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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이텔 vt서비스 종료를 알리는 글이 뜬 초기화면
ⓒ 조창완
'모든 사라지는 것은 여백을 남긴다'

지리산 뱀사골에서 실족사한 시인 고정희의 유고시집 제목이다. 오는 2월 28일 하이텔이 사라진단다. 그 공간의 사라진 여백에는 무엇이 남을까?

사실 VT환경으로 남아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지난 수년 간 한 번도 들어가 보지 않았으니 무슨 회한이 있을까만은 그래도, 하이텔이 사라진다니 마음 한구석이 텅 빈 것 같다. 마치 어릴 적 놀았던 시골 동산이 이제는 황폐화되어 잡목만이 남아있어 발 디딜 수 없는 느낌이랄까. 아니면 그 공간에 새로운 건물이 들어선 느낌이랄까.

예전에 썼던 어떤 글에선가 "나를 키운건 8할이 사이버 공간"이라는 회고를 한 적이 있다. 그 시작이 하이텔이었다.

대학 4학년 초였던 것 같다. 95년 봄. 집에 컴퓨터를 두고, PC통신을 시작했다. '01410'인가 이전에 인지되지도 않았던 공간으로 기계가 전화를 걸면 껄끄러운 소리가 들리고, 새로운 세계로 접촉했다. 그리고 사이버공간이나 가상현실로 불리는 이 공간을 만났다.

처음에는 채팅을 통해서 사람들을 만나기도 했다. 사실 통신을 시작한 첫해 하이텔 대화방에서 지금의 아내를 만났으니 영화 '접속'이 실제 실현됐다고도 볼 수 있다.

사실 대학에 머물러 있던 내 생활의 커뮤니티들은 통신을 통해서 확장됐다. 문학동호회인 '이다'는 나에게 많은 지적 성장을 준 친구들을 만나게 해준 공간이었다. 그곳에서 김재인, 김지운, 김정복 등 젊은 문화 청년들을 만났다. 지금은 연결고리들이 사라져서 어디에 있는지 연락이 되지 않지만 그때는 사이버 공간에서 단상을 올리고 토론을 하기도 했다.

사라지는 하이텔

▲ 독서일기를 쓰던 공간. 그때는 참 부지런히 책을 읽었다
ⓒ 조창완
문학평론 공간에서는 마초기질을 가진 한 시인과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 이후 서평을 두고 한 기자와도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 95년부터는 리터란의 '독서'(LITREAD)에 서평을 올리기 시작했다.

서평이라기는 뭐하고 내 생활과 책의 접점을 찾아서 책의 이야기를 썼다. 일주일에 한두 편을 꾸준히 올린 탓에 적잖은 독자들이 생겼다. 독서가 서평을 낳기도 했지만, 서평을 올리기 위한 독서도 있었다. 덕분에 대학 때의 독서량을 크게 떨어뜨리지 않으면서 직장생활을 할 수 있었다.

사실 독서일기를 쓰면서 인상에 대한 이야기를 참 많이 들었다. 내 서평을 본 사람들은 대부분 내가 아주 날카롭고 매서운 느낌의 사람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서평이 대부분 긍정적인 부분 보다는 비판이 중심이라 그런 평을 들었던 것 같다. 하지만 나를 실제로 본 사람들은 대부분 놀랐다. 실제 이미지와 사이버 공간의 이미지가 너무 달랐기 때문이다.

국문학이 전공인 탓에 필자의 서평은 대부분 시나 소설, 문학평론 등에 국한됐다. 그 당시에 나오는 주요 문학작품은 대부분 읽고 서평을 썼던 것 같다.

이후 기자 생활을 하면서 몇 작가들을 인터뷰할 기회가 있었는데 역시 내 서평과 내 인상이 너무 달라 많이 놀랐다고 했다. 사실 윤대녕 등 몇 작가들에게는 냉혹하리만큼 변화를 주문했는데, 어떨 때는 내가 생각해도 심하다 싶을 정도였다. 물론 그 작가들이 내 글을 볼 가능성이 크지 않았으니 다행이지만 기자의 생각을 풀어내는 습관을 들일 수 있다는 점에서 이 공간은 나에게 적지 않은 의미를 주었다.

▲ 소설 '그 길을 걷다' 연재하던 공간.
ⓒ 조창완
그렇게 보면 나에게 사이버 공간은 공격 성향을 드러내는 해방구였는지도 모른다. 사실 그다지 강건하지 못한 성격을 사이버를 통해서 단련했다고나 할까. 사이버 세계는 어찌보면 모순된 공간이지만 그 공간을 통해 공격성을 가다듦을 수 있었던 것은 어쩌면 좋은 기회였는지 모른다. 또 등단할 기회가 없었던 젊은 신진 작가들에게 가장 유효한 글쓰기 공간이기도 했다.

나도 그 공간을 통해 <그 길을 걷다>라는 중편소설을 연재한 적 있다. 황당한 소재와 중간에 기술상의 문제로 연재가 끊어졌다가 겨우 끝냈지만, 그래도 창작을 집중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의미있는 일이었다.

평생 단어인 콘텐츠를 알려준 곳

나는 하이텔을 시작했던 그해 가을에 첫 직장 생활을 했다. 사실 운동과 직업이 반반씩 섞인듯한 직장이었다. 이후 많은 변화를 겪었지만 통신을 통해서 만들어지는 사이버세계와 기자 생활을 통해 콘텐츠의 소중함을 되새길 수 있었다.

97년에는 나의 개인 홈피를 만들었다. '나모'(나모웹에디터)를 통해 만든 탓에 복잡하고 힘들었지만 그 자체가 재미있어서 열심히 만들었고, 몇 곳의 공모에서 수상하기도 했다. 사실 부족한 글 실력에도 7권의 책을 출간할 수 있었던 것도 콘텐츠를 축적하고, 통신 세계에서 글을 쓰는 습관을 들인 탓일 것이다.

무엇보다 통신을 통해 콘텐츠(지금은 더 넓은 의미의 UCC도 쓰인다)의 소중함을 알았던 게 큰 자산이 됐다. IP(정보 제공)에서 CP(콘텐츠 제공)로 넘어가는 것을 봤고, 이제는 동영상까지 움직이는 사이버 세상을 확연하게 이해할 수 있게 됐으니 말이다.

지금도 나는 한 인터넷 선지자가 밝힌 "과거에는 하드웨어, 소프트웨어, 콘텐츠가 7:2:1이라면 향후에는 1:2:7로 바뀌게 될 것"이라는 말을 믿고 있다.

지난 1999년 9월 중국으로 건너오면서 통신과의 인연은 대부분 끊어졌다. 대안으로 인터넷이 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초기 통신의 공간처럼 좋은 친구들을 사이버 공간에서 구하기가 힘들어진 탓이 가장 큰 것 같다. 하지만 지금도 서울에 나가면 만나는 친구들이 있다.

시대에 밀려서 거의 사라져 버린 것들이 얼마나 많은가. 존재는 하지만 기능을 거의 읽어버린 삐삐, 존재가 없는 시티폰 등. 추억의 깊이에 따라 이런 대상의 소멸에 대한 감회가 다르겠지만 하이텔의 소멸이 유독 가슴 아린 것은 내 20대 후반의 열정의 상당 부분이 그곳에 담겨 있기 때문인 것 같다. 그로부터 10년이 지났지만 지금도 그때 오프 모임에 나설 때 가슴 설레였던 기억이 생생하다.

아쉽다고 그 공간의 존속을 주장할 수는 없는 일이다. 하지만 당시의 사라진 여백들로 남은 이름들을 불러보고 싶다.

김정복, 원희재, 고흥준, 권정현, 유종윤, 강기우, 박경범, 김흥년…. 그리고 내 가장 앙숙이었던 박남철 시인과 내 잡글을 사랑해준 소중했던 이들도.

오늘 밤에는 달 보기도 힘든 베이징의 하늘을 보면서 맥주나 한잔 시원하게 들이켜야 할 것 같다.

덧붙이는 글 | 하이텔의 후신인 파란 사이트(http://user.paran.com/member/index.jsp)에 가면 '하이텔vt접속하기'가 있다. 이곳을 클릭하면 창이 나온다. 과거 아이디가 있는 경우 현재의 파란 아이디로 접속해도 자동으로 과거 아이디로 접속 연결된다.


태그:#하이텔, #01410, #PC통신, #독서일기, #그 길을 걷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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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케이아이테크놀로지 상무. 저서 <삶이 고달프면 헤세를 만나라>, <신중년이 온다>, <노마드 라이프>, <달콤한 중국> 등 17권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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