 잡아도 3할은 친다는 양준혁 선수의 만세 빠던이나 손목 스냅을 극단적으로 활용해 홈런을 친 방망이를 풍차처럼 날려버렸던 김재현 선수의 빠던 등 KBO 선수들의 개성넘치는 빠던은 야구팬들의 주요한 즐길거리중 하나입니다.

오죽하면 본토에서도 한국의 빠던에 대한 관심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2016년 미국 ESPN은 특집기사를 통해 빠던을 집중 조명했습니다. 머릿글에서 “MLB에서 배트플립은 오랫동안 무례함의 상징이었지만 한국에서는 예술”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예의를 중시하는 동양에서 빠던이 무리없이 정착한 것을 보고 놀라움을 표한 것이지요. 코로나팬데믹으로 MLB가 늦게 개막한 2020년엔 미국 야구팬들이 야구를 보기 위해 KBO에 관심이 쏠리는 일이 있었습니다. 당시에도 KBO를 소개하는 현지매체의 기사들에서도 언제나 빠던을 찾아볼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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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중과 중계진은 물론 동료선수들마저 속여버린 롯데 자이언츠 전준우 선수의 ‘빠던’과 자축 포즈. 공은 워닝트랙에서 잡혔습니다. <출처=온라인 커뮤니티>

MLB 진출을 꿈꾸는 KBO 선수들은 이 빠던을 교정하기도 합니다. 한국에선 뒤로 드러눕다시피 한 자세에서 기가막힌 빠던을 보여줬던 박병호 선수는 MLB 미네소타 트윈스로 진출한 뒤 배트플립을 하지 않기 시작했씁니다. 황재균 선수는 ESPN과 인터뷰에서 “외국선수들이 나에게 ‘MLB에서 그런짓을 하면 머리를 얻어맞을 것’이라고 경고했다”고 말하며 미국 진출을 꾀하면서 배트를 다소곳이 내려놓기 시작했다고 말했습니다.

참고로 KBO 선수의 모든 빠던이 성공적이진 않습니다. 2013년 롯데 자이언츠의 전준우 선수는 NC 다이노스와 경기중 좌중간을 가르는 호쾌한 타구를 만들어 낸 뒤 빠던을 실시합니다. 거기에 더해 자이언츠팀 라커룸을 통해 ‘봤지?’라는 의미로 손을 뻗는 셀레브레이션까지 더했지만, 공은 외야담장 바로 앞에서 잡혀 아웃되고 맙니다. 이 실패한 빠던은 MLB 공식 홈페이지 등 미국 주요 매체에서 앞다퉈 다루며 전준우 선수를 ‘월드스타’로 만드는데 일조합니다.

“스포츠맨십이 아닌 통제를 위한 것”...NFL이 ‘노잼리그’라고 비판받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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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메라맨의 휴대전화를 빌려 셀레브레이션을 하는 스타 와이드리시버 타이릭 힐(마이애미 돌핀스). 카메라맨은 더 이상 NFL 구장에서 일을 할 수 없게 됐습니다. <출처=ABC>

MLB에선 오랜기간동안 선수들 사이의 불문율로서 배트 플립과 같은 셀레브레이션이 설 자리가 없었던 반면, 명실상부 미국 최고의 스포츠리그인 미국프로풋볼(NFL)은 반대로 리그가 선수들의 셀레브레이션을 막고 있습니다.

NFL 규정에 따르면 “스포츠맨십, 깨끗한 경쟁, 어린 선수들에 대한 좋은 본보기를 위해” 공격적이거나 경기를 지연하고 상대방을 겨냥한 셀레브레이션은 처벌의 대상입니다. 물론 이같은 규정이 생긴 이유는 있습니다. 2003년 뉴올리언스 세인츠의 와이드리시버 조 혼은 경기전 골대 안에 휴대전화를 숨겨두고서는 경기에서 터치다운에 성공한 뒤 이를 꺼내 전화하는 셀레브레이션을 해 비신사적이라는 비난을 받았습니다. 이밖에 선수들의 창의적이지만 다소 도발적인 셀레브레이션이 경기를 과열시킨다는 지적도 있었지요. 이에 NFL은 매 경기, 매 공격기회마다 몸을 부딪히는 종목의 특성상 불필요한 갈등을 유발하는 비신사적인 셀레브레이션을 막겠다는 취지로 2006년 이같은 규정을 만들어냈습니다.

그러나 과도한 제한 규정이 경기의 재미를 반감시킨다는 비판도 만만치 않습니다. 가장 최근엔 마이애미 돌핀스의 스타 와이드리시버인 타이릭 힐의 셀레브레이션을 두고도 논란이 있었습니다. 힐은 터치다운에 성공한 뒤 경기장 인근에 있던 카메라맨에게 다가가 휴대전화를 빌렸습니다. 그리고 휴대전화 카메라를 켜고 쥔채 공중돌기를 하는 셀레브레이션을 벌였죠.

문제는 NFL 사무국이 경기 후 휴대전화를 힐에게 빌려준 카메라맨에게 영구 정직 징계라는 철퇴를 내렸다는 것입니다. 주요 언론들은 이 문제에 대해 앞다퉈 다뤘고, 힐은 이 카메라맨의 올해 남은 연봉을 대신 지급하겠다고 밝히기도 합니다. 이와중에 NFL 사무국은 힐이 스스로 촬영한 셀레브레이션 장면은 공식 유튜브 채널에서 숏츠 등으로 게재해 쏠쏠하게 재미를 봐 빈축을 사기도 했습니다.

미국에서도 문제제기는 꾸준하게 이뤄지고 있습니다. 스포츠일러스트레이티드는 “NFL의 터치다운 셀레브레이션 관련 규칙은 매우 어리석은 일”이라고 개정을 촉구하는 칼럼을 실은 바 있습니다. 워싱턴포스트는 셀레브레이션 규정에 대해 “스포츠맨십을 지키기 위한 것인 아닌 통제를 위한 것”이라고 비판하기도 했습니다. 이어 규정을 보면 “소년 문학의 감성과 일관성이 뒤섞인 것을 발견할 수 있다”고 촌철살인을 날렸습니다. 과도하게 ‘안무가 섞여 있거나(choreographed)’ 오래 끄는 셀레브레이션을 제한한다는 규정이 부정확하고 해석의 여지가 다분하다는 지적이지요. 실제로 NFL의 규정에 따르면 터치다운을 성공시킨 뒤 공을 빠르게 회전시키는 셀레브레이션은 가능하지만, 공을 소품으로 이용하는 것은 금지돼 있습니다.

일각에선 이를 비판하며 NFL이 ‘No Fun League(노잼리그)’의 약자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리그의 확장에 열중하고 있는 NFL이 MLB처럼 젊은 층 포섭에 실패할수 있다는 비판도 나오고 있는 실정입니다.

걸핏하면 징계받았던 그 선수, 이제 말대신 손으로 ‘트래시토킹’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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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FL 와이드리시버 DK 멧캘프(시애틀 시호크스)의 수화 셀레브레이션중 하나. ‘Stand on business’는 ‘맡은 바를 잘해나가고 있다’정도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출처=Gettyimage>

노잼리그의 규정을 우회적으로 비판하는 창의적인 셀레브레이션도 있습니다. 시애틀 시호크스의 와이드리시버 DK 멧캘프는 초월적인 운동신경과 함께 셀레브레이션 규정 위반으로 수많은 제재를 받은 것으로 유명합니다.

그러던 중 맷켈프는 지난 11월 LA 램즈와 경기에서 그를 마크하던 수비수를 제치고 터치다운 패스를 잡아냅니다. 그리고 카메라를 향해 무엇인가 손동작을 보여주죠. 바로 수화였습니다. 그는 수화로 “44번은 내 아들이야”라고 말합니다. 44번은 멧캘프 방어에 실패한 수비수의 등번호였습니다. 상대방이 자신을 막아설 수 없다는 걸 입이 아닌 손으로 말한 것이죠. 또 다른 경기에서도 멋진 플레이를 성공한 멧캘프는 ‘Stand on business’를 뜻하는 수화를 했습니다. 의역하자면 “난 내 일 잘하고 있어” 정도로 해석되는 문구입니다.

멧캘프는 미시시피 대학 시절 수화를 배운적 있지만 사용한지 오래 돼 잊고 있었습니다. 그런 그가 올해부터 순전히 셀레브레이션을 위해 일주일에 한 번씩 수화수업을 듣기 시작했습니다. 이해할 수 없는 과도한 규정을 유지하는 NFL에 대한 문자 그대로 ‘무언의 항의’인 셈이죠. 그는 농담반 진담반으로 “수화를 하용하다보니 심판에게 징계를 받게 되는 트래시토킹을 멈추게 됐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경기에서 승리하거나 득점하는 경우 선수들이 취하는 자축행동에 대해 한국은 통상 ‘세리머니’라고 칭하지만 이 글에서는 ‘셀레브레이션’으로 갈음했습니다.

※셀레브레이션과 관련된 이야기는 다음화에도 계속됩니다.

<참고문헌과 외신>
◎https://www.espn.com/espn/feature/story/_/id/17668845/korean-bat-flip
◎https://jaysjournal.com/posts/how-jose-bautista-blue-jays-bat-flip-saved-baseball
◎https://www.si.com/mlb/2018/07/17/rob-manfred-pro-bat-flips-players-showing-emotion
◎https://www.king5.com/article/sports/nfl/seahawks/metcalf-relearns-american-sign-language-to-trash-talk-bring-awareness-to-unseen-community/281-9a702716-b675-4f34-9719-f1971b5424c0
◎https://www.washingtonpost.com/sports/redskins/nfls-celebration-penalties-arent-about-sportsmanship-theyre-about-control/2016/10/18/5b89a436-9545-11e6-bc79-af1cd3d2984b_story.html

≪[올어바웃스포츠]는 경기 분석을 제외한 스포츠의 모든 것을 다룹니다. 스포츠가 건강증진을 위한 도구에서 누구나 즐기는 유흥으로 탈바꿈하게 된 역사와 경기 곳곳에 스며들어 있는 문화, 수백억원의 몸값과 수천억원의 광고비가 만들어내는 산업에 자리잡은 흥미로운 내러티브를 알게 된다면, 당신이 보는 그 경기의 해상도가 달라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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