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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 볏단을 쌓아 놓았다. 우리 동네는 꽁지는 꽁지끼리 이삭은 이삭끼리 열 다발씩 가지런히 놓았는데 장성엔 네 방향으로 더 많은 단을 쌓았다. 밤에도 일을 했던 그 때는 왜 그리 일이 많았을까.
ⓒ 김규환
벼를 베어 놓고 이틀이 지났다. 아침저녁으로 기온차가 심해 논두렁과 베어둔 벼 위에도 서리가 하얗게 깔렸다. 어머니와 셋째형, 내가 아침부터 서두른 건 논바닥에서 바로 말리기 위해 한 번은 뒤집어줘야 했기 때문. 그도 중간에 하등 도움이 되지 않은 가을비라도 내리는 날엔 두 번 헛고생을 했다.

그 시절 빠트리지 않고 뒤집어준 까닭이 있다. 털어서 말리기보다 이삭 째로 말려야 일이 줄어들기도 하거니와 볏단을 지고 오려면 생것보다는 훨씬 가벼워 옮기기도 편하기 때문이다. 거의 동시에 탈곡을 하므로 멍석을 빌릴 수도 없는 노릇이기도 하다.

발걸음과 손놀림이 빠른 어린 우리가 실력을 발휘할 절호의 기회였다. 논에 다다르자 언덕 앞쪽에 한 줄씩 잡고 섰다. 한 깍지를 냉큼 잡고 뒤집고 나서 발을 움직였다. 내려놓자마자 다음 무더기를 잡고 뒤집는다. 눈 깜짝할 사이 몇 걸음이나 옮겨갔다.

손이 시렸지만 나란히 놓인 긴 줄을 다 마칠 때까지 멈추지 않았다. 호호 손을 불어주고 호주머니에 잠시 넣었다가 다음 줄로 옮아갔다. 맨 처음에 오른쪽으로만 갔다가 두 번째는 왼쪽으로만 온다.

"성, 우리 누가 먼처 오는가 내기할까?"
"콧물 없어야."
"아녀, 내가 이긴 당께. 한번 해보더라고."

아까보다 걸음과 손놀림은 더 빨랐다. 캥거루가 톡톡 뛰다시피 건너뛰고 뒤집기를 반복했다. 그렇다고 이삭을 헝클어놓지는 않았다. X자로 놓인 벼를 움켜쥐자마자 내려놓으면 기분 좋게 벼이삭끼리 찰랑찰랑 이라기보다 "착" "착"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고꾸라질 듯 말 듯 엎드렸다 일어선다. 찬찬히 하라는 어머니 말씀도 아랑곳하지 않고 내기 없는 시합에 들어간 것이다. 어머니는 60여m 온 줄에서 절반도 오지 않았고 나와 형은 거의 한 줄을 끝낼 참이다. 물꼬 앞에 이르자 숨이 턱턱 막혔다.

막판까지 지푸라기가 밟히는지 빼먹지 않고 왔다. 겨를 없이 달려왔지만 형을 따라잡지 못하고 다섯 깍지를 남겨놓고 벼 위에 푹 쓰러지고 말았다.

"아따 그런 것이 어딨어?"
"뭐?"
"내가 본께 대충 뒤집다 말고 가는구만. 이판엔 내 신발이 벗겨져부렀응께 다시혀."
"헛소리하고 자빠졌네. 언넝 일어나서 해라. 그려야 다음 판에 또 하지. 할텨?"
"해봐. 이번엔 내기로 하자고. 쇠죽 쑤기!"

갑작스레 한쪽으로만 움직인 탓에 허벅지에 무리가 갔는지 왼쪽이 결리기 시작했다. 느림보 어머니가 뒤집어 준 줄은 가지런하다. 두 형제는 다시 진짜 내기를 했다. 극복할 수 없는 두 살 터울이 어렸을 땐 그렇게 큰 줄 몰랐다. 결국 이번에도 지고 말았다.

세 배미(배미는 다랑이 수를 말하고 한 마지기는 200평 단위) 세 마지기를 마치는 데는 시간 반밖에 걸리지 않았다. 이제 소쟁이 논으로 가서 마저 뒤집어 줘야 한다. 하루를 꼬박 벤 순서대로 벼를 뒤집고 내일부터는 나락을 묶어야 한다.

▲ 매년 그곳에 다녀와야 살맛이 나고 밥맛이 돈다. 작년에 벼를 베고 있는 내가 찍혔다.
ⓒ 김규환
키 작은 신품종 통일벼가 보급되기 전까지는 길이가 길어 따로 볏단을 묶기 위한 줄을 만들지 않았다. 아무 것도 없이 논으로 가서 벼를 먼저 한줌 들어 이삭끼리 꼬이게 가로대고 대여섯 깍지를 올려 흐트러져 빠지기 않게 꾹 누른 채 뿌리 부분을 아래쪽으로 향하여 힘껏 보듬어 안아 뒤집고 무릎을 눌러 죄주면 다발이 만들어졌다.

어린 나도 따라해 보았지만 줄을 홀치기가 쉽지 않아 더디기만 했던지라 어머니와 아버지가 열 다발을 할 때 나는 한 다발도 하기 힘들었다. 이내 포기하고 묶어둔 다발을 열 다발씩 가지런히 올려놓았다.

"지기아무지 많이 날 것 같소?"
"시원치 않어. 나락 묶어 보면 모른가."
"하기야 작년 같지는 않으요."
"숫제 다발 수가 나와야 말이제. 지난 달에 태풍 몰려올 때 벼멸구가 쓸려 와서 나락 줄기 힘아리가 하나도 없잖어. 푸석푸석 하당께."
"글게라우."

내가 생각해도 예년 같지가 않았다. 벼를 베어 보면 산다랑지와 벌레가 먹지 않은 논은 낫을 시퍼렇게 갈아가서 젖 먹던 힘까지 줘가며 당겨도 쌩쌩하고 뻣뻣하게 살아 있어 잘 베어지지 않는다. 알갱이도 황금이어서 탱글탱글 하며 한 손에 가득 잡아놓는 양이 절반밖에 되지 않았다.

벼가 다 익어도 쓰러지지 않고 파릇파릇한 줄기로 남아 있던 벼를 베면 농사짓는 재미가 쏠쏠했지만 며칠 전 이 논에서 일을 할 때는 아래 겉잎이 말라있었고 죽정이가 적지 않게 보였질 않나.

"글도 큰아(큰아들)랑 작은아(작은아들)가 없는디 이거 다 어쩐다요?"
"묶기나 혀. 다 수가 있제."

어머니는 아들 둘에 큰딸까지 서울로 올려 보내고 어린 자식들과 곳곳에 산더미처럼 쌓인 볏단을 보며 한숨 섞인 걱정을 하셨다. 세상사 수완으로 먹고 사는 방법을 터득한 아버지는 별 걱정이 없었나 보다.

어머니가 일찌감치 나서고 아버지를 따라 우리도 양껏 지고 나섰다. 지게 목발이 길어 언덕이 있는 길에선 땅에 살짝살짝 스치며 언제 넘어질지 몰라 무거운 짐에 축 처졌지만 어깨를 들어올려 총총 걸으니 위험한 난간 길은 간신히 통과했다. 중간에 두 번을 쉬고 마을 앞에 와서는 달음박질을 쳤다.

▲ 길이가 길고 벼 이삭 귀가 튼튼한 것은 따로 끈을 준비할 필요없이 이렇게 이삭을 홀쳐서 반대편 꽁지를 잡아 두어번 돌렸다가 밀어주면 된다.
ⓒ 김규환
부려 놓은 볏단 주위로 쭉정이를 먹어 토실토실 살이 오른 씨암탉 예닐곱 마리와 붉은 볏을 맘껏 자랑하는 수탉이 우르르 몰려왔다.

"워~쉬."

낟가리를 쌓기 위해 터를 잡고 있던 아버지가 그냥 놔두라고 하셨다.

"아부지 왜 라우?"
"몇 마리 남지 않았는디 묵으면 얼매나 묵겄냐?"
"글도 라우."
"다 생각이 있응께 쳐묵게 놔둬. 어차피 여긴 쥐새끼들 차지랑께."
"예."

아버지 머릿속엔 무슨 생각이 맴돌고 있을까. 봉초 담배 한대를 말아 피우시고 막걸리 한 사발을 가득 떠드신다.

"아부지 댕겨오깨라우. 근디 성꺼는 목발이 너무 질어서 안되겄어라우. 바꿔 줏쇼."
"밑에를 짤라불면 되야."

여섯 살 때 아버지를 조르고 졸라 만들었던 귀여운 내 지게는 못 쓰게 되었다. 둘째 형 지게를 반 뼘 가량 자르니 기형 지게가 되었지만 당장 거치적거리지는 않으니 당분간은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찬찬히 다녀."
"알았어라우."

어느덧 해가 서산에 걸렸지만 아버지는 논으로 가실 생각은 하지 않고 마룻바닥에 걸터앉아 쉬고 계셨다. 쇠죽을 앉혀 놓고 고샅길을 따라 나가셨다. 어머니는 세 번 우리는 두 번 져 나르자 해가 저물었다.

집 근처에 이르자 닭털 타는 냄새가 진동했다. 웬일일까? 누구 집에 이 바쁜 철에 제사라도 있는 걸까? 노인들도 이 바쁜 철에 돌아가시기라도 하는 날엔 누구에게 원성을 살지 모르는 판이라 날을 늦춰 죽는다는데 한가히 닭털 타는 냄새라니!

"어이, 닭죽 쑬 준비나 하더라고."
"뭤이라고라우?"
"마늘 까고 쌀이나 당가놓으랑께. 여남의 명 될 것이여."

▲ 볏가리, 낟가리를 쌓아두고 보리 심고 밀 심은 뒤 눈이 펄펄 내릴 때 탈곡을 하였다. 집채만큼 크고 높게 쌓았다.
ⓒ 김규환
그 땐 그랬다. 70년대 초중반엔 동네 청년들에게 닭 한두 마리 잡아 마늘 듬뿍 넣고 쌀 두어 되 불려서 흰 닭죽을 끓여 주면 스무 명에서 많게는 삼사십 명까지 한 집 일을 밤 9시를 넘기면 끝내주곤 했다. 몇 남지 않은 청년들이었지만 어떻게 긁어모았는지 아버지 부름에 마다 않고 하나 둘 우리집으로 지게를 지고 몰려왔다.

"아제 계시오?"
"그려. 자네 왔는가."
"다들 온다고 했어라우."
"고맙네. 밀주 한잔씩 들고들 가더라고."
"한번씩 댕겨와서 묵을라요. 달이 아직 안 올라와서 질이 잘 안 보인당께라우."
"후딱 다녀오더라고."

초승달이 여느 때보다 크게 보였다. 십대 후반에서 40대 초반까지 동네 청년을 죄다 긁어 모았다. 나도 졸리지 않아 한 번 따라가 보기로 했다. 오는 대로 집을 나서 서넛이 한 조가 되어 이야기를 하며 간다. 누구누구가 바람이 났다는 둥, 누구는 밤에 홀태를 가져가 벼를 훑어 옥과장에 내다 팔아 막걸리를 며칠간 먹었다는 그렇고 그런 이야기다.

논두렁엔 볏단을 묶어 열 다발씩 가지런히 가려 놓았다. 지게를 바닥에 뉘어 놓고 이삭이 안쪽으로 향하도록 엇갈려가며 한 계단에 네 다발에서 여섯 다발까지 차곡차곡 올린다. 볏단이 흐트러지거나 떨어지기 쉬우므로 꼬뺑이(지게에 실린 짐을 묶는 줄)를 살짝 걸어둔다. 쌓기를 대여섯 번을 반복하니 힘에 따라 열여섯 다발에서 스무 다발을 넘어 스물네 다발을 넘기는 사람도 있었다.

단단히 묶어 한쪽 발을 지게 안쪽에 넣고 간신히 들어올려 세우면 지게발이 10여cm나 푹 빠져 들어가며 우지끈 소리가 난다. 무릎을 꿇고 작대기에 힘을 나눠 한발씩 일어서면 허리가 끊어질 정도로 대단한 무게가 전달된다.

일어선 이상 쉴 수 없으니 냅다 논두렁을 걷어차고 올라 길도 아닌 길을 따라 간다. 어찌나 무겁고 주변 길이 높던지 거치적거린다. 그냥 한 자리에 서있으라면 고꾸라질지도 모른다. 짓눌려 기형아처럼 양다리가 벌어지지만 박차기를 거듭하여 힘을 넣어야만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나란히 줄지어 하얀 입김을 내뱉으며 밤을 가른다. 싸늘한 추위도 쉬 물러가고 말았다. 나는 두 번을 쉬고 왔기 때문에 형들이 모두 집으로 들어간 걸 보았다.

마당엔 볏단으로 가득해 발을 디딜 틈도 없었다. 아버지는 둥글게 낟가리를 쌓고 아래서 어머니와 형이 차차 높아진 볏가리 옆에 사다리를 걸쳐놓고 볏단을 올려주고 있었다. 출출하던 참인지라 물을 조금만 타서 지게미를 꾹 짜 양동이에 내놓은 막걸리를 풋풋한 김치쪼가리에 한잔씩 걸치고 들길로 나선다.

▲ 한 줄 한 줄 따라가며 집었다 놓고 집었다 놓으면 짚과 벼가 말랐다. 허리가 무척 아프고 장딴지와 허벅지가 알이 배기는 고된 일이 하나 추가 되었던 시절이다.
ⓒ 김규환
전깃불도 없는 마당은 오로지 달빛만 으스름하게 비출 뿐이다. 제일 힘이 없던 나는 정지에서 불을 땠다. 밥솥에 닭 두 마리와 마늘, 햅쌀이 푹푹 끓고 있다. 어머니께 다 끓었다고 하자 불을 빼서 푹 퍼지게 두라고 하셨다.

잠시 후 어머니와 내가 교대하였다. 닭 두 마리가 잘 무르게 뒀다가 꺼내서 찬물 한 그릇 떠놓고 뜨거워지면 손을 담가 식히고는 닭살을 계속 찢어 양푼에 담았다.

"쉬엄쉬엄하더라고. 오늘만 날인가."
"아녀라우. 아제, 한번씩만 지고 오면 끝날랑갑소."
"막걸리 한 사발씩 들고 가소. 나도 좀 쉬어야겠구먼."

일을 술김에 하면 흥이 절로 난다. 술기운이 에너지를 발산하니 허리가 아픈지, 다리가 팍팍한지 모른다. 취기는 겁까지 달아나게 하니 몇 다발 더 얹어오는 형들도 있었다.

닷 마지기를 우리 식구끼리 했다면 이틀이 걸릴지도 모르는 엄청난 양이지만 자발적 동원으로 몇 번 오가고 나니 밤 8시 반을 넘기자 볏가리가 초가지붕 처마보다 더 높게 쌓였다. 아버지도 하시던 일을 멈추고 밑으로 내려오셨다.

"자자, 앉더라고."
"글도 아제 껏은 볏단이 묵직해서 솔찬히 나오것는디요."
"뭐해 얼른 얼른 죽 푸지 않고?"
"자, 시장헌께 어서들 들자구."

그릇 바닥엔 자잘하게 잘 찢어진 살점이 열 점 가량 들어있다. 내장도 점점이 잘려져 있었다. 식구들까지 양푼만 열 17개였다. 어머니가 그 위에 죽을 두 국자씩 퍼서 주면 인부들에게 건네줬다.

"여깄어라우."
"니기들도 묵어라 어서. 식어불면 맛이 없어야."
"잉. 째까 있다가."
"아짐, 닭이 허벌나게 맛나요. 아까운 씨암탉 잡아부렀소?"
"일하고 온께 성님이 잡아놨습디다. 많이들 드싯쇼. 아직 고기 많은께."

한창때 실군(상일꾼)들이 먹는데 무언들 맛이 없을까. 논일을 마치고 수확을 끝내며 먹는 맛이란 수라상에 차린 것보다 낫다. 두 그릇 세 그릇씩 먹어대니 한 솥 가득이었던 죽이 금방 바닥이 났다. 우린 따로 한 그릇씩 퍼둔 죽을 먹었다. 꿀맛이었다.

"잘 묵었구만이라우."
"더 들지 그런가."
"배가 터질라그요."
"애들 썼네."
"아녀라우. 쥐약은 이장님 댁에 있다고 합디다."
"알았네. 살펴들 가라고 멀리 안 나감세."

▲ 그 땐 가마솥에 가득 끓여 뼈와 살을 발라 몇 점씩 넣어주면 동네 청년들 죄다 모여들었다. 닭도 요즘처럼 뜨거운 물에 튀기지 않고 닭모가지를 비틀어 쥐고 다 뽑은 다음 짚불로 그을려 먹었는데 향기가 좋고 쫄깃쫄깃했다. 이 사진이 조금 거무튀튀한 건 예전처럼 잡았기 때문이다.
ⓒ 김규환

덧붙이는 글 | 40대 초반부터 5, 60대는 많이 겪어봤던 이야기일 겁니다. 며칠 전 장성 북일면 금곡영화마을 등 전라도 일대를 국도를 타고 취재여행을 4일간 다녀왔습니다. 아직도 그곳은 낫으로 벼를 베고 경운기로 추수를 하고 있습니다. 다음에 탈곡하는 장면이 몇 편 더 소개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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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환은 서울생활을 접고 빨치산의 고장-화순에서 '백아산의 메아리'를 들으며 살고 있습니다. 6, 70년대 고향 이야기와 삶의 뿌리를 캐는 글을 쓰다가 2006년 귀향하고 말았지요. 200가지 산나물을 깊은 산속에 자연 그대로 심어 산나물 천지 <산채원>을 만들고 있답니다.도시 이웃과 나누려 합니다. cafe.daum.net/sanchaewon 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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